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 은하궁주
부르르-
남하림의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그녀들의 심장이 떨렸다.
유극지의 상황을 들은 모녀.
가장 가까운 사람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여염집 여인들과 달리 무림 최고의 여인들이라 하나,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말이 사실인가요?”
“안타깝지만 제가 확인을 했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를 상황입니다.”
예설란은 의자에 힘없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동안 이상한 느낌을 받았던 모든 것들이 이해되었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던 이유까지.
‘바보같이…….’
혼자서 모든 것을 참고 있었다.
예설란은 일어났다.
그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야 했다.
예설란이 먼저 자리를 뜬 후에도, 유미령은 그녀와 함께 가지 않았다.
남하림은 유미령이 안정될 때까지 옆에서 기다려 주었다.
어릴 적부터 유미령에게 유극지는 무림의 정점의 찍고 일가를 이룬 무공 고수로서 존경심을 품고 우러러봐야 하는 존재였다.
유극지가 그녀의 아버지임에도 그랬다.
그는 영원히 강한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공자님, 아버지께서 공자님을 부른 이유가 또 있지요?”
“……어떻게 알았습니까?”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 잘 압니다. 그 일 때문이라면 굳이 공자님께 부탁을 따로 하지 않았을 거예요.”
“…….”
그녀의 예상이 정확했다.
남하림은 그에게 부탁받은 내용까지 알려주었다.
유미령은 숨을 죽이며 남하림의 말을 끝까지 경청했다.
“아버지께서는 공자님을 믿고 계시는군요.”
“워낙 출중한 인물이지 않소이까?”
“…….”
슬픔 속에서도 유미령은 작게 웃음을 지었다.
“그런 말을 하면 부끄럽지 않으세요?”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저는 세상에 한 줌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지요.”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진짜 어이가 없네요.”
“후후, 유 소저는 인상을 쓰는 것보다 그런 표정이 보기 좋습니다.”
“…….”
‘이 사람이…….’
가볍기도 하고 생각 없이 툭툭 말을 던지는 사람 같지만,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람이다.
“공자님은 여기를 어떻게 할 생각이신가요?”
“음, 돌아오면서 생각을 해봤는데, 은하궁을 맡을 생각은 없습니다.”
“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하시는 건가요?”
“거절이 아닙니다. 당연히 은하궁의 주인이 될 사람이 있거늘. 그 인물이 맡아야 하는 겁니다.”
‘은하궁의 주인?’
유미령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버지 외에 은하궁의 주인이 될 인물은 없었다.
“누구란 말이죠?”
“누구긴요. 은하궁에 그분의 자식이 누가 있나요?”
“……!”
유미령과 남하림의 시선이 마주쳤다.
설마 자신을 가리킬 줄은 몰랐다.
“왜 안 된다고 생각합니까? 여인이라서? 아니면 능력이 못자라서?”
“그게 아니라…… 전 검문의 제자라…….”
“유 소저. 본인도 개방의 제자이면서 이것저것 다 맡고 있습니다. 조금 이따가 신무맹의 맹주도 맡게 되겠죠.”
“…….”
“어려울 거 없습니다. 어려운 일들은 똑똑한 사람 찾아서 부탁하면 전부 다 됩니다. 정 힘들면 내가 도와줄 수 있고요.”
유미령이 은하궁을 맡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충분히 잘할 자신도 있었다.
“은하궁의 무인들도 본인보다는 유 소저가 궁주를 맡길 원할 겁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아니다 싶으면 그때 그만둬도 되지요.”
끄덕.
남하림의 말이 틀린 게 없었다.
유미령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후후후, 귀찮아질 일을 더 안 맡아서 다행이야.’
남하림은 안심이 되었다.
* * *
잠시 뒤.
유미령은 금지로 향했고.
남하림은 영화당에 홀로 들어섰다.
기다리던 일행은 무슨 일인가 궁금했는지 그가 오자마자 귀를 기울였다.
남하림은 그들에게 금지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장아, 정말 믿기질 않네.”
“무독, 나도 그래. 창천과 균천의 싸움이 이 정도로 컸을 줄 누가 알았겠냐.”
“하림 형이 양천의 전인이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이제 몽땅 정리할 수 있잖아!”
팽유도는 남하림을 믿었다.
무림의 전쟁은 구천의 싸움.
구천의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진정한 양천의 전인이 나온 이상, 모든 것이 끝날 것이었다.
“휴…… 그래도 궁주님에 의해 십천이란 조직이 사라졌다고 하니 다행이지 않아?”
“철각, 그건 의미가 없어. 십천은 가짜 창천주인 구천마제의 호위가. 즉, 개인을 위한 조직이었던 것 같다. 창천하고는 처음부터 상관이 없었던 모양이야.”
이휘연은 십천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했다.
“휘연 형 말이 맞아. 창천에게 십천은 불필요한 존재였어. 그냥 사라지는 게 창천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낫다고 판단했을 거야.”
