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 창천멸천군 무너지다
씨익.
팽유도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상혁천의 눈동자는 당황했는지 흔들거렸다.
전신을 타고 내려가는 싸늘한 느낌.
방금 전까지 가졌던 호기로운 자신감은 사라지 지 오래되었다.
“후후후,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생각되지요?”
‘망할 새끼.’
팽유도의 비웃음에 입안에서 욕이 맴돌았다.
꽈악.
상혁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하게 그와 실력 차이를 느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무림인의 무공보다 항상 우위에 있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싸우고 싶지 않았다.
이미 몸이 싸우기를 거부했다.
하나 물러나고 싶어도, 뒤에서 노려보는 군장 가묵풍의 차가운 시선이 등을 찌르고 있었다.
‘괜히 나섰다.’
상대의 실력도 파악하지 못한 채 호승심으로 나선 게 잘못이었다.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한다고 해도 늦는 법.
스스슥.
천천히 다가오는 팽유도의 기세에 상혁천의 신형이 움찔거렸다.
“싸우고 싶지 않으면 그냥 들어가시오.”
“…….”
팽유도에게 무시를 당했지만 살고 싶었다.
상혁천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헉.’
가묵풍과 시선이 마주쳤다.
스르르륵-
그의 눈빛에서 죽음의 기운이 밀려왔다.
‘아…… 아…… 조졌다.’
이제는 물러나고 싶어도 가묵풍의 시선에 살기가 가득하니 불가능하다.
‘죽기 살기로 싸우는 방법밖에.’
파아아앗!
하지만, 상혁천이 원하지 않아도 이미 팽유도의 묵흑반도는 눈앞에까지 다가왔다.
휘익!
상혁천은 검을 머리 위로 다급하게 들어 올렸다.
까아아앙!
한 번의 부딪힘으로 끝나는지 않았다.
까아앙!
까아아앙!
팽유도는 내력이 실린 묵흑반도를 강하게 쥐며 연이어 두 번을 검을 부수듯 내리쳤다.
팽유도의 힘이 막아선 검을 통해 온몸으로 전해졌다.
“욱…… 욱…….”
상혁천의 두툼한 입술 밖으로 신음이 굵고 짧게 나왔다.
한 번 더 공격을 받는다면 검보다 몸이 먼저 쓰러질 것 같았다.
다행히 묵흑반도를 내리치던 팽유도가 뒤로 물러났다.
‘휴우…….’
상혁천은 검을 아래로 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고 했다.
하지만,
슈가아아아앙-!
물러났다고 여겼던 상대는 곧바로 새로운 공격을 준비했다.
강력하게 뻗어 나온 도강이 상혁천의 눈앞으로 날아왔다.
번쩍!
그는 도강을 막고자 검을 올려 막아섰다.
하지만…….
채애애앵!
검이 두 조각으로 잘리면서 바닥에 먼저 떨어졌다.
도강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스걱.
예리하게 그어진 소리.
상혁천의 몸 한가운데로 혈선이 길게 생기면서, 붉은 피가 머리끝에서부터 흘러내렸다.
파아아아앗!
그리고 혈선에서 순식간에 사방으로 피가 분수처럼 퍼져 나갔다.
털썩.
상혁천이 바닥에 쓰러졌다.
“와아아아아!”
“도제, 만세!”
“개방 만세!”
개방의 진영에서 퍼진 함성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멍청한 놈…….’
빠드득.
가묵풍은 이빨을 갈았다.
멸천군의 진영은 개방과 달리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사기를 위해서 기세 좋게 나섰지만 반대로 한 번에 사기를 떨어뜨려 버렸다.
둥둥둥둥둥-
북소리가 울렸다.
개방 진영에서 타령이 북소리와 함께 장단을 맞추기 시작했다.
“어어어어어절씨구구구구구…… 저어어어어어얼씨구.”
“신나게에에에에에…… 놀아보자꾸우우우우나!!”
