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 살성을 다스리다
객잔의 뒤로 자리를 옮기자 공터가 있었다.
삼 층 객실에서 창문 아래로 내려다 본 장소였다.
위에서 본 것과 달리 하늘로 길게 뻗은 나무들 안으로 자리 잡은, 넓지 않은 공터.
사방이 건물에 막힌 듯, 객실에서 내려다보지 않으면 밖에서는 찾을 수 없는 공간이었다.
현현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밖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들이 가려져 있었다.
“클클. 이 정도면 나쁘지는 않구나.”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슥슥.
현현자는 발바닥으로 바닥을 쓸었다.
너무나 가벼워 보이는 움직임.
이휘연은 살짝 의외라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놀란 모양이군. 내가 늙어서 무공을 전혀 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느냐?”
“아닙니다. 제가 착각을 한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클클클.”
현현자는 이휘연이 마음에 들었다.
잘못을 곧바로 그 자리에서 인정하는 모습.
젊은 나이에 검제의 위명을 얻은 청년이다.
중원 무림에 이와 같은 인물이 어디 있겠는가.
대부분 무공이 강한 무인은 자부심이 높아 쉽게 인정하지 않는 편이었다.
“생긴 것과 다르게 사람이 유하군. 무당이라서 그런가? 여하튼 검제가 사과를 하니 받아주겠네.”
“고맙습니다.”
“어떻게, 내가 삼 초의 공격을 하겠는데 받아줄 수 있는가?”
“알겠습니다.”
“후후후. 노인이라 제깟 게 얼마나 강할까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전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찌이이이잉-
현현자가 오른손을 올리자 현기가 솟구치면서 무형검을 만들어냈다.
‘대…… 단한 분이시다.’
무형검의 내력.
체력이 얼마나 받아줄지 모르나 현현자가 펼친 무형검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천하제일이란 말이 나올 듯했다.
“요건 청형무검이라고 제법 강하다네.”
굳이 현현자가 설명을 해주지 않아도 강한 기운이 그의 주위에서 뻗어 나왔다.
“멋집니다.”
이휘연은 진심이었다.
나이조차 알 수 없는 현현자.
세상을 담아낸 기운이 틀림없었다.
“그럼…… 시작하겠네.”
“…….”
이휘연은 숨을 멈추며 현현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우우웅-
이휘연의 단전에서 태극음양의 기가 자연스럽게 휘돌았다.
‘허어. 저 나이에 대단하구나. 검제란 위명이 그냥 얻은 게 아니었어.’
현현자는 푸른색으로 변한 눈빛으로 이휘연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굳이 세 수가 아니라 한 수만으로도 알 수 있겠군.’
현현자는 마음을 바꾸었다.
한 초식으로 이휘연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번쩍!
두 팔을 벌린 현현자의 모습이 광명에 잠기면서 사라졌다.
하늘 위에 떠 있는 태양이 아래로 점점 내려온 것처럼, 온 세상이 오직 빛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것을 이겨내는지…… 한번 볼까.’
아공간에 들어선 이휘연은 백색의 공간에 몸이 떠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태극음양(太極陰陽) 음양시태청소양(陰陽始太淸少揚) 육신무용(肉身無用) 극의정신(極意情神).’
눈을 감으며 태극을 읽었다.
덜덜덜덜-
빛이 떨렸다.
그 안에서 붉은 점이 보였다.
‘허어…… 정령공무가 이렇게 빨리…… 깨어지다니.’
우우우우웅-
현현자 또한 세상이 떨리는 파장을 느꼈다.
손톱보다 작았던 붉은 점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저 모양은…… 태극인가.’
붉은 점은 점점 또렷하게 홍태극의 모양으로 변해갔다.
스걱.
백색의 종이가 찢어지는 듯했다.
사방으로 찢어진 광명의 공간.
그 안에서 태극흑검을 든 이휘연의 모습이 나타났다.
“대단하군. 검황의 이름도 아깝지 않을 정도이다.”
“검황께는 아직 멀었습니다. 두 번의 공격이 남았습니다.”