“아하…… 그렇구나.”
성철각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장, 앞으로 우린 어떻게 할 거야?”
“균천의 전인이 다른 인물에게 이어진다고 해도 중원에는 당분간 나오지 못할 거야.”
“결국 창천은 우리가 상대해야 한다는 거네? 유천과 주천. 이들도 없애야 하고. 마교인 변천은 당분간 가만히 있을 거라곤 했지만, 믿을 수 없는 곳이잖아요? 호천만 빼면 전부 도움도 안 되네.”
팽유도의 말처럼 상대해야 할 구천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힘을 모아야 해. 그나마 은하궁을 상대하지 않게 된 게 다행이지.”
“그러게 말이다. 신무맹으로 은하궁을 상대했다면 십중팔구 서로 큰 피해를 입었을 테니까. 요걸 알게 되면 유천이나 주천에서 많이 아쉬워하겠네.”
유천의 설백진과 주천의 기성이 원하는 그림이 바로 신무맹과 은하궁의 격돌이었을 테니까.
남하림은 기합을 주었다.
“진정한 싸움은 지금부터야. 지금까지 우리가 겪었던 일들은 모두 잊어버려.”
“응!”
“알겠어.”
“우리 처음 만난 날 했던 약속대로야. 개방에 온 김에, 깔끔하게 천하제일대개방을 만들어주는 것! 마지막으로 모두들 힘내자.”
개방에 입방한 다섯 사람.
모든 곳에서 원치 않았던 아이들이 처음으로 모인 그날.
그들은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우릴 개방으로 보낸 것을 후회하도록, 천하제일대개방을 만들자.
그들의 대화를 듣는 두 사람.
탈혼마제와 황보궁은 중원 최고의 극비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창천과 균천의 대결도 신기하지만, 다섯 명의 대화도 재미있었다.
동네 싸움 이야기하듯 보였지만, 전부 하나하나가 중원 무림의 사활을 건 내용이었다.
‘궁금해.’
무림에서 이들이 과연 어떻게 움직일지, 계속해서 지켜보고 싶었다.
* * *
짙은 어둠이 가득한 동굴.
한 사내가 암흑 동굴에서 가부좌를 튼 채,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동굴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천주님, 소신 단저이옵니다.”
[무슨 일인가?]
사내는 동굴 입구로 다가선 단저에게 전음을 사용했다.
“구천마제술혼계획의 혼령 제압이 실패했습니다.”
[아쉽군. 성공할 줄 알았거늘. 그를 잡는다면 중원 무림은 끝났을지도 모르는 것을.]
“천주님, 대신 유극지를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크크크큭, 자네 말대로 유극지를 잡는다면 아쉽기는 하지만 수확은 얻은 편이지.]
“유극지가 사라진 은하궁을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이미 그자는 모든 것을 마무리 지었을 게 확실하다. 균천의 전인은 다른 인물에게 넘겼을 게 틀림없지.]
“…….”
[크크크. 균천은 더 이상 본인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 균천의 전인 중 최고의 인물이었던 유극지란 인물이 거슬렸을 뿐. 그가 없는 한 균천은 언제든지 칠 수 있다.]
“알겠습니다. 계획대로 염천을 지우기 위해 중원으로 나가겠습니다.”
[그건 자네가 알아서 하게. 물러가라.]
기척이 동굴에서 점점 멀어졌다.
계획이 틀어졌다.
아쉬웠다.
유극지는 그만큼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대혼술법을 밀어내며 구천마제의 혼을 이겨냈다.
‘구천마제. 그 녀석을 키운다고 고생했거늘.’
구천마제는 그의 대역이었다.
창천혼령과 검성 혁자성의 대혼술법.
창천혼령은 검성 혁자성의 혼을 밀어내고 그의 몸을 차지하면서 구천마제가 되었다.
검성의 무공은 물론 모든 내력을 끌어낸 후, 양천의 전인 상무우까지 싸워 이겼다.
창천혼령은 대혼술법을 익히기 위해 극악의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
하나 유극지의 몸을 차지하진 못했다.
창천주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음에는 좀 더 강한 녀석으로 대역을 만들어야겠어. 어디, 내가 들어갈 몸은 열심히 단련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현재의 모습으로 산 지 오십 년이 지났다.
‘이번에는 젊은 놈이라서 좋아. 과연 성공할지…… 크크큭.’
* * *
유극지는 다시금 남하림을 찾았다.
“공자님, 어서 오세요.”
유미령은 금지로 들어선 남하림을 반겼다.
‘울고 있었군.’
부은 눈을 보았다.
강한 여인이라 하나 부모의 앞에서는 자식일 뿐이었다.
“괜찮습니까?”
“네. 전 괜찮습니다.”
건물 안에서 유극지와 예설란이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정말 강하신 분이군.’
죽음까지도 이겨낸 듯한 모습.
무공이 강하다고 해서 죽음을 초월하는 것은 아니었다.
