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곤륜파 만나다
성도평야의 밤은 깊어갔다.
유미령은 고민이 되었다.
구천신품을 찾는다는 후개 남하림.
중원의 소문과는 달리 구천신품에는 구천마제의 기연이 담겨 있지 않았다.
대신 그의 정체를 알려주는 비밀이 담겨 있다고 했다.
중원에 한 번도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
오직 아버지 유극지만이 그의 정체를 알고 있을 뿐이다.
죽어 있는 시신이 구천마제라고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그의 진정한 정체를 알기 위해선 오직 구천신품에 숨겨진 비밀을 알아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미령은 망설였다.
‘분명 아버지와 어떻게든 연관이 있어.’
직감.
여인 특유의 느낌.
하지만 이는 밝혀져야 할 비밀이었다.
“흐음.”
그때.
유미령의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오셨군요.”
군막에 있던 남하림이 유미령의 전언을 받고 찾아왔다.
“늦은 시간에 만나는 걸 보면 다른 사람이 오해하겠습니다. 큰일 아니면 낮에 사람들이 많을 때 만나면 안 되겠소이까?”
‘이 사람이…….’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누가 들으면 꼭 자신이 그에게 반해 만나자고 하는 듯한 어감이다.
신경이 아주 조금 쓰이는 거랑은 엄연히 다르다.
자존심 강한 유미령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허어, 그렇게 인상을 쓰면 예쁜 얼굴에 주름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허!’
능글맞은 데가 있는 건 예전부터 알았다.
이런 사람은 그냥 무시하면 된다.
“괜히 부른 것 같군요.”
유미령이 질색했다.
남하림은 생긋 웃으며 은근슬쩍 넘어갔다.
“무슨 일입니까?”
‘능구렁이.’
유미령은 포기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입을 열었다.
“구천신품을 찾으러 다닌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유 소저도 혹시 알고 계십니까?”
“……네. 구천신품을 누가 가지고 있는지 압니다.”
“오, 잘됐네요. 그렇지 않아도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소만.”
남하림이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보였다.
유미령이 구천신품의 행방을 알고 있을 줄 몰랐다.
“하지만 이분을 만나려면 고생해야 할 거예요.”
“고생한다는 게 사람 때문입니까? 아니면 장소 때문입니까?”
“둘 다…… 이지요.”
장난기가 섞인 듯 묘한 웃음을 짓는 유미령.
‘표정만 봐선 상당히 까다로운 인물 같은데…… 대체 누구야?’
“그분이 누구인지 알려 드리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함부로 만나지 못한다는 말이군요.”
“네. 맞아요. 그분은 제가 아니면 만나주지 않을 겁니다.”
유미령의 뜻이 보였다.
“동행을 하겠다는 겁니까?”
“저도 굳이 후개와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구천신품을 찾아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것뿐.”
“아하, 그렇군요. 난 또…… 알겠소이다. 그가 누구입니까?”
“한때 대장군을 지내셨던 하후도 숙부입니다.”
유미령이 가리킨 인물은 군부 출신의 대장군.
“하후 숙부께서는 군부를 그만두신 뒤 고향에서 조용히 사신다고 들었어요.”
“고향이 어디입니까?”
“강서성 남창이에요.”
남창이라면 익숙한 동네의 이름이었다.
남천상국의 강서성 총국이 위치한 도시였으니까.
“유 소저, 고맙습니다. 구천신품을 어떻게 찾을지 고민하던 중이었습니다.”
“하후 숙부를 만나러 가실 거라면 저도 함께할 겁니다.”
“하긴, 힘들게 만나는 것보다 쉽게 만날 수 있다면 좋겠죠. 마교에 다녀온 뒤 연락을 하겠소이다.”
“그러시죠. 그런데…… 마교에 정말로 가는 겁니까?”
검후 정화진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무슨 농담도 그런 농담을 하는가 싶었다.
원래부터 이상한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말이다.
“못 갈 것은 없죠. 후후후.”
남하림의 웃음 속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이상하긴 해도…… 대단한 사내이긴 하지.’
“뭐, 가는 건 그대의 맘이니 말리지는 않겠지만…… 조심하긴 하세요.”
“이런! 제 걱정을 해주는 겁니까? 감동입니다.”
“……당신, 말하다가 맞아본 경험은 없을 것 같군요.”
“어떻게 알았습니까?”
“하는 걸 보니 꼭 그런 것 같아서요. 어쩌면 이제 한 번 정도 경험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경험은 사양하지요.”
남하림은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휙! 휙!
그러고는 그녀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미리 인사하는 겁니다. 내일 일찍 조용히 갈 생각이거든요. 그럼 마교에 다녀온 뒤 보도록 하죠.”
“…….”
유미령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남하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
새벽 일찍 성도평야를 나섰다.
남하림은 전날 가볍게 작별 인사를 모두 마쳤다.
가야 할 목적지는 신강의 마교.
