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서서히 움직이는 창천
혈사천의 멸문.
조용했던 무림이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무림의 호사가들은 서로 아는 체를 하며,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해서 떠들어댔다.
창천에 대해서도 수많은 이들이 이런저런 말을 옮겨댔지만, 대부분 맞는 것은 하나도 없을 만큼 헛소문이 나돌았다.
이미 무림을 장악했다든지, 창천은 마교의 중원 교두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을 정도.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종전의 절대고수였던 두 사람, 정사의 맹주였던 유극지와 설백진이 사라진 자리에 일황사제가 최고의 무림인으로 올라섰다는 것이었다.
신소소의 입이 삐쭉 튀어나왔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여인 때문.
“아주머님이 여기 왜 있죠?”
“호호호, 누가 아줌마라는 건지 모르겠구나. 언니라고 부르렴.”
“농담도 지나치시네. 내가 모를 줄 알아요? 대혼술법을 펼쳤다면서요. 혹시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내 나이는 늘 방년(芳年)이지.”
“향년(享年)이겠죠?”
“…….”
찌릿!
제령운화가 눈에 힘을 주며 신소소를 째려보았다.
‘이게 꽤 쳐다보네?’
웬만한 무공을 지닌 무인도 그녀의 눈빛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제법이야. 그새 무공이 조금 늘었군.”
“이런, 놀라셨나 보네.”
취구단을 복용한 뒤 남하림과의 꾸준한 수련으로 신소소의 내력은 급격하게 늘어났다.
신무극수 또한 집중적으로 무리(武理)을 깨우치면서, 한 달 만에 절정의 단계에 들어섰다.
“너…… 자꾸 까불다가는 언니에게 맞는 수가 있다?”
싸늘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그때, 두 여인의 싸움을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만들 하지.”
남하림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완전히 앙숙이구만.”
“저 아주머님이 자꾸 언니라고 주장하고 계시거든요.”
“언니라고 해줘. 돈 드는 것도 아니잖아.”
“나이도 되게 많다고 들었는데요?”
“몸이 늙는 것이지 마음은 늙는 게 아니야.”
제령운화는 의외라는 눈빛으로 남하림을 보았다.
설마 그가 자신의 편을 들어줄지 몰랐다.
“호호호, 동생. 부군께서 하신 말씀을 잘 들었어? 육체만 나이를 먹을 뿐이라고 하잖아.”
“……!”
다시 샐쭉해지려던 신소소의 입가에 갑자기 살짝 미소가 비쳤다.
‘얘…… 갑자기 왜 이래?’
제령운화의 갑자기 조용해진 신소소의 분위기가 의아한 듯 살폈다.
‘아, 그런 거군. 호호.’
제령운화가 신소소의 부군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자마자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이었다.
“큼, 알겠어요. 언니는 언니니까. 마음이 넓은 제가 참아야죠.”
신소소는 제령운화를 슬쩍 쳐다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남하림이 제령운화를 보았다.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렇죠. 맹주께선 궁금한 게 있으시면 물어보세요. 전부 알려 드리지요.”
“좋습니다. 창천의 규모는 어떻게 되지요?”
“그건 정확히 알 수 없지요. 오직 창천주만 알고 있으니까. 내가 알고 있는 건 창천십문이 가장 큰 조직이라는 것뿐. 하지만 그동안 한 번도 나서지 않았던 법혼자라는 인물들이 나타난 것을 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들이 더 숨겨져 있을 가능성도 있어요.”
“하긴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곳이니…… 숨겨놓은 세력만 해도 대단하겠지.”
남하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천을 상대로 함부로 도발해서는 안 될 문제였다.
“역시 힘든 곳이군요.”
“창천주는 절대로 사람을 믿지 않아요. 최측근인 창천십문의 수장들에게 조차 금제를 펼쳤어요.”
“그대도?”
“난 다행히 설 천주에 의해 금제를 풀 수 있었지요.”
“그래서 창천주에게 대항했군요.”
“맞아요. 더 이상 그의 뜻대로 하지 않아도 되니 한 번 싸워볼 만하다고 여겼지요. 게다가 우리와 동조한 인물들도 생겼고요.”
“창천에 그대들과 뜻을 같이한 인물들이 있었다는 말이군요.”
