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황무적-260화 (261/328)

260. 배신하다

설백진의 뜻.

혈사천을 공격하는 창천의 무리들을 막아달라는 내용이었다.

“걸황,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가?”

“그 전에 확인할 게 있소이다.”

“무엇인가?”

“창천에서 그대가 신무맹에 온 사실을 모를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당연히 알겠지.”

“알고 있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 내용은 모른다는 것이군요.”

“당연하다. 그것을 창천주가 알면 어떻게 되겠는가? 난리가 나겠지. 당분간 휴전 협정을 맺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의논하기 위해 만날 거라고 이야기했네.”

“휴전이라…… 좋은 생각이긴 하네요.”

“그렇지. 창천주도 시간을 어느 정도 확보를 하면 편할 테니.”

한 가지 문제는 해결된 듯했지만.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불안감은 아니지만, 깊은 늪에 서서히 빠져드는 느낌.

모든 것을 창천주가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지나갔다.

설백진은 창천의 위치에 대해서는 남하림에게 말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남겨둘 생각이었으니까.

창천주의 남긴 유산들을 신무맹에 주고 싶지 않았다.

남하림에게 알릴 때는 최후의 순간일 때였다.

“좋아요. 혈사천의 뜻을 따른다면, 혹시 우리에게도 이익이 있습니까?”

“…….”

설백진은 남하림을 노려보며 한마디 했다.

“욕심이 많군. 창천주를 없애주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다행이라고 누가 그러던가요?”

“…….”

“물론 그렇게 해준다면 좋은 일이지만.”

“……알겠다. 그들을 막아준다면 혈사천은 당분간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

당분간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남하림은 조용히 지내겠다는 말을 받아들였다.

“정확히 기간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창천주를 없앤다고 하니 한 번 정도는 막아주지요. 하지만 계속해서 그들의 공격을 막아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시죠.”

“알겠다.”

어차피 한 번만 그들의 공격을 막아내면 되는 일이었다.

창천주가 사라지면, 구심점을 잃은 창천의 무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혼란을 가져올 것이 틀림없었다.

다만 여기까지 계획대로 이어지려면 한 가지가 확실히 따라와야 했다.

창천주의 죽음.

설백진이 그를 죽이지 못한다면 남하림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밝혔다.

굳이 남의 싸움에 신무맹 무인들의 목숨을 잃게 만들 수 없었다.

더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창천과 공존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창천주를 정말로 죽일 수 있소이까? 실패한다면 우린 가만히 있을 것입니다.”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흐음…… 알겠소이다. 언제 시작할 것인지 연락을 주면 우리도 움직이도록 하지요.”

“이번 일이 잘되면 앞으로 잘 지낼 수 있도록 해보지. 예전에 있었던 일은 이미 지나가지 않았나? 사내대장부라면 마음이 넓어야 하지 않겠는가.”

“설 천주께서 원한다면 그렇게 하죠. 우리야 조용하면 좋으니까.”

“시원시원하게 결정을 내려서 좋군.”

“그럼, 서로 원만하게 마무리가 됐으니 쉬고 계시죠. 신무맹에 돌아가서 내원에 우리의 결정을 설명해야겠습니다.”

“그들에게 허락을 맡아야 하는 것인가? 그대가 정파의 주인이거늘.”

“허락보다는 상황을 알려주는 것이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할 테니까요. 이해하세요.”

“그러지.”

남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는 게 심심하면 두 분은 한 잔들 하고 계시죠. 오랜만에 같은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까?”

“…….”

“불편하신가 봅니다?”

설백진과 기성은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불편하기도 하며 껄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가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불편한 감정을 뒤로 밀어냈다.

“아니네. 걸황 말처럼 천주와 예전 이야기를 하면서 술이나 한잔 마셔도 좋겠군.”

“그렇게 하시죠. 술은 얼마든지 있으니 말만 하면 가져다줄 겁니다.”

“고맙네.”

남하림은 남양루에서 나온 뒤 신무맹으로 향했다.

* * *

내원장 진후도인과 역위천과 정화진, 장두철은 설백진이 제시한 내용을 전해 들었다.

창천주를 제거하겠다는 설백진의 뜻.

“맹주, 그가 정말로 창천주를 죽일 수 있다고 보는가?”

“사부님, 그건 저 또한 모르는 일입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창천주는 쉽게 죽일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의심스러운 건 설백진이 죽이고자 하는 인물이 창천주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

장두철은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을 들었다.

대혼술법을 펼치는 인물.

공신 해정이 창천주라 했지만 그 사이에 어떤 인물과 혼이 바뀌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번에는 내원장 진후도인이 물었다.

“맹주, 설백진의 뜻을 받아들인다면 신무맹은 어떻게 하면 좋겠소이까?”

