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읽는 막내 공자 133화>
133화. 신검궁(2)
“네 녀석을 잡아가면 요녕 상방에서 거액을 주겠지. 내 오늘 너를 잡아 신세 한번 고쳐 봐야겠구나.”
중년인의 말에 공손무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신세를 고친다고? 미안하지만, 나에게 검을 들이댄 순간, 네놈들의 인생은 망한 거야.”
“어린놈이 말버릇하고는. 안 되겠다. 내 좋은 말로 데려가려 했는데, 네놈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줘야겠구나.”
중년인이 검을 뽑자 그의 주위에 있던 사내들도 덩달아 병장기를 들었다.
“정말 후회 안 해?”
“후회는 무슨, 헛소리 말고 어서 항복해라. 이것이 너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다.”
“후우. 뭐, 어쩔 수 없지.”
순간 공손무의 눈에서 형형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너희에게 공손세가의 무서움을 보여 줄 수밖에.”
“공손세가? 그게 무슨 소리냐?”
“요녕 상방이 내가 어디 출신인지는 알려 주지 않았나 보지?”
“뭐? 그럼 설마……?”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었다!”
공손무가 안광을 번뜩이며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지면이 울리고 건물 전체가 요동쳤다.
‘일검잔월(一劍殘月).’
허공을 가르는 칼날.
돌풍이 일어나며 초승달 모양의 검기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크아악!”
검기를 맞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남은 사람들의 눈에는 경악이 가득했다.
“마, 말도 안 돼!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새파랗게 어린놈이 검기를 아무렇지 않게 뿌려 대다니.
사내들은 도저히 이 상황이 믿기지를 않았다.
‘이걸로 끝이다.’
공손무는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들을 한 번에 쓰러트리기 위해 더 강력한 초식을 전개했다.
그가 검을 허공 높이 치켜들며 내공을 끌어 올렸다.
‘일검철퇴(一劍鐵槌).’
쿠르릉-!
그러자 공기가 진동을 일으키더니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몰려왔다.
‘이건?’
심상치 않은 기운에 사람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지가 충만해지다 못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이 기운. 설마 저 녀석이 뿜어내는 것인가?’
이때 내공을 끌어 올리던 공손무가 이빨을 꽉 깨물며 검을 수직으로 그었다.
콰지지직-!
새하얀 벼락이 객잔의 지붕을 뚫고 지면을 강타했다.
“크아악!”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지자 사람들이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대지를 진동시키는 벽력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순식간에 무사들을 쓰러트린 공손무는 반쯤 무너진 객잔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그는 공포에 떨고 있는 객잔 주인에게 주머니를 던지며 말했다.
“객잔이 부서진 건 미안하오. 그 안에 있는 보석을 팔면 이런 객잔쯤은 얼마든지 다시 지을 수 있을 것이오.”
말을 끝낸 공손무는 서둘러 다시 길을 떠났다.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남은 시간 동안 어떻게든 신검궁에 도착해야 했다.
* * *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반지가 반응을 보인다?’
그동안 금룡 반지는 계속 화살표로 방향만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금룡 반지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신검궁이 이 근처에 있다는 건가?’
본능적으로 신검궁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공손무는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금룡 반지가 이끄는 방향으로 갈수록 빛의 강도가 강해졌다.
‘여기다!’
빛의 강도가 가장 강해지는 지점, 그곳에서 공손무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여기 어딘가에 신검궁으로 가는 입구가 있을 거야.’
공손무는 우거진 수풀을 뒤지며 신검궁의 입구에 대한 단서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건?’
한쪽 구석의 흙바닥에서 지하로 이어지는 듯한 문을 발견했다.
흙과 모래를 걷어 내자 문의 손잡이가 보였다.
자물쇠를 부수고 손잡이를 당기자,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우웅-! 우웅-! 우웅-!
이제는 빛을 내뿜는 것도 모자라 진동까지 일으키는 금룡 반지.
공손무는 그 반응을 보고 확신했다.
이 아래에 그토록 찾고 있던 신검궁이 있다고.
이때 옆쪽에서 지켜보던 학통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조심해야 할 것이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 말이야.
옆에 있던 혈혼 또한 생각이 같은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공손무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지하로 내려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
지하의 내부는 드넓은 동굴이었다.
미로같이 엉켜 있는 동굴.
범인이라면 들어가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손무는 달랐다.
학통이 백우선을 살랑거리며 말했다.
-흐음. 저쪽에서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동굴의 심부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기운.
그 기운을 따라 공손무는 걷고 또 걸었다.
구불구불한 동굴의 통로를 따라가니 어느새 동굴의 심부에 이르게 되었다.
‘저건?’
이윽고 무엇을 보았는지 공손무의 눈이 커졌다.
‘백부님?’
동굴 심부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중년인.
그는 한 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품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공손무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백부님, 제가 왔습니다. 공손세가의 막내 공자인 공손무입니다.”
공손무는 아주 어렸을 적 공손광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모습이 완전히 달랐다.
피골이 상접해 있고 산발한 머리.
도저히 공손호의 형이라고는 할 수 없어 보였다.
“으음?”
이때 굳게 닫혀 있던 중년인의 눈이 떠졌다.
“의선이 나의 말을 잘 전달하였나보구나.”
땅을 울리는 중저음의 목소리.
분명 공손광의 목소리였다.
공손무가 곧바로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공손세가의 막내 공자 공손무가 백부님을 뵙습니다.”
