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황무적-325화 (326/328)

325. 상황(商皇)이 되다

“으으으으-”

뜨거운 수증기 속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욕조 안에 몸을 담근 채 목만 밖으로 내놓은 남하림이 눈을 감았다.

한 시진 전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진짜 죽을 뻔했어.”

지하 동굴 속에서 탈출은 아슬아슬했다.

천장이 조금이라도 빨리 무너졌다면 호수 아래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었다.

다행히 지하 바닥에 구멍이 먼저 뚫리면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화엄호에서 올라왔을 때는 이미 사당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 있었다.

‘쩝.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겠군.’

사당의 입구가 왜 부서졌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남하림은 형산에서 내려온 뒤, 오 년의 시간이 지났음을 알았다.

‘잠깐 잠을 잔 듯했는데…… 그게 오 년이라니…….’

남하림은 괜히 신경질이 났다.

‘내 청춘의 황금 같은 시간들이 지하 동굴 속에서 썩은 거 아냐.’

오 년의 시간이 허무하게 지나간 사실에 짜증이 났다.

누구에게 보상 받을 수도 없었다.

“어휴, 그냥 그의 제안을 받을 걸 그랬나?”

형산을 내려온 남하림이 가장 궁금했던 건 두 여인의 행방이었다.

내려오자마자 알아본 바로, 두 사람은 은하궁에서 함께 지낸다고 했다.

곧바로 은하궁이 있는 정주로 방향을 잡았다.

똑똑.

“공자님.”

“들어오게.”

문을 열고 점소이가 들어왔다.

“밖에 마차를 준비해놓았습니다.”

“수고했어. 여기 받아.”

휘익.

점소이의 손바닥에 금전 한 닢이 떨어졌다.

꾸벅.

“고맙습니다.”

* * *

다가닥다가닥.

남하림을 태운 사륜마차가 정주로 느긋하게 움직였다.

마차를 타고 정주로 올라가면서 오  년의 시간 동안 무림이 어떻게 변했는지 소문을 들었다.

신무맹은 이 년 전에 내원 책임제에서 다시 맹주가 결정하는 맹주 실권제로 바뀌었다.

맹주로 진후도인을 추대했으나 그가 사양한 뒤, 화산파 출신의 명동도인이 선출되었다고 했다.

‘화산파의 명동도인이라면 괜찮은 분이시지.’

신무맹을 세운 건 분명 일황사제들이었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무림의 일은 더 이상 귀찮았다.

사제들도 마찬가지였을 터.

창천이 사라진 이상 신무맹은 의미가 없었다.

사제(四帝)들은 개봉으로 돌아간 뒤 걸황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개봉에 지금쯤이면 연락이 갔겠지?”

* * *

주작남지의 특외부.

신무맹에서 본 방으로 돌아온 네 사람에게 딱히 할 일은 없었다.

가끔씩 수련관에 가서 타구봉법을 익히는 개방도에게 시범을 보여주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이고……! 심심해 죽겠네.”

벌떡.

팽유도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성철각을 보았다.

“철각 형, 우리 심심한데 은하궁이나 갔다 올까요?”

“그럴까? 연우도 본 지 꽤 됐군.”

성철각도 따분했는지 팽유도의 말에 동의했다.

“휘연 형은 어때요?”

“음. 좋아. 가자.”

“앗싸.”

팽유도는 기분이 좋은 듯 소리쳤다.

“무독은 어디에 있지?”

“또 이상한 독을 만들고 있겠죠. 그래도 우리들 중에 제일 바쁘잖아요.”

“바쁘다고 하니 부럽네.”

덜컹.

성철각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당무독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왔어! 드디어 왔어!!”

“누가? 설마…… 부장이?”

팽유도도 당무독을 향해 물었다.

“무독 형, 하림 형이 온 게 맞아요? 어디에 있어?”

팽유도는 당장 달려 나가려는 듯 벌떡 일어났다.

“아니, 아니, 여기에 온 게 아니고, 서신이 도착했어. 지금 은하궁으로 가고 있다고.”

“와아아아아!!”

성철각이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기다렸던 남하림의 소식이 도착했다.

“잘됐네. 그렇지 않아도 은하궁에 가려고 했는데.”

“뭣들 하세요. 빨리 가야죠!”

“맞다. 가자.”

후다다닥!!

그들 네 명은 무엇을 챙겨야 할지도 생각지 못한 채 정신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은하궁에도 소식이 전해졌다.

가장 먼저 소식을 받은 인물은 양삼.

남하림이 없는 동안 양삼은 소주 남연우를 곁에서 보살폈다.

“역시…… 공자님이시다…… 준 호위! 축하해야 할 일이 있네.”

양삼은 함께 차를 마시던 준극남에게 서신을 보여주었다.

그의 손이 떨렸다.

“총관님. 정말로 주군께서…….”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그분은 절대로 돌아가실 분이 아니라고.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으신 분이시지!”

“그런 것 같습니다. 아…… 주모님들께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준 호위는 공자님께서 정주로 올라오신다고 하니 준비를 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게.”

파악!

