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황무적-239화 (240/328)

239. 고향 방문

기성은 힘없이 축 처진 그를 내려다보았다.

‘신 가주…….’

설백진과 신명항의 관계는 사파의 무인이라면 모르지 않았다.

“멍청한 사람. 그가 가짜인 줄 알면서도 죽으러 왔다는 것인가?”

“그가 가짜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소이다. 그리고 가짜라면…… 직접 그를 죽이고자 했소이다.”

“그가 가짜라고 해도 설백진의 무공을 지닌 인물이네. 다른 인물도 아닌 신 가주가 무모한 짓을 하다니 실망이오.”

신명항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처럼 무모한 짓을 했다.

하나 그때에는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가짜 혈사천주 설백진은 더 이상 사파 무림을 이끌어갈 수 없소. 이제는 그대, 신 가주께서 사파인들을 위해 앞장을 서야 않겠소이까. 그것이 그대가 주군의 원수를 갚는 길이외다.”

스윽.

신명항은 고개를 들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주군의 복수를 할 것이외다.”

“결심을 했다니 다행이오. 본인의 생각으로는, 우선 중원의 사파인들에게 설백진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리는 게 순서일 듯하네.”

공통의 적을 상대하기 위한 동맹이 맺어지는 순간이었다.

* * *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중원 무림에 흐른 소문.

#NAME?

은하검인 유극지와 봉황인 제갈령의 죽음에 이어, 사파에서도 거대한 사건이 하나씩 터지고 있었다.

#NAME?

#NAME?

천사회가 와해되기 전 군사였던 혈군사 기성까지도, 두 인물의 말에 동의했다.

중원 사파 무림의 거두 삼인의 발언은 충분히 효과가 있었다.

이제 혈사천의 명은 사파 무림에서 더 이상 효력이 없었다.

호남성으로 내려가던 일행도 소문을 들었다.

혈사천에 갔던 신명항을 걱정하던 차, 다행히도 무사하다는 소식에 한숨을 내려놓았다.

일행 중 신소소가 가장 걱정을 많이 했다.

신명항이 혼자 혈사천으로 간 사실을 알면서도, 그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던 남하림이 무심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부장 말대로 신 가주님께서 살아 계셔서 다행이야.”

“하림 형, 어떻게 알았어?”

당무독과 팽유도는 신기했다.

일행은 신려세가를 혼자 떠나는 신명항을 보면서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남하림은 혼자 가도 괜찮다고 했다.

“현천에 다녀온 뒤로 이상한 능력이 생겼다고 할까…….”

“하림 형은 좋겠다.”

자신의 미래를 알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남하림은 달랐다.

“글쎄. 과연 좋을까?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이 재미없을 것 같은데…… 안 그래?”

“부장의 말이 맞아. 나도 굳이 내 미래에 대해 알고 싶은 생각이 없어.”

“좋은 생각이야. 미래는 항상 유동적이지.”

“무슨 뜻이에요?”

팽유도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미래를 아는 순간부터 미래는 바뀌고 있어. 내가 유도의 미래를 말하는 순간 미래가 변한다는 것이지.”

“그런가요? 그럼 내 미래가 아니지 않나요?”

“당연히. 그래서 말을 안 하는 거야. 굳이 아닌 것을 알려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

팽유도는 알 듯 모를 듯한 말에 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스윽.

황보궁이 팽유도의 곁에 다가섰다.

“유도 형, 무슨 말이야? 난 모르겠어.”

“그게 뭐나면…… 나도 모르겠다.”

신소소는 슬그머니 남하림의 팔짱을 꼈다.

“뭐냐?”

“왜요? 좋잖아요.”

“……뭘 물어보려고 그런 눈으로 보냐?”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전 잘 살고 있겠죠? 그건 알려줄 수 있잖아요.”

“몰라.”

“안다면서요.”

“내가 가끔이라고 했지. 항상 미래를 볼 수 있는 건 아니야.”

“진짜인가요?”