“우린 두 가지 계획을 세워야지요. 첫째는 창천주가 죽이는 계획이 성공했을 경우. 둘째는 실패했을 경우.”

“알겠소이다. 내원에 알려서 좋은 의견들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소이다.”

“아닙니다. 내원장님. 이번 일은 우리끼리 비밀로 해야 할 듯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창천주의 암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만일 여러 사람들에게 알린다면 그들의 계획이 창천에 알려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조용히 듣고 있던 검후 정화진이 말했다.

“그 말이 맞네. 우린 맹주의 뜻을 따를 뿐이네.”

“본인도 마찬가지요.”

척.

남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포권을 했다.

“좋은 계획이 있으면 곧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번에도 맹주께서 고생을 하시는구려.”

“아닙니다. 제가 할 일이 아닙니까. 그리고 남양루에 가시지요. 손님 대접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 *

설백진이 떠난 지 하루가 지났다.

그와 동시에 기성도 신무맹을 떠났다.

그는 떠나면서 조만간 연락이 올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스르륵.

맹주전으로 들어서는 여인.

백리희의 시선이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그리고 다섯 명의 사내들 사이에서 돌아 앉은 남하림을 찾았다.

팽유도가 다가오는 그녀를 먼저 발견했다.

“하림 형.”

반대편에 앉아 있던 남하림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백리 가주,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

“안 되겠나요?”

“그건 아닙니다.”

남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쉬고 있어.”

“알겠어요.”

남하림은 백리희와 함께 맹주전의 정원을 나란히 걸었다.

“내일…… 신무맹을 떠나요.”

“백리세가에 돌아간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백리세가를 재건하기 위해.

이제 검문을 완전히 나오기로 한 것이다.

“감사해요. 돌아가는 길에 인사차 들린 것이에요.”

“그렇군요. 백리 가주께서는 충분히 잘하실 수 있을 겁니다. 백리세가는 예전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

그녀는 남하림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신무맹에 온 뒤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계속해서 망설였다.

모든 것에 자신이 있던 그녀는 오직 이것 하나만큼은 자신이 없었다.

내일이면 신무맹을 떠난다.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마지막 날 그녀는 용기를 냈다.

결과가 같다면 속에 담지 말고 말을 하는 게 나을 것이었다.

“왜…… 저는 안 되는 것인가요?”

“…….”

이번에는 남하림이 말이 없었다.

그녀가 묻는 의도를 잘 알았다.

오래전부터 느껴왔던 마음.

하지만 남하림은 거부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제가 다른 남자를 좋아했던 것이 문제가 되나요?”

남하림을 대하면서 항상 마음속에 걸렸던 문제였다.

“그건 아닙니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습니다.”

“제가 여인으로서 매력이 없는 모양인가 보네요. 소소보다 더…….”

청영은 이해가 됐지만 소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닙니다. 백리 가주는 충분히 매력이 있습니다. 소저가 원하는 사내에게 충분히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전…… 제가 사랑을 받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어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유 소저도 소소도 항상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요. 하지만 백리 가주는 늘 스스로 자책을 하더군요. 이제는 한 가문의 가주로서 본인을 사랑해보세요.”

“…….”

내가 못했기에.

내가 잘했다면…….

나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라고…….’

백리희는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러고 보니 사부인 정화진도 가끔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렇군. 난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 단 한 번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내가 그녀들처럼 나를 사랑한다면…….”

“소저, 우리에게는 시간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

그가 가주가 아닌 소저라 불렀다.

그리고 시간이 많다는 말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알겠어요. 돌아가서 저를 사랑하는 방법을 찾도록 해보겠어요.”

“너무 조급하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고마워요.”

그녀는 돌아섰다.

맹주전을 찾아왔을 때와 다르게 표정이 밝아졌다.

* * *

콰아아앙!

우루루루-

동굴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수십 명의 인물들이 동굴 밖에서 숨을 죽이며 동굴 안에서 나올 인물을 기다렸다.

무너진 동굴을 잠시 동안 먼지가 앞을 가렸다.

스윽.

그리고 안에서 나오는 기척이 들렸다.

오 척의 작은 키.

볼품없는 노인의 모습이었지만 눈빛만은 태양보다 뜨거웠다.

척.

수십 명이 그 자리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부복을 했다.

“창천주님을 뵙습니다.”

“…….”

공신 해정.

창천의 전인인 그가 제자리에 선 채 전방을 주시했다.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파일 정도로 인상을 쓴 채로.

“광문자는 보이지 않는군.”

창천주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차가웠다.

살기라고 하기엔 애매했지만 싸늘한 기운이 주위를 단숨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광문자께서는 혈사천을 비울 수 없어…….”

“화문자, 누가 그를 옹호해도 좋다고 했느냐?”

제령운화가 재빨리 사죄를 했다.

“소신, 죽을죄를 졌사옵니다.”

