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황무적-280화 (281/328)

280. 영문자

구우우웅-

석문이 열렸다.

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가득했다.

스윽, 스윽.

어둠의 석실에서 들려오는 괴기한 쇳소리.

그와 동시에 검은 그림자가 석실 밖으로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처억.

빛과 어둠의 경계선에 멈춘 인영.

스윽.

흑색의 인영은 천천히 손을 올려 석문 밖으로 손바닥을 폈다.

손바닥 위에 빛이 비췄다.

“캬, 오랜만에 보는군.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어.”

쇳소리에 날카로운 예기가 뿜어져 나왔다.

처어억.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그는 햇볕이 내리쬐는 바깥을 향해 일 보 앞으로 내디뎠다.

슥슥.

모습을 드러낸 인영.

구 척의 장신에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린 사내.

얼마나 길었는지 바닥을 끌고 나온 머리카락이 석문을 빠져나오지 않았다.

스윽.

사내는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햇볕이 따뜻해서 좋군.”

킁킁.

“공기도 맑고…….”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쿠웅!

흑색의 인영을 향해 중년 사내가 부복을 하며 소리쳤다.

“소신, 순중. 창천영문의 수장이신 영문자님을 뵙습니다.”

“처음 보는 놈이군. 네놈은 누구의 제자이더냐?”

“요문제께서 제 사부입니다.”

“그놈은 어떻게 되었지?”

“십 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죽어? 어떻게 죽었지?”

“천수(踐修)를 다하셨습니다.”

“늙어서 죽었다라……! 예전부터 특이한 놈이었어. 대혼술법을 알면서도 거부하고 죽었군.”

“…….”

영문자는 다시 서너 걸음 걸었다.

스윽- 스윽-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 바닥을 쓸었다.

영문자는 재차 걸음을 멈췄다.

“순중이라 했나? 허리에 찬 놈이 잘 드는가?”

순중은 허리에서 검을 뽑았다.

“여기 있사옵니다.”

“이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잘라라.”

스걱, 스걱.

순중이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바닥에 잘린 머리카락이 수북이 쌓였다.

휘익휘익.

이내 영문자가 허리께까지 잘려 가벼워진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됐어. 이 정도면 됐다.”

스으윽.

얼굴을 가렸던 머리카락을 뒤로 묶자 영문자의 본 얼굴이 나타났다.

건장한 중년 사내의 모습.

순중은 놀란 눈빛이었다.

‘이곳에 들어선 지 백 년이 넘었다고 들었거늘…… 대혼술법을 펼친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

순중의 얼굴을 본 영문자가 피식 웃었다.

“별거 없다. 대혼술법에는 영혼을 바꾸는 것도 있지만 동면하면 남들보다 늙지 않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도 있지.”

“……!”

쿵. 쿵.

일보씩 내디디는 그의 걸음이 바위가 떨어지는 듯 무거웠다.

“내가 초공(超空)에 들어선 지 얼마나 흘렀는가?”

“소신에 알기에 백 년하고도 오 년이 흘렸습니다.”

“제법 긴 잠을 잤군.”

스으윽.

빠드드득.

그는 목을 천천히 돌렸다.

“창천주께서 곤란하신 모양이군. 백 년이 지난 나를 깨우시다니.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지?”

“양천의 전인이 나타났습니다.”

“구천의 조율자?”

“맞습니다.”

스윽.

영문자는 걸음을 멈추었다.

“예전에도 구천의 조율자는 있었다. 제법 강했는데. 은무조…… 양천의 전인이었던 그자의 이름이었지. 크크크큭.”

그에게서 괴소가 흘러나왔다.

순중은 내력이 울렁거리는 것을 겨우 막아냈다.

“단단한 놈이어서 목을 잘라내는 데 꽤 힘이 들었다고.”

“…….”

“지금 난리치는 녀석이 그놈의 제자인가?”

“아닙니다. 그의 제자였던 천강신인이 키운 인물입니다.”

“지금 장난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겨우 애송이 하나에 나를 깨웠다는 말이 되는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애송이가 아닙니다. 그자는 창천주님께서도 인정을 하셨습니다.”

“창천주께서?”

세상의 주인 창천주의 인정을 받았다는 말에 영문자는 노기를 거두었다.

“송구한 말씀이지만 십문의 몇 분 수장들께서도 그에게 당했습니다.”

파아앗!

영문자의 눈이 번쩍거렸다.

“큭, 크하하하핫! 하긴 나를 깨울 정도면 그 정도의 능력이 있어야겠지.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궁금해지는군.”

‘우욱.’

대소에 흐르는 내력의 힘.

순중의 몸이 절로 휘청거렸다.

휘익.

