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 설백진 죽다
깊은 밤.
남하림은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혈영성이 무너지고 있다.’
동쪽에서 밝게 빛나던 별의 끝이 흐려지며, 점점 빛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실패했군…… 파군성이 더 밝아지고 있어.”
곧이어 파군성에서 쏟아져 나온 붉은빛이 천체를 가두기 시작했다.
파군성이 곧 창천이었다.
‘피곤하겠네.’
창천주가 대단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한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안휘성 총타에 있는 휘연 형에게 빨리 연락해야겠어.’
깊은 밤이지만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늦은 시간인데 죄송합니다. 급한 일입니다.”
스윽-
허공 속에서 걸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휘성 총타에 연락하세요. 혈사천의 일에 상관하지 말고 곧장 돌아올 것.”
“알겠습니다.”
스으으-
걸비는 나타났을 때처럼 기척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남하림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창천주.
대체 언제부터 살아온 인물인지도 알 수 없다.
수백 년을 이어오며, 수많은 일들을 겪은 경험이 있다.
그를 만난 적은 없지만, 공신 해정으로 대혼술법을 펼친 뒤 남천상국과 인연을 맺은 것만 보아도 그의 치밀한 성격을 알 수 있었다.
‘혈사천의 움직임을 꿰뚫어 보았을 거야. 굳이 사람을 심어놓을 필요가 없었던 거겠지. 부모가 애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채듯이…….’
처음부터 혈사천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흐를 뿐이었다.
스윽.
“천주님.”
만통자가 멀리서 남하림을 지켜보고 있다 천천히 다가섰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입니까?”
“천기가 어지러워서 잠시 나왔다가 천주님께서 계신 것을 봤습니다.”
“나이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고요?”
“……크흠.”
만통자가 눈을 부릅떴다.
“그러다 눈 빠지겠소이다.”
“천주님, 조금이라도 진지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노인장이 너무 진지하게 나오시니 풀어주려고 한 겁니다.”
“굳이 안 풀어주셔도 됩니다.”
“그러다 오래 못 삽니다. 좋은 세상 일찍 갈 생각이십니까?”
“어휴…… 진짜…….”
툭툭.
남하림은 그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걱정 안 해도 될 겁니다. 저기 무림성이 밝게 빛나고 있지 않습니까.”
남하림이 가리킨 별.
그의 말처럼, 무림수호성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무림성이 왜 밝게 빛나는지 알고 있습니까?”
“이유가 있습니까?”
“세상의 이치에 이유가 없는 것은 없지요. 현천의 만통자께서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니.”
“죄송합니다. 제가 미천하여…….”
“모른다고 하니 알려 드려야지요. 무림성이 밝게 빛나는 이유는…….”
“……?”
“내가 있기 때문이지요. 세상에서 제일 뛰어난 인물이니까. 아하하!”
‘에라이…….’
만통자는 몸을 돌렸다.
상대하기 싫어졌다.
늘 끝은 그에게 말려 이상하게 마무리됐다.
“어디 가십니까?”
“밤에 무슨 짓인지 모르겠소이다. 잠이나 잘랍니다.”
“허어, 같이 들어갑시다. 나도 잠이 오네요.”
* * *
혈사천으로 향하는 창천의 무리들.
그들의 선두에서 달리는 제령운화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녀의 뒤로 이천의 창천 무인들이 따랐다.
창천주의 명은 혈사천을 단숨에 밀어붙인 뒤, 광문자의 목을 베는 것.
제령운화는 혈사천과 설백진을 만나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정말 방법이 없는가……? 내가 살기 위해서는 그를 죽여야 한다는 말인가?’
창천주 암살은 헛된 꿈이었다.
창천주는 처음부터 혈사천의 미래를 정해두고 있었다.
처억.
그때, 제령운화의 앞으로 흑의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문자님, 호관만 넘어서면 바로 혈사천입니다.”