남하림과 동행한 다섯 명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느 누구에게 물어도, 대군도 아니고 겨우 여섯 명의 인원으로 마교에 간다는 건 미친 짓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휘연 형, 괜찮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니.
팽유도의 표정이 울상이 됐다.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지금 그들이 가는 곳은 마교였다.
마교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아니었다.
굳이 안 가봐도 알 수 있으니까!
“혀어어엉-”
“걱정하지 마. 부장에게도 생각이 있을 거다. 그러니 간다고 했겠지.”
“그건 그렇지만…… 나도 계획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무작정 간다고 하던걸요. 내가 보기에 정말 그냥 가는 것 같다고요.”
“훗.”
이휘연이 짧게 웃었다.
선두에서 황보궁과 함께 걷고 있는 남하림의 뒷모습.
“유도야, 우린 중원 무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과 함께하고 있다. 그의 뒤를 따르면 될 뿐이지.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이휘연의 믿음은 강했다.
세상이 무너진다고 해도 남하림과 함께하면 위험하지 않을 것이었다.
* * *
청해성으로 들어선 여섯 명은 빠르게 움직였다.
유람이라면 모를까, 그들의 목적지는 마도의 종주.
천마신교였다.
황보궁이 마을 초입에 세워진 작은 이정표를 보았다.
“대형, 여기가 증천이란 마을인가 봐요.”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일찍 가자.”
저녁을 보내기 위해 일행이 마을로 들어섰다.
그때, 남하림의 귀에 이휘연의 전음이 들려왔다.
[부장, 한 사람이 우릴 따라오고 있다.]
[적의는 없는 것 같지 않나요?]
[어떻게 할까?]
[우리에게 용건이 있다면 앞에 나타날 테니, 그때 보죠.]
반각이 지난 후.
인적이 드문 장소를 지나가는 중이었다.
스윽.
드디어 일행 앞에 중년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복장을 한 인물이다.
‘흐음, 도기(道氣)가 흐르는 것을 봐선 도사 같은데.’
일반 중년인은 아닌 듯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중년 사내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누구신지요?”
“곤륜파 이대제자인 허진이라 합니다.”
모두가 놀라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들을 미행하던 인물이 곤륜파 도사일 줄은.
곤륜은 현재 마교 혈적마군단에 의해 모두 전멸당했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혹시 개방의 후개이십니까?”
“맞습니다. 제가 후개입니다.”
털썩!
곤륜파 도사 허진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후개님, 도와주십시오.”
“아, 이런, 일어나시지요.”
남하림은 얼른 그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스윽.
허진의 몸이 남하림의 부축에 가볍게 떠올랐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씀해 주세요.”
“네에…… 후개님.”
허진의 설명이 이어졌다.
곤륜파가 혈적마군단에 의해 무너지기 직전.
장문인은 어린 제자들과 곤륜파의 비전서들을 아래로 내려 보냈다.
허진은 동료 이대 제자 다섯 명과 삼대 제자 오십 명을 데리고 속가제자가 세운 석자무관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얼마 후.
살아남은 곤륜파 제자들이 비전서를 가지고 무관에 숨어 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면서, 곤륜파의 비전에 욕심을 내는 무리들이 많아졌다.
그들의 협박에 석자무관 또한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었다.
그때 마침, 성도평야에서 마교를 물리쳤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다행히 청성파가 무사했던 것이다.
청성파가 도움을 준다면 막아낼 수 있을 터.
그렇게 한 가닥 희망을 찾아, 허진이 대표로 청성파로 내려가려던 중.
소문이 자자한 모습과 똑 닮은 청년들을 발견했다.
설마 걸협오성일까.
믿기지 않았지만, 혹시나 그들이 아닐까 기대하며 뒤를 쫓았던 것이다.
“청해삼도가에서 삼 일 뒤에 곤륜파의 비전서를 내놓지 않는다면 힘으로 빼앗아가겠다고 했습니다.”
팽유도가 바로 청해삼도가에 대해 설명했다.
“하림 형, 그들은 정사의 중간이라고 할 수 있어. 세 문파로 되어 있다고 해서 삼도가(三刀家)라고 해.”
“나쁜 놈들이군.”
“같은 지역에서 도움을 주지 못할망정 강도짓을 해?”
남하림은 화가 났다.
“허진 도인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이 함께 가겠소이다.”
“후개,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허진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글썽거렸다.
“아닙니다. 우리들이 곤륜파의 어려움을 사전에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늦게 알아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말씀이라도 고맙습니다. 마교에서 너무 빨리 움직여 중원에선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앞장을 서시지요.”
“지금 가기에 시간이…… 늦지 않습니까?”
“무관까지 얼마 정도 걸립니까?”
“낮에는 한 시진이면 됩니다만…… 저녁이라…….”
“우린 밤길이 밝아서 괜찮습니다. 무관에서 걱정하고 있을 게 아닙니까? 삼도가란 곳에서도 어떻게 할지 모르니 빨리 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후개님…… 정말 고맙습니다…….”
