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은하성에 도착하다
은하궁.
한때 중원 무림맹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무림 세력.
은하검인 유극지.
현 무림 최고의 인물 중 한 명으로 은하궁의 주인이었다.
중원 무림인들은 그가 무림맹을 와해한 후, 무림을 향해 검을 휘두를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달랐다.
그는 은하궁에서 나오지 않은 채 특별한 행동 또한 하지 않았다.
유극지의 집무실 밖에서, 누군가 도착한 기척이 들렸다.
“궁주님, 부명욱입니다.”
“들어오게.”
비선당 수장 부명욱이 들어섰다.
유극지는 허리를 숙인 그를 쳐다보았다.
“연락이 온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상황은?”
“십천이 완전히 전멸했습니다.”
“다행이군.”
“완벽한 승리입니다.”
“후후후.”
구천마제의 안배 중 하나인 십천을 정리했다.
‘운이 좋았군.’
생각대로 십천이 움직여 주었다.
조금이라도 의심했다면 십천을 완벽히 제거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이번에는 창천인가?’
구천마제의 기억에 의하면 창천은…….
찌이이잉-!
“……!”
갑자기 머리가 깨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창천에 대해 기억하려고 할 때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부명욱은 인상을 쓰는 유극지를 보며 놀랐다.
“궁주님, 괜찮으십니까?”
“아…… 아니다. 지금은 괜찮다.”
유극지는 구겨진 인상을 폈다.
“요즘 신경을 쓴 모양이군. 쉬어야겠어.”
“소신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야. 자네는 볼일을 보게.”
* * *
유극지는 홀로 창문 아래로 은하궁을 내려다보았다.
‘두통 주기가 빨라지고 있어.’
구천마제의 혼은 완전히 지웠다.
이제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건만.
한 달 전부터 이상한 현상이 시작되었다.
머리가 깨지는 듯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고통이 오는 간격이 빨라졌다.
‘잘못된 게 틀림없다. 아니면…….’
만약 이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구천마제의 기억에서 십천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창천의 기억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의 기억의 일부가 사라진 게 아니라.
마치 처음부터 기억이 없었던 것처럼.
‘잘못된 게 맞다면……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당한 것은 그가 아니라 바로 나다.’
타악.
유극지는 두 손을 창문틀에 걸쳤다.
‘대책을 세워야 한다. 가만히 기다릴 수는 없어.’
유극지는 곧바로 책상 앞에 앉았다.
‘휴우…….’
호흡을 다스린 후.
슥슥슥.
백지 위에 글을 적어 내려갔다.
균천지에 있는 유지황에게 보낼 서신.
붓이 움직일 때마다 유극지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스윽.
유극지는 붓을 내려놓았다.
“은령, 잠시만 나와 보게.”
스르륵.
마치 바닥에서 올라오는 듯한 인영의 모습.
“천주님, 부르셨습니까?”
“부탁할 게 있네. 이 서신을 지황에게 전해줄 수 있겠나?”
유극지의 손에는 서신과 함께 수정으로 만든 패가 있었다.
균천지패가 틀림없었다.
“천주님.”
“느낌이 이상해. 은하궁은 사라져도 되지만 균천은 이어져야 하지 않겠나.”
은령은 균천을 지켜야 하는 수호령의 일인이었다.
“내 예감을 잘 알지 않는가. 지금 내 몸은 정상이 아니야. 더 나빠지기 전에 움직여야 할 게야.”
“……알겠습니다. 서신과 함께 균천지패를 전달하겠습니다.”
“고맙네. 그리고…… 걸황에게 본인이 한번 만나고 싶어 한다고 전해주면 좋겠군.”
“그에게 따로 연락을 하겠습니다.”
“고맙네. 지금 바로 움직였으면 하네.”
스으으으-
은령의 신형이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그가 아니라…… 내가 당한 거야.’
창천을 무너뜨리고 구천의 수장이 될 것이라 자신했다.
‘창천주…… 진정한 얼굴을 보고 싶군.’
* * *
황궁은 새로운 황제의 즉위로 바빴다.
황궁수천은 다시 수면 아래로 잠겼다.
남하림은 황궁을 떠나기 전날, 황제가 될 오왕 주민을 만났다.
황제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한마디.
“황궁수천의 존재는 기억하되 잊어도 됩니다.”
오왕 주민은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했다.
황궁에서 나온 일행.
그들의 목적지는 신무맹이 있을 남양성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의 인상착의가 널리 알려져 있던 터라,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몰려드는 중원인들에 의해 움직이는 속도가 느려졌다.
“아하하, 이놈의 인기란.”