“허어…… 네놈이 나를 죽이고자 하는구나. 한 번이면 충분하다. 늙은 내가 힘을 많이 사용했더니 기력이 달리는군. 방금 그 무공이 태극혜검이더냐?”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다라…… 그건 무슨 의미인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검이 가려고 하는 방향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허어…… 무로검행(無路劍行)에 들어섰구나.’
검과 마음이 일치가 되어야 펼칠 수 있는 검공 최후의 경지.
현현자는 이휘연의 앞으로 다가섰다.
‘참고 있군.’
자신이 이곳으로 와야 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휴우…….’
이휘연은 호흡을 하며 내력을 안정시켰다.
무로검행의 경기에 들어서게 되면서 그동안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일이 발생했다.
당사자인 이휘연조차, 이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천살성의 기가 무로검행에 들어서면서 다시금 불완전해졌다.
그동안 다행히 무당의 심공으로 막아낼 수 있었지만, 거대하게 변한 천살성의 기운을 무당의 심공으로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었던 것.
만일 조금이라도 천살성이 기운이 흐트러지게 된다면 거대해진 천살기가 내부에서 폭주하게 될 것이었다.
유일하게 천살성을 막아낼 수 있는 자연기.
청심청령기(淸心靑靈氣)만이 천살성의 기를 다스릴 수 있다.
현현자의 내력이 청심청령기였다.
“내가 왜 그대의 앞에 나타났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 전에 하나 물어보자. 몸에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는가?”
이휘연은 숨기지 않고 현현자에게 사실대로 밝혔다.
“가끔 가슴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합니다.”
“맞군. 그건 천살성의 기가 스스로 밖으로 나오려고 하기 때문이다. 네놈이 너무 강해진 탓이지.”
“…….”
설마 했던 의심이 사실로 밝혀졌다.
“그것을 처리할 방법이 있는지 궁금하군.”
“지금까지도 내공으로 막고 있었습니다. 문제가 없었습니다.”
“허어, 멍청한 놈이로다. 언제까지 내공으로 막아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거늘.”
“…….”
“네놈도 알 것이다. 일이 한 번 잘못되면 그동안 지탱했던 몸이 사라질 수도 있다.”
“전 괜찮습니다. 그 녀석들과 함께 싸우다가 사라진다고 해도 후회는 없습니다.”
현현자에게 한 이휘연의 말은 진심이었다.
동료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다.
“역시 멍청한 녀석이로군. 네놈이 죽는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이 없지 않느냐?”
“아닙니다. 세상이 저들 손에 들어간다면 그동안 동료들과 했던 많은 일들…… 물론 그게…… 의미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허무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네 목숨보다 그들이 더 중요하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나.”
“그렇습니다.”
“클클클. 됐다.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들었구먼. 돌아앉아라.”
“…….”
이휘연이 다시금 현현자를 바라보았다.
“손에 들고 있는 타구봉을 주게.”
현현자가 태극흑검의 자루를 빼앗듯이 잡아당겼다.
“좋군.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잘 만들었어. 멍청한 놈은 이런 걸로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따악!
현현자는 그대로 이휘연의 머리를 가볍게 때렸다.
“한 번 말할 때 들어라.”
“아…… 네에…….”
젊었을 때 현현자의 성정은 매우 불같았다.
이휘연은 조용히 돌아서며 바닥에 앉았다.
척.
그 뒤로 현현자도 바닥에 앉았다.
“내가 청심청령기를 괜히 익혔도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죽 쒀서 개 주는구나.”
“…….”
“완전 남 좋은 일 시켜주는 것이군. 하긴 청성엔 전부 멍청한 놈들밖에 없어서 이걸 물려주고 싶어도 받을 놈이 없으니…… 내가 애들을 잘못 키운 탓이겠지.”
“현현자님…….”
“조용히 듣고만 들어라. 정신 사나워진다. 내가 고맙다고 느껴진다면 네놈이 살아 있을 때까지 청성파를 도와주면 좋겠다.”
“알겠습…….”
