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 신명항, 결심을 내리다
호북성으로 들어선 일행의 걸음걸이는 빨랐다.
뭔가에 쫓기는 듯.
예전과 달리 느긋하게 움직일 수 없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무림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만.”
앞서 가던 남하림은 먼저 걸음을 멈췄다.
아무래도 여유를 가지는 게 좋았다.
뒤에서 신소소가 바짝 붙어 섰다.
“하림 오빠, 무슨 일이세요?”
“그게 아니라 우리가 너무 급하게 움직이는 것 같아.”
“그렇긴 해.”
이휘연도 느끼고 있었다.
일행도 다 같은 생각을 했다.
남하림은 선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늘 아래 보이는 산들.
마침 주위의 경관이 뛰어났다.
샤르르르-
바람도 적당히 불어왔다.
“여기에서 잠시 쉬는 게 좋겠어요.”
“알겠어.”
일행은 편한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어디가 좋을까?’
남하림은 주위를 살피다가 적당한 곳에 앉았다.
쏘옥.
신소소가 바로 옆에 바짝 앉았다.
좁은 자리에 두 사람의 엉덩이가 거의 붙어 있을 정도.
“안 불편해?”
“괜찮은데요. 불편하세요?”
“응. 많이…….”
“참을 수 없어요?”
“어…….”
“아, 진짜.”
신소소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옆으로 아주 조금 물러났다.
“형님이 그랬다면 아무 말도 안 했겠죠?”
“유 소저는 처음부터 붙어 앉지도 않아.”
“그걸 어떻게 알아요?”
“어떻게 알긴. 앉아 봤으니깐 알지.”
“좋겠네요?”
“됐다.”
일행은 재미있다는 듯 남하림과 신소소를 구경했다.
“소소가 아예 작정을 하고 왔구나.”
“그러게요. 미령 누나 때문에 가만히 있다간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한 모양인가 봐요.”
“하긴…… 부장을 좋아하는 여인이 한두 명은 아닐 테니깐. 뭐든지 확실하게 하고 싶으면 빠르게 움직이는 게 좋지. 승부수를 제대로 띄웠어.”
“저 두 사람,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팽유도의 물음에 다른 세 사람은 고민에 빠졌다.
“부장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깐 소소가 이기지 않을까?”
“나도…… 무독의 생각과 같아.”
마지막으로 이휘연이 고심 끝에 대답했다.
“잘 살겠지.”
“헤헤, 그럼 소소에게 잘 해야겠네요. 나중에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하잖아요.”
팽유도의 말에 그들은 웃음이 나왔다.
“그러게 말이다.”
잠시 동안이나마 느긋하게 여유를 가진 일행.
그렇게 이각이 지나갈 쯤이었다.
이휘연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만 나오는 게 어떨까.”
벌떡!
팽유도와 황보궁이 자리에 일어나 사방을 살폈다.
휙휙.
좌우를 돌아보며 팽유도가 소리쳤다.
“누구냐?”
스르르-
허공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모습을 드러낸 그에게서 살기는 보이지 않았다.
사내는 남하림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갈민영이라 합니다.”
‘제갈세가?’
뜻밖의 인물에 남하림은 그를 자세히 보았다.
“본인을 찾아왔습니까?”
“그렇습니다.”
“제갈세가에 좋지 않는 일이 생겼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 말문을 열었다.
“천주님께서 걸황님께 보내주신 것이 있습니다. 제 눈을 마주 보시면 될 것입니다.”
남하림은 그의 말대로 눈을 주시했다.
번쩍.
제갈민영의 눈동자가 빛났다.
‘이건…….’
어떻게 된 것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제갈령이 만났던 인물들이 비쳤고, 귓가엔 설백진과 나누는 대화들이 똑바로 들렸다.
‘설백진도…… 가짜다. 대혼술법에 의해 창천의 인물로 바뀌었어.’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
혈사천주가 제갈세가를 공격한 의문이 모두 풀렸다.
창천은 유극지뿐만 아니라 설백진에게도 대혼술법을 펼친 것이었다.
혈사천주 설백진은 유극지와 달리 창천의 인물에게 대혼술법을 당한 뒤 모든 기억을 뺏긴 채 혼이 소멸했다.
남하림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 덕분에 큰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천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긴 일이십니다. ……송구하지만 걸황께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부디 천주님의 복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대의 뜻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남하림은 가려던 제갈민영을 잠시 말렸다.
“제갈세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봉황은 다시금 날 준비를 할 것입니다.”
“혹시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됩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인사 한마디를 남기고, 제갈민영의 기가 사라졌다.
남하림 곁으로 일행이 모였다.
그들은 어떤 일인지 알지 못했다.
“무슨 일이야?”
“혈사천주 설백진은 가짜야. 창천의 인물에게 대혼술법을 당했어.”
헉!
모두 똑같은 표정이 나왔다.
심지어 무림의 일에 신경조차 쓰지 않던 탈혼마제도 이번만큼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뭣이?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제갈령과 제갈민영의 특이한 능력.
남하림은 사라진 제갈민영의 눈을 통해 제갈령과 설백진의 모습을 봤다고 전했다.