“두 분을 뵙습니다.”
“걸황, 왔는가? 여기에 앉지.”
“고맙습니다.”
네 사람은 같은 자리에 앉았다.
그는 나란히 앉은 남하림과 유미령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제3자가 두 사람의 관계를 억지로 만들 필요 없었다.
인연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흘러갈 터.
유극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미령에게 이야기를 들었네. 그게 자네 생각인가?”
“유 소저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능하겠지. 뛰어난 아이니까. 다만 한 세력의 수장이 되는 일은 뛰어나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네. 사람을 다스리고 이끌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 현 무림에서 이만한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인물은 자네밖에 없는데.”
“그건 궁주님께서 정확히 보셨습니다. 제가 아니면 감당하기 힘든 자리이긴 하지요.”
“……오호.”
‘또 자랑이네.’
툭!
유미령은 한 손으로 남하림을 툭 쳤다.
시선이 마주친 두 사람.
씨익.
남하림은 그녀를 보며 씩 웃었다.
“유 소저, 사실이지 않소이까?”
“하아…….”
유미령은 한숨이 나왔다.
그 순간, 앞에 유극지와 예설란이 보고 있다는 사실도 잊었다.
유극지와 예설란은 서로 얼굴을 보며 웃었다.
[가만히 있어도 될 것 같지 않소?]
[그러네요. 이 아이들을 보니 서로 좋은 사이인 것 같은걸요.]
“하하하, 자네의 말이 맞네. 그러니 은하궁은 자네가 맡도록 하게.”
“궁주님의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래도 유 소저가 은하궁을 맡아야 합니다. 명분도 있거니와 중원 무림에 모양새가 좋습니다.”
남하림은 다시 거절을 했다.
유극지의 눈에 잠시 실망의 빛이 나타났다.
“대신 제가 은하궁의 태상호법이 되어드리겠습니다. 그 자리라면 충분히 유 소저께 힘을 보태줄 수 있다고 봅니다.”
“태상호법이라…….”
남하림의 제안이 나쁘지 않았다.
태상호법은 어떤 권한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강한 힘을 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예설란도 남하림의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좋은 생각으로 보이네요. 은하궁의 사람들도 태상호법의 자리까지는 양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부인께서도 그런 생각을 한다면 좋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유극지는 결정을 내리기 전 마지막으로 유미령의 의견을 물었다.
“어떠냐? 은하궁을 맡겠느냐?”
“네, 아버지. 제가 하겠어요.”
그녀는 이미 결심을 한 상태였다.
바로 결정을 내렸다.
“좋다. 내일부터 은하궁의 궁주에 오를 준비를 하도록 하자.”
“네.”
* * *
나란히 선 두 사람.
유극지와 남하림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있느냐?”
“이미 외줄에 올라탄 느낌입니다. 뒤로 물러날 수도 없습니다.”
“후후후. 자신이 있는 모양인데?”
“안 되면 죽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맞다. 어떻게 죽느냐가 다르겠지만 모두가 죽지.”
스윽.
유극지는 한 권의 심공서를 내밀었다.
항혼정법(抗魂正法).
“이것을 받아라.”
“무엇입니까?”
“혹시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익힌다면 대혼술법에 대항할 수 있을 게야.”
“……고맙습니다.”
남하림은 심공서를 받아 넣었다.
“이제 내일 당장 어떻게 되어도 걱정이 없군. 모두가 자네 덕분이다.”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지. 가장 소중한 것들을 지켜주고 있지 않는가. 그녀들과 은하궁을…….”
“…….”
“한 사내로서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최악의 상황이지 않습니까. 아무 일 없을 수도 있습니다.”
“후후후, 나 또한 기우라면 좋겠지만…… 어떻게 될지 알 수 있다네.”
“궁주님…….”
유극지는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고통을 참으면 참을수록 머릿속에서 죽음의 기가 빨리 퍼지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이 우리가 볼 마지막이겠군.”
“궁주님을 알게 되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남하림은 그 자리에서 마지막 인사를 했다.
“나도 자네를 만나서 좋았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번 안아보면 되겠나?”
스윽.
유극지는 남하림을 두 팔로 안았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두 여인.
그녀들의 눈가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 * *
남하림과 일행은 은하궁을 나섰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다.
궁주 수업을 받기 위해 유미령은 더 이상 함께하지 못했다.
황보궁이 가장 아쉬워했다.
그녀를 친누나처럼 따르며 좋아했으니까.
은하궁을 나선 지 한 시진도 지나지 않은 시각.
“아…… 누나 보고 싶다.”
황보궁은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유미령이 엷게 웃으면서 따라올 것만 같았다.
“궁아. 너도 아쉬운가 보구나.”
“유도 형. 이젠 우리들과 함께하지 못하나요?”
“아니야. 성문에서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했잖아?”
“아……! 맞네요. 누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잖아요.”
황보궁은 다시 얼굴이 밝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