영문자의 신형이 처음과 다르게 빛처럼 쏟아져 나갔다.

“네놈들은 영문에서 대기하도록. 창천주님을 만나 뵙고 오겠다.”

“영문자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순중이 허리를 숙이는 순간, 그의 신형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휴우…… 엄청난 분이시다.’

사부인 요문제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강한 사내이시다.

창천주와 비교할 만할 정도로…….

‘모시기에 힘들지 않다고 하셨다. 그분의 명을 잘 따르기만 한다면.’

* * *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사내.

창천의 재정 책임자 조경노가 두툼한 책자를 내려다 놓았다.

“주군, 창고를 채우고 있는 중입니다.”

“수고하는군.”

“아닙니다. 소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남천상국에서 일이 틀어지는 바람에 곤란했거늘. 곧바로 처리할 줄이야. 그곳에 사람을 심어놓았을 줄은 몰랐어.”

“한 바구니에 달걀을 한꺼번에 놓아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후후후, 역시. 내가 창천에서 믿을 놈은 딱 두 놈밖에 없는데 그중 한 명이 경노, 자네이지.”

“주군께서 소신에 대해 믿음을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본 천의 재정에 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네만 믿도록 하지.”

스윽.

조경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주군, 보기 싫은 놈이 온 듯합니다. 소신은 먼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호오, 자네의 친우가 아닌가?”

“주군께 막말을 하는 놈이 어찌 친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조경노가 움직이기 직전.

한 발 늦었다.

휘이익!

빠르게 다가온 인영이 두 사람 앞에 내려섰다.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망할 놈, 씻고나 오지.’

조경노의 이마에 주름이 짙어졌다.

“주군. 잘 지냈소? 이번에는 완전 젊은 놈의 몸에 들어갔구려.”

“창홍, 주군께 말을 함부로 하지 말게.”

스윽.

영문자는 돌아서며 조경노를 마주 보았다.

“큭, 안 본 사이에 간이 커졌는데. 내 눈을 똑바로 볼 줄도 알고.”

“이 자식이…….”

덥석.

영문자는 순식간에 조경노를 안았다.

탁탁탁!

그러고는 조경노의 등을 두드렸다.

“살아 있었구만. 반갑다. 친구야.”

“친구는 무슨. 빨리 떨어져라. 냄새난다.”

“이거 섭섭하군. 백 년 만에 만나는 친구에게 냄새가 난다고 하다니. 주군, 안 그렇소?”

“크하하, 맞다. 친우 사이에 그러면 아니 되지.”

조경노는 그들의 대소를 들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만 가겠습니다.”

그는 얼른 밖으로 나섰다.

“경노, 나중에 찾아갈 테니 한잔하세나.”

“싫다. 네놈이 나오니 이번에는 내가 석문에 들어가고 싶군.”

“하하하하! 여전히 웃긴 친구이구만.”

영문자는 웃으면서 돌아선 후,

척.

창천주를 향해 포권을 했다.

“주군을 뵙소이다.”

“단잠을 자는데 깨운 것은 사과하지.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는데, 귀찮은 일들이 많아 부득이 부를 수밖에 없었네.”

“양천의 전인이라는 놈 때문이오?”

“맞네. 약관을 지난 놈인데 제법 강해.”

“대충 젊은 줄은 알았는데 완전 애기가 아니오?”

“그러다가 여러 명 갔다.”

“하긴…… 무공이 강한 것이랑 죽는 것은 나이와는 상관없지.”

영문자는 양천의 전인이라는 인물이 궁금해졌다.

창천주가 어떤 인물인가.

그런 그가 부담스러워하는 존재였다.

스윽.

창천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세.”

“어딜?”

“오랜만에 나왔는데 축하주라도 한 잔해야지. 아니 그런가?”

“좋긴 하지만 안 바쁘시오?”

“우리 일에 바쁜 것이 있었나? 영원한 것이 시간이거늘. 자네도 다시 나왔으니 좀 더 즐기다가 일을 하면 되네.”

“음…… 그렇긴 하지요. 아, 석문에 들어가기 전에 좋은 술을 담아 놓은 게 있소이다. 지금쯤이면 맛있게 숙성이 되어 있을 겁니다.”

“벌써 꺼내 마셨다네. 자네가 언제 나올지 몰라서. 상당히 향이 좋더군.”

“…….”

탁탁.

창천주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뭘 그리 쳐다보는가. 그보다 좋은 술도 얼마든지 있네. 가세나.”

“주군, 너무한 게 아니오?”

“난 잘못이 없네. 경노가 알려주더군.”

“경노…… 이 자식이…….”

밖으로 나간 조경노는 손가락을 넣고 귀를 후볐다.

* * *

‘중앙상국이라…….’