이천 무인의 창천멸천군 군장, 가묵풍이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가 군장, 호관을 넘어서면 곧바로 혈사천을 치시오.”
“화문자님의 명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휙!
가묵풍은 돌아서며 전방을 향해 소리쳤다.
“멸천대는 단숨에 호관을 넘어선다!”
둥! 둥! 둥! 둥!
이천 명의 창천멸천군이 북소리에 맞춰 호관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호관의 반대편.
혈사천의 무인들이 정렬했다.
이천의 창천 무인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설백진은 호관을 넘어 점점 가까워지는 살기를 느꼈다.
정찰을 나간 수하에 의하면, 이천의 창천 무림들 선두에 제령운화가 보인다고 했다.
‘실패했군.’
용문자와 세웠던 계획이 틀어졌다.
이제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죽거나, 죽이다가 죽거나.
신무맹에서 도움을 주기로 했던 원군은 오지 않았다.
남하림은 창천주를 죽이는 계획이 실패한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걸황이 이 사실을 어떻게 안 것인지 모르지만, 인정해야겠군.’
스윽.
“모두 준비하라. 우리들은 마지막으로 창천과 신나게 싸우다 갈 것이다.”
“넵, 혈사천주님. 뜻을 따르겠습니다.”
“와아아아아-!”
혈사천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호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작은 언덕.
두 명의 젊은 사내들이 내력을 거둔 채 호관을 조심스럽게 주시했다.
일각 전에 도착한 이휘연과 당무독이었다.
“휘연 형, 제대로 붙는 모양이구나.”
“창천과 혈사천에서 끝을 보기로 결심했군.”
“서로 알았다는 거네요.”
창천주의 암살 계획이 결국 실패했다는 것.
“부장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부장이니까.”
“아…… 풉, 하하, 그렇죠. 부장이니 알았겠죠.”
“후후.”
이휘연과 당무독은 서로 마주 보며 당연한 질문과 당연한 대답을 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털썩.
이휘연과 당무독은 그 자리에 앉았다.
“여기서 구경이나 하자.”
“그러죠.”
싸움 구경은 흥미로웠다.
* * *
창천멸천군은 호관을 넘어선 뒤 혈사천의 진영과 똑바로 마주쳤다.
당분간 대치가 이어질 거란 기대는 처음부터 없었다.
가묵풍은 상대가 누구인지 상관하지 않고, 곧바로 진격 명령을 내렸다.
두 진영의 힘의 세기는 반시진도 지나기 전에 차이가 났다.
창천멸천군의 기세는 단번에 혈사천을 밀어붙였다.
죽을힘을 다해 싸웠지만 혈사천의 무인들은 매 순간 수십 명씩 바닥으로 쓰러졌다.
수하들이 비명을 지르며 목숨을 잃고 있었지만, 설백진은 가만히 움직이지 않았다.
‘크윽…….’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었다.
설백진의 움직임을 막아선 기.
‘네…… 놈이군.’
설백진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무형기는 네 방향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라.”
“크크크, 그대가 원한다면…….”
스스스슥.
설백진을 포위한 네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지? 처음 보는 녀석들인데.’
오랜 세월 동안 창천에서 이런 놈들은 본 적이 없었다.
“창천십문은 우리의 존재를 알지 못하지.”
“크크크크, 우리의 임무는 창천십문 중 배반하는 놈을 때려잡는 것. 법혼자(法魂者)라고 한다.”
법혼자.
이들만 봐도 창천주는 모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철두철미한 성격임을 알면서도, 오랜 세월에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잊고 있었다.
“대혼술법을 익힌 인물이라면 우리 네 명의 제혼술법을 벗어날 수 없지.”
“……!”
대혼술법을 만들어내고 제혼술법까지 창안했다?
‘창천주는 처음부터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군.’
설백진의 얼굴은 이미 포기한 듯 보였다.
‘창천주를 이길 수 없다.’
이런 괴물을 어찌 죽일 것이라 생각했는지.
