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 감찰당주
설백진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 즉시 혈사천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혈사천의 목표는 신려세가.
혈사천에 의해 천사회가 만들어졌던 것처럼, 이번에는 신명항에 의해 사파 연합이 조직되는 중이었다.
‘네까짓 놈이.’
설백진은 비웃음을 지었다.
신려세가의 신명항은 사파 연합을 이끌 수 있을 만한 재목은 아니었다.
“웃기는군. 겨우 신려세가 따위가 사파 연합을 만든다?”
신려세가에 의해 사파연합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과연 오래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연합의 중심이 되는 세력은 연합 세력들보다 강해야 하는 법.
신려세가는 강한 세가가 아니다.
설백진은 사파 연합은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 확신했다.
물론 그 전에, 신려세가가 먼저 사라지겠지.
‘신명항, 이번에는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설백진은 자신했다.
‘귀찮은 놈들.’
이번 기회에 사파도 궤멸시킬 것이다.
그가 이토록 자신만만한 이유.
창천십문의 한 곳.
창천광문(蒼天狂門)이 설백진의 명으로 혈사천에 도착했다.
창천에서 수하들을 불러 모았다.
혈사천의 힘밖에 없었다면 아무리 설백진이라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을 터.
설백진의 육체로 들어온 그의 진정한 정체는 창천십문의 일인으로, 창천광문자 후자벽.
후자벽이 천사회를 해체한 이유는 아쉬울 게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의 머릿속엔 창천광문이 있었으니까.
설백진이 뒤에 따르는 중년 사내를 불렀다.
“광문일군.”
중년 사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고개를 숙였다.
“혈사천에서 신려세가를 칠 것이다.”
“광문자님, 이들만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썩어도 준치. 혈사천의 힘이 줄어들었다고 한들, 신려세가 정도는 얼마든지 정리할 수 있겠지.”
“사파에서 놈들에게 원군을 보내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급습한다면 사파 놈들이 쉽게 오지는 못할 것이다. 제 목숨을 아끼는 놈들이라 강한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겁이 나서 움직이지 못하겠지. 만약 그들이 움직인다면 그때는 광문에서 처리하도록.”
“광문자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한 시진 뒤.
두두두두두두두두-
혈사천의 정문이 열리며, 수백 명의 혈사천 무인들이 밖으로 달려 나왔다.
그와 동시에 전서구들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이미 그들이 움직일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 * *
‘예상대로 설백진이 움직이는군.’
기성이 손에 들린 전서를 툭 내려놓았다.
혈사천의 목적지는 신려세가.
설백진이 그가 가짜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린 신명항을 살려두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더구나 이제 사파 연합의 수장격인 신명항은 설백진에게 제거해야 할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분명 창천을 등에 업었을 설백진은 자신에 차 있을 터.
하지만,
혈사천이 움직인 이상, 모든 것은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걸황이 차려준 밥상.
잘 먹으면 된다.
‘후후후, 신려세가에 오는 순간 혈사천은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이미 주천의 무인들이 신려세가에 숨어 있었다.
기성과 걸황은 설백진이 가장 먼저 신려세가를 칠 것이라 예상했다.
다만 그가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움직이도록 만들어 행보를 유도하기로 한 것.
타악!
기성은 백색의 바둑돌을 바둑판 위에 내려놓았다.
흑돌의 대마는 완벽하게 갇힌 채 살아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설백진, 당신들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시작했다. 어쩌면 조금 더 기다렸어야 했을지도 모르지. 영원한 시간을 가지고 있으니 몇십 년은 의미가 없었을 텐데…… 그 괴물이 중원에서 사라질 때까지 말이야. 후후.”
걸황 남하림.
그들 또한 걸황이 창천을 위협할 정도로 강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터
창천은 걸황 남하림이 무림에서 영원히 사라진 뒤, 세상 밖으로 나왔어야 했다.
‘이젠 늦었어. 창천의 존재는 모두에게 알려질 것이다.’
스윽.
기성은 바둑판을 물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는 다시 전서가 들려 있었다.
천천히 경내를 지나, 한 건물 앞에 도착한 기성이 목소리를 냈다.
“가주, 안에 있소이까?”
“들어오시지요.”
드륵-
“오셨소이까?”
신명항이 일어나 그를 반겼다.
“혈사천이 움직였다는 연락이 왔소이다.”
“그자가 드디어 움직였군요. 걸황의 말이 맞았소이다.”
“그는 자신이 왜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외다.”
“이번 기회에 그자를 잡아야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완벽하게 잡을 수 있는 기회라 할 수 있소.”
기성은 기대했다.
신려세가를 치기 위해, 곧 설백진이 직접 혈사천을 이끌고 들어올 것이다.
하지만.
기성의 뜻과는 달리, 아쉽게도 설백진은 함부로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었다.
기성과 신명항은 혈사천이 다가올 때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
* * *
내원 수장 진후 도인은 남하림의 제안을 단번에 찬성했다.
그 또한 남하림과 함께 신무맹을 세우기 위해 초창기부터 공을 들였던 인물.
