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읽는 막내 공자 129화>
129화. 낙향의선(2)
“그렇소. 천회에 대한 행방을 알고 있소.”
율가복의 대답에 공손무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그걸 알고 계십니까?”
“공손 대인이 저에게 말을 해 주었기 때문이오.”
“백부님이?”
본가에도 알리지 않은 것을 낙향의선에게 알렸다고?
공손무는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
“실례지만, 백부님과는 무슨 사이십니까?”
“뭐, 일단은 친구 사이라고 해 두지요.”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 물으려는 찰나.
갑자기 공손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동시에 의식이 흐려지고 심장 박동수도 빨라졌다.
그는 손목이 화끈거림을 느꼈다.
‘윽! 설마?!’
손목에 있는 천회의 표식이 또다시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온몸의 기력이 모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
공손무의 표정에 율가복의 눈빛이 깊어졌다.
“왜 그러시오? 안색이 좋지 못한 게, 어디가 불편한 것이오?”
“아, 아무것도 아닌…….”
폭주를 견디지 못한 공손무는 결국 그 자리에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 * *
“으음…….”
앓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공손무의 눈이 조금씩 떠지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공간.
‘여긴 어디지?’
공손무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낡아 보이는 방 안에 홀로 누워 있는 상태였다.
이때 학통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정신이 드는 것이냐?
‘어르신!’
-쯧쯧.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죄송합니다. 다 저의 부족함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도대체 어디입니까? 제가 기절하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공손무는 자기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폭삭 젖어 있지만, 몸과 정신은 오히려 개운합니다. 누가 이렇게 한 것인지…….’
-거기에 대한 답은 나 대신 저 녀석이 해 줄 것이다.
학통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공손무는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엇을 보았는지 그의 눈이 커졌다.
“일어나셨소?”
다름 아닌 낙향의선 율가복이었다.
“아직 몸이 성치 않으니 무리하지 마시오.”
“의선께서 저를 구해 주신 겁니까?”
“눈앞에서 그리 픽 쓰러지는데, 사람이라면 구하고 봐야 하지 않겠소.”
옆에 있던 학통이 백우선을 살랑거리며 말했다.
-저 사람이 아니었다면 네 목숨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그의 말에 공손무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됐소. 그런 인사를 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니까. 대신 내 질문에 답이나 해 주시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진맥해 보니 손목의 흉터에서 이상한 기운이 나오고 있더군. 그 기운이 온몸의 기력을 갉아먹고 있었소. 그 흉터, 어디서 어떻게 얻은 것이오?”
공손무는 자신과 천회의 관계를 사실대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적당히 꾸며 말하려고 했는데.
‘으음?’
대답하려고 고개를 든 순간 율가복의 눈과 마주쳤다.
마음속에 이상한 끌림이 느껴지면서 거짓말을 하려던 생각이 싹 사라졌다.
뭔가에 홀린 듯이 공손무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천회와 검의 맹세를 했기 때문입니다.”
“검의 맹세? 호오. 그런 것이었나.”
“어라?”
대답이 끝나자마자 공손무는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내가 왜 이런 말을?’
자신이 왜 진실을 말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감각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의 모습에 옆에 있던 혈혼이 혀를 차며 소리쳤다.
-바보 같은 놈! 저런 거에 당하면 어떡해!
‘의선의 눈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진실을 말하고 말았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노인의 눈을 보지 마.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게 될 테니까.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옆에 있던 학통의 대신 답해 주었다.
-아무래도 저 노인, 고강한 내공을 품고 있는 것 같구나.
‘그게 정말입니까?’
-내공의 운용이 극에 달하면 기세를 펼치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느니라.
율가복은 눈빛으로 약초꾼과 거지들을 제압하고 그들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 냈다.
모두 다 고강한 내공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의술을 행하는 그가 내공을 품고 있다니. 어찌 된 일일까요?’
-그거야 나도 모르지. 직접 물어보지 그러느냐?
공손무가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저도 의선께 한 가지 물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혹시 무공을 익히셨습니까?”
잠시 뜸을 들이던 율가복이 이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미 들통 난 것 같으니 더는 숨길 필요가 없겠지. 그렇소. 나는 내공을 익혔소.”
“의원이 내공이라니. 솔직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무림인들을 좀 더 잘 진맥하기 위해 시작한 것인데, 어쩌다 보니 이리 되었소. 천운이 따른 것이지.”
율가복이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 천회와 검의 맹세를 맺었다고 했소?”
“예, 자세한 사정은 밝힐 수 없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혹여라도 또 자신도 모르게 진실을 말해 버릴까, 공손무는 율가복의 시선을 피했다.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율가복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이 있다는데 억지로 알아낼 필요는 없겠지. 걱정하지 말고 고개를 드시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몸을 추스른 공손무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천회의 행방을 아신다고 했지요?”
“그렇소.”
“백부님이 직접 말씀해 주신 겁니까?”
“엄밀히 따지자면 직접 말해 준 것은 아니오. 나에게 서찰을 보낸 것이니까.”
“혹시 그 서찰을 제가 볼 수 있을까요?”
공손무는 율가복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안될 거야 없지.”
율가복이 방 한쪽 구석에 놓인 함을 뒤지더니 이내 그 속에서 서찰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여기 있소. 읽어 보시오.”
공손무는 곧바로 서찰을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이건?’
무엇을 보았는지 그의 눈이 커졌다.
‘호오. 이거 정말 놀랍군.’
서찰의 내용은 이랬다.
북마교가 사방에서 천회를 빼앗으려고 마수를 뻗고 있으니 신검궁(神劍宮)으로 잠시 피신하겠다.