스스로 한심까지 생각이 들 정도.
‘괴물은 괴물밖에 죽일 수 없을 터.’
이제 중원에 창천주를 죽일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오직 그밖에 없을 것이다.
“광문자, 네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창천주님을 배반하다니. 배신자의 죽음은 당연한 것이만, 네놈에게 동조한 놈이 있을지 모르니 사지를 자른 뒤 목숨을 붙일 것이다.”
“…….”
‘나를 원한다고? 역시…….’
창천주는 용문자의 기억을 읽지 못한 게 확실했다.
살아남은 자를 위해서라면…….
설백진은 결정을 내렸다.
그는 법혼자의 제혼술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사지를 자르고 창천주에게 끌고 가겠다는 그들.
‘네놈들 뜻대로 할 수 없다.’
이것이 설백진이 펼칠 수 있는 마지막 의지였다.
‘……광문자!’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제령운화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스스스스-
설백진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뜨거운 화기가 솟구치며 온몸 전체로 흘러내렸다.
“이놈……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그만두지 못할까?”
법혼자들이 제혼술법을 계속해서 펼쳤지만,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점점 붉어지는 설백진의 내기를 끊어내도 화기는 점점 더 강해져만 갔다.
법혼자가 심상치 않는 느낌을 받고, 뒤로 물러나고자 할 때였다.
콰아아아앙!!
설백진의 몸이 사방으로 터지면서 굉음을 냈다.
강대한 기의 폭발은 법혼자 네 사람 또한 완전히 피할 수 없었다.
퍼어억!
“커어억!”
절대고수의 내력이 폭발했다.
법혼자들은 내상을 입은 채 바닥에 쓰러졌다.
결국 제령운화의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허무.
그는 오랜 세월 동안 함께 지냈던 사내였다.
삶의 동반자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장면을 뜬눈으로 지켜보았다.
연인이 되고 싶다고 했지만, 그는 친구처럼 영원히 함께 지낼 것을 원했다..
동반자로서 불사의 세월을 함께 지내려 했던 그는 이제 없다.
‘……이놈들을 죽이고 나도 따라갈 것이다.’
스윽.
제령운화가 비틀거리며 네 명의 법혼자들 앞에 다가섰다.
차가운 냉기가 그녀의 온몸에서 피어올랐다.
그들은 그녀의 살기를 느꼈다.
“화문자, 지금 무슨 짓을 하려고 하지?”
“네놈들을 죽일 것이다. 그의 원수를 내가 갚아주겠다.”
쏴아아아아-
그녀의 발아래서부터 쏟아져 나온 빙기가 법혼자 네 명을 향해 동시에 뻗어 나갔다.
찌지지직-
그녀 또한 대혼술법을 펼친 인물이었다.
제혼술로 제압하면 되지 않은가!
하지만 제령운화는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알았다.
정상적인 몸의 상태가 아닌 법혼자들은 제령운화의 호신기를 뚫지 못했다.
그 사이에 그들의 몸으로 빙기가 밀려들어갔다.
“아…… 아아악…….”
“멈춰라……! 이년이…… 감히 배반을……!”
파아앗!
그녀는 한 줌도 남김없이 전 내력을 단숨에 뽑아냈다.
더 이상 살아갈 이유도 없었다.
“아아아악!.”
그들의 비명 소리가 울리다가 어느 순간 멈췄다.
심장까지 완전히 얼어붙은 네 명의 법혼자가 몸이 굳어졌다.
털썩.
기운을 단숨에 쏟아낸 제령운화는 바닥에 주저앉듯 쓰러졌다.
이제 그녀에게 두 무리의 승패는 상관이 없었다.
“허어…… 화문자, 창천주님의 말씀이 맞았군.”
“…….”
그녀의 뒤로 멸천군장 가묵풍이 다가섰다.
스윽.
그의 손에 차가운 도가 제령운화의 목에 닿았다.
