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기성, 도망가다
갑자기 세상이 떠들썩해졌다.
탕아앙! 탕탕!
뿌우우우우-!
북 소리와 나팔 소리가 염성평야를 가득 채웠다.
“개방의 제자들이여. 한바탕 놀아보자꾸나!”
남하림의 외침에 신풍걸이 소리쳤다.
“후개께서 놀아보고 싶다고 하신다! 뭣들 하느냐?! 장타령을 울려라!!”
“우우우우우우우우-”
“어어어어얼씨이이구우우우우- 조오타아아아!!”
“저어어어얼씨이이이구우우나- 조오오오타아!!”
“처어어어언화아아아아제에에에에이이이일 와아아아아앗도오오오다-!!”
염성평야를 울리는 악기 소리와 장타령은 다급하게 돌아가던 혈군사 기성의 생각을 멈추게 만들었다.
‘망할 거지 새끼들.’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이 없었다.
이만 명이 지르는 괴성 같은 타령.
짜증이 났다.
‘당했다. 처음부터 당했던 거였어.’
오행진으로 보이게 만든 뒤 그를 유인했다.
그리고 역으로 함정을 만들었다.
천사광명군과 천사수호군.
남궁세가와 역천군은 완전히 갇혀 빠져나올 수 없었다.
더구나 개방이 평사진을 펼치며 내려오고 있었다.
‘모두 죽일 생각이야.’
평사진을 펼친 것은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는 의미.
혈군사 기성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언제든지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곳이 중원 무림이어야 하지 않았던가!
‘망할 놈.’
양천의 전인.
하필이며 그가 개방의 후개였다.
중원 무림을 차지한 양천.
이제, 구천의 세력 중 가장 큰 힘을 가진 곳은 양천이었다.
* * *
우우우웅-
강한 기가 부딪히는 소리.
남궁강과 역위천이 마주 섰다.
“불사무혼, 드디어 서로 검을 부딪쳐 보는군.”
“우리들에게는 그 한 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지 않는가?”
“맞소.”
찌이이이잉-
남궁강의 손에 들린 창천검에서 검명이 울렸다.
역위천의 불사검이 바로 반응을 보였다.
“좋은 검이군.”
“그대의 검도 뛰어나오.”
검을 앞으로 겨눈 남궁강과, 아래로 검을 비스듬히 내려놓은 역위천이 서로를 주시했다.
‘남궁세가 최고의 검. 얼마나 강한지 볼까?’
역위천이 먼저 움직였다.
남궁세가의 검에 초식의 우위를 따질 수는 없었다.
호천의 검은 생사검(生死劍).
슈욱-
역위천은 왼손을 뻗어 앞으로 내밀었다.
오른손에 있던 불사검이 언제 왼손으로 옮겨졌는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남궁강은 불쑥 튀어나온 불사검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나 그 또한 남궁세가의 가주이자 절대고수.
보법을 밟으면서 허리를 돌렸다.
핏!
옆구리에 불사검이 스치며 지나갔다.
최소한의 피해는 어쩔 수 없다.
남궁강은 바로 반격했다.
무애무량(無愛無量)의 초식.
푸른 하늘이 펼쳐지며 그 안에 검의 세상이 담겼다.
스파아앗-
창천검의 푸른 검강.
역위천의 가슴에 남궁의 검이 쏟아졌다.
스르르릉-
역위천은 불사검을 천천히 앞으로 끌어당기며 호신검공을 펼쳤다.
채애애애앵!!
창천검이 튕기며 남궁강의 신형이 뒤로 밀려났다.
‘좋군.’
역위천은 남궁강의 검에 만족했다.
역시 중원제일의 검가.
검황의 전설을 지닌 세가이기도 했다.
‘하나 이 정도 가지고는 남궁세가의 검이라고 할 수 없지.’
역위천은 아쉬웠다.
좀 더 강한 상대였으면 했는데.
