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 제령운화
호북제일루의 밤이 깊어갔다.
천하제일 야경을 자랑한다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일행이 모두 밖으로 나왔다.
잔잔한 호수에 비친 불빛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신소소는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와아, 하림 오빠, 정말 예뻐요.”
“그렇군. 꽤 볼만해.”
사방이 화려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때,
웅성웅성.
주변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샤르르르-
백의여인의 등장.
중원십미에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그런데, 여인이 일행 중 남하림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스윽.
신소소가 용맹하게 앞으로 나서며 남하림 앞을 막아섰다.
“멈춰요. 누구죠?”
피식.
백의여인이 당돌한 그녀를 보며 실소를 지었다.
“호호, 이리 깜찍한 꼬마 숙녀가 있나? 귀엽게.”
“누구보고 꼬마 숙녀라고 하는 거죠?”
신소소는 특유의 직감이 발동했는지, 백의여인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린애가 말이 심하네. 애는 잠시 뒤로 물러났으면 좋겠구나. 예쁜 언니는 저기 뒤에 있는 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누구 맘대로 누구랑 이야기하겠다는 거예요? 꺼져요.”
‘이게…….’
백의여인의 눈매가 순간 꿈틀거렸다.
스윽.
그녀가 살랑 손을 내밀자,
휘리릭!
신소소의 몸에 백의여인의 손이 닿기 직전.
순식간에 뒤로 당겨지며 신소소가 남하림의 품에 안겼다.
“난 당신과 할 말이 없소이다. 그만 들어가서 목이나 축이자.”
“…….”
남하림은 여전히 신소소를 한 손으로 감싸 안은 채 그 자리에서 떠났다.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백의여인의 입가에 살소가 진하게 흘렀다.
‘제법이야. 천주님께서 눈여겨볼 만해.’
여인의 손안에서 독기가 사라지며 연기로 화했다.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을까?’
* * *
탁자에 앉은 남하림의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참.’
안까지 따라 들어온 백의여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남하림은 그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았다.
잠들어 있던 혼령안이 깨어나 반응했으니까.
‘혼령안이 없었다면 몰랐을 테지.’
대혼술법을 펼친 여인.
백의여인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이휘연과 팽유도가 일어나려고 했다.
“무시하면 방까지 찾아올 기세야.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지.”
스윽.
창천주의 명을 받고 찾아온 제령운화.
백의여인이 남하림의 앞에 바짝 다가섰다.
“앉을까요?”
“거절을 해도 앉으실 테고.”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군요.”
“모르오.”
“…….”
순간 멈칫거린 여인은 정말 목청껏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호!”
그녀의 대소에 실린 내력이 예리한 비검으로 변하면서 남하림을 향해 쏟아졌다.
핏핏핏핏-
단번에 남하림의 몸을 찌른 뒤 통과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뚝.
무형비검은 남하림의 눈앞에서 멈췄다.
“장난이 심하시네요.”
“호호, 장난은 당신이 먼저 치지 않았나요?”
“장난과 농담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군요.”
휘익!
남하림은 손을 가볍게 휘둘렸다.
무형비검이 먼지처럼 허공에서 사라졌다.
“오호…… 본녀의 내력을 쉽게 받아내는군요. 무림의 걸황이란 호칭이 아깝지 않네요.”
스윽.
남하림은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면서 손바닥을 폈다.
“오는 게 있으면 분명 가는 것도 있어야겠지요.”
파아앙!
파공음이 터지며 기풍이 제령운화를 향해 쏟아졌다.
슈우우욱-
그녀가 두 팔을 중앙으로 교차시키며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절대무인들의 내력 대결.
기루 전체가 적막감에 잠겼다.
절대무인이 아니고서는 펼칠 수 없는 무공이 한 수씩 펼쳐지고 있었다.
여인의 뒤로 휘날렸던 백색의 천 자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 자식이…….’
“본인은 결코 호의적인 사람이 아니외다.”
“…….”
“무슨 일로 본인 앞에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서로 불편한 상황을 만들지 않았으면 하오.”
남하림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살기가 묻어 있었다.
제령운화는 만면에 인상을 쓴 채 의자에 앉았다.
“참 나, 되게 뻔뻔하시네.”
신소소는 가감 없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휘익!
제령운화가 고개를 돌리며 노려보았다.
“꼬마야. 계속 나불댔다가는 크게 다칠 수 있단다.”
“뭐예요?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요? 할 수 있으면 해보든지. 그 전에 하림 오빠에게 맞지나 말고요.”
신소소는 얄밉게 입술을 삐죽 내면서 슬쩍 남하림에게 붙어 섰다.
“…….”
마치 승자는 자신이라는 것처럼.
남하림은 평소라면 밀어냈겠지만 이번만큼은 가만히 그대로 두었다.
“봤죠?”
“두 사람이 무슨 사이죠?”
남하림은 그녀의 물음에 상관없이 질문을 했다.
“창천에서 왔군요.”
“어떻게 알았나요?”
그녀가 대혼술법을 펼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봤다고 말할 이유는 없었다.