준극남의 신형이 곧바로 사라졌다.

밖으로 달려 나가는 그의 걸음이 가벼웠다.

“후후후. 나도 두 분 주모님께 이 소식을 알려 드려야겠군.”

양삼의 발걸음 또한 가벼웠다.

* * *

“야압!”

다섯 살 소동이 한 자 정도의 목검을 내리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세 명의 여인.

예설란과 유미령, 그리고 신소소였다.

“호호호. 연우가 제법이구나.”

“그러게요. 천천히 해도 된다고 했는데도 상공이 돌아오실 때 보여준다며…….”

유미령은 아들 남연우를 보면서 미소를 지으면서도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눈빛이었다.

스윽.

그때, 은하미전으로 들어서는 기척에 그녀들은 시선을 돌렸다.

“앗…… 양 아저씨.”

목검을 휘두르던 소동도 반갑게 양삼을 맞이했다.

“엇차.”

양삼은 소동을 안아 들었다.

“무공을 익히고 있군요.”

“네에. 아저씨, 오늘을 안 바빠요?”

두 개의 상국 일을 처리하느라 양삼은 거의 쉴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

“오늘은 바쁘지 않네요.”

“그럼 나하고 놀아요.”

“후후후. 얼마든지요.”

양삼은 소동을 안고 유미령과 신소소 앞으로 다가섰다.

“정말로 바쁘시지 않은 모양인가 봐요. 아님 좋은 일이 생겼나요?”

“아무리 바빠도 좋은 소식을 전해드려야지 않겠습니까? 공자님께서 은하궁으로 오시는 중이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

그녀들은 잠시 멍하게 미소를 띤 양삼을 보았다.

“이보게, 양 총관, 그게 정말인가? 걸황이 여기로 온다는 말이던가?”

“네, 검후님. 방금 걸비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유미령의 목소리가 잠긴 듯 잘 나오지 않았다.

“아…… 아…… 고마워요.”

“형님, 진짜로 그분이 오신다고 해요!”

손을 맞잡은 두 여인의 눈에서는 이미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엄마, 왜 울어요?”

“연우야. 아빠가 오신다고 하는구나.”

“진짜요? 진짜 우리 아빠가요?”

“그렇다는구나. 이젠 연우도 아빠를 볼 수 있단다.”

유미령은 소동을 껴안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 * *

다각다각.

은하궁으로 돌아오는 준극남의 표정을 세상을 얻은 듯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이틀 동안 정주성의 초입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반 시진 전, 네 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사륜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은하궁에 사두사륜마차를 타고 들어설 인물은 없었다.

‘하하하하! 주군은 변함이 없으시구나.’

그것을 보는 순간 걸황 남하림이 타고 있는 것을 단번에 알았다.

웅성웅성.

은하궁의 정문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개봉에서 출발을 한 네 사람.

이틀 동안 거의 잠도 자지 않은 채 곧장 은하궁으로 달려왔다.

멀리서 준극남이 이끄는 기마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형수님, 하림 형이 오시는 모양입니다.”

팽유도가 눈을 크게 뜨며 뚫어지도록 앞을 보았다.

준극남이 이끄는 기마대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뒤로 네 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사륜마차가 나타났다.

‘마차라……!’

형산에서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천천히 올라온 게 확실했다.

팽유도는 슬쩍 고개를 돌려 유미령을 보았다.

“아, 형도 참…… 웬만하면 빨리 오시지!”

“괜찮아요. 원래 저런 분이시잖아요. 오히려 다행입니다. 전혀 변한 게 없으시니.”

혹시나 그에게 다른 변화가 생겼는지 걱정했던 유미령은 그가 오는 모습을 보는 순간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하여튼 부장도…… 보통 사람은 아니야.”

“당연하잖아. 우주제일인인데.”

사륜마차가 정문에 도착했다.

유미령이 앞으로 나섰다.

그 뒤로 신소소가 남연우의 손을 잡고 바로 섰다.

덜컹.

준극남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주군, 도착했습니다.”

스윽.

남하림은 환하게 미소를 띤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

투명할 정도로 밝은 백의 금복을 입은 사내.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였다.

“부인, 돌아왔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남하림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늦어서 미안하군요.”

“아니에요. 무사히 오신 것만 해도 고맙습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신소소와 함께 남연우가 다가왔다.

오 년의 시간 동안 그녀는 성인으로 변해 있었다.

“이젠 소소라고 하면 안 되겠다.”

“그러게요. 진짜로 처녀 귀신이 될 뻔했잖아요! 중원에 소문이 나서 데리고 갈 사람도 없다고요.”

“후후후, 그러게 말이다.”

“그동안 뭘 했는지 모르지만 얼굴이 좋은데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더니 오 년이 지났더군.”

“정말요? 어디에서요?”

“화엄호에 있는 사당의 지하에서.”

“……진짜요? 사당에 지하가 있었다고요? 그래서 우리가 못 찾았던 건가…… 아버님께서 사당이 부서진 채로 있다고 하셔서 그곳에 지하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사당이 부서져 있었다는 말이구나.”

“네에.”

남하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윽.