‘여기서 끝을 내야겠군.’
생사검의 천무.
불사지검 생사지경이라.
스으으윽-
천천히, 역위천의 신형이 떠올랐다.
그의 신형이 붉은 기로 감싸였다.
그리고,
번쩍!
한 줄기 붉은 빛줄기가 남궁강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막을 수 없어.’
빛을 범인이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남궁강의 신형이 붉게 변하고, 아래로 몸이 처지면서 쓰러졌다.
남궁세가 가주의 죽음은 곧바로 전장의 승패에 영향을 주었다.
호천의 무인들에 의해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한두 명씩 쓰러졌다.
“크으으윽-”
역천군장 여지홍 또한 앞에 나타난 사내에 의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한심걸. 이토록 진한 살기를…….’
그는 한심걸의 무공은 직접 싸우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자자한 소문이라도 그의 실력을 담아낼 수 없었다.
붉은 태극 문양의 무서움은 직접 상대해야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었다.
다행히 급소는 피했지만 이제는 움직일 힘도 없었다.
“개방이 이렇게 강할 줄은…….”
“당신이 약한 거요.”
“……크.”
이휘연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맞다. 내가 약한 것이겠지.’
슈우우우욱-
살기가 점점 강해졌다.
“마지막이오.”
“진정 오가련과 원수가 되려는 것인가?”
“시작은 오가련에서 먼저 했소. 원수가 되고자 한 건 당신들이고. 부장이 말했지. 중원 무림을 건드리는 자가 있다면 죽을 각오를 한 뒤 덤비는 게 좋을 것이라고.”
스걱-
결국 여지홍은 마지막으로 이휘연의 홍태극문양을 보며 숨을 거두었다.
천사광명군 군장 학우청과 천사수호군 군장 조판상은 팽유도와 성철각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콰아아아앙!
팽유도는 묵흑반도를 내리치면서 학우청을 일방적으로 몰아쳤다.
콰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십이 성의 내력은 끊임없이 펼칠 수 없다.
하지만 팽유도는 십여 초를 계속해서 전 내력으로 펼치면서도 호흡에 변화가 없었다.
‘이, 괴물…… 같은 놈이! 대체 내력이 어떻게 되기에……!’
여유가 있어야 반격을 할 수 있다.
점점 강해지는 팽유도의 공격에 학우청은 죽을 맛이었다.
반도천멸도법의 저화시공(底化始空).
공간을 뚫고 들어가듯 강맹한 도가 학우청의 강막을 뚫었다.
스걱-
어깨에서 허리까지 도강이 스쳤다.
“아아악!!”
학우청은 참을 수 없는 비명을 질렀다.
신형이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그의 가슴을 향해 도강의 빛이 번쩍거렸다.
파아앗!
묵흑반도가 지나가며 학우청의 가슴에 붉은 선이 길게 그어졌다.
챠르르르-
쉬이이익.
환영각주 성무항은 순간 뒤로 물러나며 성철각의 각법을 눈에 담았다.
‘이것이…… 환보걸선각이군.’
유난히 긴 다리는 환영각법을 펼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건 노력만으로 될 수 없다.’
하나 성철각의 무위는 천부적으로 태어나지 않고서는 펼칠 수 없는 수준.
‘멍청하게 이 아이의 잠재력을 보지 못하다니…….’
환영각의 무공이 맞지 않는 것을 재능이 없다고 단정 지어 버렸다.
조판상을 밀어붙이는 성철각의 무공.
그들은 천사회의 사대 무력군장을 어린아이 다루듯, 무공을 펼치고 있었다.
타아앗!
하선고벽주출해(何仙姑霹宙出海)는 춤을 추듯 조판상의 퇴보를 막아냈다.
챠르르르-
철각반의 철비늘이 흔들거리며 조판상의 신형을 향해 뻗어 나갔다.
조판상이 허리를 뒤로 젖혔다.
그때,
핏핏핏핏핏!
