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 현현자를 만나다
꿀꺽.
살유탑은 침을 삼켰다.
미공서의 눈빛에 주눅이 들었다.
눈을 제대로 마주칠 수 없었다.
‘미치겠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것보다 왜 문을 안 열었지? 내가 온 것을 알면서.”
“그건…… 죄송합니다.”
당신이 두려워서 겁이 났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태양궁의 수장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은 죄송하다는 한마디 말밖에 없었다.
“흠, 미안하다고 말을 하니 어쩔 수 없지. 내가 싸우고자 했다면 전부 죽었을 걸세.”
“생각이…… 짧았습니다.”
“내가 태양궁에 찾아온 이유는 그대와 할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었네. 근데 태양궁에서 싸움을 원하는 모양인 듯하군.”
“그…… 건 아닙니다. 아마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후후후, 오해는 무슨 오해를 했다는 말이야?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인가?”
“……죄송합니다.”
“그 말밖에 못하는 모양이지? 우리 여기에서 계속 이야기를 해야 하나?”
“죄송…… 합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살유탑은 빠르게 돌아서며 태양전으로 앞장섰다.
잠시 뒤.
태양전으로 들어선 살유탑은 태양공영실로 미공서를 안내했다.
“앉으시지요.”
태양궁의 주인인 살유탑이었지만 한 발 뒤로 물러난 뒤 상석을 권유했다.
“허허. 그대가 앉아야 할 자리가 아닌가. 나쁜 일 때문에 찾아온 건 아니니 굳이 긴장할 필요가 없네. 어서 앉게.”
“아…… 네에…….”
살유탑은 미공서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앉았다.
“…….”
여전히 미공서의 시선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먼저 미공서가 말문을 열었다.
“자네를 보니 입이 붙은 모양이군. 내가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은가?”
최근에 한 일 중 거슬리는 한 가지가 있었다.
“죄송합니다. 각제와 권소협이 태원평의 원주와 함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잘 아는군. 태원평의 원주를 죽이려고 한 이유가 뭔가?”
“…….”
“어허. 답답하게 구는군.”
“죄송합니다. 청부를 받았습니다.”
“청부한 놈은 태원평의 육서웅이라는 놈이겠지.”
“…….”
육서웅의 이름이 툭 튀어나왔다.
그리고 미공서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전부 알고 있어.’
거짓을 말했다가는 큰일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네. 맞습니다. 그가 본 궁에 청부를 부탁했습니다.”
“그렇겠지. 지금도 그를 죽이고자 사람을 보냈는가?”
“아직은……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중이었습니다.”
“허어……!”
미공서는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무슨 잘못을……?”
“자네, 정말로 멍청한 게 아닌가. 그의 옆에 각제와 권소협이 있음을 모르는가?”
“……저어,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는 사람이 고민을 한다고? 당장 그만둘 생각을 안 하고?”
살유탑은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죄송…… 합니다.”
“말끝마다 죄송합니다만 연발하는군.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하겠네.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원평의 일에서 손을 떼고, 앞으로 그들과 관련된 모든 일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는 게 좋을 걸세. 알아들었는가? 태양궁이 건재하고 싶다면.”
“네…… 알겠습니다.”
“이건 내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네. 각제가 쓸어버리자고 한 것을 겨우 말려 놓았다네. 그래도 화는 풀리지 않았을 게야.”
각제의 분노.
살유탑은 걱정이 되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리겠습니까?”
“특별히 할 건 없네. 그냥 사람을 보내서 지금까지 한 짓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난 뒤 용서를 빌게. 그 방법밖에 없지 않겠나.”
“충고를 해줘서 고맙습니다. 곧바로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일은 그렇게 하는 것이네. 잘못된 것을 알아낸 즉시, 숨기는 것보다 상대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지.”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한 장의 각서를 적게.”
“…….”
“뭘 놀라나? 내가 갔다 왔다는 증거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앞으로 태원평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내용이 든 각서를 적게.”
