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 남후정을 만나다
남천상국의 정문에는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다.
외상국과 내상국으로 나누어진 남천상국.
내상국과 달리 외상국의 정문은 항상 열려 있었다.
수많은 장사꾼들이 남천상국과 거래할 때 자유로이 지나다니게 하기 위함이었다.
남하림은 외상국으로 들어섰다.
옆에 누가 있는지 모를 정도로 장사꾼들은 저마다 바쁘게 지나갔다.
“여전하군.”
그가 개방에서 지내는 꽤 긴 시간 동안에도, 특별히 변한 것은 없었다.
남하림은 외상국으로 들어선 뒤 조용히 내상국으로 발길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눈에 띄게 조용해졌다.
남천상국의 내상국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다.
최소한 한 지역성에서 서너 개 현을 담당할 수 있을 만큼의 규모를 지닌 상단이나 표국이어야 했다.
내상국의 정문 앞에는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의 모습들이 보였다.
스윽.
남하림은 줄을 서고 있는 그들을 지나 내상국의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에서는 자격이 되는 업체인지 확인하는 중이었다.
“앗, 저…… 사람은……?”
길게 늘어선 대기자들 중엔 상명상단의 인물들도 있었다.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안적은 대기줄을 지나 정문으로 휘적휘적 다가서는 남하림을 알아보았다.
“저자가…… 미쳤나?”
그는 고개를 쑥 내민 채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았다.
남천상국은 줄을 지키지 않으면 그곳이 큰 이익을 주는 곳이라도 거래를 하지 않았다.
척.
남하림이 내상국 정문 엎에 멈췄다.
‘나 참, 또 그런 놈인가?’
갑자기 앞으로 다가온 기척에 내상국위 번준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가끔 잘난 체하는 인물이 줄을 서지 않고 막무가내로 오는 경우가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인물인 줄 알았다.
하지만,
“헉…….”
다가온 인물과 시선과 마주쳤다.
“후후후. 오랜만이야.”
번준은 입이 벌어진 채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공…… 자님!”
“수고 많아.”
“아……! 네에!”
남하림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정문으로 들어섰다.
‘공자님께서…… 무슨 일이시기에…….’
번준은 입을 다물 생각도 못 한 채 남하림이 안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았다.
“저어…….”
옆에서 누가 부르고서야 번준은 고개를 돌렸다.
“저희들도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아! 들어가시오.”
들어가려던 중년 사내는 갑자기 나타나 먼저 안으로 들어간 청년이 궁금했는데 다시 몸을 슬쩍 돌렸다.
“고맙습니다. 근데…… 방금 들어간 청년은 누구신지요?”
“저분께서 바로 걸황 남하림 공자님이오.”
술렁.
번준의 말 한마디에 내상국의 정문 앞에 대기하던 인물들이 놀란 표정으로 충격을 받았다.
“아하……! 방금 저분께서…….”
남천상국의 삼공자 남하림은 무림 최고의 무인이자 오대상국 중 두 상국의 주인이었다.
그와 인연을 맺는다면 거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큰일 났다. 엄청난 짓을 해버렸다.’
안적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뒤에서 영화령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안 표사 때문에 좋은 인연이 달아났어요. 어떻게 해요?”
“죄…… 송합니다.”
“지금 이 일이 죄송하다고 말만 하면 끝나는 일인가요?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
“만일 이번에 일이 잘못된다면 모두가 당신 때문인 줄 아세요.”
* * *
남천상국이 순식간에 난리가 났다.
갑자기 홀로 등장한 걸황 남하림.
그가 무슨 이유로 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저번에 왔을 때는 사전에 통보가 있었지만, 이번 경우는 상국에 홀로 조용히 나타났다.
상국의 모든 시선이 남하림을 찾고 있었다.
난영루(蘭榮樓)에 나란히 앉은 모자(母子).
난영루에서 쉬고 있던 표진희는 갑자기 남하림의 방문을 받았다.
정자로 올라오는 남하림을 보면서 헛것을 본 줄 알았다.
분명 신무맹에 있어야 할 아들이었다.
무슨 볼일로 왔냐의 물음에 첫 마디가 ‘그냥’이었다.
‘대체 이 아이가…….’
“여기도 오랜만에 오네요. 저번에 왔을 때는 함께 온 동료들이 많아서 못 왔었잖아요.”
“그러게 말이다.”
표진희는 대답을 하면서도 그냥 왔다는 아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남하림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진짜 내 아들이 맞느냐?”
“가끔 저도 그런 생각이 들긴 합니다. 어머니의 아들이 정말로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눈매를 꿈틀거리더니 버럭 화를 냈다.
“아들이라는 녀석이 열 달 동안 배 아파 놓아준 부모에게 할 수 있는 말이더냐?”
“아들이 맞는지 물어보셔서 해본 말입니다.”
“……나도 신기해서 그런다. 무가도 아닌 상가에서 신기하게도 무림 최고의 인물이 된 아이가 내 아들이라니.”
“그거야 제가 똑똑하고 뛰어난 능력을 지녔으니까요. 당연한 게 아닌가요?”