철각반의 철비늘이 하나씩 벗겨지면서 쇠사슬처럼 길게 뻗어나갔다.
차아악-
발 길이만큼 뒤로 젖혀 피했다고 확신한 순간,
일 장의 거리로 늘어난 철비늘이 그의 목을 칭칭 감았다.
“커어억!”
철비늘의 양쪽 끝은 날카롭게 날이 세워져 있었다.
휘익!
목을 감았던 철비늘을 잡아당기자,
스걱-
검날같이 날카로운 철비늘이 목을 스치며 빠져나갔다.
목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피.
이미 조판상의 숨은 끊어졌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죽은 두 명의 군장.
혈군사 기성은 후퇴의 명을 내릴 수 없었다.
이미 수하들 대부분은 목숨을 잃은 뒤.
‘완전 당했다.’
기성이 재빨리 돌아섰다.
“어딜 갑니까?”
“…….”
뒤에 다가오는 인물.
기성이 다시 몸을 돌리자 남하림이 서 있었다.
“이번 싸움은 네놈이 이겼다. 하나 다음에는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다음번이란 말은 없습니다.”
“너무 자만심이 강하군. 나를 잡을 수 있다고 보는 모양이지?”
“충분할 것 같습니다만.”
“클클클, 양천의 전인이라 하나 건방지군.”
슈슈슈슈슈-
혈군사 기성이 손을 뻗자 그의 주위에 운무가 피어났다.
“어딜……!”
남하림은 운무를 향해 일장을 뻗으면서 안으로 달려갔다.
쏴아아아아-
강풍이 불면서 운무를 걷어냈다.
뒤로 물러나는 혈군사 기성의 앞을 막고자 했지만,
쉬이이익-
쉬이이익-
양옆에서 날카로운 검기가 날아왔다.
무시할 수 없는 기세.
남하림은 그대로 신형을 멈췄다.
기성의 앞을 막으며 내려선 두 명의 인물.
주작령인 미령과 소령이었다.
그들이 기세는 예전에 만났던 한 인물과 비슷했다.
기성은 뒷짐을 쥔 채 돌아섰다.
“후개, 승리를 축하하네. 하지만 그대가 잘나서 이긴 것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게나. 다음에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니 기대해도 좋네.”
“그거 참 기대되는군요.”
앞을 막아선 두 명의 주작령을 단 번에 꺾지 않고서는 혈군사 기성을 잡을 수 없었다.
“후후후. 다음에 제대로 보세나.”
휘이익!
혈군사 기성의 신형이 사라졌다.
‘좋은 기회를 놓치는군.’
남하림은 살짝 아쉬웠다.
“뭐요? 당신들은 계속 있을 거요? 아니면 나와 겨루어볼 생각인가?”
“후개, 이번은 넘어간다. 다음에 문령의 복수를 꼭 해주지.”
“그쪽 집안은 다음이란 말을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
“다음이든 다다음이든 알아서 하고. 하지만 날 다음에 만나면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겁니다.”
남하림의 눈웃음을 본 두 사람은 인상을 쓰면서 혈군사 기성이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스윽-
당무독이 남하림의 뒤로 다가왔다.
“혼자서 도망간 모양이군. 비겁한 인물일세.”
“다음에 보자고 하던걸.”
“다음에 보자는 놈치고 겁나는 놈이 있던가?”
“그렇긴 하지.”
남하림과 당무독은 염성평야를 향해 돌아섰다.
“거의 끝났어.”
“부장, 이젠 공식적으로 무림에 신무맹의 대해서 알리는 게 좋지 않을까? 딱 좋은 기회야.”
“그건 무독이 알아서 해.”
“알겠어.”
남하림과 당무독은 다시 전장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 * *
제이차 염성평야 결전도 중원무림 연합 세력의 승리로 돌아갔다.
천사회와 오가련 연합의 패배.