보통이라면 피곤한 표정을 짓거나 싫어하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
“자네들 부장이란 녀석은 확실히 보통 인간과 다른 것 같군.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탈혼마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저런 성격을 지니게 되는지 모르겠군요.”
유미령도 한마디 하며 거들었다.
탈혼마제와 유미령도 일반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일황사제, 다섯 명은 확실히 특이했다.
“하긴 똑같은 녀석들이니 같이 다니는 게지. 개방 방주가 희한하게도 잘 모아놨구나.”
탈혼마제는 앞서가는 남하림을 불렀다.
“걸황, 하나만 물어보자.”
남하림은 뒤를 돌아섰다.
“또 귀찮게 하시네요.”
“이번이 마지막이다.”
“벌써 그 말만 백 번째입니다. 이번에는 뭡니까?”
“무소유행(無所有行)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이 뭐냐?”
“만마심공에 그런 구절도 나오나요? 완전 불경 서적이 아닌가요?”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먼.”
“노인장, 머리도 나쁘시면서…… 익히지 마세요. 손발이 고생해요.”
“이놈 자식. 내 손발이 고생하니깐 상관하지 말거라.”
“아이구…… 잠깐 이리 오세요.”
‘저놈 새끼…… 지가 오면 될 일을. 어른에 대한 공경심이라고는 전혀 없도다.’
탈혼마제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아쉬운 사람이 가야 했다.
슈우우욱!
그때였다.
남하림의 손에서 내력이 쏟아져 나왔다.
“허억!”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남하림의 내력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퍼어어엉!
탈혼마제의 몸 안에 있던 공기가 터졌다.
“크윽, 이놈아, 이게 무슨 짓이냐?”
“잘 들으세요. 내력, 기(氣)의 식(識)은 형은 있으나 무(無)를 느끼지 못한다면 내가 가진 모든 내력이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죠. 만물회귀. 이건 무슨 말인지 아시죠?”
“…….”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남하림의 말을 마음속으로 계속 중얼거리자,
‘식을 느끼지 못한다면 무소유라는 것인가? 식을 느껴 처음으로 가라는 뜻인가?’
많은 생각들이 하나씩 나타나고 사라졌다.
그러는 사이 그는 점점 고뇌에 빠져 들었다.
보행수행(步行修行).
탈혼마제의 주위를 다섯 명이 둘러쌌다.
그는 만마심공의 한 부분 벽을 깨뜨리며 들어서는 중이었다.
일각이 지났다.
탈혼마제의 눈동자가 변했다.
탁했던 눈동자는 투명할 정도로 맑아졌다.
“크하하하하!”
온몸이 힘이 넘쳐났다.
마(魔)의 기가 넘쳤다.
누구와 싸워도 절대로 지지 않을 것 같았다.
“걸황. 일단 고맙기는 해.”
“별말씀을. 좋은 성취를 얻은 것 같네요.”
“크크크큭, 큭, 조만간 한 번 붙어보고 싶구나. 안 그러냐?”
“원한다면 얼마든지 상대해 드리죠. 대신 내력이 사라졌으니 돌려달라고 하면 안 됩니다.”
“……크흠.”
탈혼마제는 입맛을 다셨다.
앞뒤 볼 것 없이 달려들고 싶어도, 껄끄러운 부분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하며 주워 들었던 내용에 의하면 이러했다.
양천의 전인이 익힌 무공은 무단의 무공.
상대의 내공을 완전히 무(無)로 바꿀 수 있다고 했다.
그것도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부딪치지 않고 무형기로 펼치면서.
‘이 녀석의 말대로라면 이미 천하제일인이다.’
“지금 한번 해볼까요?”
“아니, 지금 말고. 아직 만마심공이십이 성으로 대성하려면 멀었구나. 그때 보자.”
“그러죠.”
“…….”
남하림의 기세에 완전히 눌렸다.
“유도 형, 마노께서 완전히 잡히신 듯하네요. 맞죠?”
“오, 궁아가 이제 잘 보는구나.”
“이봐, 황보 꼬맹이. 무슨 말을 하는 게냐. 아직 때가 안 된 것뿐이다. 알겠느냐?”
슬쩍.
황보궁은 돌아서며 대답 없이 미소만 지을 뿐.
“허어, 이젠 싹이 새파란 어린놈도 나를 물로 보는군.”
* * *
처억.
이휘연이 손을 위로 들어 일행을 멈췄다.
순간, 일행 앞에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냐?”
“은하궁 궁주님의 전언을 전해 드리러 왔습니다.”
유미령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버지가?’
“은하궁주를 말하는 것이오?”
“그렇소이다. 걸황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남하림이 서너 걸음 앞으로 나섰다.
