<검을 읽는 막내 공자 147화>
147화. 복수의 시작(2)
“자, 그러면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예? 어디로 가려고요?”
“사실 나도 여기가 처음이라 길을 완전히 아는 게 아니거든.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말을 끝낸 공손무가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와아!”
처음 보는 광경에 아명이 입을 크게 벌리며 감탄사를 내질렀다.
허공으로 도약한 공손무가 커다란 나무 위에 착지했다.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나뭇가지 사이를 빠르게 이동하며 위쪽으로 올라가 단숨에 나무 꼭대기까지 다다랐다.
사방이 나무로 빽빽하게 들어차 시야를 확보할 수 없자, 최대한 높은 곳으로 가서 주변의 지리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저기 있구나!’
나무 꼭대기에 이르자 웅장함을 자랑하는 화산의 봉우리들이 멀리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화산에 공손무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화산이구나. 진짜 화산이야!’
그런데 그것도 잠시, 뭔가 이상한 것이 눈에 비추었다.
‘연기?’
화산으로 들어가는 초입 부분 주변에서 정체불명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일반 생활에서 나오는 연기가 아니었다.
‘불이 난 거야. 남도 마을이 불에 타고 있어!’
마을에 변이 생긴 것을 알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녀석에게는 뭐라고 말하지?’
마을에 불이 났다고 하면 울고불고할 게 뻔했다.
‘일단은 데려가야 하나? 하아. 화산검마 할아버지가 사고 치지 말고 있으라 했는데, 이거 어쩌지?’
용종찬의 꾸지람이 두렵긴 했지만, 그렇다고 꼬마를 혼자 놔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래. 일단 집까지만 바래다주면 될 거야. 나머지는 부모가 알아서 챙겨 주겠지.’
생각을 끝낸 그가 나무 아래로 잽싸게 내려갔다.
얕은 바람을 일으키며 지면에 착지하자 아명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우와! 정말 굉장해요!”
“후훗. 이건 별것 아니야.”
“길을 찾은 거예요?”
“그래. 찾았어. 이쪽으로 가면 돼. 근데 말이지.”
“엇?”
이때 공손무가 두 손으로 아명을 번쩍 들어 올렸다.
“헉! 뭐 하는 거예요?”
“이 속도로 계속 움직이다가는 곧 날이 저물고 말 거야. 그럼 너희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으시겠어?”
“나 걸음 빠른 편인데…….”
“너보다 내가 훨씬 빠르거든? 그러니까 잔말 말고 고개 팍 숙이고 있어. 역풍이 심할 거니까.”
아명이 공손무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오늘 처음 만난 아이었지만 자신의 옛 모습이 투영된 탓이었을까?
아명을 바라보는 공손무의 눈빛은 꽤나 복잡했다.
‘제발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 * *
섬서성 화음현에는 평화롭고도 활기가 넘치는 한 마을이 있다.
화산 자락 아래에 있는 이 마을은 남도 마을이라고 불리는데, 화산과 가깝다 보니 자연스럽게 화산파와도 교류가 많다.
화산파에서 필요한 생필품들은 대부분 남도 마을을 통해 조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화산파와 오랫동안 거래를 한 상인들도 많이 있었다.
생기가 넘쳐 흐르고 웃음소리가 가득했던 이 마을에 오늘은 어찌한 일인지 평소와는 정반대의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화르르륵!
사방에서 거대한 화염이 치솟아 올라 모든 것을 태우고 있었고.
“꺄아아악!”
“사, 살려 줘! 살려……! 커허헉!”
선혈이 낭자하며 죽음의 냄새가 진동했다.
“반항하는 놈은 모두 죽여라!”
족히 수십 명은 되는 검은 피풍의를 입은 무사들이 남도 마을을 휩쓸며 재물을 약탈하고 보이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있었다.
“흐음…….”
마을 맞은편에 있는 언덕 위에서 누군가가 말을 탄 채 이 참혹한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적당히 탄 피부에 남색의 안대로 한쪽 눈을 가리고 있는 그는 한 폭의 지옥도와 같은 광경에도 의연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자 흑립을 쓰고 청색의 복면을 한 일련의 사내들이 보였다.