따악!
“조용히 듣고만 있으라고 했지. 내가 말하라고는 안 했다.”
“…….”
이휘연은 현현자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청심청령기는 천살성의 살성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었다.
도가의 심공 중 유일했다.
“단전을 비우고 내가 보내는 기를 단전에 넣어라. 몸에 무리는 없을 게다.”
스으으으-
이휘연은 단전에 내력을 비우기 시작했다.
출렁.
텅 빈 공간에 거대한 양의 물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청성파 특유의 청량한 기가 단전을 통하고 전신혈맥을 통하며 뻗어나갔다.
“가슴과 머리에서 천살성을 다스려라.”
우우우우웅-
현현자의 말처럼 청심청령기가 천살성의 기를 향해 올라갔다.
샤르르르-
붉은 태극음양기와 팽팽하게 맞서던 천살성의 기를 감쌌다.
쏴아아아아-
처음 가져보는 느낌이 몸 전체로 흘러나갔다.
두근거렸던 가슴과 머리가 잔잔한 호수의 수면처럼 고요해졌다.
‘허어…… 단숨에 청심청령기를 받아들였어. 아무런 꺼림 없이…….’
“클클클. 네놈을 보니 무당파도 머리 꽤나 아프겠구나. 이런 아까운 놈을 천살성이란 이유로 박대하다가 개방 거지 놈들에게 빼앗겼다니…… 청성파 입장에서는 다행인가.”
스윽-
현현자는 등에서 손을 뗐다.
“아이고…… 힘들구나.”
이휘연은 얼른 돌아서며 그를 안았다.
“감사합니다.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앞으로 태사부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태사부라…… 옳다. 네놈이 먼저 말을 꺼냈도다.”
다행히 검제가 청성파와 인연을 맺도록 하였다.
이휘연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절을 올렸다.
* * *
다음 날 아침.
이휘연은 기운이 빠진 현현자를 등에 업었다.
“클클클. 이럴 줄 알았으면 제자란 놈들을 키웠을 텐데…… 아쉽군. 진양이란 녀석이 네 사부라 했느냐?”
“그렇습니다.”
“그놈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올라갔겠구나.”
“그런 듯합니다.”
진양진인이 생각났는지 무당산을 올라가는 이휘연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아 참…… 내가 정신이 없도다.”
“태사부님, 무슨 일이십니까?”
“갑자기 무당에 혼자 온 이유가 무엇이냐?”
현현자는 청성산에서 내려오면서도 목적지도, 만나야 할 인물도 알지 못했다.
오로지 기가 흐르는 방향을 따라 도착한 장소가 무당산이며, 만난 인물이 이휘연이었다.
“태사부님께서는 저를 만나러 오신 게 아니었습니까?”
“여기 와서 만나야 할 사람이 네놈인 줄 알았느니라.”
“알겠습니다.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이휘연은 무당산으로 오르면서 홀로 내려온 이유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오호…… 그것을 신무맹 맹주 걸황이 예상을 했다는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그걸 믿고 은하궁과 검문이 무당파 주위에 도착할 거라는 것이고?”
“네, 맞습니다.”
“너희들…… 대단하구나. 걸황이란 인물을 만나보고 싶다.”
“이번 일이 끝나면 함께 신무맹으로 가시지요. 태사부님께 소개를 시켜 드리겠습니다.”
“클클클. 좋구나. 할 일도 없었거늘. 오랜만에 삶의 재미가 있도다.”
현현자는 수십 년을 청성산에서 홀로 생활했다.
갑자기 재미난 일들이 생기자 흥이 났다.
“기분이 좋아서 그러는데 노랫가락이라도 뽑아낼 수 있느냐?”
“따로 아는 노래는 없습니다만…… 본 방의 타령은 알고 있습니다.”
“거지 타령이더냐? 한 번 뽑아봐라.”
“……알겠습니다.”
장타령의 가사들은 잘 알고 있다.
‘이런 건 유도, 그 녀석이 시원하게 잘 부르는데…… 그놈이 했던 것을 따라 해야겠군.’
