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 전쟁의 시작
남천상국에 창천상가의 가주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보고되었다.
대총관 양진명은 곧바로 창천상가에 연락을 했지만, 여전히 상가주의 행방은 찾을 수 없다는 말뿐.
남후정 또한 창천상가에서 올라온 보고를 받았다.
“대총관, 이게 사실인가?”
“국주님, 서너 번 확인했습니다. 창천상가의 석봉 일대를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그를 본 자는 한 명도 없다고 합니다.”
“음…… 그 말은 상가주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뜻이군.”
“아마도…….”
남후정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상가주가 이대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계약서를 다시 적어야겠지?”
“계약서상에는 수급자는 반드시 공신 해정 님의 자손이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렇군. 해정 님은 어쩔 수 없다손 쳐도, 사대장인들 같은 경우는 수급자가 사라졌으니 네 분들과 다시 계약서를 적어야 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곧바로 연락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창천상가의 해주민이 사라졌다고 해도 남천상국의 입장에서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사대장인이 존재하는 이상 어차피 나갈 금액이었다.
다만 남후정이 이 사안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창천상가 표행에 남하림이 표사로 변장해 동행했다는 이야기가 남천상국에 퍼져 있었다.
즉시 양진명에게 확인을 하니, 과연 소문처럼 표행에 남하림과 이휘연이 표사로 함께했다는 것이 아닌가.
‘창천상가주와 그 녀석이 무슨 연관이 있는 모양이군.’
이유 없이 표사로 변장해서 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남후정은 자신이 부모라고 하나, 걸황이자 신무맹의 맹주가 하는 일에 끼어들어야 할지, 아니면 가만히 있어야 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궁금한 건 참을 수 없지.’
결국 남후정은 남하림을 만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을 하는지 만나보러 가야겠어.”
“다녀오시지요.”
* * *
남후정은 빠른 걸음으로 귀빈각을 향했다.
‘그새 능구렁이가 다 됐어.’
오직 구천신품 때문에 남천상국으로 온 것이라면, 진작 문제는 해결된 상황이다.
돌아가도 한참 전에 돌아갔어야 할 녀석이 상국에 죽치고 앉아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하고 있다.
‘그놈 참 궁금하게 하네.’
스윽.
열린 귀빈각의 정문으로 들어서자,
파아아앙!
퍼어어엉!
공기가 터지면서 파공음이 울렸다.
‘앗…… 깜짝이야.’
남후정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보궁이 남하림을 상대로 일권을 내지르고 있었다.
“잘했어. 이번 움직임은 좋았어.”
“헤헤. 대형이 잘 가르쳐 준 덕분입니다.”
“강하면서도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너무 몸에 너무 힘이 들어가면 안 돼. 내력을 충분히 끌어 올린 상태에서 가볍게 내질러야 해. 알겠지?”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다시 해봐.”
“넵.”
황보궁이 내력을 올리는 모습을 본 뒤 남하림은 뒤로 물러났다.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오셨어요?”
“어…… 그냥 아들이 잘 지내나 궁금해서 왔지.”
“그것만은 아니실 테고.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시면 안으로 들어갈까요?”
“그럴까?”
남하림의 말처럼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었다.
남하림과 남후정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서로 마주 보며 앉은 두 사람.
먼저 남하림이 말문을 열었다.
“저에게 묻고 싶으신 게 뭡니까?”
“난 급한 다른 볼일이 있는 줄 알았더니. 검제와 창천상가에 갔다 왔다지?”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제가 모두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했거든요.”
“흐음…… 그게 큰 문제가 되느냐? 나에게까지 비밀로 할 정도로?”
남후정은 살짝 기분이 상했다.
아버지인 자신을 못 믿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버지를 믿지 못한 게 아닙니다. 제가 창천상가에 간 일은 중요한 일로, 아주 극소수의 인물들만 아는 일입니다. 분명 출발하기 전, 쟁자수도 필요 없이 표사만 움직인다고 하기에 열 명도 되지 않는 표사들 모두에게 비밀을 지켜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소문이 났다는 것은 입들이 너무 가볍다는 것입니다. 어찌 그들을 믿고 큰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군. 내가 알기로는 표사들 중에서 소문이 난 모양이야.”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소문을 낸 자를 찾아내서 이번 일에 대해 일벌백계(一罰百戒)로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그…… 정도까지 해야 하느냐?”
“아버지께서 하기 싫으시다면 뜻대로 하시지요. 하긴, 제가 신경 쓸 일도 아니니까요. 다만 이런 사소한 것이 나중에 큰일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아마 그때 가서 제가 했던 말이 기억나 후회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허허, 너무 앞서가는 것 같구나.”
“처지는 것보다 앞서가는 게 더 좋습니다. 제궤의혈(堤潰蟻穴)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큰 둑도 작은 개미구멍으로 무너진다는 것인가?’
“……이런 일로 그를 찾아낸다면 상국의 분위기가 안 좋지 않겠느냐?”