이만의 개방도들이 소리치는 타령은 직접 듣지 않고서는 누구도 그 기세를 알 수 없었다.
사방에서 울리는 소리에 창천멸천군 오천 명이 인상을 쓰며 귀를 막을 정도였다.
두두두두두두두두-
개방도들은 일제히 타령을 부르면서 창천멸천군을 향해 내달렸다.
그들 중 선두에서 팽유도가 사자후를 터뜨렸다.
“천하제일대개방은 무적이다!”
“와아아아아아!!”
개방도들은 상대가 누구인지 신경 쓰지 않았다.
일황사제.
그들만 믿으면 될 뿐이었다.
그들과 함께라면 두려울 게 없었다.
개방의 앞을 막아서면 타구봉으로 개 패듯이 내리치고 가면 되었다.
일황사제를 따르면 그만이었다.
개방도를 보면서 가묵풍은 어이가 없었다.
‘이런…… 무식한 거지 새끼들…….’
창천멸천군이라 하면 겁을 내야 하는 게 맞다.
철저히 무시를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개방도들은 오로지 괴성을 지르고 타구봉을 내리치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방법이 먹히고 있었다.
중원 무림을 대한 자만심을 가졌던 창천멸천군의 무인들은 생각이 없어 보이는 개방도를 상대하면서 당황했다.
‘완전히…… 거지 놈들에게 밀렸어.’
개방도들의 무식한 움직임에 가묵풍은 질려가고 있었다.
창천멸천군의 사기는 떨어진 상태였다.
물러나서 다시 정렬한 뒤 싸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휘익!
가묵풍의 앞에 한 명의 인영이 내려섰다.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화문자를 놓친 그때, 잠깐 마주쳤던 인물.
검제 이휘연.
태극흑검에 붉은빛이 나돌았다.
가묵풍은 살기를 내뱉었다.
“생각보다 빨리 보게 되는군. 언젠가는 다시 만나고 싶었다.”
“…….”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지? 화문자를 데리고 내 앞에서 도망을 갔을 텐데.”
“……그때 그자군.”
당무독에 의해 팔이 잘린 그는 대혼술법을 써서 새로운 몸으로 바뀌어 있었다.
“대단한 술법이군.”
“원한다면 가르쳐 줄 수 있다.”
“사양하겠소. 굳이 긴 세월을 살고 싶지 않으니.”
“지금은 젊기에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지. 하나 나중에 늙어서 후회하게 될 것이다.”
“글쎄. 그래도 하늘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다.”
이휘연의 신형에서 나오는 무형기.
가묵풍은 저도 모르게 진심이 나왔다.
“검제, 강하군.”
“당연히.”
이휘연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가묵풍은 담담히 스스로 강하다고 인정을 하는 태도에 실소가 나왔다.
자만심이 하늘을 찌를 듯 보였다.
“너무 자신하는 게 아닌가?”
“누가 그러더군. 허세가 아니라면 일단 기세로 강하게 보이는 것도 좋다고.”
“…….”
그 누구란 남하림을 가리켰다.
스으으윽-
이휘연이 검을 가볍게 휘두르자 붉은 태극문양이 빛을 내면서 선명해졌다.
가묵풍 또한 긴장이 되었다.
사홍태극(死紅太極).
어느 순간부터 검제의 무공은 죽음의 붉은 태극이라 불리고 있었다.
핏!
이휘연은 태극흑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단번에 뻗어나간 사홍태극이 가묵풍을 덮쳤다.
파아아앙!
가묵풍은 손을 뻗어 도를 잡은 뒤 도막을 만들었다.
쿠우우웅-!
강한 소리가 나오면서 상대를 밀어냈다.
스르르르-
또다시 태극흑검이 움직였다.
‘만검일검(萬劍一劍) 일검일심(一劍一心) 일심일백(一心一白) 일심일만(一心一萬).’
태극혜검의 구결을 외우자 이번에는 사홍태극이 연이어 피어올랐다.
태극흑검이 만들어낸 바람.
