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읽는 막내 공자 136화>
136화. 화산파 돼지치기 공손무(3)
“행복해 보이십니다.”
“뭐? 어허헛! 내가 그리 보이냐?”
당황했는지 주도진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당시 추억을 회상하신 것 아닙니까? 사부님의 입가에 한없이 편한 미소가 번져 있습니다.”
“정말이냐?”
“예, 사부님.”
주도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누구나 행복했던 시절이 있기 마련이지. 불행한 시절이 다가오면 그때를 떠올리며 버티는 것이고. 자, 얘기는 그쯤하고 어서 앉아 보아라.”
“알겠습니다.”
공손무가 짐 보따리에서 두꺼운 보자기를 꺼내어 평평한 돌바닥에 깔았다.
“끄응…….”
보자기 위에 앉은 공손무가 힘겹게 가부좌를 틀었다.
“다 되었느냐?”
“예. 준비되었습니다.”
“그럼 침술을 시작하마. 말은 해도 되나, 내가 움직여도 된다 할 때까지는 몸을 움직여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딸그락.
공손무의 등 뒤에서 가부좌를 튼 주도진인이 침통을 열어 기다란 침 하나를 집어 들었다.
“으읏!”
첫 침이 놓이자 공손무는 따끔한 감각과 함께 등 전체가 후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연달아 침이 놓였지만, 많이 맞아 봐서인지 곧 고통이 사그라졌다.
잠시 후 한참 침을 놓던 주도진인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무야.”
“예, 사부님.”
“왜 가만히 침만 맞고 있는 것이냐?”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무공을 익히는 방법에 대해 궁금한 것 아니었느냐?”
“크흠흠! 제자가 되어서 어찌 그것을 제 입으로 여쭙겠습니까. 사부님의 가르침대로 인내하면 저절로 기회가 오겠지요.”
이를 들은 주도진인이 눈가를 좁혔다.
“아, 그래? 인제 보니 별로 관심이 없었던 거로구나? 그럼 그냥 없던 일로…….”
“사, 사부님!”
“어허헛! 요놈아, 사부 귀청 떨어지겠다. 무공을 배운다라……. 내 그 방법에 대해 너에게 가르쳐 주기 전에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네가 무공을 익혔다 치자, 그것도 무림에서 손꼽히는 아주 강한 무공을 말이다. 그럼 무엇을 할 것이냐?”
잠시 생각하던 공손무가 이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
“응? 뭐라고?”
“가, 가족을 찾고 싶습니다.”
“가족이라…….”
공손무의 가족은 그가 두 살이 되던 해, 정체불명 집단의 습격을 받고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는, 가족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었고 어머니를 비롯해 큰형과 둘째 형은 같이 도망을 치다가 서로를 놓치고 말았다.
물론 이건 공손광의 환영이 만들어 낸 기억이었지만.
지금의 공손무에게는 그것이 진짜였다.
“네가 상처받을까 봐 따로 물은 적이 없다만, 가족이 흩어진 날, 그날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있느냐? 네가 워낙 어릴 때라 제대로 된 기억은 없겠지만, 단편적인 것도 괜찮다.”
주도진인의 물음에 공손무는 악몽 같았던 그날의 기억을 힘겹게 떠올리기 시작했다.
“다른 것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오직 기억나는 것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습니다.”
그날의 아픔이 느껴지는 듯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속에서 제 가족은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업고 있었지요. 하지만 도망치던 중 업고 있던 저를 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게 기억의 끝입니다.”
진중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주도진인이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비록 그것으로 한쪽 팔과 한 다리를 못 쓰게 되었지만, 목숨을 부지한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너를 제때 발견하여 화산파로 데려온 것도 하늘이 도운 것이고. 그런데…….”
“예. 사부님.”
잠시 뜸을 들이던 주도진인이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네 가족만을 찾는 거라면 굳이 무공을 익히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냐?”
“…….”
“설마, 복수를 꿈꾸는 거냐?”
머뭇거리던 공손무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저희 가족을 노리고 저를 이렇게 만든 자들을 가만히 놔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무야!”
주도진인이 언성을 높였지만 공손무는 뜻을 꺾지 않았다.
“그게 잘못된 겁니까? 저희 가족을 풍비박산 내 버린 그 녀석들에게 똑같은 고통을 주는 것이 그렇게 잘못된 겁니까?”
“잘못된 거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잘 생각해 보아라. 네 복수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자유? 행복? 응? 뭐가 남아 있겠니?”
“적어도 마음속 깊숙한 곳에 응어리져 있는 한은 풀 수 있겠죠.”
“스읍! 조그만 게 지금 누구 앞에서 한을 논하는 것이냐!”
주도진인이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후우, 대부분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겠지. 복수하면 마음이 편안해질 거라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어. 하지만 아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 법. 특히 너와 같이 ‘천살성’을 가진 아이가 복수를 위해 살을 품는다면 천하가 피로 물들 것이다. 내 말 알아듣겠느냐?”
그 말에 공손무가 울상이 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마음에 응어리진 것은 다른 마음으로 치유하는 것이란다. 네가 만약에 무공을 익힌다면 세상의 많은 무림인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그들과 함께 중원을 이끌어 나가면 되는 것이야. 복수에 눈이 멀어 피의 광기에 젖은 괴물이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된다.
“…….”
“약속할 수 있겠느냐?”
공손무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못하겠느냐?”
진지한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하던 공손무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한 어조로 답했다.
“약속하겠습니다.”
“내 네 말을 믿으마. 내 하나밖에 없는 제자이니까.”
빙그레 미소를 짓던 주도진인이 공손무의 등에 꽂혀 있던 침을 뽑으며 말을 이었다.
“자, 이제 다 됐다. 움직여도 되느니라.”