그들의 모습을 보는 사내의 입가에 자부심 가득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다그닥 다그닥.
이때 말발굽 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말을 몰며 나타났다.
“형님!”
구수한 억양이 가미된 목소리가 들리자 안대 사내가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안대 사내와 비슷한 이목구비를 가진 자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왜 벌써 온 것이냐? 아직 상황은 종료되지 않았을 텐데?”
“제가 있어 봤자 딱히 더 할 게 없던걸요. 이 마을에 경계할 요소는 없습니다. 너무 지루해서 형님 곁으로 온 겁니다.”
“아직 무르구나. 내부에 그럴 요소가 없더라도 외부에서 얼마든지 변수가 생길 수 있다. 매 순간 방심하지 말라고 일렀거늘!”
그의 언성이 높아지려 하자, 사내가 손사래를 치며 재빨리 소리쳤다.
“아아! 알겠습니다! 조금만 있다가 다시 내려갈 테니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크흐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침음을 흘리는 안대 사내의 이름은 유곤청, 청랑단(靑狼團)이라는 도적단의 우두머리였다.
그의 옆에서 헤헤거리며 웃고 있는 것은 동생 유겸성이었고 부두목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유겸성이 화염으로 뒤덮인 남도 마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형님,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좀 소름 돋습니다.”
“뭐가 말이냐?”
“아, 그 화산파의 대장로라는 노선(老仙) 말입니다. 도명이…….”
“천승진인(天昇眞人)을 말하는 것이냐?”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유겸성이 주먹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내리쳤다.
“맞다, 천승진인이었지! 하여튼 그 사람 생각할수록 피도 눈물도 없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남도 마을은 화산파의 영역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노선은 수십 년 동안 이어 온 인연을 저버리고 오히려 이곳을 마음대로 점거하라고 했습니다. 너무한 것 아닙니까?”
잠시 말없이 가만히 있던 유곤청이 이내 그의 동생을 쏘아보았다.
“너무하다라. 그런 생각이야말로 네가 얼마나 무른 놈인지 증명해 주고 있구나.”
“윽! 제가 또 뭘 잘못 말한 겁니까?”
“너무한 게 아니다. 첫째로 그는 순리를 따른 것뿐이다. 그 노인은 그런 흐름을 익는데 도가 튼 것이고.”
“순리요?”
“순리만 따른 것이 아니다. 둘째로 화산파와 자신이 살길을 모색하기 위해 철저히 꼬리 자르기를 한 것이다.”
잘 모르겠다는 듯 유겸성이 머리를 긁적였다.
“도통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는 이곳에 청랑단의 지부를 건설하고 화산파가 그분의 뜻대로 움직이는지 감시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분이 누구더냐?”
“아아!”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유겸성이 낮은 탄식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힘의 차이를 일찍이 깨달은 거군요.”
“그래, 천승진인은 우리가 무서운 게 아니라 우리의 뒤에 있는 그분에게 굴종한 것이다. 이건 굴욕적인 게 아니다. 순리에 따른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이지.”
“권모술수와 셈법에 능한 도사라, 감히 잘 잡히지 않습니다.”
천승진인을 떠올리는 유곤청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는 단순히 굴종하는 것을 넘어서 꼬리 자르기로 피해를 최소화했다. 너도 알다시피 애초에 우리는 화산파로 입성하여 그 내부에 지부를 건설하려고 했다.”
“예. 그랬었지요.”
“하지만 천승진인은 화산파의 오래된 영역인 이곳 남도 마을을 선뜻 내주고는 뭘 하든 상관 않겠다며 이곳에 지부를 건설하라고 했지. 그분께서는 천승진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말이야. 그로서도 화산파 본산에 우리를 들이기는 탐탁지 않았을 터, 남도 마을이라는 꼬리를 버리고 화산파라는 몸통을 지킨 것이지.”
“과연…….”
“그는 주의해야 할 인물이야. 나중에 이곳으로 돌아온다면 다른 의미로서 우리가 잘 감시해야 해.”
“다른 의미라니, 그 무슨 말씀입니까?”