미공서의 눈빛에 살유탑은 몸이 떨렸다.
“알겠습니다.”
잠시 뒤…….
미공서의 앞에 한 장의 각서가 올려져 있었다.
“좋군.”
대충 내용은 간단했다.
태원평을 건드리면 차후 일어난 모든 책임은 태양궁에서 스스로 질 것이다.
미공서는 각서를 품 안에 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따라 살유탑이 벌떡 일어났다.
“어디를 가십니까?”
“할 일을 다 했으니 돌아가야지 않겠나?”
“아하…… 네, 알겠습니다.”
“후후후. 자네 심정은 내가 바로 사라졌으면 좋겠지?”
살유탑은 맞다고 큰 소리로 말하고 싶었지만 전혀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 닙니다.”
“그럼 며칠을 여기에서 지낼까?”
“……!”
“정색하기는. 자고 가라고 해도 싫다. 그만 간다.”
“소신이 안내를 하겠습니다.”
“됐네. 그냥 내 발로 떠나겠네. 정문까지 나올 필요 없다.”
“아닙니다. 제가 제대로 모시지 않았다는 말이 나오면 안 됩니다. 정문까지 소신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이번에는 미공서가 먼저 밖으로 움직였다.
그의 뒤로 삼 보 정도 떨어져서 살유탑이 종종걸음으로 따라 걸었다.
* * *
태원평에서 연락이 왔다.
환금호에 대한 일은 마무리가 된 듯했다.
남은 일은 단 하나.
북방표국에 대한 문제였다.
중앙상국을 처리하던 양삼은 마침 하루 전날에 신무맹으로 돌아왔다.
마무리가 된 중앙상국은 이름만 그대로 사용할 뿐 모든 사업체는 남하림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중앙상국의 운영은 후연이 대리인으로서 관리하기로 정했다.
양삼은 서신을 읽었다.
“공자님, 북방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임을 알았지만 또 이런 짓을 하고 있을지는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미안해서 더 이상 손대지 않았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치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답은 나와 있잖아. 창천하고 연결되어 있으니 완전히 쓸어 버려야지.”
“저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북방의 인물들은 전혀 반성이 없습니다.”
“이번 일에 무독을 보낼까 해.”
“독제께서 움직이십니까? 하북이기에 전 도제께서 움직일 줄 알았습니다.”
“유도도 처리할 수 있지만 그놈들을 완전히 끝장내기에는 애가 착해. 무독이라면 냉정할 땐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분이 움직인다면 북방표국은 중원에서 영원히 사라질지 모릅니다.”
* * *
스르르르-
당무독의 손가락에서 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치이이이이이-!
가루가 떨어진 은빛 그릇 안에서 소리와 함께 흑색의 거품이 올라왔다.
“흐흐흐, 성공 같은데?”
최근에 연구하는 독.
목숨과는 상관없이 전신을 단숨에 마비시키는 극독.
“음…….”
성공한 독.
하지만 그와 반대로 당무독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 독을 만들었지만 성능이 어떻게 되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무독, 들어가도 돼?”
밖에서 남하림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장이?’
찾아오기에 늦은 시간이었다.
“들어와.”
남하림은 지하실 문을 열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이건 또 무슨 냄새야?’
처음 맞는 독 향이 지하실에 퍼져 있었다.
새로운 독을 만들어낸 게 틀림없었다.
“그건 또 뭐야?”
남하림이 독무가 올라오는 은빛 그릇을 보았다.
“방금 따끈따끈하게 만든 독이야. 전신을 단번에 마비시킬 수 있지.”
“전신마비독은 기존에도 있지 않아?”
“이건 달라. 기존의 전신마비독은 독의 약효 성능이 약해서 마비가 돼도 해독제만 있으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어. 하지만 이건 해독하기도 힘들어.”
“음…… 이런 걸 왜 만들어?”