“본인에게 적대감을 보이는 인물은 창천밖에 없소이다.”
단순한 대답.
“맞아요. 창천에서 왔지요.”
“오늘은 싸울 목적이 아닌 것 같고, 무슨 이유로 본인 앞에 앉아 있소이까?”
“걸황이 누구인지가 아니라, 걸황이라는 인물이 과연 창천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 궁금했지요.”
“의문은 풀렸소이까?”
“어느 정도.”
“알았으면 가시오.”
이게 끝인가?
예상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는 남하림을 보면서 제령운화는 살짝 당황했다.
‘특이한 사내군.’
짧은 시간이었지만 남하림은 일반인과는 달랐다.
“궁금하지 않나요?”
“뭐가 궁금해야 하오?”
“내가 가졌던 의문에 대해서.”
“결론이 이미 정해져 있거늘, 궁금해봤자 무엇 하겠소이까?”
남하림의 말이 맞았다.
그녀의 판단을 남하림이 안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질 것은 없었다.
하지만 무시를 당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빴다.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군.’
스르륵-
제령운화의 손이 바람을 타고 흘렀다.
주위가 순간 급속도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찌지지직-
냉기가 뿜어져 나오며 남하림의 주위를 둘러쌌다.
‘이 여자, 생각보다 더 강하군.’
내력을 감추고 있었다.
지금까지 만난 어떠한 인물보다 강했다.
남하림이 상대의 내력을 읽지 못할 정도의 무인은 유극지와 설백진, 역위천 정도였다.
스스슥-
남하림은 양손을 앞으로 올린 뒤 기를 손바닥 사이에 모았다.
우우우웅-
내력이 올라오면서 남하림의 주위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차갑게 변했던 공기는 남하림의 화기에 의해 정상으로 돌아갔다.
‘걸황, 상상 이상이다.’
무공이 강하면 화기를 올릴 수 있다.
하지만 남하림처럼 빠르게 끌어 올릴 수는 없다.
그들은 예상을 넘은 서로의 수준에 감탄했다.
걸황이 창천주의 영혼을 완벽하게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될 수 있는가.
이것만으로도 확인은 끝난 셈이었다.
‘충분해. 이 정도의 힘을 가진 육체라면 천주님이 들어가셔도 문제가 전혀 없어. 다만…….’
휘릭!
그녀의 신형이 뒤로 날아갔다.
“호호호. 당신이 강한 것은 인정하겠어요. 하나, 그렇다고 해서 창천십문을 모두 이길 수 있다고는 보이지 않네요.”
“지금까지 당신과 같은 말을 한 사람들은 많았소이다. 그리고 그들은 중원에서 사라졌지.”
남하림은 미소를 띠었다.
아무리 말로 떠들어도 직접 붙어보지 않는 이상 모른다는 의미의 웃음.
“자신만만하군요. 하긴 충분히 그럴만한 실력이니. 기대하세요. 조만간에 다시 만날 것 같군요. 그때는 저기 어린애는 두고 둘이서만 보는 게 좋겠군요.”
휘리리릭!
여인의 신형이 사라졌다.
“앗! 저게! 둘이서 뭘 만나! 다음에 만나면 가만히 안 둘 거야.”
신소소는 씩씩거렸다.
“하림 형, 창천에서 온 게 확실해?”
“대혼술법을 펼친 인물이더군.”
“또 대혼술법?”
“저 여인도 부장 말대로 대혼술법을 펼친 것이라면, 창천 대부분의 인물들도 마찬가지라는 말이겠군.”
이휘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창천이 강한 이유에 대해 알 듯했다.
강한 육체를 유지한 채, 오랜 세월 동안 무공을 익히며 이어져 내려온 이들이었다.
당무독도 같은 생각을 했다.
“정상적인 집단이 아니야. 그들 개개인의 무공이 구천마제와 대등하다는 거잖아.”
“완전 괴물들이네요. 우리가 그런 놈들과 싸워야 하다니…….”
창천에 대해 차라리 몰랐다면 두려움이 없을 수도 있었다.
하나 예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그들의 정체에 대해 하나씩 알아갈수록, 자연스레 두려운 감정이 드는 것도 사실.
“유도야, 걱정 안 해도 돼. 그놈들이 아무리 괴물들이라 해도 우리에겐 부장이 있잖아.”
“철각 형 말씀이 맞아요. 저들도 대형을 보면서 괴물이라고 생각할 게 틀림없어요. 싸워보면 알겠죠.”
“아하하하! 맞다.”
황보궁의 말에 잠시 가라앉았던 분위기에 웃음이 피었다.
처억.
남하림의 황보궁의 어깨를 감쌌다.
“궁아의 말이 맞아. 붙어봐야 아는 거야.”
“네. 저도 대형의 말씀처럼 생각합니다.”
“후후후, 좋아. 그런 의미에서 가볍게 한잔들 마실까?”
* * *
붉은빛을 뿌리는 호북제일루를 바라보는 시선.
제령운화는 조금 전에 만났던 남하림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강해. 너무…… 대혼술법을 쉽게 펼칠 수 없을 것 같아.”