“그래요. 설 천주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
제령운화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대는 창천에 있는 인물들과 연락을 할 수 있소이까?”
“어렵겠지만 시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필요할 때 말하지요.”
남하림은 한동안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 뒤 남양루에서 물러났다.
창천의 인물을 무작정 신무맹에 머물게 할 수 없었다.
당분간 제령운화는 남양루에서 지내게 될 것이었다.
* * *
척척척.
가묵풍이 굳은 표정으로 대전을 들어서 창천주 앞에 부복을 했다.
“소신, 가묵풍.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왼팔이 사라졌군.”
가묵풍의 왼팔이 잘려 있었다.
혈사천과 일어났던 일들은 대충 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왼팔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독침에 당했습니다.”
“독침?”
의외였다.
제령운화를 죽이기 직전 그녀를 구한 뒤 달아난 두 명의 인물.
창천주 또한 검제와 독제가 끼어들었다는 사실은 보고를 들어 알고 있었다.
“독제에게 당했나?”
“괜찮습니다. 잠깐 방심을 했습니다.”
“멍청한 놈.”
“송구하옵니다.”
가묵풍은 고개를 바닥에 닿을 정도로 숙였다.
“아쉽군. 아직도 배신을 한 놈들이 본 천에 있을 텐데. 잡을 수 없게 되었어.”
창천주는 설백진과 제령운화에게 동조하는 세력이 있다고 확신했다.
“천주님. 그렇지 않아도 중요한 인물들의 곁에 감시를 붙여놓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죽여도 좋다.”
“천주님의 명을 이행하겠습니다.”
“돌아가서 몸을 바꿔라. 군장이란 놈이 팔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알겠습니다.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가묵풍은 곧바로 대전을 빠져나갔다.
대전에 홀로 남은 창천주는 생각에 잠겼다.
‘그놈들이 그년을 구해 간 이유는 뻔하다.’
창천에 대해 알고 싶은 이유일 것이었다.
“크크큭, 그년을 잡아가도 창천에 대해서는 일부밖에 모르지. 이런 일도 자주 겪다 보니 만성이 되는군.”
그는 살아온 모든 시간들이 지루했다.
공신 해정의 몸으로 들어간 이유는 자금력을 확보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따분한 삶을 즐기기 위해, 즉 무림인이 아닌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림인이 아닌 다른 인물로 사는 것도 그때뿐. 그는 늘 심심했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형들을 가지고 노는 것보다 그냥 부숴 버리는 게 재미있을 것이다.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모습은, 과연 즐길 만하지 않은가.
“목옥창.”
창천주가 밖을 향해 소리쳤다.
드륵.
사신호위대주 목옥창이 들어섰다.
“하명하십시오.”
“신무맹에 본 천주의 명을 전해라. 당장 그년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무당을 칠 것이라고.”
“명을 받들겠습니다.”
“나가는 길에 주문자를 들여보내도록.”
“알겠습니다.”
목옥창은 뒤로 물러나며 밖을 나섰다.
그리고 일각이 지나가기 전.
창천십문의 일인, 창천주문의 수장 주문자가 대전으로 들어섰다.
“창천주님을 뵙습니다.”
“일어나라.”
스윽.
주문자는 천천히 신형을 일으켰다.
하지만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아래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광문자와 화문자의 사건을 들었겠지?”
“그들은 당연히 죽을 짓을 했습니다.”
“그렇지, 당연하다. 그럼 자네는 어떨까.”
“소신의 충심은 한결같습니다.”
“과연. 십문의 인물들 중에서 자네가 충정이 가장 높지.”
“소신을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 오래 살다 보면 대체적으로 그런 놈들이 뒤통수를 제일 많이 치더군.”
“…….”
주문자의 인상이 붉게 변했다.
“소신을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사옵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렇게 흥분하지 않아도 돼. 자네의 충정을 잘 알고 있으니깐. 그런 놈들이 많으니 주위를 잘 살펴보라는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창천주가 그를 부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변천,
이제는 마교를 그냥 놓아둘 수 없었다.
“주문자, 마교를 어떻게 생각하나?”
“그들을 칠 생각이십니까? 당장 달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앞서가지 말고 내 말에 대답을 하라.”
“알겠습니다. 마교는 필히 사라져야 할 무림입니다. 그들을 없애지 않고서는 진정한 무림의 통일이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없애야겠지. 그렇다고 무작정 치고 들어가기에 워낙 힘이 강해.”