“아버지, 한 번쯤 분위기를 잡을 필요는 있을 듯합니다. 사실 며칠 동안 상국을 보았는데, 안일합니다. 당연하겠지만 남천상국의 상대가 없으니까요.”
“그건 네 말이 맞긴 하다. 약간의 경각심도 있어야 하지. ……그렇게 하마.”
남후정도 결국 남하림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 내렸다.
“그건 그렇고, 이번 일이 중요했던 모양이지? 표사로 창천상가에 간 것을 보면.”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근데 소문이 났으니 중원의 일이 완전히 틀어졌습니다.”
“우리 남천상국이 위험하다는 뜻이냐?”
“그건 아닙니다. 제가 그들의 표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표적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창천상가주를 찾든 못 찾든 상대방은 범인이 저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그들이 누구란 말이더냐?”
“창천주. 유극지를 죽이고 제갈명을 죽인 인물. 그의 수하 혈사천주 설백진과 함께 무림을 말살시키려는 나쁜 놈이죠.”
“……!”
남하림이 내뱉은 말에 남후정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
유극지와 제갈명을 죽인 인물이 아들 남하림을 노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제 계획대로 끝날 때까지 몰랐어야 했는데…… 아쉽게 됐습니다.”
“미안하구나. 내가 망친 듯해.”
“아닙니다. 제 잘못도 있습니다. 그곳에 몰래 갔어야 했는데. 상국의 인물들을 너무 믿은 듯합니다.”
“…….”
남하림은 이어서 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 남후정에게 창천상가로 가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구천 중에서 창천이 어떠한 곳인 줄 알려준 뒤, 창천상가에 보낸 황금들이 무림의 멸살시키려는 창천의 운용 자금으로 쓰인다는 사실에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그게 사실이냐?”
“네. 그렇습니다.”
“허어…… 이런 어이없는 짓을 하다니…… 본 상국이 무림에 해가 되는 짓을 하고 있었구나…….”
남후정은 자책했다.
그동안 상국을 운영하면서 항상 중원에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었다.
“아버지, 그건 상국의 탓이 아닙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저도 몰랐습니다.”
“우리가 몰랐다고 하지만 결과는 아니지 않느냐. 허허…… 앞으로 우린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이제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더는 그들의 자금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맞다. 당연하다.”
“그분들을 불러들이세요. 그리고…….”
남하림는 앞으로 몸을 숙이며 남후정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을 이었다.
“알겠다. 그렇게 하마.”
남후정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수십 년 동안 상국을 이용하다니.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르게 해줄 것이다.
‘이 새끼들…… 감히 나를 건드리다니…… 창천 네놈들은 무림에서 밥도 사 먹지 못하도록 만들어주겠어.’
* * *
툭, 툭.
팽유도는 자루를 발로 찼다.
꿈틀.
자루 안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아.”
“열어봐. 마음이 바뀌었는지 물어보게.”
“알겠어요.”
팽유도는 자루를 풀어 얼굴만 나오도록 했다.
해주민이 자루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어둠 속.
사방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쯤이면 당신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할 거야.”
“…….”
“이번 질문이 마지막이다. 생각 잘 했으면 좋겠어. 네놈을 더 이상 피곤하게 만들지 않겠다.”
이건 협박이다.
해주민은 지금까지 입을 꾹 다물었다.
분명 자신이 필요해서 지금까지 살려뒀을 터.
이대로 어떠한 말도 하지 않으면, 놈들이 자신을 죽이진 못할 거라 확신했었다.
어둠 속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당신에게 대답을 듣고 싶었다면 고문을 했겠지. 하지만 왜 하지 않고 그동안 말로 했을까? 그건 당신이 대답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기 때문이야.”
“…….”
“결론은 당신이 누구인가는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그대를 그냥 죽이기로 했으니까. 어차피 당신이 없으면 남천상국은 창천상가에 돈을 주지 않아도 되지. 계약서에 보면 공신 해정의 자손에게만 주도록 되어 있지 않나? 당신만 없으면 우린 모든 게 끝나.”
정말…… 마지막인가?
“어…… 어…….”
해주민은 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털어 놓아야 했다.
남하림은 그의 뜻을 알아들었다.
“아, 이제 할 말이 있는 모양이지?”
끄덕끄덕.
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좋다. 말을 할 수 있게 해주지.”
타악!
남하림은 손가락을 짧게 튕겼다.
그의 목소리를 잠갔던 아혈이 풀어졌다.
푸욱.
해주민은 숨이 단번에 터져 나오는 듯이 크게 내쉬었다.
“하아…… 모든…… 것을 말하겠소이다.”
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이들은 자신을 죽일 것이 분명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따지고 고를 이유도 없었다.
그동안 모아 놓았던 황금 덩어리들을 두고 허무히 죽을쏘냐.
“당신이 사실대로 말을 해준다면 조용히 돌아가도록 해주겠소.”
“무,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공신 해정과 어떠한 사이인지. 그것만 알면 다른 건 필요 없소.”
“전…… 그와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파앗!
주위가 밝아졌다.