“그래.”

신소소는 유심히 남하림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뭐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네!’

“됐으면 좀 떨어지지.”

“에이, 치사하네. 이러고 가면 얼마나 좋은데.”

휘리리릭!

남하림이 슬쩍 간지럼을 태우려는 시늉을 하자,

화다닥!

신소소가 깜짝 놀라며 팔짱을 풀었다.

“흐응.”

남하림은 미소를 띠며 앞서 나갔다.

‘진짜 못됐어.’

* * *

호북성의 마지막 마을을 지나며, 일행은 호남의 악양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이곳에서 곧장 장사로 내려갔다.

중원오대상국 중 최고의 상국, 남천상국에 도착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신소소는 장사에 가까워지자 들뜬 듯 안절부절못했다.

남은 하루를 보내기 위해, 객잔에 들어갔을 즈음..

‘흐음…….’

남하림은 자리에 앉아서 왠지 분주해진 신소소의 행동을 보았다.

황보궁이 신소소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객잔 밖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궁아, 왜 저러냐?”

“아, 네에. 상국에 가는데 어떻게 입고 갈지 고민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어딜 가는데?”

“객잔 주위에 옷을 파는 곳이 있나 알아보려고요.”

“무슨 옷?”

“최대한 예쁘게 입어야 한다고 해서요…….”

“아…… 근데 소소가 입을 옷을 네가 왜 구하러 다녀?”

“제가 간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형수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알겠다.”

남하림은 피식 웃었다.

굳이 자신이 끼어들 문제도 아니고 두 사람이 알아서 하는 일이었다.

“궁아. 굳이 돌아다니지 않아도 돼. 밖에 나가면 상국 사람이 있을 거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말해. 바로 구해 올 테니까”

“아!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황보궁은 바로 객잔 밖으로 나갔다.

악양을 거치면서 남하림의 소문은 곧바로 남천상국에 알려졌다.

남천상국은 곧장 일행을 마중하기 위해 마차와 함께 사람을 보내왔다.

“걸황.”

탈혼마제가 불렀다.

그의 표정과 목소리가 비장에 차 있었다.

남하림은 귀찮았다.

“요즘 너무 자주 하는 거 아닐까요?”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그 말만 벌써 열 번은 넘은 것 같은데.”

스윽.

남하림은 무심한 듯한 말과 다르게 바로 일어났다.

“그냥 하면 재미없잖아요. 이번에도 일 초 만에 쓰러지면 내 부탁을 들어주시는 겁니다.”

“부탁은 들어주겠는데…… 수하가 되어달라는 것들은 제외하거라.”

“그건 저도 사양입니다. 노인장을 부하로 데리고 다니면 피곤해질 텐데. 굳이 그런 말은 안 해요.”

두 사람은 객잔 뒤에 공터가 있는 장소로 내려갔다.

탈혼마제의 만마심공.

얼마 전에 삼단공의 벽을 뚫었다.

점점 자신감이 붙은 그는 남하림과 싸워서 이길 생각에 신이 나 있었다.

“선공하세요.”

“크크큭, 이번에는 네가 먼저 해라. 충분히 막을 수 있도다.”

“후회할 텐데요?”

“크크크.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삼단공을 뚫었으니까!”

“축하는 해드리죠. 그럼 갑니다.”

타앗!

움직이는 남하림.

탈혼마제는 그 모습을 똑바로 주시했다.

남하림이 움직이는 찰나의 찰나.

‘크하하! 이제 보인다……!’

종전까지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던 남하림의 신형.

탈혼마제의 입가에 미소가 나타났다.

하지만 그는 잊고 있었다.

어디에서 남하림이 모습을 드러낼지 전혀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을.

팟!

쿠가가가가가가가가가-!

‘위!’

머리 위에서 나타난 거대한 열 마리의 강룡들이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콰과과과과과-!

“으아아아악!”

탈혼마제는 비명을 질렀다.

붉은 눈동자의 강룡들.