“그게 아들 덕이냐? 말을 똑바로 해야지. 내가 잘 낳았기 때문이니라.”
“물론 어머니께서 낳아주셨지만 그 외에는 모두 제가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고 무공을 익혀서 그렇지요. 어머니는 일 할 정도…… 나머지 구 할은 제가 지닌 능력이라는 것이죠.”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내 아들이 맞구나.”
말을 퉁명스럽게 했지만 표진희는 미소를 띠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걸황이 아들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아들의 성격상 이유 없이 오지는 않았을 게야.”
“그냥요.”
“호호, 또 그냥이란다. 나에게까지 굳이 대답하기 싫어하는 것을 보니, 그냥 차라도 마시자꾸나.”
“그러죠.”
남하림과 표진희는 반시진 동안 사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냈다.
스윽.
이윽고, 남하림은 난영루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많은 사람들이 밖에 서 있었다.
남하림은 안으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사전에 이야기를 해놓았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네요. 궁금한 게 많나 봅니다.”
“당연하지 않느냐? 맹주 걸황이 홀로 왔으니 궁금할 수밖에.”
“보아하니 양 아저씨께서도 오셨네요.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나중에 저녁을 같이하시죠.”
“그렇게 하자. 따로 먹고 싶은 것은 없고?”
“오랜만에 대두어를 먹고 싶네요.
“알겠다. 준비하고 있을 테니 볼일 보고 오너라.”
스윽.
남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위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양진명은 막을 수 없었다.
“아저씨, 오랜만이네요.”
“공자님, 오셨습니까?”
양진명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잘 지내셨나요?”
“후후후. 중원에서 들려온 공자님의 소식을 듣는 재미로 지내고 있습니다.”
“요즘 시끄러웠지요?”
“축하드립니다. 무림 최고의 인물이 되셨습니다. 전 예전에 하신 말씀대로 공자님께서 천하제일인이 되실 줄 알았습니다.”
“제가 한다면 하거든요. 하지만 제가 아직 못한 게 하나가 남아 있네요.”
“상황(商皇)이 되신다던 말씀이십니까?”
“네. 맞아요. 그것도 기억하고 계셨군요.”
“워낙 공자님께서 의지가 또렷하지 않으셨습니까?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지요.”
“아저씨가 오신 걸로 봐서 아버지께서 보내신 모양인가 본데요.”
“네. 맞습니다. 국주님께서 찾으십니다.”
남하림과 양진명은 천천히 걸었다.
“분명 한 소리 하셨지요? 집에 왔는데 먼저 찾아오지 않고 어머니께 갔다고.”
“국주님의 성정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가’라고 하시면서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후후후, 설마요.”
남하림은 믿지 않았다.
두 사람은 주위의 시선에 상관없이 국주전으로 들어섰다.
* * *
드륵.
남하림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두 명의 인영이 남하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국주 남후정과 큰형 남경이었다.
“하하하하! 왔군.”
남후정은 대소를 터뜨리며 안으로 들어선 남하림을 반갑게 맞이했다.
“아버님을 뵙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잘 왔다. 큰형하고 인사를 나눠라.”
아홉 살 차이의 남경은 어느덧 청년에서 중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큰형, 잘 지냈어? 결혼식에 참석을 못 해서 미안해.”
“괜찮다. 네가 그 자리에 나타났으면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될 거라고 했잖아. 이해하고 있어.”
“고마워. 수항은 잘 자라고 있어?”
“나중에 같이 보러 가자.”
“그래.”
남경은 남하림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뒤로 물러났다.
남후정은 마주 선 남하림을 유심히 보았다.
“급한 일은 없지?”
“네. 한가해요.”
“우선 자리에 앉자.”
나란히 앉은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
같은 피로 이어진 사이였지만 쉽게 말을 열지 못하는 사이이기도 했다.
“몇 년 남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무엇을 말하시는 건가요?”
“개방의 기간은 십 년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무림의 일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은데…… 굳이 개방에 계속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개방에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요. 방주께서도 제가 하는 일은 오히려 도와주십니다.”
“물론 편하기는 하겠지만 한 곳에 얽매이는 것보다 자유롭게 지내는 편이 더 좋을까 싶어서 하는 말이다.”
“불편한 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나와도 이곳에는 올 일이 없을 것입니다.”
“개방이 있는 게 편하다면 상관없겠지.”
“그래도 아직 시간은 많이 있으니 생각해 보겠습니다.”
양진명이 차를 준비하며 들어섰다.
“본국의 많은 사람들이 공자님을 자랑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사람의 앞에서 차를 따르며 남천상국과의 연을 강조했다.
“그렇습니까? 이거 갑자기 부담이 많이 되네요.”
남후정은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저녁에 한잔 마시는 게 어떻겠느냐? 그러고 보니 너와는 지금까지 술을 함께 마셔본 적이 없군.”
“오늘은 안 될 것 같습니다. 먼저 어머니와 저녁을 하기로 했거든요.”
“흐음…… 아버지보다는 어머니가 먼저인 모양이군. 섭섭하다.”
남후정은 실망한 목소리였다.
“오늘 마시고 싶으시면 큰형이 있지 않습니까? 내일은 시간이 되니 괜찮으시다면 내일 뵙지요.”