한데, 처음에는 눈치만 보던 문파나 세가들이 신무맹이 점점 커지자 슬쩍 발을 집어넣고 들어왔다.
그들은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신무맹에서도 대문파에 해당하는 권리들을 요구했다.
진후 도인은 초반부터 시끄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보고만 있었다.
서로 아는 안면에 모질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런 마당에 감찰당을 만들겠다는 맹주의 의견이 나왔다.
진후 도인은 반색하며 받아들였다.
상내원의 다섯 문파인 무당, 소림, 개방, 검문, 용병림은 곧바로 감찰당을 인정했다.
신무맹의 규율을 어기는 자에 대해 즉시 파면권을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한 것.
감찰당주는 맹주의 추천으로, 상내원 다섯 문파의 만장일치를 받아야 했다.
감찰당주의 기한은 맹주와 임기와 같았다.
그리하여, 맹주와 상내원의 결정으로 감찰당주는 맹주 남하림의 호위 출신인 준극남이 임명됐다.
* * *
휘이이이이이익-
채애애앵!
준극남이 무극신창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번쩍!
무극신창의 끝에서 폭발하는 거대한 빛.
광폭풍이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
‘으으으으윽.’
공동파 금적자는 입가가 떨려왔다.
준극남이 펼치는 무공에 대해 모르는 인물이 있을까.
감찰당주가 임명된 후.
신무맹의 일부 무인들은 감찰당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준극남에 대해서는 불신했다.
무공이 약할 것이라는 이유 하나로 말이다.
“무극창신공이다…….”
“저…… 자가…… 어떻게?”
그들의 시선은 곧바로 남하림에게 향했다.
분명 그가 사대절대무공을 모두 불태웠다고 했는데.
‘설마…… 그것들을 지금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인가?’
슈우우욱-
무극신창의 창강이 점점 커지면서 금적자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의 다리는 이미 풀려 있었다.
파아아앙!
무극신창이 금적자의 코앞에서 멈췄다.
창강이 연기처럼 사라지며 허공 속에서 파동을 만들어냈다.
퍼어어억!
가슴에 충격을 받은 금적자가 뒤로 날아갔다.
털썩!
완전히 정신을 잃은 그는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준극남의 무위에 신무맹의 무인들은 입이 다물지 못했다.
예전에는 겨우 이름을 날린 삼류 무사로 취급했던 그가 절대무인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
남하림이 관람석에서 일어났다.
“어떻소이까? 이 정도면 감찰당주로서 무위는 충분하지 않소이까?”
“…….”
어느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준극남은 앞으로 나서라.”
“넵, 맹주님.”
휘익!
준극남이 연무장에서 남하림 앞으로 내려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남하림은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옆에 있던 양삼이 내민 검을 받았다.
“신무맹의 모든 무인들은 들으시오. 이 검은 본 맹주가 감찰당주에게 하사하는 정의수호검이외다.”
채애애앵!
남하림이 검신을 뽑았다.
맑은 소리와 함께, 투명할 만큼 빛이 나는 검신이 드러났다.
“감찰당주는 정의수호검을 받은 뒤 본 맹에 위배되는 행동이나 말, 규율에 대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어기는 자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도 좋다. 할 수 있겠는가?”
“소신, 맹주님의 명을 하나라도 어김없이 따르겠습니다.”
“좋다. 정의수호검은 앞으로 감찰당주의 신물이 될 테니, 어느 누구라도 정의수호검을 따르지 못하겠다면 목을 베도 상관없다.”
스윽.
준극남은 두 손으로 정의수호검을 공손하게 받았다.
“소신, 맹과 맹주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준극남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남하림은 신무맹의 무인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내력을 올렸다.
“신무맹의 무인들은 모두 들으시오. 오늘 이후로 감찰당주의 명을 무조건 이행하야 할 것이오. 만일 이 시간 이후 이에 대해서 거부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신무맹을 나가주었으면 하외다. 본인은 신무맹의 규율을 따르지 않는 문파는 필요 없소이다.”
“…….”
신무맹 소속의 몇몇 무림인들은 고민했다.
맹주 남하림의 통보.
감찰당를 따르지 않겠다면 신무맹을 떠나라는 말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남하림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현 무림은 혼자서 살아 나갈 수 없는 곳이니까.
신무맹의 감찰당.
막강한 힘을 지닌 조직이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일부 무림인들은 일황사제가 신무맹을 세웠다고 해도, 무림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며 내원이 있는 이상 힘이 없는 맹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남하림이 내원에 모든 권한을 준 이유.
그것은 그가 힘을 가지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무맹은 걸황 남하림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들은 감찰당주 준극남과 맹주 남하림을 말없이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 * *
당무독이 맹주전으로 들어섰다.
“무독 오빠!”
정원에 들어서자 신소소가 반갑게 맞이했다.
“어, 왔어?”
남하림은 예설란과 유미령, 신소소와 함께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당무독이 예설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스윽.
예설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독제께서 일이 있는 모양이군요.”
“예설란 님, 부장과 같이 계셔도 괜찮습니다.”
“그런가요?”
당무독의 말에 예설란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무독, 무슨 일이야?”