“본인이 남하림이오. 궁주께서 어떠한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소?”
“궁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쁜 일이 많겠지만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한 번 만나고 싶다고 전하셨습니다.”
“본인을?”
“그렇습니다.”
“만나는 일이야 어려운 건 아니지만. 이유는 어느 정도 알고 가는 게 좋지 않겠소?”
“죄송합니다. 저 또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좋습니다. 곧바로 은하궁으로 가서 그분을 뵙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소신이 바로 은하궁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
일행은 정주를 통해 남양성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계획을 잠시 수정했다.
정주 은하궁은 남양성으로 가는 길목에서 며칠만 벗어나면 됐다.
유미령은 남하림이 은하궁으로 두말없이 가겠다고 했을 때 내심 놀랐다.
“남 공자께서 허락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마울 건 없습니다. 가는 방향이 비슷하지 않소이까. 유 소저께서도 오랜만에 두 분을 뵐 수 있을 것입니다.”
남하림의 미소는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 * *
일행이 빠르게 움직인 덕에 정주에는 사흘 만에 도착했다.
구우우우웅-
은하궁의 성문이 굉음을 내며 안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벌써 걸황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접한 인물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유극지의 명을 받은 부명욱이 남하림의 앞으로 다가섰다.
“어서 오시지요. 걸황을 뵙소이다.”
“환영을 해줘서 고맙소이다.”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제가 여러분들을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일행은 늘 영화당으로 안내를 받았다.
들어가는 풍경들이 익숙했다.
“이곳에서 편히 쉬고 계시면 됩니다.”
“그러지요.”
부명욱은 일행과 들어서는 유미령을 보았다.
“아가씨께서는…….”
“저도 이들과 함께하겠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어디에 계시나요?”
“두 분께서는 금지에 계십니다.”
유미령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함께 온 것도 아시나요?”
“알고 계십니다.”
“나중에 찾아뵙겠다고 전해주세요.”
유미령은 돌아서며 일행과 안으로 들어섰다.
덜컹!
“네놈들을 따라다니니 별 곳을 다 가보는구나.”
황궁에 이어 은하궁까지.
탈혼마제는 예전과 다르게 어느 곳에 있든지 편안해졌다.
“여기도 자주 오니 익숙해지네.”
“나도 같은 생각이야. 물건들도 예전 그대로고.”
스윽-
팽유도가 의자를 끌고 당무독의 곁으로 다가섰다.
“어째 예전과 다른 분위기가 된 거 같지 않아요? 별로 적대심도 보이지 않고…….”
“그러게. 무슨 일이 있나 몰라.”
당무독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영화당으로 오는 동안 받은 은하궁 소속의 무인들의 시선.
‘호감을 보이는 것 같던데. 뭐 때문인지 모르겠네. 우리가 따로 이들을 위해서 한 일도 없는데.’
“부장은 뭔가 아는 게 없어?”
“글쎄다. 우리가 지금까지 한 것이라곤 황궁하고 북방에 간 것밖에 없잖아. 그 일은 여기 은하궁과는 상관이 없을 테고. 나중에 궁주를 만나게 되면 알게 되겠지. 기다려 보자.”
“알겠어.”
“다들 푹 쉬어.”
* * *
영화당에 들어선 지 반시진이 지났다.
“누가 오는군.”
안으로 들어서는 기척.
‘여인?’
바람 속으로 향이 느껴졌다.
“들어가도 되나요?”
누구의 목소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검후께서 오셨네.’
남하림은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선 예설란을 맞이했다.
“예설란 님을 뵙습니다.”
“이제는 걸황이라 불러야겠군요. 오랜만입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그녀의 얼굴은 예전보다 훨씬 나았다.
예설란은 유미령을 보며 싱긋 웃었다.
“항상 네 소식을 듣고 있었다. 북방까지 걸황과 둘이서만 갔었다지.”
“…….”
유미령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무슨 의미로 묻는지 확실하게 의도도 파악하지 못했다.
“잘 다녀왔느냐?”
“잘…… 다녀왔습니다.”
“그러냐? 후후후.”
유미령은 얼른 전음을 보냈다.
[아니에요. 그 소문은 아니라니깐요.]
[무슨 소문? 난 그냥 물어본 것밖에 없어.]
[…….]
“후후, 걸황. 상공께서 그대를 보고 싶어 하세요. 늘 만나던 곳에 가면 계실 겁니다.”
“지금 말입니까?”
“그대와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지요. 자리를 비울 겸 내가 말을 전하러 온 것이고.”
“알겠습니다.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금지에서 단둘만 만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유극지의 뜻.
남하림은 영화당을 나가며,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