사방으로 햇빛을 가렸던 암막천이 치워졌다.
해주민은 눈부신 빛에 눈을 반쯤 감으며 주위를 살폈다.
‘국주……!’
그의 앞에는 남천상국의 국주와 대총관이 앉아 있었다.
“…….”
해주민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 자네는 공신 해정과 아무런 관계가 없군.”
“죄…… 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네. 어차피 누군가에게 줘야 할 돈을 준 것뿐이니. 다만 지금부터서는 그의 후손이 없어졌으니, 줄 필요가 없어졌군.”
남후정이 뒤로 물러나자 그의 옆에 있던 양진명이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적게.”
“……무엇을……?”
“무엇이라니. 자네가 그의 후손이 아니라는 내용을 써야 할 게 아닌가.”
“아…… 네에…… 알겠습니다.”
해주민은 빈 종이 위를 채우기 시작했다.
스윽.
“여기 있습니다.”
양진명은 증명서에 적힌 글을 읽었다.
“마지막으로 여기 인장을 찍게.”
해주민은 그의 이름 옆에 인장을 눌렸다.
양진명은 증명서를 남후정에게 보여 주었다.
“이 정도면 증거로 충분합니다.”
“그렇군. 그럼 우린 나가세. 나머지는 이들이 처리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남후정과 양진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나가기 전 남하림에게 물었다.
“저자를 어떻게 할 생각이냐?”
“사람을 시켜서 창천상가에 던져 놓고 올 생각입니다.”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농담입니다. 그냥 놓아두면 어디든 가지 않겠습니까.”
“살기 위해서는 잘 도망 다니겠지. 수고하게.”
“먼저 들어가십시오. 나머지는 저희들이 처리하지요.”
남하림은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을 배웅했다.
“당신을 이제 창천상가에 보내주겠소. 무독.”
남하림의 부름에 당무독이 나왔다.
옥병 안에 환단이 한 알 들어 있었다.
툭.
당무독이 해주민을 건드렸다.
“이걸 받아서 복용해.”
“…….”
“강제로 먹이기 전에 먹는 게 좋을 거야.”
해주민은 옥병을 받은 뒤 억지로 환단을 목 안으로 넘겼다.
“잘 들어. 방금 먹은 건 독이야. 금방 죽지는 않아. 정확히 한 달 뒤에 발작을 일으키는 절명독이지.”
“헉……!”
독약이라는 말에 벌써부터 중독이 된 둣 숨이 막혀왔다.
“한 달 전에는 죽지 않으니 걱정 마. 하지만 한 달이 넘어도 해독을 안 하면 몸속의 오장육부가 전부 녹으면서 세상을 하직하는 거지. 그렇게 알고 있어.”
“……!”
“자네가 돌아가서 우리에게 잡혔다고 말을 하면 안 되겠지?”
“아닙니다. 절대로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지금 생각이고, 창천상가에 간 뒤 이상한 말이 들리면 해독제는 받지 못할 거야. 어떻게 마무리를 짓는지 본 뒤 그때 해독제를 보내주지. 알겠나?”
“아…… 네에. 알겠습니다.”
“자, 그럼 창천상가에 돌아가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기다리게. 확인이 되면 해독제를 보내줄 테니.”
“명심하겠습니다.”
해주민은 무조건 나가야 했다.
그는 창천상가에서 오래 지낼 생각이 없었다.
집무실에 숨겨놓았던 황금을 챙기고 중원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기기로 작정했다.
모아놓은 돈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다.
“가시오. 마음 바뀌기 전에.”
“아…… 네에. 감사…… 합니다.”
해주민은 자루에서 완전히 나온 뒤 건물 밖으로 빠르게 달렸다.
남하림의 뒤로 당무독이 다가섰다.
빠르게 달려가는 가짜 후손의 뒷모습이 보였다.
“부장, 지금부터 창천과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겠지?”
“맞아. 조만간 어떤 식으로도 반응이 나타나겠지.”
남하림은 미소를 지었다.
창천주와의 만남이 기대가 되고 있었다.
* * *
‘흐음.’
전승은 남천상국에서 온 서신을 받았다.
남후정의 직인이 찍힌 서신.
중요한 일이 아니면 남천상국의 국주가 직접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
서신의 내용에는 자신의 저작권료를 정산받는 수급자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모르겠군.’
문제가 생겼다고 적혀 있을 뿐.
내용은 한마디도 없었다.
“서신으로 설명하기에 곤란하다는 뜻이겠구만.”
수급자라고 한다면 스승인 공신 해정의 후손이었다.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자신들이 받아야 할 저작권료를 그에게 넘겼다.
사대장인들은 딱히 돈이 필요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오직 유용한 물건을 만드는 것일 뿐.
“오랜만에 상국에 한 번 가볼까?”
문제가 생겼지만 남천상국에 갈 일이 생기자 기분은 좋았다.
전승은 짐을 챙겼다.
그와 동시에 다른 곳에도 남후정의 서신이 전해졌다.
다른 세 명의 장인들도 전승처럼, 남천상국으로 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