허진의 표정이 안도로 물들었다.
* * *
‘하늘은 아직 곤륜파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석자무관으로 향하는 허진의 마음은 곤륜산을 내려온 이후 가장 가벼웠다.
어둠 속을 지나는 일행.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밤이었지만, 한 시진이 되기도 전에 석자무관에 도착했다.
마을 속에 자리 잡은 무관이었다.
“여기 무관의 관장이 대단하네요. 어려운 결정을 내렸습니다.”
곤륜파의 어린 제자들을 받아주는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벌떡!
석자무관의 관장은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왔다고?”
“네, 그렇습니다!”
“후개와 걸협오성이……!”
관장 석명은 관장실에서 나와 접객실로 날듯이 걸어갔다.
그들이 누구인가.
얼마 전 성도평야에서 마교의 두 무력단을 전멸시킨 인물들이 아닌가!
‘허엇…… 어떻게 하지?’
접객실이 가까워지면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겨우 동네 마을에서 무관을 운영하는 그가 무림 대영웅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런지.
“…….”
접객실 안에서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도 좋아 보였다.
똑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세요.”
드륵-
‘아…… 하…….’
열린 문 안에서부터 눈이 부셨다.
환하게 웃고 있는 인물.
‘저분이구나.’
여섯 명의 청년들 중에서 단번에 후개 남하림을 알아보았다.
남하림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서, 석자무관의 관장 석명입니다.”
“개방의 후개 남하림이라 합니다. 여기는 제 동료들이자 형제들이지요.”
“아…… 네에…….”
석명은 포권을 한 채 허리를 숙이며 걸협오성에게 인사를 했다.
“우리가 늦은 시간에 오게 되었습니다.”
“아…… 아…… 닙니다. 후개님께서 오시는데…… 언제든지 오셔도 됩니다.”
석명은 말을 하면서도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계속 서 있을 것입니까? 앉으시지요.”
남하림은 주인이 먼저 앉은 뒤 뒤이어 자리에 앉았다.
‘오호…… 예의도 바르시다.’
잘나간다는 무림의 여느 후기지수와 달랐다.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남하림의 태도를 보니 과연 존경받을 만했다.
“관장님께서 곤륜파를 위해 힘쓰신다고 들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닐 텐데…… 큰일을 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저 또한 동네의 작은 무관을 운영하고 있으나 곤륜파의 속가제자였습니다. 곤륜파가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 제가 위험하다고 해서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처억.
남하림은 두 손을 올려 포권을 했다.
“관장님께서 진정한 대협이십니다. 존경합니다.”
“아, 아닙니다. 어찌 무림의 대협객이신 후개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송구합니다.”
“무관으로 오는 길에 허진 도인께 그동안의 사정에 대해 들었습니다. 우리들이 왔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두 다리를 뻗고 잘 수 있겠습니다.”
석명은 며칠 동안 한숨도 편안하게 자지 못했다.
청해삼도가의 협박에 머리카락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다음 날.
다다다다-
아이들의 발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곤륜파의 어린 제자들.
열 살부터 십오 세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아이들이 모두 한 곳을 향했다.
“어허…… 얘들아, 조용히들 해야지……!”
허진이 당황하며 제자들을 조용히 시키려고 했다.
아이들은 개방의 후개와 걸협오성이 왔다는 말을 하자마자 흥분하여 접객실로 곧장 달려왔다.
“허진 사숙님! 정말로 후개님이 계신가요?”
“우리 나중에 오자. 아직 일어나지 않으신 것 같다.”
덜컹!
접객실의 창문이 열렸다.
“아닙니다, 허진 도인님, 일어났습니다.”
창문가에 선 남하림의 모습.
어린 제자들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꾸벅.
“안녕하십니까?”
“아하하, 반갑다.”
“후개님이신가요?”
“내가 후개가 맞다. 너희들이 곤륜파의 제자들인 모양이구나.”
“넵. 맞습니다!”
남하림은 또박또박 대답하는 어린 제자들을 보고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햇살이 반짝이고 있었다.
* * *
청해삼도가 혼류도문(混流刀門).
문주 복정은 기회가 왔음을 알았다.
청해성의 패자였던 곤륜파가 전멸했다.
‘흐흐흐흐! 드디어 청해성의 패권을 삼도가 중 본 문인 혼류도문에서 차지하게 되겠군.’
그는 그동안 억눌려 있던 야망이 꿈틀거렸다.
마교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 전혀 문제가 없었다.
“문주님, 모든 준비가 되었습니다.”
혼류무단 단주 하창모가 보고했다.
분명 석자무관에 곤륜파의 비전이 남아 있을 터.
“하 단주, 무조건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해야 할 것이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거리상으로도 본 문이 가장 빠릅니다.”
“좋아. 출발하도록!”
문주 복정의 외침에 혼류도문이 석자무관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