산들바람 같았다.
사홍태극의 검풍은 소리 없이 가묵풍을 향해 다가섰다.
‘욱.’
가묵풍은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을 느꼈다.
가볍게 보이는 바람이 순간 거대한 태풍으로 변하며 그를 향해 쇄도했다.
휘이익!
이휘연이 검풍 뒤로 날아올랐다.
연화락의 풍화류.
바람을 타고 흐르는 보법에 태극혜검의 만화가심(萬化加心)을 펼쳤다.
스으으윽-
태극흑검이 가묵풍의 전신을 감으며 지나쳤다.
‘으으윽.’
가묵풍은 이를 악물었다.
최대한 호신강기를 일으키며 사홍태극을 잘라내었다.
파아아앗!
채애애애앵-
붉은 태극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는 이휘연의 공격을 힘들게 막아내면서 뒤로 물러났다.
방어하며 내력의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정말 믿기지 않는군.’
걸황도 괴물이라 하건만, 검제 이휘연도 마찬가지였다.
저번에 짧게 부딪혔지만 이 정도의 실력을 가졌을 줄은 몰랐다.
덜덜덜덜-
가묵풍은 전신이 떨렸다.
그가 자신감이 넘칠 이유가 충분했다.
‘할 수 없군. 이놈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가묵풍은 최후의 방법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대혼술법.
상대의 몸에 들어가려면 최소한 하루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상대의 동작을 순간적으로 짧은 시간 동안 멈추게 할 수 있었다.
기회를 본 뒤 이휘연과 마주치는 그때, 대혼술법을 펼치며 정신을 잃게 만들어야 했다.
‘무공이 아무리 강한다고 해도 대혼술법에 빠지면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우우우웅-
가묵풍은 심어를 되새기면서 앞으로 내디뎠다.
무방비로 오는 듯한 가묵풍의 모습.
‘뭔가 꾸미고 있군.’
무엇인가 노리고 있는 듯한 모습에, 이휘연은 그를 무심한 시선으로 주시했다.
가묵풍의 눈동자에서 심상치 않음을 알았다.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이휘연은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대혼술법의 일단계인 심혼술.
가묵풍은 이휘연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며 심혼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웅웅웅-
최면술보다 강한 제압으로 이휘연의 움직임을 멈추기 위함이었다.
멈칫.
정말로 그가 원한 것처럼, 어느 순간 이휘연의 움직임이 멈췄다.
씨익.
‘됐다. 걸렸다.’
가묵풍은 심혼술이 성공했다고 믿었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이휘연의 앞으로 다가섰다.
도를 들어 목을 베면 끝이다.
그때였다.
“멍청한 놈…….”
살기가 그의 온몸을 죄여왔다.
“……?!”
이휘연의 입가에 살소가 피어올랐다.
“이런 것으로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나?”
‘어떻게……?’
믿을 수 없었다.
심혼술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심혼술은 상대의 무공과는 상관이 없었다.
“왜…… 안 걸렸지……?”
가묵풍은 도를 든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가 마치 심혼술에 걸린 것처럼.
슈우우우욱-
이휘연의 중심으로 삼 장까지 살기가 솟구치며 퍼졌다.
‘엄청난 살기…… 헛……?! 이놈은 천살성의 기를 받고 태어난 놈이다.’
천살성의 살성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기는 없다.
심혼술도 마찬가지였다.
스걱.
태극흑검이 흔들리는 바람마저 가르며 지나갔다.
가묵풍은 바로 눈앞에서 불던 바람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
‘어…… 어…….’
이번에는 허공이 비스듬히 잘려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점점 바닥과 시선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앞은 하얗게 변해갔다.
쿠우우우웅!
얼굴을 그대로 바닥에 부딪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이상 가묵풍의 움직임은 없었다.
이휘연은 죽은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수백 년간 헛살았군. 무인이라면 무인답게 싸워야 하거늘.”
파아앗!
이휘연은 곧장 창천멸천군 사이로 다시 움직였다.
