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황무적-217화 (218/328)

217. 신명항을 만나다

현천지문(玄天之門).

석벽 위에 뚜렷하게 새겨져 있는 글자가 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저벅저벅.

문 앞에 멈춘 인영.

내력을 올린 손으로 석문을 밀었다.

스르르륵-

석문이 안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양쪽 벽 사이에 붉은 불빛이 안을 환하게 밝혔다.

스윽.

밖으로 나오는 기척이 들렸다.

“만통자님, 오셨습니까?”

“회주님께서는 어떠하신가?”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홍 단주, 앞장을 서게나.”

만통자는 그의 뒤를 따랐다.

석벽의 총 길이는 십여 장 정도 되었다.

천천히 걸으며 석벽의 통로를 빠져나오자 넓은 공간에 정자가 나타났다.

만통자를 안내하던 그는 걸음을 멈추며 옆으로 물러났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들어가시면 됩니다.”

“알겠네.”

만통자의 표정은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굳어 있었다.

정자로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길게 뻗은 의자에 반쯤 누워 있는 인물.

황궁수천의 수장이자 현천의 전인이었다.

“회주.”

만통자는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만통자, 오셨소이까?”

“그대로 계시지요.”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그를 말렸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

그의 안색이 창백했다.

“건강은 어떠하십니까?”

“항상 그대로이지요.”

회주는 여전히 허리를 숙인 채 서 있는 만통자를 보았다.

“이런…… 앉으세요.”

만통자의 눈가에 슬픔이 가득했다.

“허허…… 괜찮소이다. 사람이라는 게 아프기도 하고 죽기도 하지 않소이까. 하늘의 뜻을 어찌 사람이 알겠소이까.”

‘천주…….’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했다.

십 년 동안 싸운 긴 병마에 몸과 마음이 지쳐간 모습이 확연했다.

“오늘 만통자를 부른 이유는…… 때가 된 듯하군요.”

“회주, 아직은……!”

“아니외다. 이 자리는 아무런 힘도 없는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지요.”

“황궁의 일이라면 저희들이 나서 처리할 수 있습니다.”

회주는 고개를 힘겹게 좌우로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들의 힘은 강합니다. 그들은 금의위까지 거두었소이다. 게다가 북방에 있는 여진과도 손을 뻗은 상태입니다.”

천운을 거스르고 있었다.

“허어…… 그들의 운명은 천하를 가질 때가 되지 않았거늘. 벌써 중원을 노린다는 것인지. 동창에서 큰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천운을 억지로 만들 수는 없지요.”

만통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러기에 본인이 부탁을 하는 것이외다.”

“……알겠습니다.”

만통자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이치를 읽는 현천의 전인.

회주의 말에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듣기에 그 아이가 황궁으로 올라올 것이라 하더군요.”

“하후도 장군과 함께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말로 다행이지 않소이까? 이 시국에 양천의 전인이 나타난 것이…….”

그는 이미 결심을 한 상태.

“회주께서는 처음부터 양천의 전인에게 이곳을 물려줄 생각이셨지요.”

“…….”

“그래서…… 저를 그에게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현천을 충분히 이끌어갈 수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후후후…… 만통자를 어찌 속이겠소이까. 맞습니다. 만통자께서 그를 인정하신다면 현천의 모두가 따를 것입니다.”

“회주, 그가 새로운 현천의 수장이 된다 해도 어쩌면 구천이 모두 사라질 수 있소이다.”

“구천지명이 무존(無存)이라면 받아들여야지요.”

“……알겠습니다. 그가 황궁으로 올라오면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오늘 이 시간부로 현천의 전인은 본인이 아니라 걸황입니다.”

현천지패(玄天之牌).

만통자는 그의 손에 들린 신패를 경건하게 받았다.

* * *

‘누가 내 험담을 하나?’

왼쪽 귀가 간지러웠다.

휘비적.

남하림은 귀를 후볐다.

포양호에서 나온 일행의 목적지는 황궁.

무림인들의 속도는 군부의 군사들이 움직이는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더구나 내력을 이용해서 신법을 펼치면 거의 열 배 이상 차이가 벌어질 수 있었다.

‘약간 시간이 남으니 잠시 남양에 가서 양삼을 만나보고 가는 게 좋겠어.’

신무맹을 정식으로 출범할 시기는 남양에 모든 건물들이 완벽하게 지은 후.

하지만 그 외는 이미 모든 준비는 끝이 난 상태였다.

신무맹 소속으로 가입한 문파들에서 내원의 인물들이 정해졌다.

내원의 인물들 중에서 내원 수장은 무당파의 진후 도인이 맡게 되었다.

무당파의 장로 출신으로 사리분별이 분명하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었다.

신무맹의 맹주와 함께 내원 수장의 임기는 오 년으로 정했다.

당연히 신무맹의 초대 맹주는 내원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걸황 남하림이 뽑혔다.