세상을 삼킬 만큼 크게 벌린 입안에서 붉은 화염들이 쏟아졌다.

털썩.

단번에 기를 뺏긴 탈혼마제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 * *

번쩍.

탈혼마제는 눈을 떴다.

이미 어두운 밤이었다.

‘의리 없는 놈들.’

객잔 밖에서 기절했는데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탈혼마제는 상체를 일으키며 잠시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 사이의 일 초는 평범한 일 초가 아니었다.

전신의 전력을 다한 일 초.

전력을 드러내지 않은 채 싸운다면 두 사람은 몇 날 며칠을 싸워도 끝이 나지 않았다.

단 한 번의 공격에 모든 것을 실어야 승부가 끝이 났다.

삼단공의 벽을 깨우친 이상 남하림과 싸우기에 충분하다고 여겼건만.

‘만마심공이 가짜인가?’

곧바로 머리를 흔들었다.

진품이 틀림없었다.

‘휴우. 또 지다니. 그래도 사라지는 건 보았으니. 다음에 두고 보자.’

그때,

끼이이익.

문을 열고 누군가 밖으로 나오는 기척이 들렸다.

“휘연 형, 고마워요.”

“괜찮다.”

이휘연이 황보궁의 무공을 도와주기 위해 밖에 나온 것.

“어, 마노께서 일어나셨네요.”

“둘이 왜 나왔냐?”

“휘연 형이 제 무공을 잠시 도와주신다고 해서요.”

“좋겠구나.”

탈혼마제는 일어나서 옆으로 물러났다.

이윽고.

‘잘 가르치는군.’

탈혼마제는 역무천심공을 익히는 황보궁을 상대로 가볍게 대련하며 하나씩 가르치는 이휘연의 움직임을 유심히 보았다.

퍼어엉!

휘릭!

이휘연은 가볍게 황보궁의 손을 밀어냈다.

“다시.”

“넵. 알겠습니다.”

얍!

황보궁은 일권을 다시 내질렀다.

휘익!

이휘연은 움직이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무공을 펼칠 때는 무공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헉헉.

황보궁의 숨소리.

폐가 터질 듯 크게 들렸다.

“본질을 어떻게 아는 것입니까?”

“그건 가슴이다.”

‘가슴?’

황보궁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기 위해선 보이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네가 어느 정도 무공에 대해 알게 되면 단계를 넘어서기 위해 가슴에 무공을 심어야 한다.”

“헛……! 아직 모르겠어요.”

“지금은 한꺼번에 급하게 할 필요가 없어. 하나씩 익히다 보면 무공의 본질이 무엇인지 가슴에 하나씩 들어올 것이다.”

“아…… 네에…….”

“내가 미리 너에게 가르쳐 주는 이유는 그것이 찾아올 때마다 잊지 말고 가슴에 모아두었으면 해서다.”

“다른 형님들도 본질을 모으고 계시는가요?”

“서로 부르는 이름은 다르겠지. 하지만 결론은 똑같다.”

“알겠습니다.”

스으으윽.

이휘연은 한 손으로 내력을 모았다.

“이것이 가슴으로 무공을 펼치는 것이다.”

파아앙!

황보궁이 펼쳤던 황보삼권이 이휘연의 손에서 펼쳐졌다.

‘……엄청나다.’

“휘연 형, 고맙습니다.”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번에는 역무천심공을 한 번 더 운기행공 해라.”

황보궁은 가부좌를 취한 뒤 역무천심공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본질이라…….’

탈혼마제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는 무공의 무리에 익숙했다.

이휘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 없다.

순간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정말로 본질의 본질을 똑바로 보고 있는 것일까?’

의심이 들었다.

무공을 익힐 때 가장 경계할 사항이 있다.

주화입마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가 의심이라 했다.

하지만 탈혼마제가 하는 의심은 부정이 아닌 긍정적인 의심이었다.

무공을 깨우쳤다고 해서 깨우친 게 아니라는 것인가.