“마교가 강하다고 하나 본 천의 힘을 이기지는 못합니다.”
“당연한 말이다. 우리가 전력을 다하면 전멸시킬 수 있지. 다만 쉽게 가자는 뜻이다.”
마교를 칠 창천주의 계획은 안에서부터 무너뜨린 후 단 한 번에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휙!
창천주는 그에게 군장패를 던졌다.
“창천주문이 맡아서 마교를 정리해라. 마교주를 잡을 놈은 따로 있으니 그 외의 마교 놈들만 잡으면 된다.”
마교주 천마를 상대할 인물이 있다는 의미는, 이미 그 안에도 창천의 인물이 숨어 있다는 뜻.
“그놈들에게는 본인이 연락을 하겠다. 창천주문은 마교주를 죽였다고 소식을 들으면 그때 움직이면 된다.”
“천주님의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창천주는 살소가 천천히 올라왔다.
‘변천부터 정리한 뒤, 마지막으로 신무맹과 한바탕 놀아볼까.’
* * *
두두두두두-
신무맹의 정문으로 다가오는 무리들.
그들 무리의 위로 창천이라는 깃발이 펄럭거렸다.
정문 위사는 빠르게 정문 안으로 들어갔다.
내원 수장 진후도인과 마주 앉은 중년 사내.
창천의 사자가 신무맹으로 찾아왔다.
탁자를 가운데에 두고 앉은 두 사람.
“본인은 내원의 수장을 맡은 진후라 하오.”
“창천주님의 전언을 가지고 왔소.”
“말씀해 보시오.”
“신무맹은 잘 들어라. 그대들은 본 천의 인물을 납치했다. 본 천주는 이에 그녀를 요구하는 바, 삼 일의 시간을 줄 테니 본 천주의 사자에게 인도를 했으면 하는 바이다.”
진후도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본 맹을 칠 명분을 찾고 있구나.’
중년 사내의 말이 이어졌다.
“만일 본 천의 그녀를 풀어주지 않을 시, 본 천은 무당을 칠 것이다.”
타아앙!
진후도인은 탁자를 내리쳤다.
“허어……! 지금 본 맹과 무당파를 협박하는 것이오?”
창천의 사자 벽계호는 피식 웃었다.
‘네놈들이 화를 내봤자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다.’
“협박이 아니오. 당연한 요구를 하는 것이외다.”
진후도인은 노기가 치밀었지만 내원의 수장으로서 이를 참았다.
벽계호는 한마디를 내뱉으며 일어났다.
“삼 일 뒤에 다시 오겠소. 그때 본인의 앞에 그녀가 있기를 바라겠소이다.”
“…….”
벽계호는 그대로 문을 나서 사라졌다.
‘이번 일은 맹주와 상의를 해야겠군.’
내원에서 결정을 내릴 일은 아니었다.
진후도인은 맹주전으로 향했다.
일각 뒤.
이미 그가 찾아올 거라 예상한 남하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지요.”
“맹주의 표정을 보아하니 본인이 오는 것을 아신 듯하군요.”
“창천에서 오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본 맹에 온 이유야 한 가지밖에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창천의 인물이었던 제령운화 때문일 터.
“그녀를 내놓으라는 말을 했겠지요.”
“맞소이다. 그가 말하기를, 삼 일 뒤에 그녀를 인계하라고 하더이다.”
“그렇군요.”
“만일 내놓지 않는다면 무당파를 칠 거라 협박하더군요.”
“내원장님께서 무당파 출신인 걸 알고 협박한 모양이군요.”
“맹주,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제가 아는 무당파는 적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지요.”
“맞소이다. 창천에서 굳이 싸움을 원한다면 무당파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외다.”
“내원장님, 저들이 무당파를 건드리는 순간, 창천과 신무맹의 전쟁이 시작될 것입니다.”
“맹주.”
남하림은 단호한 표정이 지었다.
“그들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상대해 줄 것입니다. 제가 꺼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총동원해서.”
“……!”
진후도인은 가슴이 벅찼다.
모든 것을 다해 싸우겠다는 의지의 집념.
맹주 남하림과 함께한다면 두려울 게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맹주의 뜻을 내원에 알리겠소이다.”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