그리고 걸협오성인 이휘연, 당무독, 성철각, 팽유도를 각각 검제, 독제, 각제, 도제라 칭했다.

무림 역사상 나이 삼십을 넘기 전에 황(皇)과 제(帝)의 칭호를 받은 무인은 걸협오성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라 전해졌다.

* * *

채애애앵!

채애애앵!

멀리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무림맹이 와해된 후, 곧바로 신무맹이 들어서면서 정파 무림은 안정을 찾아갔다.

하지만 사파 무림은 혈사천주의 공표 후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의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싸워댔다.

“또 싸우나 보네…….”

언덕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보지 않아도 뭔지 알 수 있었다.

사파인들끼리 치고받는 중이었다.

“구경이나 하고 가죠. 재미있겠는데.”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이 남들 싸우는 모습이라 했다.

“부장. 그럴까?”

남하림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언덕을 올라가는 다섯 명이었다.

“킬킬, 싸움 구경이 재미있다는 일황사제를 보면 중원 무림인들이 뭐라고 할까?”

“그러게요.”

일황사제.

중원 무림에서는 어마어마한 위명을 떨치는 인물들이었지만.

다섯 명이 행동하는 모습들을 보면 가끔씩 천진난만할 정도로 아이들 같았다.

‘사내들은 성인이 되어도 애들 같다고 하더니.’

언덕 위에 올라선 그들은 싸움 현장을 주시했다.

사파 무인들은 백여 명의 무리들을 막아내고 있었지만 쉽게 밀어내지는 못했다.

“어? 하림 형, 저들은 신려세가 사람들 같지 않아?”

“맞군. 가만히 구경하려고 했는데…….”

남하림은 그들과 인연이 있었다.

“신려세가와 싸우는 곳은 어디지?”

“흐음……? 어깨에 두 마리 뱀이 보이는 걸로 봐선…….”

“쌍두사문이군.”

이휘연은 그들을 바로 알아보았다.

호북성 무당파 출신이기에 웬만한 사파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쌍두사문이라면 신려세가에 비빌 수 없을 텐데. 뭔가 있는 것 같군.”

“가서 물어보자.”

“좋아요!”

타앗.

남하림은 신형을 날렸다.

* * *

‘뭐지?’

대하벽은 순간 빠르게 다가오는 기를 느끼면서 흠칫했다.

그리고 이내 안심했다.

‘걸황!’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잠시 물러나라!”

대하벽의 명에 아수군의 수하들이 뒤로 물러났다.

쌍두사문 쌍혈대주 각초신도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인물들을 주시했다.

눈에 익은 모습들.

‘설마…… 그들……?’

하도 소문을 많이 들어 머리에 박힌 모습.

다섯 명의 청년 거지들.

일황사제(一皇四帝)가 틀림없었다.

그 뒤로 가장 덩치가 커다란 청년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일황사제를 뵙습니다.”

대하벽이 공손하게 반겼다.

“아하하, 지옥검향께서 맞군요. 얼핏 지나가면서 본 터라 바로 못 알아봤습니다.”

“괜찮습니다.”

남하림은 반대편을 보았다.

“당신들은 쌍두사문이라 들었소이다.”

“아…… 예에…….”

각초신은 얼떨결에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오랜만에 지인을 만났군요. 오늘은 그대들이 그만 물러가는 게 좋겠소이다.”

“…….”

걸황의 말에 바로 물러나야 하나?

자존심인지, 아니면 소문을 믿지 않은 것인지, 각초산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허, 모두 다치고 싶은 모양입니다.”

슈우우우욱-

남하림이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손바닥에서 펼쳐진 일장의 위력은 폭풍보다 강했다.

콰아아아앙!

각초신은 깜짝 놀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헉…… 상대가 되지도 않잖아!’

그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물러나야 해.’

“걸황님,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걸까요?”

“그게…… 저희들이 말을 듣지 않아서…….”

“이런, 본인이 한 번 말을 했을 때 그대가 들어서야 했소이다.”

툭.

남하림은 가볍게 어깨를 튕기며 손을 뻗었다.

파아아앙-!

각초신의 정면으로 태산을 압도할 장법이 떨어졌다.

퍼어어어억!

휘이이이이익!

장기(掌氣)의 위력에 각초신의 몸이 뒤로 십여 장 뒤로 날아갔다.

털썩.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그는 이미 정신을 잃었다.

“쌍두사문에 돌아가거든 본인의 말을 똑바로 전하시오. 신려세가는 건드리는 것은 본인을 건드리는 것과 같다고. 알아들었소이까?”

“……!”

쌍두사문의 사파인들은 안색이 굳어졌다.

그들은 죽고 싶지 않았다.

후다다닥!

쌍두사문 사파인인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대주를 업고 사라졌다.

주변의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가 되었다.

척.

대하벽은 감사의 포권을 했다.

“어떻게 된 일이오? 쌍두사문에서 싸움을 걸 정도는 아니라고 하던데.”