“창천, 이놈들…… 정말 엄청난 놈들이군. 혹시 마교주는? 그도 그런 것인가?”
“확실하게 장담할 수 없지만 아닐 겁니다. 제가 다른 사람에 비해 좋은 눈을 가지고 있거든요.”
“뭐라는 거야? 눈에 좋은 눈, 나쁜 눈이 어디 있어?”
“후후, 그런 게 있어요.”
하북소가에서 혼령안을 거둔 남하림이었다.
상대방이 사술을 쓴 흔적이 있다면 혼령안에 의해 알 수 있었다.
설백진을 만났을 당시에는 대혼술법이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을 뿐더러, 제대로 움직이기 전 당했던 탓에 똑바로 확인할 수 없었다.
“부장, 설백진이 창천의 인물이라면 더 귀찮아져.”
“형 말이 맞아요. 사파 무림까지 창천의 편에서 움직이는 거나 마찬가지죠.”
“하림 형, 사파에 설백진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리면 되지 않을까요?”
“증거가 없잖아. 내가 본 걸 그들에게 보여준다고 해도, 사술이라고 하면서 믿지 않겠지.”
“아…… 그렇구나. 증거가 없네.”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봐도 대혼술법의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설백진 자신이 스스로 밝히지 않는다면 아무도 모르겠네요.”
황보궁도 한마디 했다.
“궁이 말이 맞아. 증거를 찾거나 그가 스스로 가짜라는 사실을 밝히거나…… 그것밖에 방법이 없지.”
그건 절대로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설백진과 만날 수도 없을뿐더러, 만난다고 해도 가짜인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저어어…….”
그때, 신소소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무슨 할 말이 있어?”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를 만나 뵙고 상의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신 가주님을?”
“네. 혈사천주가 가짜라면 아버지는 알아보실 수 있지 않겠어요?”
혈사천주 설백진과 신명항의 관계는 중원 무림에서 소문이 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부장, 소소의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분이라면 설백진이 가짜라는 증거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당무독도 신소소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분이 확인을 해줄 수만 있다면…….’
남하림은 곧바로 결정을 내렸다.
“좋아. 바쁘겠지만 우선 신려세가에 가는 걸로 하자.”
* * *
살천성 성주 살왕 지무린은 혈사천에서 날아온 서신을 받았다.
그의 얼굴에 고뇌가 가득했다.
걸황을 죽이라는 명령.
지무린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 의해 살천성 절반의 전력을 잃었고, 자존심 상하게도 걸황에게 고개까지 숙였다.
그날 이후, 그 또한 복수를 원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복수를 하려던 생각은 사라져 갔다.
그때는 지금보다 무력이 낮았을 때였다.
현재 그들은 일황사제라 불리는 무림 최고의 인물이었다.
살천성 전체를 이끌고 나가지 않으면 이길 수도 없었다.
하지만 싸우기 싫다고 해서 거부할 수 없었다.
천사회가 와해되었다고 해도, 사파 무림은 혈사천주의 명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분의 명을 거부해도 마찬가지겠지…….’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사파 무림은 혈사천주의 명에 따라 싸울 수밖에 없었다.
“……시 부장, 살천성에 모두 알려라. 그들을 칠 것이다.”
“알겠습니다.”
지무린은 여전히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저번과 같은 경우를 당하지 않으려면 한 번에 끝을 내야 한다.’
“걸황…… 결국 둘 중 한 명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군. ……아니면 살천성을 버려야겠지.”
* * *
‘이건…….’
신명항의 손에 들린 한 장의 서신.
‘주군께서……!’
믿기지 않는 명령이 내려왔다.
사실 오래전부터 혹시나 이런 일이 있지 않을까, 마음 한편으로 걱정을 했었다.
‘어떻게 하지?’
하지만 오래전부터 주군으로 모신 이상 혈사천주의 명을 거역하기 어려웠다.
걸황을 죽이라는 명령.
고민에 빠져 있는 그를 보며 내당주 신명진이 말했다.
“형님, 천사회는 이미 와해가 되었습니다.”
설백진과 신명항의 사이를 그도 잘 알았다.
하나 신명진이 보기에, 가주에게 중요한 것은 설백진이 아닌 자식이었다.
“자네의 말이 맞을지도. 하지만 난 주군께 충성을 맹세했다. 어찌 신하의 도리로 주군의 명을 배신할 수 있겠나.”
“형님. 상대가 소소와 연관이 된 그입니다.”
“명진, 안타깝지만 그분의 명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내가 죽어야겠지.”
“가주님…….”
신명진은 어쩌면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똑.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가주님, 대하벽입니다.”
지옥검향 대하벽, 그가 직접 수하를 보내지 않고 찾아왔다.
“들어오게.”
안으로 들어선 그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인 일인가?”
“가주님, 아가씨와 일황사제가 찾아왔습니다.”
“……!”
신명항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방금 누가 왔다고 했는가?”
“아가씨와 걸황이 뵙고자 하십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남양성에 있었을 텐데.
‘호북성에는 무슨 일이지?’