본가의 사람들도 믿을 수가 없어 내 오랜 벗인 그대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겠다.
그대가 공손세가의 막내 공자에게만 천회의 행방을 몰래 알리라.
그만이 천회의 주인이 될 수 있으니까.
“백부님이 의선께 이런 부탁을?”
“그렇소. 공손 대인의 부탁을 받고 천회의 행방을 그대에게 알리려 한 것이오.”
“신검궁이라니, 여기는 뭐 하는 곳입니까?”
“공손 대인이 수련을 하던 시절에 폐관수련의 장소로 쓰던 곳인데,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그곳에 은신처를 마련해 놓았지.”
뭔가 이상한 생각에 공손무는 미간을 좁혔다.
“제가 알기로 백부님은 상당한 실력자이십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들과 맞서지 않고 피신을?”
“병이 깊어졌으니까.”
공손무의 눈이 커졌다.
“병이요? 많이 편찮으신 겁니까?”
“그렇소. 그 병 때문에 나와 인연을 맺었지.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사람의 타고난 수명을 어길 수는 없는 법. 내가 명을 연장해 주었지만, 아마 얼마 가지 못할 것이오.”
병에 걸렸다는 걸 본가에 알리면, 본가의 사람들이 천회를 차지하려고 싸울 게 뻔하다.
그뿐이랴, 본가에 암약하고 있는 북마교의 첩자들이 그것을 이용해 어떤 교활한 계책을 짤지 모르는 상황.
아무도 믿을 수 없었던 그는 유일한 벗인 낙향의선에게만 자신의 상황을 알리고, 자신은 천회를 지키기 위해 신검궁으로 간 것이다.
“저는 천회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제 목숨을 건지고 가문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대에게 천회의 행방을 알리는 게 내가 받은 부탁.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소.”
“그게 무엇입니까?”
“그대가 진짜 검혼의 재능을 가진 게 맞는지, 또 정말 천회를 맡겨도 될 정도로 강한지를 시험해 보라고 공손 대인이 말했소.”
힘이 없으면 천회를 가져도 금방 빼앗길 터.
공손광은 공손무의 자질을 확인하고 싶었다.
“제가 어찌하면 되는 겁니까?”
“간단하오. 나와 실력을 겨루어 보면 되오.”
율가복이 품에서 쥘부채를 꺼냈다.
“나를 제압하면 신검궁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겠소.”
“만약 제압하지 못한다면?”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고 알려 주지 않을 것이오. 그것이 공손 대인과 천회를 위한 길이니까.”
“무조건 의선 님을 이겨야겠군요. 손속에 자비가 없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바라던 바요.”
공손무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다잡았다.
율가복 또한 쥘부채를 펼쳤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치열한 신경전.
율가복이 먼저 숨 막힐 듯한 침묵을 깨고 초식을 펼쳤다.
그가 손바닥을 펴 앞으로 쭉 뻗었다.
공손무는 이를 피하지 않고 내공을 끌어 올려 똑같이 손바닥을 내질렀다.
쩌어엉-!
두 손바닥이 허공에서 충돌하면서 귀를 울리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뿐이랴, 강력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지면을 뒤엎었다.
두 개의 거대한 기운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이 용호상박과도 같았다.
그것을 본 율가복의 눈이 커졌다.
‘호오.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설마 이 정도의 내력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과연 공손세가의 기대주다웠다.
하지만 이 정도로 천회를 맡길 수 있다고 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럼 어디 좀 더 내력을 올려 볼까?’
율가복이 공력을 끌어 올리자 반대쪽에 있던 공손무의 눈이 커졌다.
‘낙향의선의 공력이 이렇게 강하다니. 방심하다가는 큰코다치겠어.’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패배할 것이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
공손무는 승부를 빨리 결정짓기 위해 전력으로 임하기로 했다.
“하아앗!”
공손무가 힘을 주자 율가복의 몸이 뒤로 점점 밀려났다.
더는 버틸 수 없게 된 율가복은 내공을 이용해 손바닥을 억지로 떨쳐 냈다.
뒤로 물러선 그가 안광을 번뜩이며 말했다.
“대단하구려. 설마 이 정도 내공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감탄하기에는 이릅니다. 저에겐 더 많은 힘이 있거든요.”
“허허. 그렇소? 그것참 다행이구려. 이게 끝이었다면 천회를 맡길 수 없었을 테니까.”
공손무는 검을 뽑았다.
예기 서린 광채를 본 율가복이 쥘부채를 움켜잡았다.
공손무는 율가복에게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달려 나가려 했다.
“후훗. 나를 그 검으로 벨 수는 없을 것이오.”
율가복이 쥘부채를 접으며 세차게 휘둘렀다.
돌풍과 함께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천둥소리가 들렸다.
‘저것은?’
무엇을 보았는지 공손무의 눈이 커졌다.
꾸르릉-!
벽력음이 들리고 얼마 뒤, 하늘에서 거대한 소용돌이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학통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풍술사! 의선은 풍술사였구나!
‘풍술사라면?’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자를 말한다. 그는 내공을 이용해 바람을 조종하여 저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낸 것이야.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소용돌이.
그 앞에서 공손무는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크읏!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
공손무는 두 눈을 감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내공을 천천히 끌어 올리자 마음속을 침범한 공포를 밀어 낼 수 있었다.
이윽고 그가 안광을 번뜩이자 온몸에서 거대한 공력이 솟구쳤다.
쉬이익-!
이내 지면을 미끄러지듯 움직이더니 날아오는 소용돌이 사이를 통과해 버렸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한 줄기의 빛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