“그들은 혈군사의 명을 받았습니다.”

“혈사천주와 혈군사가 완전히 갈라선 게 확실하군요.”

“그렇습니다.”

최근 사파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싸움들은 두 세력의 주도권 싸움이었다.

“여긴 의창에서 제법 떨어진 곳이지 않습니까?”

“이곳에 본 세가의 화진 지부가 있습니다. 쌍두마문이 계속 노린다는 전서를 받아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사파가 요즘 많이 시끄럽군요.”

“혈군사에 동조한 문파나 세가들이 많습니다.”

“그는 보통 인물이 아니지요.”

혈군사 기성은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이었다.

“그분은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주군께서는 화진 지부에 계십니다. 뵙고 가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그런가요? 잘됐습니다. 가시죠.”

남하림의 신분은 예전과 달랐다.

신무맹의 맹주인 그가 사파의 가주와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주군께서 좋아하실 것입니다. 제가 앞장을 서겠습니다.”

* * *

화진 지부에 내려온 신명항.

쌍두사문까지 칠 계획으로 내려온 것이다.

‘기성, 이놈이…… 사파를 반으로 가르고 있다.’

사파가 하나로 뭉쳐도 어려운 시기에 분란을 조장하고 있었다.

‘주군께서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마셨어야 했다.’

신명항이 보기에는 기성을 천사회의 군사로 받아들인 것부터 실수였다.

후다다다다-

그때, 정문에서 다급히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가주님!”

“무슨 일인가?”

지옥검향 대하벽을 보낸 뒤 상황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정문에 군장님이 도착하셨는데…… 일황사제, 다섯 분과 함께하셨습니다.”

“방금 누구라고 했는가? 일황사제?”

“네. 맞습니다.”

신명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황은 신무맹의 맹주였다.

정사가 나뉘어 있지만, 함부로 할 수 없는 직위.

‘그가……!’

신명항이 다급히 정문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화진 지부의 경내로 들어서는 일행과 마주쳤다.

‘걸황.’

이제는 후개가 아니었다.

여전히 번쩍이는 금(錦)으로 만든 걸복.

“하하하하! 걸황, 어서 오시지요.”

“가주님, 반갑습니다. 아이구, 요즘 못 먹고 다니십니까? 얼굴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하긴 고생이 많으시단 말을 들었습니다.”

“하하하하!”

남하림을 보니 예전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그 뒤로 다른 네 명과도 곧바로 인사를 나누었다.

“이번에 감축드릴 일이 생긴 것 같소이다. 신무맹의 맹주가 되신 걸 축하하외다.”

“축하까지야. 뭐……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중원 정파의 최고 자리가 대단한 게 아니라면 무엇이 대단한 것입니까?”

“천하제일인이 되어야 최소한 축하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천하제일인이 아니고서는 만족하지 않는다고 당당히 밝히는 배포.

‘암, 사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모두 안으로 드시지요.”

“고맙습니다.”

신명항은 안으로 안내를 하면서 일행들 뒤에 함께하고 있는 탈혼마제를 보았다.

이들 일행에 대해 소문이 난 터라 노인이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익히 소문을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여쭈면 될런지요.”

“신구명의 자식이더냐?”

“그렇습니다.”

“그놈 아래로 제법 쓸 만한 녀석이 나았군. 그냥 선배라 불러라.”

“알겠습니다.”

* * *

천사회가 와해되면서 천사혈천이십문은 자연스럽게 흩어졌다.

중원 무림은 사파 무림이 소극적으로 움직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오히려 사파의 움직임은 천사회에 속해 있을 당시보다 더 활발했다.

중간에서 제재하던 천사회가 사라지자 사파인들은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과감하게 움직이지 시작했다.

“현재 사파는 세 부류로 나뉘어졌소이다.”

혈사천주를 따르는 세력.

혈군사를 따르는 세력.

나머지는 스스로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 세력이었다.

“복잡하군요.”

“혈사천주께서 천사회를 와해시킨 이유를 모르겠소이다.”

신명항뿐만 아니라 무림인들 대부분은 구천에 대해서 몰랐다.

“혈군사 때문입니다.”

“걸황, 무슨 말인지?”

한마디 툭 던지듯 말을 한 남하림을 보았다.

“그자와 혈사천주는 같은 곳을 향하는 배를 탔소이다. 하지만 각자의 뜻대로 배를 몰고자 하니 잘될 수가 있겠소이까. 결국 헤어지려면 천사회를 와해시켜야지요.”

신명항은 이해가 되었다.

“가주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분을 주군으로 모셨소이다. 그대와의 인연도 중요하지만 그분을 배신할 수 없소.”

“이해합니다. 각자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지요. 저 또한 당분간 그와 싸울 일은 없습니다. 먼저 건드리지 않는다면 크게 문제가 안 될 겁니다.”

신명항은 혈사천주와 걸황 사이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들어 알고 있었다.

‘나중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미리 생각할 필요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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