그녀는 대혼술법에 대해서 잘 알았다.
“잘못하다가는 천주님께서 먹힐 수 있어.”
구천마제와 유극지의 경우가 그것이었다.
그때는 혹시나 유극지의 혼이 이길 경우를 대비했기에, 그를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창천주의 경우는 달랐다.
걸황에게 혼이 빼앗겨 버린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창천의 전인은 오직 한 명뿐.
창천주가 없는 창천은 의미가 없었다.
“천주님께 말씀을 드려야겠어. 강한 육체가 맞지만 위험 부담이 크다.”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차라리 창천에 있는 인물이 더 적합할 수도 있었다.
‘음…… 근데…… 확실히 매력적이긴 하군.’
창천주에 대항할 수 있는 무림인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처음이었다.
휘이익-
백색 천이 긴 꼬리를 만들며 사라졌다.
* * *
제갈세가가 무너지자 오가련 또한 무너졌다.
그동안 신무맹과 오가련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중원 정파의 무림인들은 신무맹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신무맹은 명실공히 정파 무림의 수장이 되었다.
어느 누구도 신무맹의 뜻을 어기지 않으며,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남하림은 하남성으로 올라온 뒤 바로 남양으로 향하지 않았다.
일행이 향한 방향은 은하궁.
“…….”
은하궁에 가까워질수록 일행 중 유난히 조용해진 인물이 있었다.
“소소도 걱정이 되는 모양인가 보네.”
“하핫! 천하의 신소소를 조용하게 만들 수 있다니…….”
휘익!
앞서가던 신소소가 고개를 돌리자 팽유도가 얼른 시선을 피했다.
“유도 오빠. 왜 그래요. 안 그래도 떨려 죽겠는데…….”
“헤헤, 뭐, 그냥 그렇다고.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유 소저께서는 소문과 달리 따뜻하신 분이거든.”
차후 검후이자 은하궁주.
무림에서는 최근 그녀를 철혈검후라 부르기 시작했다.
“저기 은하궁이 보여.”
은하궁의 거대한 성문이 나타났다.
웅성웅성.
성문에는 이미 수십 명의 무인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하림 형, 우리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네요.”
“그 정도야 은하궁에서는 쉬운 일이겠지.”
“유 소저…… 아니, 은하궁주께서 나와 있어.”
당무독은 무인들 사이에서 청의무복 차림을 한 유미령을 확인했다.
‘어디…….’
신소소는 얼른 그들 사이에서 유미령을 찾아보았다.
‘아…… 저분이…… 형님이시네.’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강한 느낌이 전해졌다.
‘휴우……!’
범접할 수 없는 모습만으로도 신소소는 벌써 기가 죽었다.
툭툭.
“형님은 풀이 죽은 동생을 좋아하지 않을걸.”
“…….”
남하림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가볍게 쳤다.
한편, 성문 앞에 서 있던 유미령의 눈동자로 그의 얼굴이 점점 크게 비쳤다.
유미령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궁주님께서 웃음을…….’
부명욱은 그동안 유미령을 지켜보면서 지금처럼 맑게 웃는 미소를 본 적이 없었다.
‘역시…… 소문대로군. 궁주님의 배필은 걸황밖에 없지.’
부명욱은 다가오는 일행을 맞이하러 얼른 먼저 앞으로 다가섰다.
남하림 앞에 선 그가 허리를 숙였다.
“걸황을 뵙습니다. 오셨습니까?”
“부 당주께서 마중을 나와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걸황께서 오시거늘, 당연히 소인이 나와야지 않겠습니까?”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요.”
남하림의 시선이 유미령을 향했다.
부명욱이 옆으로 슬쩍 물러났다.
남하림과 유미령이 한 걸음씩 다가섰다.
“소저…… 아, 실례했소이다. 궁주, 찾아뵙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걸황께서 워낙 바쁘시니, 아버지께서도 이해하셨을 겁니다.”
스윽.
남하림이 손을 잡자 유미령이 움찔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갑자기 손을 잡을 줄은 몰랐다.
“그대가 많이 생각났소이다.”
“……!”
유미령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말문이 떨어지지 않았다.
두 남녀의 다정한 장면에 은하궁 인물들은 오히려 안심했다.
소문은 그들 사이가 연인이라 했지만, 한 번도 공식적으로 밝혀진 적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손을 잡는 모습을 보니 두 남녀의 관계가 확실했다.
“전대 검후께서도 건강하시겠지요?”
“네, 걸황께서 오신다고 하니 좋아하셨습니다.”
그리고 남하림이 뒤쪽에 있던 신소소를 가리켰다.
후다다닥!
신소소는 기다렸다는 듯 얼른 두 사람 앞으로 달려왔다.
“인사드리면 돼.”
휘익!
신소소는 느닷없이 그녀를 껴안았다.
“형님, 반가워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
“어…… 아…… 그래.”
유미령은 당황한 목소리로 멋쩍은 표정을 한 남하림을 쳐다보았다.
“유 소저, 얘가 흥분을 잘 합니다, 아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