“창천주님께선 네년은 살려서 데리고 오라는 말이 없었다. 배신자는 죽어야지.”
“죽여라.”
“그러지.”
스윽.
가묵풍은 도를 들었다.
제령운화는 눈을 감았다.
‘그와 같이 죽는다면 괜찮은 거야.’
쉬이이익.
공중으로 치켜 올라갔던 도가 차가운 소리를 내며 그녀의 목을 향해 떨어졌다.
그때였다.
채애애앵!
가묵풍의 도를 쳐낸 것은 태극흑검.
“누구냐?”
두 명의 인물이 나타났다.
“앗, 미안.”
휙!
가묵풍 앞에 둥근 물체가 떨어졌다.
‘벽력탄!’
그는 재빨리 호신강기를 일으키며 뒤로 몸을 뺐다.
퍼어어엉!
연막탄이 터지면서 가묵풍의 앞을 가렸다.
‘이런 죽일 새끼가!’
가목풍은 연막을 뚫고 잡으려 나가려고 했다.
멈칫.
‘이 기운은…….’
핏! 핏! 핏!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연막 속에서 날아오는 날카로운 비침.
팅팅팅!
그는 도를 빠르게 회전시키며 비침을 쳐냈다.
“욱…….”
비침 하나가 팔에 박혔다.
어깨에 단번에 시퍼런 빛이 퍼졌다.
팍.
가묵풍은 재빨리 독침이 박힌 팔을 스스로 잘라냈다.
‘크흑, 당…… 당했어.’
연막이 바람에 날려 사라지자 가려졌던 시야가 나타났다.
‘빠르군.’
멀리 사라진 두 명의 사내.
상당히 젊은 사내들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그들의 복장을 보고 누구인지 알았다.
“검을 사용한 놈은 검제군. 연막탄에 독침을 쏜 놈은 독제이고.”
제령운화를 죽이지는 못했지만 광문자 설백진을 죽였다.
그의 왼팔에서 피가 떨어졌다.
“아쉽군. 이놈의 몸을 구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스윽.
주위를 살폈다.
혈사천의 무인들은 거의 대부분 목숨이 끊어졌다.
‘이제 중원은 한 곳만 빼고 모두 정리된 셈이군.’
* * *
휘이익!
제령운화는 가묵평의 도를 막은 뒤 자신의 안고 달리는 사내를 보았다.
‘검제……?’
창천주를 죽이는 데 실패한다면 신무맹은 나서지 않을 것이라 했다.
‘근데…… 나를 왜……?’
순식간에 호관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까지 도착했다.
처억.
이휘연은 신법을 멈췄다.
“내리겠습니다.”
“……고맙군요.”
제령운화는 바닥에 내려섰다.
그녀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나를 구해준 이유가 있나요?”
“혈사천주가 사라진 이상 그대가 창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인물이지 않소이까.”
“그 이유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간단하네요.”
제령운화는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이휘연을 뚫어지게 보았다.
“할 말이 있습니까?”
“난 죽고자 했거늘…… 창천에 대해 알기 위해 나를 살렸으니 그대들이 나를 책임져야 해요. 창천에 돌아갈 수도 없고 혈사천도 망했어요.”
“…….”
“왜 말이 없나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여기에서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 일단 신무맹으로 갑시다.”
휘익.
이휘연이 신법을 펼쳤다.
그 뒤를 당무독이 따라붙었다.
홀로 남은 제령운화.
그녀는 신무맹으로 함께 갈 것이라 말도 하지 않았다.
“재밌는 녀석이군.”
그녀는 떠나기 전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금 죽은 설백진이 생각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를 따라 죽고자 했지만 살아났다.
이것 또한 운명이라면.
살아남을 것이다.
“광문자. 당신의 복수를 할게요. 그자가 죽는 모습을 꼭 내 두 눈으로 확인하지요.”
휘리리릭!
백색 인영이 먼저 사라진 두 사람의 뒤를 따라 신형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