“오냐. 그동안 잘 지냈느냐?”
“많은 일이 있었지만, 보다시피 지금까지 잘 견뎌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부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나는 이미 병색이 깊어 얼마 살지 못한다.”
“병이요?”
“그렇다. 내가 죽으면 누군가는 천회를 지켜야 할 터. 네가 검혼의 재능을 가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리로 부른 것이다. 천회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
공손무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백부님, 천회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 신검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봉인해 놓았다. 내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거기에 발을 들이지 못할 것이다.”
“저는 그 검이 꼭 필요합니다.”
“왜? 소가주가 되기 위해서?”
“예,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공손무는 팔목을 내밀었다.
순간 잠잠하던 공손광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그건?!”
“예, 맞습니다. 이것은 검의 맹세. 천회와 한 검의 맹세입니다. 이 검의 맹세가 저를 갉아먹고 있습니다. 천회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이 맹세가 저를 죽일 겁니다.”
“어떻게 천회와 검의 맹세를 맺을 수 있단 말이냐? 저 검은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쭉 나와 함께했거늘?”
“그건 지금으로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천회의 주인이 되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흐음…….”
천회의 표식이 있다는 건 그의 선택을 받았다는 뜻.
하지만 공손광은 선뜻 그에게 검을 맡길 수 없었다.
그가 정말 천회를 가지고도 타락하지 않고 천하를 구할 재목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내 너에게 한 가지를 제안해도 되겠느냐?”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주는 시련을 통과한다면 천회를 너에게 맡기마. 하지만, 통과하지 못한다면 천회를 포기해라.”
잠시 고민하던 공손무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공손광의 허락 없이 천회를 가지기는 어려울 터.
“그렇게 하겠습니다.”
“단언하건대, 아주 위험한 시련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무얼 두려워하겠습니까.”
공손무의 눈빛에서 굳건한 다짐이 느낀 공손광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허리춤에 있는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내가 가진 이 검의 검능은 환영궁(幻影宮)이라고 한다.”
알 수 없는 말에 공손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영궁이요?”
“그렇다. 환영궁은 내가 원하는 이에게 무한한 환영을 보여 주는 검능이다.”
“환술을 부리는 검입니까?”
“이건 단순한 환술이 아니다. 현실과 똑같으면서도 거대한 독자적인 하나의 세계를 만들지. 그곳에 내가 원하는 이의 의식을 집어넣는 것이다.”
공손무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환영으로 현실과 똑같은 거대한 세계를 만들다니. 정말 대단한 검능입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지금부터 나는 너를 이 세계에 집어넣을 것이다. 그 세계에서 너는 이름만 같을 뿐, 공손세가의 막내 공자가 아닌 다른 신분으로 깨어나게 될 것이다.”
공손무의 눈이 커졌다.
“공손세가의 막내 공자가 아닌 다른 신분으로요?”
“그렇다. 또한, 원래 세계에서의 기억 또한 전혀 없을 것이다. 마치 우리가 전생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곳에서는 이곳에서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
어느 정도 감을 잡았는지 공손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직 그곳에서 얻는 정보와 힘만으로 시련을 극복해야겠군요.”
“그렇다. 환영의 세계에서 일정 시간 동안 내가 내리는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는다면, 내 너를 인정해 주겠다. 어떠냐? 하겠느냐?”
잠시 고민하던 공손무는 이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예, 하겠습니다.”
“좋다. 내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라.”
공손무는 공손광의 말대로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너의 의식을 내가 만든 환영의 세계로 인도할 것이다. 참고로, 그 세계에서의 죽음은 현실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래도 하겠느냐?”
“예, 하겠습니다. 어서 시작해 주십시오.”
공손무가 두 눈을 감자 공손광은 검을 뽑아 자신의 검능을 사용하였다.
“크읍!”
영혼이 뽑혀 나가는 듯한 느낌.
그 이질적인 느낌 속에서 공손무의 의식이 점점 희미해졌다.
* * *
유독 비가 많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지독한 날씨 속에서 죽립을 깊게 눌러쓴 한 사내가 거친 호흡을 내쉬며 달리고 있었다.
그는 이따금 불안한 시선으로 뒤를 힐끔거렸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쫓기고 있는 것처럼.
덜커덩!
어느 허름한 모옥에 도착한 그는 들어가자마자 황급히 문을 걸어 잠갔다.
“으으! 너무 추워서 오한이 생길 지경이야. 어서 불을 때야겠어.”
죽립을 벗자 추위에 질린 중년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떨리는 손길로 화로를 달구었다.
몸이 따뜻해지자 창백했던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혈색만 돌아왔을 뿐, 얼굴에 드리워진 근심은 여전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사실을 본산에 알려야 한다.”
떨리는 목소리에서 공포가 느껴졌다.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어서 먹과 종이를…….”
서둘러 먹을 간 중년인은 붓으로 종이 위에 뭔가를 적으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탕! 탕! 탕!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그는 눈만 크게 뜬 채 석상처럼 가만히 있었다.
탕! 탕! 탕!
재차 소리가 들리자 정신이 든 그가 소리쳤다.
“이 야심한 시각에 누구시오!”
하지만 상대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문만 두드렸다.
“대체…….”
중년인은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곧바로 병풍 뒤에서 검 한 자루를 꺼냈다.
낡은 검이었지만, 그동안 관리를 잘해서인지 칼날에서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가 검을 든 채 문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