그러고는 하의를 잡아당기는 소동을 보았다.

“상공, 연우예요. 남연우. 어때요? 많이 닮았죠?”

스윽.

남하림은 바로 앉은 자세로 남연우와 시선을 마주했다.

“연우라고 했어? 우리 처음 보는구나.”

“네…… 아…… 빠.”

“후후후. 단번에 나를 알아보네? 역시 나를 닮아서 똘똘하구나.”

“엄마들도 그랬어요. 아빠를 닮았다고 했어요.”

“반갑다.”

스윽.

남하림은 남연우를 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빠와 나중에 이야기하자.”

“네에……!”

남하림은 남연우를 다시 신소소에게 건네준 뒤 정문으로 걸어가,

번쩍.

기다리고 있는 그들을 향해 두 팔을 들었다.

“모두 잘 지내고 있었어?”

휘익.

네 사람이 남하림을 향해 달려와 서로 부둥켜 안으며 한마디씩 했다.

“잘 왔다.”

“하림 형! 정말 진짜구나!”

“부장. 반가워.”

“오랜만에 왔는데 선물은 없어?”

* * *

은하궁에서 퍼져 나간 소문은 삽시간에 중원으로 퍼졌다.

걸황이 돌아왔다.

중원 최고의 인물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무림은 환호했다.

은하궁으로 중원의 많은 인물들이 찾아왔다.

사무련에서는 기성과 신명항이 대표로 찾아왔고, 마교에서는 탈혼마제가 다시 중원에 나왔다.

황궁에서도 만통자가 나오면서 개방의 장두철까지 합세했다.

세 명의 노인들은 은하궁에 터를 잡았다.

신무맹에서도 맹주 명동도인이 찾아오면서 맹주직을 내려놓겠다고 했지만, 남하림은 무림의 일에는 당분간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걸황이 돌아온 지 한 달이 지났다.

세상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갔다.

* * *

똑똑.

남후정은 문이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접니다.”

“…….”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았다.

“들어오너라.”

드륵.

문을 열고 안으로 남하림이 들어왔다.

“빨리도 나타나는군.”

“죄송합니다.”

“내가 항상 꼴찌구나.”

“…….”

“앉아라.”

남하림은 그의 앞에 앉았다.

“많은 생각을 하느라 늦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생각이기에 지금 나타난 것이더냐?”

“그러게 말입니다.”

“여기에 온 것을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모양이군.”

“넵.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군. 이번에도 나에게 볼일이 있는 모양이지?”

“…….”

남하림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스스로 그가 대답해 주기 원했다.

“내가 사당 아래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던 것 때문이겠지?”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분명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수많은 자재들이 들어갔거늘. 눈에 보이는 사당이 전부라면 이상하지 않겠느냐?”

“알고 계시면서 사당을 무너뜨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

남후정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남하림의 눈빛은 모든 것을 아는 듯했다.

남하림이 다시 물었다.

“이유가 무엇인지요?”

“네가 당했다고 한다면 그 안에는 그분이 계셨을 것이라 예상했다. 내가 사당에 갔을 때 그분이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봐서, 사당의 지하를 모른 척하면 조용히 지나갈 것이라 여겼지. 네가 이기지 못한 그분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는 것입니까?”

“네가 믿건, 믿지 않건 상관없다. 난 그때 최선의 선택을 한 것뿐이다. 그리고 네가 살아 있다면 나올 것이라 믿었다.”

“아버지께서 예전에 어느 누구도 믿지 말라고 하셨지요. 다만 상황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내려와야 했을 것입니다. 정말로 창천주가 살아 있었다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보다 자신의 가진 것을 더 사랑하셨습니다.”

남후정의 인상이 굳어졌다.

“기회라 여겼을 것입니다. 보통 때는 화엄호에 접근도 하지 못했을 테지요.

남천상국에 있어 창천주는 큰 걸림돌이 되었을 것입니다. 간섭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언제든지 이루어놓은 것들이 무너질 수 있으니, 그가 사라지기를 원했을 것이지요.”

“맞다. 남천상국이 이룩한 가업을 그분 때문에 무너지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하로 연결된 통로를 무너뜨렸군요. 아무도 올라오지 못하도록.”

“……남천상국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무림도…….”

“이해합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보다 가업이 우선인 분이시지 않습니까?”

스윽.

남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느냐?”

“모든 것을 알았으니 내 가족이 있는 곳으로 가야지 않겠습니까?”

“여기는 아니더냐?”

“글쎄요. 아무리 생각해도 가족까지는 아닌 것 같네요. 그리고 이젠 마음 편하게 남천상국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제가 예전부터 상황(商皇)이 되고 싶었지요. 나중에 보도록 하시죠. 당신께서 아들보다 사랑했던 남천상국이 어떻게 되는지.”

휘익.

남하림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오 년 후.

두두두두.

오십 대의 마차가 장사성으로 들어섰다.

펄럭.

상명상국의 상국기가 바람이 휘날렸다.

선두에 선 인물.

상명상국의 총표두 안적이 뒤에 따르는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상황(商皇)께서 기다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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