상무우 사부에게 무공을 배울 당시였다.

사부가 남천상국으로 찾아온 중앙상국의 인물들 중 한 명을 두고 이상한 느낌이 난다고 하신 적이 있었다.

‘……그가 누구였지?’

너무 어릴 적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딱딱.

남하림은 스스로 머리를 치면서 구시렁거렸다.

“에이, 기억이 안 나네. 갑자기 머리가 나빠졌나?”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의 얼굴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털썩.

못마땅한 얼굴로 앞을 주시하던 남하림이 갑자기 의자 밑으로 몸을 깊숙이 숙였다.

“…….”

그와 동시에, 문밖에서 조잘거리는 여인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죽이 맞군.’

신무맹에서 만난 그녀들.

신소소와 명화진은 나이가 같았다

둘은 단번에 오래된 친구처럼 가까워졌다.

드륵!

신소소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상하다?”

방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안에 있다고 했는데. 어디 갔지?”

신소소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방 안에는 남하림이 없었다.

“몰래 밖에 나갔나?”

“걸황님이 안 계셔?”

“그러네. 휘연 오빠한테 갔나? 거기 가보자.”

타악.

신소소와 명화진은 함께 밖으로 나간 뒤 문을 닫았다.

맹주전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스윽.

책상 아래로 숨었던 남하림이 빼꼼 고개를 들었다.

‘나갔군.’

근데 내가 갑자기 왜 숨었을까.

아직 뭔가 해결이 안 된 상황.

생각이 날 듯하면서 마지막 벽 하나를 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집중을 하고 싶었다.

남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책상에 기댔다.

“……!”

번뜩.

갑자기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책상 아래에 있을 때였다.

책상에 있던 물건이 굴러떨어져서 주우려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거기서 뭐 하지?”

사내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기억이 났어.’

그가 누구인지 알아냈다.

남하림은 무심코 벌떡 일어났다.

쿵!

“아야.”

급하게 일어나면서 책상과 그대로 머리가 부딪쳤다.

콰앙!

책상 한쪽이 그대로 박살 났다.

다다다다-

그리고 다시 빠르게 다가오는 발소리.

드륵!

순간 문이 활짝 열리고.

신소소와 머리를 긁적이며 책상을 바라보던 남하림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

신소소가 그의 앞에 책상이 부서진 것을 보았다.

“……이건 왜 조각났어요?”

“음…… 여기에 서류가 떨어져서 말이지. 그걸 줍다가…….”

신소소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외쳤다.

“혹시 우리들이 귀찮아서 여기에 숨어 있었어요?”

“아니! 무슨 소리 하는 거냐? 내가 세상에서 얼마나 소소를 좋아하는데. 자, 가자. 명 소저가 떠나기 전에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진짜요? 그렇지 않아도 화진이가 하남에 오면 회면을 먹고 싶었다고 해서요. 오빠가 얼마 전에 맛있는 집을 찾았다고 했잖아요.”

“하남이라면 당연히 방성회면(方城燴面)은 먹고 가야지. 가자.”

“넵.”

신소소와 명화진은 신난 표정으로 남하림을 따랐다.

일각 뒤.

남하림과 두 명의 여인이 남양성 시장의 입구로 들어섰다.

세 사람은 가벼운 차림으로 변복을 했다.

남하림이 입는 걸복을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까.

신소소와 명화진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면서 상점들과 노점들에서 파는 물건들을 구경했다.

신소소가 바짝 남하림의 곁에 붙어 섰다.

“어디에요? 요런 데 맛있는 음식점이 있나요?”

“그럼. 다 왔어. 저기야.”

남하림이 가리킨 곳은 허름한 노점 가게.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나무 탁자 세 개. 그리고 삐거덕거리는 나무 의자들.

그것도 모자라는지, 그냥 서서 먹는 사람들과 건물 벽에 쪼그리고 앉아서 회면을 먹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저기요?”

실망한 눈빛.

“한 번 먹어봐. 음식은 맛이 중요하잖아.”

“……흐응.”

남하림은 먼저 앞서 걷고는,

번쩍!

면을 담고 있는 노파를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잘생긴 총각 왔는가?”

* * *

후루루룩!

신소소와 명화진은 말할 사이도 없이 면을 흡입했다.

“어때, 맛있지?”

척!

신소소는 국물을 마시면서 엄지를 올렸다.

“맛있는 모양이네. 그럼 잠깐 먹고 있어. 볼일 좀 보고 올게.”

끄덕끄덕.

남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였다.

느릿하면서도 흐느적거리는 느낌.

그리고,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남하림의 신형이 사라졌다.

‘헛…… 어디?’

갑자기 사라진 남하림의 모습.

순간, 숨어서 그들을 지켜보던 인영의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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