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읽는 막내 공자 146화>
146화. 복수의 시작(1)
그는 자신의 사부인 주도진인을 뒤로하고 여기로 왔다.
사부의 생사가 불분명한 만큼 화산파를 방문하고 싶다는 마음이 제일 컸다.
‘그곳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사부님은 무사하실까? 하나리 님은 어떻게 됐을까?’
마음을 가다듬은 공손무가 용종찬에게 물었다.
“밖으로 나가면 화산파로 갈 수 있나요?”
“화산 근방이면 몰라도 화산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안 되느니라. 지금의 네가 가기에 그곳은 너무 위험해.”
“아아…….”
갈 수 없다는 말에 그는 실망감을 숨길 수 없었다.
“끌끌! 너무 그렇게 실망하지 말아라. 때가 되면 갈 수 있을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 어서 가자. 나를 따라 뛰어내리거라.”
말을 끝낸 용종찬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회오리 속으로 몸을 던졌다.
“후우…….”
공손무 또한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용종찬을 따라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내렸다.
“크읍!”
두 번째로 겪는 것이었지만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는 몸의 신진대사를 조절하여 산소의 사용을 최소한으로 줄인 뒤 자신의 몸을 거센 물살에 맡겼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차가운 물살이 느껴지지 않아. 오히려 따뜻해. 이 따뜻함은 햇살인가?’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난 것을 안 공손무가 내공을 운용하며 신진대사를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조심스럽게 두 눈을 떴지만,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감을 수밖에 없었다.
하늘 위에서부터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어 두 눈을 간지럽혔기 때문이다.
“햇살, 정말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는 지하 동굴에만 있었기에 햇빛을 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화산검마의 비밀 거처에는 영양분을 보충하고 내력의 증진을 돕는 약초들이 많았다.
햇볕을 쬐지 못한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공손무는 내심 이 따스한 느낌이 그리웠다.
“진짜 밖이구나. 후우웁!”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차갑고도 신선한 공기가 폐 안 깊숙이 들어왔다.
“푸하아아! 정말 좋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답답한 곳에서 어떻게 육 년이나 버텼는지 모르겠어.”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이내 손바닥을 꽉 움켜쥐며 다짐했다.
‘이제 한 걸음을 뗀 거야. 모든 것을 내 손으로 바로잡을 날이 머지않았어.’
굳게 다짐하는 공손무의 표정에 옛날의 순박함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지난 육 년 동안 그는 남다른 성취를 얻어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지하 동굴에서 자신보다 수십 배나 더 큰 천수관음상을 맨몸으로 상대한 것만 봐도 확실히 강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어느새 공손무의 성취는 초절정의 경지를 넘어 화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나이 이제 열다섯, 성인도 안 된 소년이 화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중원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있었다고 하더라도 구전으로 전해지는 믿지 못할 신화뿐이었다.
이때 용종찬의 목소리가 공손무의 독백을 깼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오니 기분이 어떠냐?”
“정말 좋습니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에요.”
“낄낄낄! 최상의 신체조건을 가졌으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자만하지 말아라. 넌 지금 신체와 내공만 만들어졌을 뿐, 아직 제대로 된 검법을 익히지 못한 애송이에 불과해. 그 정도로는 흑사교를 무너뜨릴 수 없어.”
흑사교라는 말에 공손무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흑사교, 정말로 그놈들이 우리 가족을 해친 건가요?”
“그렇다. 그놈들이 너의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이야.”
공손무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기필코 그들을 죽일 겁니다. 제 아버지를 죽이고 가족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 그놈들을 용서치 않을 겁니다.”
“좋은 마음가짐이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오면 지금 그 감정을 기억해 내라. 복수심이야말로 적을 죽이는 최상의 원동력이니까.”
순간 공손무의 머릿속에 주도진인의 말이 떠올랐다.
‘특히 너와 같이 천살성을 가진 아이가 복수를 위해 살을 품는다면 천하가 피로 물들 것이다.’
용종찬은 확실히 주도진인과는 성향이 달랐다.
‘사부님, 죄송합니다. 모든 걸 바로잡기 위해서 저는 이 길을 가야만 할 것 같습니다.’
공손무가 마른침을 삼키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여기는 어딥니까?”
“선향숲이란 곳이다. 화산에서 이십 리 정도 떨어진 곳이지.”
“이십 리라면, 화산파와 아주 먼 곳은 아니군요?”
“그렇지. 여기서 좀 더 가면 바로 화산파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마을이 나오니까 말이야.”
용종찬이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말을 이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자유시간을 가지거라. 나는 뭘 좀 확인할 게 있다.”
“확인이요? 수련은 어떻게 합니까?”
“수련이야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하지만 지금 내가 하려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시적기(適時適期)에 움직여야만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러니 사고 치지 말고 주변 구경이나 하고 있어라. 알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휘이익!
이윽고 용종찬의 신형이 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쩝. 뭐, 어쩔 수 없지.”
영문을 모르는 공손무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숲속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푸른 녹음으로 우거진 숲에서 따스한 햇볕을 간간이 맞으며 걷고 있으니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이 순간만큼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근심이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인생이 으레 그렇듯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파스락!
나뭇가지가 부서지는 듯한 작은 소리가 공손무의 귓가에 들렸다.
범인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소리였지만, 그의 뛰어난 감각은 그것이 사람의 발소리라고 본능적인 신호를 보냈다.
“누구냐!”
바깥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경계심이 컸던 탓일까?
그는 상대방이 누군지 알아보지도 않은 채 곧바로 두 손가락을 모아 지풍을 날렸다.
콰아아앙!
