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 표행을 하다
조용한 곳에서 만나자는 국주 주양진의 연락이 왔다.
남하림은 죽군당을 홀로 나섰다.
국주원의 뒤편에 있는 작은 연못을 따라 걸었다.
햇살이 수면 위로 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제법 운치가 있군.’
연못을 지나자 커다란 나무 아래로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다만 문제는 정자 주위에 거추장스런 기들이 많다는 것.
‘여전히 상대가 어떠한지 모르는군. 은근히 고집이 강해.’
남하림은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정자에서 내려온 그를 마주했다.
“어서 오시오.”
“조용한 장소이긴 하지만, 불청객 없이 만나는 것이 더 좋았을 텐데요.”
“…….”
주양진은 흠칫했다.
중앙상국 최고의 무인들이었다.
남하림에게 호위대가 너무 쉽게 들켰다.
그는 신무맹의 맹주가 될 정도의 무공을 가늠하지 못했다.
“죄송하지만 저들을 치워주시겠습니까? 내가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면 오산입니다. 바로 물리지 않는다면 모두 죽을 수 있습니다.”
슈우우욱-
그가 알고 있던 남천상국 막내아들 남하림이 아니었다.
신무맹의 맹주가 보여주는 위엄이 뼛속 깊이 느껴졌다.
“미…… 안하네. 본인의 수하들이…… 우리들이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들을 보낸 모양이네.”
“국주님께서는 스스로 결정을 내리시는 게 없습니까? 아니면 모든 일에 핑계를 댈 생각밖에 없는 것 같군요.”
“…….”
주양진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하지만 남하림의 말이 사실이기에 반박을 하지 못했다.
“국주님께서 치우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치울까요?”
“…….”
그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마음 한편으로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은 문제를 걸고넘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분명 경고를 했습니다만…… 어쩔 수 없군요.”
남하림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아아앗!
손에서 뻗어나간 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악!”
털썩!
짧은 비명이 들리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 번의 움직임에 정확히 열 명의 사내들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꿈틀거렸다.
“이건 맛보기였습니다. 아직도 스무 명 정도가 숨어 있군요.”
“걸황…… 알겠소.”
주양진은 얼른 주위를 향해 소리쳤다.
“모두 물러가라!”
남하림은 그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역시…… 직접 당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아.’
주양진의 성격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되었다.
“국주님. 괜히 많은 사람들을 고생시키네요.”
“……미안하네.”
“됐습니다. 이로써 국주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확실히 알게 되었거든요.”
“…….”
“뭐 하십니까? 계속 서 있을 것입니까?”
“아, 알겠네.”
남하림의 기세에 눌린 탓인지 움직이는 행동도 부자연스러웠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로를 보면서 앉았다.
“서로 좋게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다시 한번 미안하네. 혹시나 우리를 누가 노리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호위를 세워두었던 것일세. 다른 이유는 없었네.”
“국주님께서 신변에 위협을 받고 계십니까?”
“……아닐세.”
“그건 아니라면서 누가 우리를 노린다는 말은 뭡니까?”
“……아…… 그건…… 그대가 걸황이기에 누가 노릴 것이라…….”
타악.
남하림은 탁상을 내리쳤다.
“그만하시죠. 만일 누가 나를 노린다면 그건 중앙상국이겠지요.”
“그건 아니네. 미안하네.”
한동안 정적이 흐른 후.
먼저 남하림이 입을 열었다.
“여기에 왜 왔는지 물었습니까? 국주님께서 말씀하신 문제 때문에 왔습니다.”
“걸황. 그 문제는 본 상국의 문제이지 않는가? 굳이 신무맹이나 천하제일상국에서 거론을 할 문제는 아니라고 보네.”
“맞습니다. 중앙상국의 일이니 거론할 가치도 없는 일이지요. 다만 정상적인 물동량이라면요.”
“흐음…….”
주양진은 말을 멈췄다.
그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왜 정상적이지 않다는 말인가? 상계에 피해를 준 적이 없지 않은가?”
“국주님께서는 네 개의 상국에서 빠져나가는 물동량들이 정상적이라 생각하십니까?”
“그거야…… 본 상국에서 빠져나가는 물량이지 않은가.”
“그럼 하나만 묻겠습니다. 그 물량들이 어디로 움직이는 것입니까? 그것만 알려준다면 문제를 삼지 않겠습니다.”
“…….”
그는 대답을 못했다.
‘아 씨…… 나도 모르는 일이거늘…….’
보내는 인물들마다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는 결국 입을 다문 채 남하림을 보았다.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망할 놈. 나를 비웃고 있어……!’
“모르는군요.”
남하림의 한마디 말이 가슴을 짓눌렸다.
이제는 정상이 아니라는 것에도 반박을 하지 못했다.
비정상적인 물동량.
“걸황, 내가 모른다고 해서 무림과는 상관없지 않는가?”
그렇다고 신무맹에서 나설 일은 아니라고 한 번 더 우겨보았다.