신명항의 몸은 이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 * *
‘후후.’
경내로 들어서는 두 남녀.
멀리서 보기에도 좋았다.
그는 남하림과 신소소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혈사천주의 명이 생각나자 이내 표정이 굳어졌다.
신소소는 안으로 들어오면서 신명항의 모습을 보자마자 반갑게 뛰었다.
“아빠……!”
“허허허, 다 큰 녀석이…… 조심하지 않고…….”
“저기 하림 오빠는 아직도 어리다고 하던데요.”
“허어, 그래도 조심해야지. 이젠 네가 잘못된 행동을 할 때마다 다른 사람이 욕을 듣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알겠어요.”
신명항은 신소소를 지나 남하림과 마주셨다.
“자주 보는구려.”
“그렇게 되었습니다. 가주님께서 소소를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워낙 고집이 센 녀석이라서 말을 안 듣지 않겠나. 그대가 잘 다독거리면서 데리고 다니면 좋겠네.”
“저에게 완전히 맡기시는 모양인가 봅니다.”
“하하하, 어쩌겠는가?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네.”
신명항은 얼른 시선을 돌려 나머지 일행과 인사를 마쳤다.
이들이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지만 우선 안으로 들어섰다.
신명항과 일행은 서로 마주 보며 앉았다.
“소소 때문에 찾아온 것 같지는 않네.”
“네, 맞습니다. 중요한 일이 생겼습니다.”
“중요한 일이라니?”
“혈사천주 설백진에 관한 일입니다.”
“……!”
남하림이 그에 대해 말을 꺼낼 줄 몰랐다.
신명항의 얼굴이 굳어졌다.
“주군과 연관이 있다는 일이 무엇인가? 자세히 말해보게.”
“제가 하는 말을 믿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주님께서 그를 어떻게 대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를 믿는다면, 끝까지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알겠네.”
“먼저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혈사천주 설백진. 그는 가짜입니다.”
“걸황! 방금 뭐라 했소이까?”
내당주 신명진의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는 대혼술법에 의해 설백진의 몸에 들어간 창천의 인물입니다.”
“대혼술법? 그, 그런 게 있단 말이오?”
“네. 있습니다. 예전 구천마제도 같은 경우였습니다. 검성 혁자성의 몸에 창천의 인물이 대혼술법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은하검인 유극지의 몸에 대혼술법을 펼쳤지만, 그분의 혼에 의해 소멸되었습니다.”
남하림은 창천의 대혼술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신명항은 한마디 질문도 없이 설명이 끝날 때까지 듣고만 있었다.
혼이 움직이면서 상대방의 몸으로 넘어간다는 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신명항은 거짓말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거짓말이란 상대에게 이익을 취할 때 하는 행동이었다.
남하림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신려세가는 정파로 돌아서지 않을 것이었다.
혈사천의 무인들은 그들의 수장이 가짜인 줄 모를 뿐이었다.
그들이 모여 있는 혈사천과 신려세가의 사이는 변함이 없을 것이었다.
“걸황, 그대의 말을 믿네.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난 알고 있네.”
“믿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신명항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남하림의 말이 사실이라면, 주군은 가짜인 혈사천주에게 죽었다는 뜻이었다.
복수를 해야 했다.
“난 주군을 모시는 신하로서 마지막 충성을 다할 것이다.”
“형님!”
신명진은 다급히 그를 불렀다.
누구보다 신명항에 대해 잘 알았다.
그는 죽음까지 생각하며 혈사천주를 찾아갈 게 분명했다.
신명항은 똑바로 남하림을 바라보았다.
“걸황, 본인을 찾아온 이유를 알고 싶네.”
“전 사파 무림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광오하군. 하지만 걸황, 그대라면 충분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네.”
“고맙습니다.”
신명항은 남하림의 말을 인정했다.
유극지가 사라진 현재, 중원은 천하제일인이 걸황이라고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서른도 되지 않는 나이에 천하제일인이 된 무인은 역사상 걸황 남하림이 처음이었다.
“사파 무림이 다치지 않으려면 그가 가짜인 것을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혈사천에서 서신이 왔네. 그대들을 죽이라는 명이더군.”
“그렇군요.”
“걸황, 무슨 뜻인지 알았네. 내가 할 일은 정해졌어. 그가 주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것이네.”
“고맙습니다만 위험할 수 있습니다.”
“내가 굳이 남을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네. 하지만 내 한 목숨으로 사파인들의 억울한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네.”
“아빠…….”
신소소는 죽음을 각오한 그가 걱정이 되었다.
“녀석. 괜찮다. 무인이라면 죽음에 대해서는 항상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다.”
그는 모든 결심이 섰다.
신명항은 내당주 신명진에게 차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부탁했다.
“명진, 만일 나에게 좋지 않는 일이 생긴다면 혈사천주는 가짜가 확실하다. 본 세가는 네가 맡은 뒤 여기를 버리고 그곳으로 옮기도록 해라.”
“형님……!”
“후후후. 대하벽, 자네가 명진을 옆에서 많이 도와주게.”
그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목숨이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신명항은 이미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