그러자 커다란 나무 하나가 연기를 내뿜으며 폭발하더니 이내 한 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나무가 옆으로 넘어가자 그 뒤에 숨어 있던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저건?!’
공손무의 눈에 보인 것은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였다.
“히이익!”
갑작스럽게 나무가 폭발하자 꼬마의 얼굴에는 공포심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폭발한 나무가 꼬마가 있는 방향으로 쓰러지려고 했다.
“칫! 내가 너무 예민했나?”
상대가 힘없는 꼬마라는 것을 알아챈 공손무가 재빨리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가 옷깃을 펄럭이며 순식간에 꼬마가 있는 곳까지 날아왔다.
공손무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꼬마를 자신의 몸 뒤쪽으로 빼낸 다음 한 손으로 쓰러지는 나무를 받쳤다.
무게가 상당할 것인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꼬마를 바라보았다.
“어어…….”
뒤로 넘어져 있던 꼬마는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잔뜩 겁을 먹은 상태였다.
휘이익!
반대쪽으로 나무를 던져 버린 공손무가 손을 털면서 말했다.
“놀랐지? 미안하다. 내가 아직 바깥세상에 적응이 안 되었나 봐. 누가 몰래 지켜본다고 생각하니 경계심이 일어나서 그만.”
말을 끝낸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정말 미안해. 내가 일으켜 줄게. 자, 내 손을 잡아라.”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던 꼬마가 공손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뽀얀 피부에 귀여운 여우상을 한 그는 누구나 호감을 느낄 만한 인상이었다.
유려한 이목구비에 조금은 마음이 누그러졌는지 꼬마가 조심스럽게 손을 잡았다.
“옳지. 착하다.”
파다닥!
“엇?”
자리에서 일어난 꼬마가 재빨리 뒤로 달려 나가더니 다시 나무 뒤에 숨었다.
공손무에 대한 경계심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닌 것 같았다.
“허헛. 이것 참…….”
공손무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조심히 놀다 가거라. 부모님 걱정하시니까 너무 늦게 들어가지는 말고!”
말을 끝낸 그가 미련 없이 몸을 들렸다.
저벅 저벅 터어억!
그리고 잠시 후.
길을 가던 공손무가 갑자기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흐음…….”
팔짱을 끼며 침음을 흘리던 그가 한순간 재빨리 고개를 뒤로 돌렸다.
파스락!
그러자 나무 아래에 아른거리던 그림자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무래도 아까 마주친 꼬마가 계속 따라오는 것 같았다.
이를 말없이 쳐다보던 공손무가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너, 계속 따라올 거니?”
그의 물음에도 꼬마는 나무 뒤에 숨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쩝…….”
공손무가 입맛을 다시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내공을 운용했다.
자신과 얽혀 봤자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지 않기에 경공을 사용하여 벗어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본능적으로 그가 훌쩍 떠날 것을 알았던 것일까?
“저기!”
꼬마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며 다급한 음성으로 외쳤다.
“응?”
경공을 사용하려던 공손무가 내공의 운용을 멈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난 또 말을 못 하는 줄 알았잖니.”
용기를 냈는지 꼬마가 조심스럽게 그림자 밖으로 나왔다.
흙먼지가 살짝 묻은 순박한 얼굴이 보였다.
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공손무는 왠지는 몰라도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저기요.”
“그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니?”
우물쭈물하던 꼬마가 마음을 굳힌 듯 공손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를 좀 도와주세요.”
“뭐?”
뜻밖의 말에 놀랐는지 공손무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 * *
잠시 후, 공손무와 꼬마 아이는 사이좋게 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그래서 이름이 뭐라고?”
“아명이요! 아! 명!”
경계심이 많이 누그러졌는지 어린 여자아이가 앙증맞은 목소리와 함께 미소를 지었다.
“이름이 아명이구나. 그래서, 길을 잃었다고?”
“네! 토끼를 잡으려고 막 뛰어갔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이상한 곳까지 와 버렸어요.”
“조심해야지. 여기 산짐승도 많은 것 같은데 어떡하려고.”
“죄송해요…….”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보자 공손무는 또 옛날 생각이 났다.
자신이 사부에게 혼나 주눅이 들어 있었던 모습이 생각난 것이다.
고개를 흔들어 애써 생각을 뿌리친 후 아명에게 말했다.
“너는 어디에 사니?”
“화음현의 남도 마을에서 살아요.”
“화음현 남도 마을?”
화음현은 화산파의 본산이 있는 곳이었고, 남도 마을은 그 근방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공손무는 직접 가 본 적은 없지만, 주도진인이 이따금 생활에 필요한 것을 사러 그곳으로 갔기 때문에 마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누구랑 같이 사니? 부모님이 많이 걱정하시겠다.”
“엄마랑 오라버니랑 같이 살아요.”
“아버지는?”
우물쭈물하던 꼬마가 이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빠는 제가 더 어릴 때 돌아가셨다고 엄마가 말해 줬어요.”
“그렇구나…….”
물어본 게 미안했는지 공손무가 풀이 죽은 아명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넌 엄마랑 오라버니랑 오손도손 같이 사니까 너무 좋겠다. 나는 그런 가족이 한 명도 없거든.”
“정말이요?”
“그래. 나 좀 불쌍하지?”
진짜 불쌍해 보였는지 아명이 자신의 조그마한 손으로 공손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조막만 한 손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자 그의 어깨가 한차례 움찔거렸다.
“괜찮아요. 제가 친구 해 줄게요! 나중에 토끼 같이 잡으러 가요! 네?”
아명을 내려다보던 공손무가 이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훗. 그래. 고맙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따스한 순수함에 거칠게 변한 공손무의 심성이 조금은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