* * *
멀리서 가묵풍과 이휘연의 비무를 보던 시선들.
“끝이 났군. 설마 개방에게 창천이 밀릴 줄은 몰랐소이다.”
“그러게 말이외다. 개방이 아무리 인원이 많다고 해도 개개인의 무공은 창천이 더 강하지 않았소이까.”
“현 개방은 일반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소이다.”
신명항의 말이 정답이었다.
인원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 이기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개방은 예전의 개방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끝이 났다.
가묵풍이 죽으면서 이미 상황은 종료가 됐다.
사기가 떨어진 창천멸천군은 무작정 살기 위해 물러났다.
도망가는 창천멸천군을 굳이 힘들게 잡을 필요 없었다.
이휘연은 그들을 그대로 보내주었다.
“휴우…… 일은 벌어졌군. 과연 창천주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군.”
사무련을 압박하기 위해 보낸 창천멸천군이 개방에 의해 아무런 소득도 없이 패배하며 물러났다.
걸황에게 창천의 뜻을 보여주려던 계획이 완전히 무산되었다.
“이번 계기로 창천주는 생각을 다르게 해야 할 것이외다.”
“신 가주의 생각이 맞네. 그들은 신무맹을 먼저 치지 않는 이상, 우리들을 공격해 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겠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대야성은 궁금했다.
‘둘이서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슬쩍 다가서면서 신명항에게 물었다.
“저어…… 의미가 없다는 게 무슨 말인지요?”
“걸황을 압박하기 위해 사무련과 은하궁을 아무리 찔러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이지요. 걸황에게 신무맹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세력. 걸황을 포함한 일황사제에게 개방보다 더 중요한 세력은 없습니다. 신무맹은 걸황에게 선택일 뿐이외다. 창천은 처음부터 계산을 잘못했다는 겁니다.”
“음…… 그건 아니지 않소이까? 지금만 봐도, 바로 반응을 하며 검제와 도제를 보내지 않았소이까? 이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까?”
“후후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검제와 도제, 그리고 개방은 신무맹에 속한 세력은 아니라고 보면 될 겁니다.”
대야성은 여전히 고개를 가우뚱거렸다.
개방이라면 신무맹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세력 중 하나였다.
근데 신무맹에 속하지 않다는 말을 한 신명항의 대답은 뭔가 모순적으로 들렸다.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구려.”
“맞소이다. 개방이 신무맹이 아니라는 게 이해가 안 됩니다.”
“간단하게 설명을 하겠소이다. 화산파에 대해서 예를 들어보지요. 만일 내원 수장이 화산파에게 한 가지 명을 내린다면 받아들이겠소이까? 무시하겠소이까?”
“받아들이겠지요. 신무맹 내원 수장의 명이라면…….”
“그렇지요. 웬만한 명이라면 당연히 받아서 수행을 할 겁니다. 근데 개방은 어떨까요?”
“개방은 아니라는 겁니까?”
“후후, 개방에는 처음부터 명을 내릴 생각도 안 할 겁니다.”
“그건…… 왜?”
“처음부터 개방은 걸황 맹주의 친군세력으로 정했기 때문이지요. 개방이 있기에 신무맹에서 맹주는 직속 세력이 없소이다.”
“아하…… 그렇게 된 것이군요.”
대야성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역사상 가장 강한 친군 세력을 가진 맹주가 걸황 남하림이었다.
소림사도, 무당파 출신의 맹주들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림 정파의 맹주라고 해서 본 문파 위에 올라설 수 없었다.
오히려 문파의 아래서 맹주가 명을 수행할 경우가 많았다.
개방은 달랐다.
방주가 있지만 개방도들은 걸황의 말이라면 지옥이라도 달려갈 수 있었다.
“여하튼 이번 일로 우리들은 한결 편해진 것 같소이다.”
“후후후. 창천주가 악수를 두었다고 봐야겠지.”
기성의 머릿속에는 중원을 두고 한 수씩 두는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