무림맹의 와해에 절망에 빠져 있던 중원 무림은 환호했다.
스슥슥.
악민은 신무맹의 명부에 직접 서명했다.
“악 가주님, 감사합니다. 산동악가에서 함께해 주신다니 더욱 든든해지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당연히 무림을 위해 본 악가도 나서야지 않겠소이까. 신무맹을 위해 최선을 다하소이다.”
“악 가주님, 신무맹이 아니라 중원 무림을 위해서입니다.”
“하하, 그렇군. 내가 말을 잘못했소.”
악민은 다른 인물이 중원 무림을 위한다는 말을 했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었다.
‘후개라면 진심이다.’
척!
역위천이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줘봐.”
“뭘요?”
“나도 그 명부에 이름을 적어야겠다.”
“용병 생활을 하지 않으십니까? 은퇴하시게요?”
“은퇴는 무슨. 신무맹에 가입하면서 동시에 용병도 하는 게지.”
“가입하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신무맹에게 괜히 돈 달라고 하기 없습니다?”
“거참 알겠다. 누가 들으면 나를 엄청 돈을 밝히는 사람처럼 보겠군.”
옆에서 당무독이 그에게 입맹 가입서 한 장을 건네주었다.
슥슥슥-
역위천은 만족한 표정으로 서명했다.
“자, 그럼…… 나도 신무맹의 일원이군.”
“여하튼 도움을 주신다고 하시니 고맙긴 하네요.”
그때, 뒤편에서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던 탈혼마제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혹시 그곳에 놀고먹는 자리는 없느냐?”
“노인장도 들어오시게요?”
“안 되냐?”
“당연하잖아요.”
“이놈의 세상은 어딜 가나 학연, 지연이 문제로다.”
“구시렁거리지 마세요. 심심하면 그냥 놀러나 오시면 되죠. 그것까지는 인정하겠습니다.”
남하림과 탈혼마제의 대화를 듣는 주위 일행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후개도 보통이 아닌 건 알지만 탈혼마제를 아이 다루듯 하다니…… 심장이 떨리네.’
천하에 오직 남하림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 *
어둠이 짙은 시간.
하지만 염성평야의 밤은 대낮처럼 환했다.
거대한 연회가 평야 전체에서 이어졌다.
“숙부님.”
남하림은 조용히 만나고 싶다는 손장의 연락을 받았다.
“후개, 왔는가?”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괜한 욕심을 부려서…….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동문상국을 이끌어 오던 그는 이번에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망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망하는 것은 한순간이라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다.
손장은 가슴 안에서 한 권의 서책을 꺼냈다.
무극검신공.
모든 일의 발단이 된 구천마제의 무공서.
“받아라. 주인은 따로 있는 법이더구나.”
“알겠습니다.”
남하림은 거절하지 않고 무공서를 받았다.
“네가 두 권 모두 불태웠다고 들었다. 이것도…….”
“세상에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것은 사라져야 할 물건입니다.”
“역시 중원에서 조카를 성인으로 부르는 이유가 있었구나.”
손장은 마음이 편해졌다.
‘이리도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모든 원흉의 근원은 이 무공서였다.
“하림아,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말씀하시지요.”
“저어…… 유 소저와는 어떤 사이더냐?”
“아무런 사이 아닙니다. 유 소저와 함께 갈 곳이 있어 동행을 하는 것뿐이죠.”
씨익.
손장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나타났다.
“다희가 요즈으으으음 상당히 예뻐졌더구나.”
“다희? 아…… 그 다희요?”
“맞다. 내 딸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객관적으로 예쁜 아이지. 가끔 네가 생각나는지 예전에 놀던 때를 이야기하더구나.”
“그래요? 다희를 본 지 거의 십오 년이 넘은 것 같은데…… 그때가 한 살인가 두 살 아니었어요?”
“…….”
“되게 똑똑하네. 그때를 기억하네요?”
“흠흠…… 그렇…… 지.”
손장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