유곤청이 눈가를 좁히며 말을 이었다.
“그 노선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나는 느꼈다. 이 자는 단순히 고개만 굽힐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이다. 고개를 굽히는 그 이면에는 엄청나게 큰 야심이 자리 잡고 있지. 내 생각대로라면 우리의 자리를 위협할 수도 있어.”
“그분의 오른팔 자리를 말입니까?”
이번에는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천승진인은 우리가 모시는 분과는 다른 분을 모시고 있다. 된다면 다른 분의 오른팔이 되겠지.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 생각에 그는 ‘그들’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아니, 이미 그들의 일부가 되었을 수도 있어.”
“허업!”
많이 놀랐는지 유겸성의 눈이 크게 치켜떠졌다.
“그들의 일부라니요? 설마……?”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단지, 추측일 뿐.”
“후우. 형님의 추측은 항상 들어맞지 않았습니까. 와! 이렇게 들으니 정말 소름이 돋습니다. 그렇게 영악한 면이 있는 도사가 있다니요. 그 정도면 더는 도사라고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내 항상 하는 말이 있지 않으냐.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지 말라고 말이다.”
“역시 우리 형님은 대단하십니다. 제가 한 수 또 배웠습니다.”
다그닥 다그닥.
이때 그들의 귓가에 또 다른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뭐지?”
“아, 제 부하입니다. 아래 상황을 보고하러 온 것 같습니다.”
“그래?”
이윽고 푸른 두건을 쓴 사내가 거칠게 말을 몰며 형제에게 다가왔다.
“부두목님! 크, 큰일 났습니다!”
부하의 다급한 음성에 유겸성의 눈썹이 치켜 올려졌다.
“큰일이라니. 학평,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그, 그것이!”
“어서 말하지 않고 뭘 꾸물거리는 것이야?”
“크읏! 정체불명의 적이 나타나 부하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있습니다!”
“뭐라고?!”
옆에서 이를 들은 유곤청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이런 일을 경계해야 했건만!”
“죄,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유겸성을 한차례 쏘아본 유곤청이 이내 부하에게 물었다.
“적의 규모는 얼마나 되는가?”
“정말 민망하게도, 단 한 명입니다. 그것도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입니다.”
부하의 말에 유곤청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한 명이라고? 게다가 노인?”
유곤청은 좀처럼 부하의 말을 믿지 못했다.
“저 아래에는 내 부하 삼백여 명이 있다. 그런데 고작 한 명 때문에 이 난리를 일으켜?!”
그가 분노하자 부하가 고개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면목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한 명이 상당한 고수인지라 어떻게 손을 쓸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도 계속 죽어 나가고 있을 겁니다.”
“상당한 고수?!”
“형님!”
동생의 부름에도 유곤청은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였다.
이윽고 그가 눈가를 좁히며 중얼거렸다.
“무공의 고수라면 얘기가 다르지. 대체 어디서 그만한 고수가 튀어나왔단 말인가.”
그의 시선이 장엄한 자태를 뽐내는 화산을 가리켰다.
“설마 화산파 놈들 중에서 한 명이 내려온 건가? 천승진인의 행보에 내심 불만을 품은 자들이 있다고 듣긴 들었는데! 그들이 손을 쓴 건가?”
더 생각해 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지 그가 부하를 보며 소리쳤다.
“우리가 갈 것이다! 너는 어서 가서 부하들을 뒤로 물려라!”
“예! 두목님!”
부하가 말을 타고 돌아가자 유곤청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드디어 너희들이 나설 기회가 왔다! 너희들이 누구더냐!”
늘어서 있던 기수들이 일제히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청랑단의 자랑스러운 최강의 부대, 청랑조입니다!!”
“그렇다! 너희들은 청랑단의 자랑이자 내가 가장 아끼는 부대이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 하였다. 이 기회에 너희들의 무용을 마음껏 발휘하여 공적을 쌓도록 하여라!”
“존명!”
유곤청이 말의 고삐를 힘차게 당기며 소리쳤다.
“자, 가자!”
흙먼지와 함께 그가 앞으로 나아갔고, 유겸성과 청랑조가 이를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