“만일 상관이 있다면요?”
싸늘한 기가 밀려왔다.
방금까지 서로 대화를 나누었던 목소리와 다르게 차가웠다.
“그게 무슨 뜻으로 말을 하는 건가?”
“다시 묻겠습니다. 상관이 있다면 신무맹에서 움직여도 되겠냐는 뜻입니다.”
“걸황. 보자 보자 하니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것인가?”
주양진은 벌컥 화를 냈다.
심장이 터져 나갈 듯 심하게 뛰고 있었다.
게다가 흥분했는지 코에서 콧김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남하림은 눈꺼풀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걸 협박이라고 보는 모양이군요. 아닙니다. 선전포고이자 경고입니다.”
팟.
남하림의 눈빛에서 터져 나온 무형의 살기.
주양진은 급격히 주눅이 들었다.
계속해서 상대가 무림인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크흠, 걸황…… 미안하네. 내가 잠시…… 흥분을 했어.”
“아닙니다. 주 국주님의 속뜻을 잘 알았습니다.”
“허어, 내가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나.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내가 무조건 걸황의 명을 따르도록 하겠네.”
주양진은 고개를 숙였다.
남하림의 노여움을 풀어야 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국주님께서는 세 곳의 국주들을 부르시면 됩니다.”
“그들을? 세 명 모두?”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연락을 해서 모두 모이게 하세요.”
“……알겠네. 으음…… 근데 혹시 안온다고 한다면…….”
“무조건 오도록 만드세요. 만일 한 명이라도 빠진다면 중앙상국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신무맹에 해가 되는 일이라면 오대상국이라도 검을 들어 잘라낼 테니까요. 내가 수하들과 함께 온 이유를 알았으면 합니다.”
일천 명의 신창강기군.
그건 협박이 아니라 선전포고를 위한 경고였다.
‘처음부터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주양진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남하림이 어떠한 생각을 하는지 깨달았으니까.
중앙상국이 살기 위해서는 세 명의 국주들을 한자리에 모아야 했다.
‘대체 어떤 놈이…… 이런 짓을 한 거야?’
* * *
하루 종일 내내 표국 안으로 많은 물량들이 모여들었다.
팽유도는 하남표국에 들어오기 전, 모든 건물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표국의 창고는 총 네 개.
‘엄청난 양이군.’
팽유도는 창고가 내려다보이는 나무 위에 올라섰다.
창고 안에 쌓여 있는 물량들을 표행한 표국은 전부 중앙상국에 소속된 표국들이었다.
‘내부 거래라는 말인데…….’
네 곳의 상국에서 모인 물량들을 마지막으로 하남표국에 집합시키고 있었다.
‘조만간 움직이겠군.’
열린 창고 안에 쌓아놓은 물건들이 밖에서 보이는 것으로 봐서, 거의 다 채운 듯했다.
‘어라? 저놈들은…….’
익숙한 기를 가진 무인들.
‘창천이다. 역시 창천과 연결된 게 틀림없군.’
그때,
휘익.
창고 앞에 서 있던 그들 중 한 사내가 갑자기 시선을 돌렸다.
‘이크, 제법인데…….’
팽유도는 곧장 신형을 날리며 나무 위에서 사라졌다.
사내는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음…… 분명 기가 느껴졌는데…….’
나뭇가지 위를 자세히 살폈지만 아무런 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민감해진 모양이군.’
하남표국의 인물들 중 자신보다 뛰어난 무인은 없을 터.
사내는 돌아서며 창고들을 바라보았다.
‘후후후. 이 정도 물량이면 당분간 부족함이 없다고 하셨다.’
만족한 미소가 표정에 가득했다.
“일경단주님, 도착하셨습니까?”
“주 표국주.”
하남표국주 주오량이 다가왔다.
보통의 얼굴 생김새에 축 처진 귀가 유난히 잘 보였다.
“언제 도착하셨습니까? 미리 연락을 주셨다면 마중이라도 나갔을 것입니다.”
“남들 눈도 있네. 조심해야 한다.”
“죄송합니다.”
“본 천으로 갈 물량들은 거의 챙긴 모양이군.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을 해준다니 다행이군.”
표국주는 창고 안으로 함께 들어섰다.
“오늘 중으로 모든 물량들이 입고할 것입니다.”
“수고했네. 그분께서 무척 좋아하실 게야. 돌아가면 자네의 노고에 대해 말을 해주겠네.”
“고맙습니다.”
표국주는 허리를 바짝 숙였다.
그에게는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
“언제쯤 움직이면 되겠습니까?”
“배가 도착하는 대로 곧바로 옮기도록 하게. 내일 오전 일찍 도착할 걸세.”
“넵. 알겠습니다.”
* * *
웅성웅성.
짐수레에서 실고 온 물건들을 배 안으로 옮겨 실었다.
오전부터 싣기 시작하여 해가 떨어질 때까지 짐꾼들과 쟁자수들이 끊임없이 움직였다.