“엄청 나쁜 놈들을 죽이는 것보다 더 고통을 주고 싶은 때를 대비해 만들었지. 괜찮지 않아?”
“좋긴 한데…… 해독하기 힘들다면 혹시 유출될 경우 너무 위험하지 않아?”
“괜찮아. 정확하게 말하면 남들에게 어렵다는 거거든. 해독제를 만들기 위해선 이 독의 성분을 하나라도 파악하지 못한다면 할 수 없어. 나만 빼고! 흐흐흐.”
“오, 마음에 드네. 이건 어떤 형태로 만들어지지?”
“아직 그것까지는. 휴대하기 쉬운 형태라면 환단이 좋지 않을까?”
“환단으로도 가능해?”
“새로운 방법으로 만들었거든. 환단이나 액체 둘 다 가능해.”
“환단형으로 만들면 휴대하기 편해서 좋겠다.”
히히 웃던 당무독은 갑자기 남하림이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아 참, 무슨 일 때문에 왔어?”
“이런, 갑자기 새로운 독을 보다 잊을 뻔했군.”
“중요한 일이야? 뭔데?”
“하북에 가서 북방표국을 완전히 끝내줬으면 좋겠어.”
“북방표국을?”
“피곤하게 이상한 짓을 하고 있더군.”
당무독의 표정에 미소가 나타났다.
“내가 직접 가서?”
“괜찮겠어?”
“당연하지. 그리고 이번 일은 내가 가장 적격자인 것 같다.”
“왜?”
“북방표국을 정리할 생각이잖아. 유도를 안 보내고 나를 보내는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지. 안 그래?”
“맞아.”
“봐. 무림인들이 아니라서 죽이는 것까지는 할 수 없어 놓아주었잖아. 유도라면 쉽게 못할 거야.
흐음, 그렇다면 죽이는 대신 사지를 영원히 움직이지 못하도록 마비시키면 되겠군. 그들이 한 일에 대한 책임으로 충분히 고통을 줄 수 있겠어.”
“후후후. 내 생각과 같네. 이번 일은 무독이 맡아서 처리를 했으면 해.”
“그렇게 하지. 흐흐흐.”
당무독은 기분이 좋았다.
이제 방금 만들어낸 전신마비독의 효력이 어떻게 되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혼자서도 움직일 수 있겠지만, 누굴 붙여줄까?”
“괜찮아. 북방표국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무독의 실력을 믿지만 만일을 대비해야 해. 창천 놈들이 몰려온다면 혼자서는 위험할 수 있어.”
“아…… 맞구나. 창천이라면 곤란해질 수도 있겠어. 북방표국에 함께 갈 사람을 부장이 알아서 붙여줘.”
남하림은 당무독을 만나러 오기 전에 이미 결정을 내려놓은 뒤였다.
“준 호위가 뒤를 따를 거야.”
“신창강기군도 같이?”
“많으면 좋지 않냐?”
“좋지. 창천이 나오지 않는다면 보고만 있으면 되고. 북방은 내가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
“죽이든 살리든 북방표국을 완전히 끝장내줘. 또 무슨 짓들을 할지 모르잖아.”
“후후후.”
당무독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직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
새롭게 만든 전신마비독이 효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한 것밖에 없었다.
* * *
끼익.
객잔으로 들어선 젊은 도사.
무당산으로 향하던 이휘연은 옷을 도복으로 바꿔 입었다.
창천에서 움직이기 전까지 비밀로 해야 했다.
현재 중원에서 가장 바쁘게 활동하는 문파는 개방이었다.
창천의 움직임에 대해 하루에 한 번씩 걸비에게 상황을 보고받았다.
의심스러운 상황이라면 어떠한 움직임도 개방도를 통해 걸비로 수많은 정보들이 모여들었다.
세상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이휘연은 홀로 자리에 앉았다.
‘빠르게 움직인 덕에 내일이면 무당산에 도착할 수 있겠어.’