“혈사천이 움직였어. 우리 생각대로 먼저 신려세가에 가는 중이야. 구방 상단을 건드렸더니 바로 반응을 보이는군.”
“난 반응이 빠른 사람이 좋더라.”
“흐.”
남하림의 말에 당무독이 음흉하게 웃었다.
‘아…… 혈사천이 본 가로 가고 있다고?’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신소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 말은 신려세가가 위험에 처했다는 뜻이었다.
“저…… 오빠…… 괜찮을까요?”
“신려세가 말이야?”
“네에…….”
본 가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남하림은 바로 안심시켜 주었다.
“흐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신려세가에는 주천이 함께하고 있으니까. 그들이 함께한다면 충분히 혈사천을 상대로 이겨낼 수 있어.”
신소소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완전하게 마음이 편해진 것은 아니었다.
“저도 본 가가 이길 거라 생각하지만…… 하림 오빠가 가서 도와주면 안 되나요?”
“…….”
‘하긴 걱정이 되긴 하겠지.’
신려세가에서 막을 수 있다고 하지만 신소소의 입장에서는 확실한 게 좋았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간절함이 보였다.
‘당분간 창천에서 다른 움직임은 없을 것 같고…… 신려세가에 빨리 다녀오면 되겠어.’
혹시나 모를 변수가 생겨 위험한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다만 굳이 원군까지는 필요 없을 듯싶었다.
신려세가와 주천의 무인이라면 충분했다.
그렇다면 자신과 서너 명만 같이 움직이면 될 터.
“좋아. 소소가 걱정을 하니 내가 직접 다녀오도록 하지.”
“와아……! 정말 고마워요.”
신소소가 환하게 웃었다.
남하림이 찾아가는 것만 해도 큰 힘이 될 게 확실했다.
“부장이 신려세가에 간다면 인원은 어떻게?”
“음, 철각하고 유도와 같이 다녀올게. 무독은 휘연 형과 함께 있어.”
“그렇게 하지. 아 참. 만통자께서도 함께 동행하지 않을까?”
“노인장이 안 보이니 잊고 있었네. 뭐야. 일 년 삼백육십오 일 내 옆에서 지키고 있겠다더니 하루 종일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군.”
“아핫, 만통자께선 마노와 지내는 게 재미있는가 봐.”
“잘 지낸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둘 다 성격이 이상해서 큰 싸움이라도 날 줄 알았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두 분이서 죽이 꽤 잘 맞아.”
“신기해. 엇, 잠깐…….”
남하림은 당무독의 말을 듣다가 고개를 정문으로 향했다.
어디선가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무독. 맞지?”
“응. 맞는 것 같아.”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
남하림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맹주전 전제가 들썩거렸다.
“제자야……! 하림아……! 사부가 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개방의 항걸 장두철.
그가 맹주전으로 들어서면서 터뜨린 대소가 사방을 크게 울렸다.
“크하하하하핫! 제자야!!”
장두철이 확실했다.
덥석!
그는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뒤 두 팔을 번쩍 벌리며 남하림을 안았다.
“걸황이구나! 항걸 장두철의 제자가 맹주이자 걸황이구나!!”
그의 함박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크윽, 사부님. 전혀 변한 게 없으십니다.”
“크하하하핫! 당연하지 않느냐? 네가 준 보신용 약들을 하루에 세 번씩 복용하니 몸이 안 좋아질 수 있겠느냐?”
탕탕탕!
그는 남하림의 등을 치듯이 두드렸다.
“제자야, 고생을 많이 했구나. 몸이 너무 가벼워진 게 아니냐?”
“아이고, 괜찮습니다. 이 정도면 적당하게 좋은 편이죠.”
장두철은 남하림을 덥석 안았던 팔을 풀었다.
“녀석…… 여하튼 잘 지내고 있으니 다행이다.”
당무독은 과격하게 인사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장두철과 시선이 마주치자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일장로님을 뵙습니다.”
“하하하하! 독제! 잘 지냈느냐? 나머지 녀석들은?”
“그럼요. 일장로님. 저희들 모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 암!”
장두철은 옆으로 중년 여인과 젊은 여인 두 명을 보았다.
“크하하하! 검후가 아니오. 맹주와 함께 신무맹에 함께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소이다.”
“후후, 항걸님, 정말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군요.”
장두철은 가볍게 그녀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 옆으로 두 명의 젊은 여인.
한 명은 어렸다.
‘오호, 이 아이들이…… 제자의……! 후후후, 벌써 두 사람과 사귀다니…… 에잉, 녀석. 나보다 낫구만!’
일 갑자의 생을 살았지만 한 명의 여인도 사귀지 못한 인생.
장두철은 제자 남하림이 두 명의 연인과 사귀는 게 제일 부러웠다.
“크하하핫, 너희들이 제자의 배필이겠구나. 내가 이 녀석의 사부이니라!”
맹주전 뜰을 종횡무진 쓸어버리고 있는 장두철을 보며, 남하림은 문득 하나의 그림이 그려졌다.
탈혼마제, 만통자, 그리고 항걸 장두철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