‘흐응, 이것 때문에…… 하남표국을 원한 모양이군.’
하남표국에 새롭게 만든 지하통로.
사전에 조사한 바론 원래 이곳엔 후문이 없었다.
하남상국으로 넘어간 뒤 만들어진 통로가 분명했다.
지하통로를 지나자 장강의 지류와 연결된 강가가 나타났다.
정문은 하남표국 건물에 의해 시야가 막혀 있었다.
그래서 강가에 정박한 열 척의 배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동안 하남표국에서 빠져나간 흔적을 찾지 못한 이유가 있었던 것.
‘대단하군. 정문에서만 지키고 있으니 알 수가 없지.’
마지막 배에 짐을 모두 싣자 표사들이 각자 올라탈 배 앞에 모였다.
“모든 준비가 됐는가?”
삼조장 평문국은 표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저어, 도유가 아직 안 왔습니다!”
“그놈은 어디에 갔어?”
“아침부터 계속 배탈이 나서…….”
“그놈 귀찮게 하는군.”
후다다닥!
빠르게 달려오는 소리.
팽유도는 바지를 잡은 채 헐레벌떡 뛰어갔다.
평문국의 인상은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듯했다.
“더 빨리 안 와?”
짧은 다리로 달려오는 팽유도를 보며 평문국이 재촉했다.
“헉헉. 죄송합니다!”
“…….”
“배탈이 나서…….”
퍽.
평문국은 검집으로 팽유도의 배를 찔렀다.
“똑바로 안 해?”
“죄송합니다!”
“너…… 나중에 갔다 와서 보자.”
주위는 이미 승선을 하고 있었다.
계속 야단 칠 수 없었다.
“우린 오 호선에 승선한다. 빨리 움직여.”
“넵!”
팽유도는 노려보는 평문국의 시선을 피하면서 빠르게 배에 올라탔다.
마지막으로 평문국까지 승선했다.
“헤헤. 평 표두님.”
“왜?”
팽유도의 물음에 평문국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함께 지낸 지 며칠밖에 안 됐지만 상당히 귀찮은 녀석이었다.
특히 돈에 관해서 집요하게 물어댔다.
월봉을 월말에 주지 않고 그다음 달 다섯째 날에 주는 이유가 뭐냐.
혹시 가불도 가능하냐.
일을 잘하면 성과금은 없느냐 등등.
“어디까지 갑니까?”
“알아서 뭐 하게?”
“다들 궁금한 것 같아서요.”
팽유도는 동료 표사들을 가리켰다.
그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처음이라 궁금했다.
“쩝…… 하긴 네놈들 여섯 명은 처음이지. 우선 뱃길로 황강까지 간다. 그다음은 육로로 움직일 것이다. 그때까지 기운 빼지 말고 푹 쉬도록.”
“아하, 넵. 알겠습니다.”
평문국이 돌아서며 선실로 들어가려다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넌…… 괜히 움직였다가는 사고 칠 것 같은데. 분명 말하지만 조금이라도 이상한 짓 하다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잘릴 줄 알아. 알겠지?”
“평 표두님도 참…… 제가 무슨 사고를 친다고 그러십니까. 조용히 잠이나 자겠습니다.”
“흥.”
그는 콧방귀를 뀌면서 선실로 들어갔다.
“네놈 때문에 우리까지 피해가 가면 죽을 줄 알아.”
“…….”
뒤를 이어 다른 표사들이 한마디씩 한 후 선내로 뿔뿔이 흩어졌다.
탁탁.
일동은 팽유도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의 말을 했다.
“기운 내. 나중에 잘려도 다른 곳에서도 표사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일동 형, 제가 잘릴 것 같으신가 봐요.”
“그래. 내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겪어봤잖아. 대부분 비슷하더라고.”
“헤헷, 경험이 중요하죠. 앞으로 조심해야겠네요. 일동 형도 쉬고 계세요.”
팽유도는 그 자리에서 옆으로 돌아누웠다.
‘이 물건들을 어떻게 할까?’
그리고 고민에 빠졌다.
창천의 인물이 나타난 것으로 확실해졌다.
모든 표행의 물량들은 창천으로 가는 게 확실했다.
중앙상국에 창천과 관련된 인물이 존재하는 것만 봐도 유추할 수 있었다.
‘이미 들어간 물건들은 어쩔 수 없지만…… 이것들은…….’
팽유도는 결정을 내렸다.
‘하림 형이었다면 그들이 가지지 못하도록 불태워 버렸을 거야.’
그가 옆으로 돌아누웠던 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기척.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음…… 창천에서 나온 인물이군.’
중앙 돛대 위에 매달려 있는 인물.
처음에는 전혀 그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미세하게 움직이지 않았다면 찾지 못했을 것이었다.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겠어.’
우선 그의 시선을 다른 방향을 돌린 뒤 움직여야 했다.
배는 뱃길을 따라 하남을 떠나 호북으로 내려갔다.
강서성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