파앗.

창천주는 손을 가볍게 흔들자 그녀의 어깨에 강기가 쏟아졌다.

‘아악!’

털썩.

그녀는 어깨가 무너지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혈사천이 중요한가, 아니면 본 천주가 더 중요한가?”

“천주님이십니다.”

“쯔쯔.”

창천주는 부복한 인물들 사이를 지나쳤다.

“본 천주가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이리도 기강이 무너지다니.”

“…….”

제령운화는 뒤로 움직이는 창천주의 기를 느끼면서 이를 악물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갔을 때보다 무공이 더 강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고 해도 대혼술법을 펼칠 때는 잡을 수 있어.’

휙.

창천주의 몸이 돌아섰다.

그리고 천천히 제령운화의 앞에 섰다.

“화문자, 그에게 연락을 해라. 당장 오지 않는다면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고.”

“천주님의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창천주는 다시 몸을 돌렸다.

“무하.”

벌떡.

중년 사내가 빠르게 일어섰다.

“준비는 해놓았겠지?”

“최선을 다해서 천주님을 모실 준비를 마쳤습니다.”

“좋군. 모든 일을 자네처럼 하면 얼마나 좋을지.”

“감사합니다.”

“가자. 오랜만에 몸을 풀어봐야겠어.”

“소신이 모시겠습니다.”

무하는 얼른 앞으로 나섰다.

“잠깐, 제자는 일어나라.”

스윽.

용문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부복한 상태에서 곧바로 일어났다.

그의 무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창천주의 시선은 이미 일어나는 순간부터 그의 온몸을 살피고 있었다.

공신 해정의 몸은 어쩔 수 없이 볼품이 없었지만 대혼술법을 펼쳤어야 했다.

“수련을 많이 했어. 나쁘지는 않군.”

“감사합니다.”

“아니지. 오히려 내가 감사할 따름이다.”

용문자의 육체는 바로 그의 육체가 될 것이었다.

“네 녀석도 따라오너라.”

“알겠습니다, 사부님.”

용문자가 일어나며 그의 뒤를 따랐다.

창천주와 용문자의 기가 사라졌다.

“휴우…….”

제령운화는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았다.

* * *

“……흠.”

혈사천주 설백진은 손에 땀이 났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오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망할…….’

그가 드디어 출관을 했다.

조만간 그는 대혼술법을 펼칠 게 틀림없었다.

두 명의 후보 중 한 명인 걸황 남하림은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구천마제의 대혼술법에 대항했던 유극지의 항혼정법을 남하림이 익혔다고 소문을 냈다.

게다가 그에게 혼령안이 있는 것까지 알려졌다.

창천주의 입장에서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었다.

만일 대혼술법을 펼치다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모든 게 끝이었다.

창천주도 그 소문을 들었다면 대혼술법을 펼칠 상대는 용문자밖에 없었다.

‘창천주, 당신이 아무리 강한들 살아나지 못할 것이오.’

무조건 성공해야 했다.

남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 * *

맹주전으로 전령이 다가왔다.

발신인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혈사천의 설백진이 보낸 전서임을 알았다.

남하림은 전서를 읽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NAME?

한 줄의 비문.

“하림 형, 무슨 뜻입니까?”

“창천주가 움직인다는 말이야. 이틀 뒤에.”

팽유도는 전서를 받아 뒤를 살폈다.

아무리 봐도 이틀 뒤에 움직인다는 글은 적혀 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일(日)에서 일(一)을 떨어뜨리면 무슨 글자가 되지?”

“아…… 하…….”

해가 떨어진다는 말을 이해했다.

달.

하지만 날짜와는 무슨 연관이 있는지 여전히 몰랐다.

“둥근 달이면 무엇일까?”

“보름달?”

“맞아. 보름달을 가리키는 것이지. 유도야, 이틀 뒤에 보름이잖아.”

당무독이 대신 설명했다.

“그냥 쉽게 이야기하면 될걸. 머리 나쁜 사람은 알아보지도 못하겠네.”

“부장, 우리도 준비를 해야겠지?”

“그렇게 하자. 준비는 해야겠지만 조심해서 움직여야 할 거야. 지금 신무맹이 움직이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야. 본 방의 총타와 함께 휘연 형하고 무독이 맡아주면 좋겠어.”

“알겠다.”

“창천에서 나온다면 상대가 어려울 수도 있으니 무독은 지금껏 만들어놓은 것들을 준비해도 좋아.”

“그으래? 이번에 실컷 뿌리고 와야겠다.”

당무독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독 형은 독만 뿌릴 수 있다면 어딜 가도 좋지?”

“아하하하, 에이, 내가 무슨 독에 미친 사람이냐?”

‘어…… 그런 것 같아.’

당무독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네 사람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당무독만 인정하지 않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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