“사부님, 무공은……?”
“흥! 이 사부가 바본 줄 아느냐? 앞으로 네가 하는 행실을 봐서 가르쳐 줄지 말지를 정할 것이다.”
“헉! 너, 너무하십니다!”
“오늘같이 함부로 살(殺)을 날린다면 아무것도 없을 것이야!”
“아, 알겠습니다.”
공손무가 주눅이 든 채 고개를 숙이자 주도진인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며칠 뒤면 개기월식이다. 붉은 달이 뜨는 날이지?”
“그렇습니다.”
“붉은 달은 천살성의 기운이 극에 달하는 날. 하지만 혈인심법(血忍心法)을 극성으로 익힌 너는 평소와 다름없을 것이다. 그날, 너에게 무공을 익히는 방법에 대해 알려 주마. 되었느냐?”
“그날에 말입니까?”
“그래. 너에게는 조금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거든.”
“헉!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이다. 그러니까 사부의 말을 잘 새겨들어야 하느니라.”
“예, 알겠습니다! 와아! 신난다!”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 공손무가 자리에서 일어나 폭포수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모두 잘 들어!! 나도 이제 무공 배울 수 있다! 나도 이제 화산파의 무공을 배운다고!!”
“허허. 녀석도 참.”
주도진인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지만 이내 표정이 굳어져 갔다.
지금 자신이 하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인지에 대해 확신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 * *
사부의 침술 덕분일까, 아니면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희망 덕분일까.
침소로 돌아온 공손무는 오랜만에 단잠을 잘 수 있었다.
자리에 눕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진 그는 꿈속에서 절세의 무공을 사용하며 하늘을 훨훨 날고 있었다.
그렇게 고된 하루가 지나가고 어둠을 홀로 밝히던 달이 사라지면서 환한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문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며 새로운 하루를 알렸다.
끼이익-!
그런데 이때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그러고는 정체 모를 인원들이 소리 없이 공손무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저마다 다른 분위기를 품은 눈동자들이 곤히 자는 공손무를 내려다보았다.
그중 유독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던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대사형, 이 녀석입니까?”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맞는 것 같구나.”
풍채가 좋고 눈썹이 짙으며 구릿빛의 피부를 가진 그 사내는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호오?”
마지막으로 도복을 입고 수려한 외모를 가진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공손무를 쳐다보더니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머나, 귀여워라. 얘가 그 주도진인께서 키우신다는 애구나?”
“뭐가 귀여워? 듣자 하니 팔 한 짝하고 다리 한 짝을 못 쓴다는데?”
“진짜? 불쌍해서 어째?”
“그러고 보니 참 이상하단 말이지.”
“뭐가?”
“주도진인은 왜 이런 병신을 제자로 삼았을까?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드디어 미친 걸까?”
그의 말에 여인이 미간을 좁히며 쏘아붙였다.
“야! 너 어쩜 말을 그렇게 못되게 하냐?”
“뭐, 어때? 얘는 지금 자고 있어서 아무것도 못 듣는데. 그리고…….”
늑대와도 같은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가진 사내가 허리를 굽혀 공손무 가까이서 중얼거렸다.
“지가 내 말을 들으면 뭐 어찌할 건데? 어차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병신이잖아? 크크큭!”
이때 뒤쪽에 있던 풍채 좋은 사내가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신충. 잡담은 그만하고, 어서 그 아이를 깨워라. 서둘러 가야 하니까 말이다.”
“예. 대사형.”
대답한 신충이 손등으로 공손무의 볼을 툭툭 치며 말했다.
“어이! 어서 일어나! 어서!!”
“으음……?”
달콤한 꿈이 방해받자 공손무의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 자식이 꾸물대기는! 아, 어서 일어나라니까!!”
신충이 꿈틀거리는 공손무의 어깨를 손으로 잡아 힘껏 끌어 올렸다.
“허억! 뭐, 뭐야!
상체가 갑자기 들어 올려지자, 공손무가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 좀 잠이 깼냐? 크크큭!”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듯, 공손무가 두려운 눈빛으로 물었다.
“누, 누구세요?”
“우리랑 좀 같이 가야겠다. 어서 옷 입고 준비해.”
“예? 어, 어디를요?”
“스읍! 이 자식이 가자면 갈 것이지 뭔 말이 이렇게 많아?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 냄새 나는 곳까지 왔는데!”
신충의 기세에 공손무가 겁을 먹자 뒤쪽에 있던 사내가 혀를 차며 말했다.
“쯧! 신충, 너는 뒤로 물러서라.”
“예? 아, 예. 대사형.”
신충이 입맛을 다시며 뒤로 물러서자 대사형이라 불린 자가 앞으로 나섰다.
“내 이름은 포염이다. 본산의 일대 제자이며, 매화검수지.”
“네?”
그의 말에 공손무의 몸이 한차례 떨렸다.
“이, 일대 제자? 매화검수?”
일대 제자는 화산파 내에서 장문인의 바로 아랫대 제자들을 말하며, 매화검수는 그중에서도 따로 선별하여 최고의 인재를 모은 집단이었다.
지금 공손무 앞에 서 있는 것은 화산파의 실질적인 최고 전력인 것이다.
“주도진인을 잘 알고 있지?”
“예…… 제 사부님이십니다.”
“주도진인은 지금 본인의 징계 회의에 참석하러 선인봉으로 가셨다.”
“네? 징계요?”
“그래. 주도진인의 징계 수위에 따라 너의 운명도 같이 결정될 거다.”
“그럼 저도 선인봉으로 가겠습니다! 사부님을 만나게 해 주세요!”
“그건 아니 될 말이다.”
포염의 단호한 대답에 공손무가 당황하며 물었다.
“왜 안 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