“흐으음…… 어어어어어어어어어얼씨이이이구 드러러러러간다- 저어어어어어어어어얼씨구 너어어어어간아아아아다-”
이휘연은 목에 힘을 주며 타령을 부르기 시작했다.
‘허허허, 시원하게 잘 부르는구나.’
* * *
하북성의 최북단 승덕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일행들.
융화로 들어서는 첫 번째 마을에 도착했다.
하북표국은 승덕과 융화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다.
정찰을 나간 수하의 보고가 들어왔다.
“독제님, 표국에 수상한 인물들이 많다고 합니다. 예상으로는 창천의 인물들 같습니다.”
“흐흥. 부장 말대로 북방은 안 되는군요.”
“신창강기군으로 쓸어버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상대를 파악한 뒤 쓸어도 늦지 않아요. 아무리 강해도 무작정 들어갔다가는 반격을 당할 수 있으니까.
싸우기 전에 충분히 상대를 파악해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곳에는 어떠한 일이 발생하지 모르지요.
부장이 항상 말하는 게 있는데, 중요한 것은 상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입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준극남은 수장으로서 알아야 할 한 가지를 깨달았다.
북방표국을 그대로 밀어붙였다면 분명 전멸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하들 또한 다치거나 죽게 될지 몰랐다.
‘독제의 말이 맞아. 이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수하들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
“신창강기군으로 정문 주위에 막으세요. 일단 표국 안에는 준 호위와 내가 들어가 보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두 명의 성인이 두 팔을 벌려 겨우 잡을 수 있는 두께의 기둥 사이에 걸려 있는 현판.
북방표국의 네 글자가 커다랗게 정문 위에 보였다.
정문에 경비를 선 두 명의 위사는 정문 앞으로 다가온 뒤 현판을 보는 두 명의 사내들을 노려보았다.
걸복과 백의무복을 입은 두 사내.
하지만 두 명의 기에 주눅이 들었는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누…… 구…… 냐?”
준극남은 등에서 무극신창을 꺼낸 뒤 닫혀 있는 정문을 향해 폭뢰탄결을 펼쳤다.
구우우우웅-!!
무극신창의 끝에서 빛이 번쩍이며 강한 돌풍이 쏟아져 나갔다.
두두두두-
콰아아아앙!!
석 자 두께의 정문이 한 번에 부서졌다.
고수가 틀림없었다.
‘헉……!!’
정문 위사는 그 자리에서 몸이 얼어붙었다.
내력을 실은 당무독의 목소리가 정문에서 울려 나갔다.
“당장 가서 표국주께 알려라. 이곳을 멸할 것이다!”
위사는 부서진 문을 통해 표국 안으로 달려갔다.
“우리도 들어가 볼까요?”
“제가 앞장을 서겠습니다.”
준극남은 무극신창을 들고 먼저 나왔다.
우르르르르-
정문이 부서지는 소리에 수십 명의 표사들이 소리치면서 달려 나왔다.
“웬 놈들이냐?!”
표두 권길의 눈에 부서진 정문이 먼저 들어왔다.
그리고 두 명의 사내를 보았다.
‘헉…… 저…… 자는…….’
권길은 몸이 움츠러들었다.
무극신창을 든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본 것이다.
북방상국이 정리당할 때 신상군 양삼의 곁에 있던 위황창신(衛皇槍臣) 준극남이었다.
‘서, 상대할 수 없어.’
이미 준극남의 무공을 본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표사들은 준극남에 대해서 몰랐다.
“저놈들을 죽이자!”
권길은 달려가는 표사들을 말리기 위해 소리쳤다.
“안 돼! 멈춰라!!”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표사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타앗!
앞에 나온 준극남을 향해 표사들이 달려들었다.
‘멍청한 놈들. 상대의 능력이 어떻게 되는지 파악부터 해야 하거늘.’
표사들이 자신 있게 확신한 건 오로지 인원의 우위.
두 명 정도는 적이 강해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위이이이잉-
무극신창이 일으킨 공명음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