혼자 무당산으로 찾아온 경우는 처음이었다.
예전과 달리 무당파로 가면서도 마음이 편했다.
‘검문에서도 도움을 주겠다고 하니 다행이군.’
내려오는 길에 남하림의 전서를 받았다.
은하궁과 검문.
두 곳이 무당파를 도와준다면 창천의 공격을 충분히 막아내고도 남았다.
“다행이야. 하늘은 중원을 버리시지 않으셨군.”
남하림이 없었다면 중원은 이미 창천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거라 확신했다.
“부장이 없었다면 우리들도 없었겠지.”
이휘연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개방에서 그와 첫 만남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동료라는 기분이 어떠한 것인지 알려주었던 네 명이었다.
엉뚱한 녀석들.
각자의 문파에서 쫓겨나오다시피 한 네 명을 중원 최고의 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클클클. 젊은 놈이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가?”
“…….”
객잔으로 들어선 노도.
이휘연은 그가 다가오는 것을 알았지만 옆에 비어 있는 자리에 앉을 줄 알았다.
평범할 정도의 도복.
하지만 청아한 내력이 노도에게서 흘러나왔다.
‘청성의 어르신이시군.’
중원 도가의 내력 중 가장 청아하고 맑은 느낌의 심공은 가진 곳은 청성파였다.
이휘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클클. 살기가 사방으로 뻗치는 녀석이라 예의라곤 없는 줄 알았건만…… 옆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군.”
탁탁!
노도는 손에 든 지팡이로 의자를 건드렸다.
“여기에 앉아도 되겠느냐?”
“네, 앉으시지요.”
“목소리에도 살성이 가득하군.”
“…….”
“근데…… 신기하게도 살성에 살기가 보이지 않는군. 내가 너무 오래 산 모양인가. 이상한 녀석을 보게 될 줄은 몰랐네.”
노도는 자리에 앉으면서 물끄러미 이휘연을 뚫어져라 보았다.
“네놈이 요즘 이름 꽤나 알리는 검제가 맞는 듯한데.”
“어르신께서는 저를 아시는 모양입니다.”
“무림에 오랜만에 나오니 네놈들 이야기밖에 없더군. 한번 만나보고 싶지만 다들 바쁜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죽기 전에 볼 수 있을까 걱정은 되었네.”
“송구한 말씀이지만 어르신께서는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클클클. 고맙군. 하지만 사람이 너무 오래 살면 안 좋아. 때가 되면 저세상으로 가는 것도 재미있지 않겠는가. 굳이 무리를 하면서 사는 이유를 모르겠어.”
창천에 대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는 있느냐?”
“어르신을 잘 모르겠으나 청성파에서 오셨음을 알겠습니다.”
“클클클. 대단한 녀석이군. 전혀 내력을 보이지 않았건만 단번에 알아내는 군.”
“…….”
“난 청성의 현현자라고 한다.”
현현자(賢賢者).
전전대 청성파의 도인으로 도명은 만우 도인이지만, 중원 무림인들은 그를 현현자라 따로 불렀다.
‘대체 이분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기에…….’
이휘연은 몸을 조심스럽게 최대한 낮추었다.
“어르신께서는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발길이 이곳으로 흘러왔을 뿐이었네. 사실 무당에는 별로 볼 것도 없지. 예전에도 자주 놀러왔던 곳이거든.”
“청성산이 아름답다고 들었습니다.”
“클클클. 내가 청성 출신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중원의 산들 중 가장 아름다운 산이 바로 청성산이지.”
그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느껴졌다.
“혹시 조용한 장소가 있겠느냐?”
“…….”
“얼마나 대단하기에 젊은 나이에 검제란 무명을 얻었는지 구경이라도 하고 싶어서 묻는 것이니라.”
“있긴 합니다만…….”
“그럼 됐다. 딴소리하지 말고 앞장이나 서도록 해라.”
노도 현현자의 맑은 눈동자가 푸르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