“…….”
“어머니를 만나 뵈니 요즘 외로운 모양이시더군요.”
“외롭다니. 내가 하루에 한 번씩은 만나거늘.”
“흐음. 어머니께서 외로워하시는 게 맞군요. 하루에 한 번 만났다고 말하시는 것을 보니…… 의무감으로 가신 것처럼.”
남하림의 말에 그는 정곡을 찌른 듯했다.
“그게…….”
“굳이 그런 일로 변명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두 분의 일에 아들이 끼어들 일은 아니잖아요. 난 단지 아들의 입장일 뿐입니다.”
“아버지인 내가 잘못했다는 말이더냐?”
“제가 아버지 잘못이라고 한 건 없습니다. 괜히 한 발 앞서 생각하시지 마세요.”
“허허. 네가 나를 가르치려 하는 것이더냐? 걸황이며 맹주라서?”
“음…… 지금이 아버지의 본모습이십니까? 지금까지 제가 보지 못했던 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스윽.
남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하지만 그만 가보겠습니다. 계속 이야기를 나누다가는 서로 감정이 안 좋아질 것 같습니다.”
“…….”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자 한 적은 없었다.
남하림은 그저 자신의 일에만 바쁜 시간을 보냈다.
남하림은 성인이 된 후 아버지와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눈 것과 마찬가지였다.
‘허어……? 진짜…… 분위기가 왜들 이래?’
남경은 예상치 못한 분위기에 현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남하림을 말려야 할까 싶었지만, 그랬다간 정말로 싸움이 크게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때, 남후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앉아라. 아직 차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
남하림은 마지못한 듯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네 어미에 대해 소홀히 한 것은 대해 미안하다.”
“그 문제는 저와는 상관없습니다.”
“안다. 남녀 사이가 늘 한결같지는 않더구나.”
“이해합니다. 어머니께서 워낙 강하신 분이셔서요. 아버지에게 한 번이라도 지지 않으셨을 겁니다.”
남하림도 모르지는 않았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강한 여인과 함께 사는 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당사자가 아닌 이상 모른다.
“어머니도 이젠…… 예전 같지는 않으십니다.”
“그렇구나. 난 항상 같은 줄 알았다.”
“제가 그런 말을 했다고는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남하림은 한 입에 차를 마셨다.
“여전히 차향은 좋네요.”
찻잔을 내려놓은 뒤 다시 일어났다.
“또 왜 일어나느냐?”
“한 잔 마시면 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놈이……!”
남후정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조금 피곤해서요. 제 방은 그대로 있겠지요?”
“아…… 네. 공자님.”
양진명이 얼른 대답을 했다.
스윽.
남하림은 떠나기 전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 잘 마셨습니다. 내일 조용할 때 찾아뵙겠어요.”
“…….”
남후정은 돌아서서 나가는 남하림을 보았다.
‘조용할 때?’
그는 바로 이해했다.
남경과 함께 있는 자리였다.
‘그렇군. 나에게 따로 볼일이 있었던 모양이군.’
* * *
남하림은 양진명과 함께 국주전에서 나왔다.
“공자님, 국주님께 볼일이 계신 모양이시군요.”
“후후후,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더군요.”
“혹시 제가 먼저 알아봐도 되겠습니까?”
“글쎄요. 죄송하지만 나중에 따로 말해야겠군요.”
“……알겠습니다. 공자님께서 마음에 내키지 않으시다면…… 편하실 때 하셔도 됩니다.”
“고마워요. 상국에 양 아저씨가 계셔서 다행이네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지만 고맙습니다.”
“후후, 여기부터서는 혼자 가겠어요. 아저씨 볼일 보셔도 됩니다.”
남하림은 그와도 헤어진 후 남소정으로 향했다.
웅성.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저들은…….’
눈에 익은 얼굴들.
객잔에서 만난 산명상단의 인물들이었다.
그들도 가까이 다가오는 남하림을 보았는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허둥지둥거리는 모습이었다.
안적은 얼른 남하림을 향해 달려갔다.
“걸황님, 죄송합니다.”
“여기서 뭐 합니까?”
“객잔에서…… 제가…… 미처 알아 뵙지 못해서…….”
“아아, 괜찮아요. 그 자리에 앉아야 해서 음식을 시켜놓았을 뿐입니다.”
“아…… 네에…….”
“어떻게 상국에 왔던 일은 잘됐습니까?”
“다행히…….”
“잘됐네요. 그럼 왜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있는 겁니까?”
“그게…… 걸황님을 뵙고자…….”
“아하, 하하, 내가 속이 좁은 사람은 아닙니다.”
“고, 고맙습니다.”
‘아…… 이제 살 것 같다.’
무겁게 짓눌렸던 가슴이 시원하게 뚫렸다.
“아 참, 오늘 바로 떠납니까?”
“아닙니다. 아까 그 객잔에서 하루를 머문 뒤 내일 일찍 떠날 예정입니다.”
스윽.
남하림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안적에게 전음을 보냈다.
[오늘 저녁에 몰래 찾아가겠습니다. 아, 이건 비밀로 해주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