깨우침 뒤에 또 다른 깨우침이 있었다.

스윽.

탈혼마제는 일어났다.

“검제, 우리 비무 한 번 해볼까?”

“부장과 하지 않았습니까?”

“방금 내가 생각한 게 맞는가 궁금해서 말이네.”

“좋습니다.”

이휘연은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중앙으로 마주 나왔다.

스르릉-

허리에 찬 타구봉에서 태극흑검을 꺼냈다.

그 순간 홍태극의 문양이 이휘연의 발밑 아래에서 생겨났다.

붉은 태극이 천천히 위로 오르며 이휘연의 몸을 통과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장면.

그 모습을 본 탈혼마제는 숨이 멈출 듯 긴장했다.

‘이 녀석은…… 지금까지 전력을 다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군.’

이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갑니다.”

슈우우욱!

이휘연의 발이 미끄러질 듯 탈혼마제 앞으로 다가섰다.

번쩍!

홍태극이 앞에서 터졌다.

붉은 광선이 비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탈혼마제는 만마심공을 끌어 올렸다.

우우우우웅-

그의 전신으로 만마호신기가 강막으로 퍼져 나오며 홍광을 막아냈다.

콰아아아앙!

‘막았어. 후후.’

탈혼마제는 미소가 나타났다가 단번에 굳어졌다.

‘이것이었나? 본질의 본질?’

막아낸 게 끝이었다고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 아니었다.

아직도 홍태극이 눈앞에 보였다.

스걱.

태극흑검이 눈앞을 스쳐 지났다.

사알랑.

다행히 겉옷만을 베었을 뿐.

하지만.

만일 이휘연이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그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걸황, 그놈만 괴물인 줄 알았더니…… 이놈도 같은 놈이군.’

* * *

두 대의 마차가 객잔 밖에 대기했다.

마차 위로 남천상국의 표기가 펄럭거렸다.

중년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삼 공자님, 마차에 오르시면 됩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셨나요?”

“아닙니다. 이부인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어머니께서?”

“그렇습니다.”

남하림은 일행을 향해 돌아섰다.

“두 대이니 우리 나눠서 타죠.”

“알았어.”

쓰윽.

신소소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명이 너도나도 두 번째 마차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궁아, 넌 나하고 가자. 거긴 여섯 명이라 복잡하잖아.”

“대형, 아닙니다. 전 여기가 더 편합니다.”

* * *

마차 안에 탄 두 사람.

“…….”

싱글벙글 웃는 신소소.

“기분 좋은 모양이네.”

“당연히 좋잖아요. 저도 형님처럼 마차에 같이 타고 싶었다고요.”

“좋다니 다행이네.”

탕탕!

신소소는 바닥을 손으로 두드렸다.

“정말 좋네요. 우리 건 불편한데 이건 하나도 안 불편해요.”

“그러게 말이다.”

남하림은 밖을 내다보았다.

싱긋.

오랜만에 잊고 있었던 고향의 모습들이 눈앞에서 지나갔다.

히이이잉!

마차가 멈춰 섰다.

‘드디어…… 왔구나.’

개방을 떠난 이후로 처음으로 돌아왔다.

마부석에서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자님, 도착을 했습니다.”

“수고했어요.”

“저어…… 국주님께서도 나와 계십니다.”

남하림은 마차를 나가기 위해 일어났다.

처음과 달리 신소소는 긴장을 하고 있었다.

“다 왔는데 나가자.”

“네에…….”

스윽.

남하림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덜덜.

신소소는 떨고 있었다.

“겁이 나?”

“누가 겁을 낸다고요. 그냥……”

“괜찮아. 그냥 있는 대로 하면 돼. 설마 인사드리러 온다고 생각해서 떨리는 건 아니겠지?”

“…….”

“소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면 돼. 좋아하실 거야.”

남하림의 미소.

그동안 그의 웃음을 많이 봤지만 방금 보여준 미소는 처음이었다.

떨렸던 가슴이 서서히 진정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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