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풍전등화
‘부인…….’
어둠이 짙은 방.
침상을 내려다보는 사내의 시선에는 애틋함과 미안함이 함께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다.
하지만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떨어져 있어야 했다.
그녀가 마음을 알아줄지 알 수 없지만, 원망하지 않는다.
‘오늘은 그만 가겠소.’
방에 들어온 지 일각.
조용히 방문을 닫고 밖을 나섰다.
멈칫.
그는 문밖에 선 청년을 보았다.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이것이 무단인가?’
내력이 없으니 기(氣)조차 느낄 수 없다.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는가?”
“밖에 나가시죠. 주무시는데 방해가 됩니다.”
“알겠네.”
남하림과 유극지는 조용히 영화당 밖으로 나왔다.
꿈틀.
침상에 누워 있던 그녀가 눈을 떴다.
‘상공…….’
유극지가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예설란은 깨어 있었다.
홍화전에서 혼자 있을 때도 하루에 한 번은 꼭 찾아와 일각 동안 조용히 앉아 있다가 물러갔다.
후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주제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예설란 님께서 그분을 사랑한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영화당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마주 섰다.
유극지의 표정은 쓸쓸해 보였다.
“조용히 왔다가 가려고 했다.”
“죄송합니다.”
유극지도 남하림이 방을 나온 이유를 알았다.
“아니다. 걱정이 되었겠지.”
“……혹시나 했습니다.”
“맞다는 말이군.”
남하림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자신감인지, 아니면 나를 믿는 것인지 모르겠군.’
유극지는 남하림이 이전과는 달라졌음을 느꼈다.
“조금 변했군.”
“한참 변할 나이가 아니겠습니까?”
“농담도 편하게 하고.”
“두세 번 만나뵙고 나니 내심 편해졌나 봅니다. 불편하시다면 고치겠습니다.”
“아니다. 상관없다. 자네는 천성이 그러하군. 엄격한 용노가 그럴 정도면…….”
“배려 감사합니다.”
유극지는 몇 시진 전에 일어난 사건을 꺼냈다.
“그새 한바탕 소란을 피웠더군.”
“별일 아니었습니다.”
남하림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겼다.
“이보게, 여긴 은하궁이네. 별일이 아니라고 하기엔 그렇지 않나? 은하수호군 부군장을 개 패듯 했다던데.”
“그렇게 생각을 하니 큰일인 것도 같습니다.”
“내일 아침이 되기도 전에 시끄러워질 게야.”
“궁주님께서는 화가 나지 않으십니까?”
“화는 나지만 그녀를 위하다 생긴 일이지 않나. 넘어갈 수밖에. 원한다면 내가 나설 수도 있네.”
“괜찮습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여긴 무림맹이 아니라 은하궁일세. 죽이려고 든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네.”
“알겠습니다.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후후, 표정은 전혀 조심할 것 같지 않군. 그만 가보겠네. 우리가 긴 시간 밖에 있으면 그녀가 또 걱정하지 않겠는가.”
“내일 찾아뵙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사람을 보내겠네.”
휘익!
남하림은 고개를 숙이는 순간 유극지의 신형이 사라졌다.
‘알 수가 없군.’
유극지와 대화를 나누면서 남하림은 점점 더 헷갈려졌다.
함부로 단정 짓기에는 너무 많은 의문이 남아 있었다.
* * *
웅웅웅웅-
영화당의 정문 앞.
은하수호군(銀河守護軍) 군장 관통이 황우대 소속 오백 명의 무인들을 이끌고 일찍 도착했다.
‘이런 개망신이 없다.’
소문은 빠르게 퍼지는 중이었다.
부군장 편포랑이 당한 사실이 은하궁 전체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상대가 후개란 사실에만 관심이 가질 뿐.
왜 당했는지 이유는 필요 없었다.
빨리 수습하지 않으면 은하팔대군(銀河八代軍)에서 은하수호군의 수장으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
사실 소식을 들은 후 곧장 영화당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긴급한 일이 아니고서는 야밤에 군사들을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날이 밝는 대로 영화당에 곧장 달려왔다.
관통이 닫혀 있는 문을 노려보았다.
노기가 가득했다.
“열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황우대 대주 갈천목이 정문으로 빠르게 다가섰다.
쿡.
묵패도(墨覇刀)에 힘을 주었다.
뒤에서 군장 관통이 보고 있다.
멋지게 정문을 여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주 깊은 인상이 남겠지.
묵패도로 단숨에 친다!
휘익!
손끝이 움직이려던 찰나,
끼이이익-
영화당의 문이 열리며, 예설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헉, 대부인…… 님.”
갈천목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여기 책임자가 누구인가요?”
파아아앗!
전대 검후의 무력.
영화당 앞은 순식간에 공기가 바뀌었다.
관통이 재빨리 나섰다.
“대부인께 인사드립니다.”
“관통 군장이군요.”
예설란의 신형에서 절대자의 무력이 흘러나왔다.
‘검후…… 대부인께서는 검후이시다.’
“수하들을 이끌고 영화당에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게…… 후개에게…….”
“그들이 본녀에게 무례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까?”
예설란의 목소리에서 힘이 느껴졌다.
‘크흠…….’
관통은 말문이 막혔다.
예설란의 기세는 달라져 있었다.
대부인께 대한 무례함은 궁주 유극지에 대한 무례함과 같다.
어떠한 변명으로도 그 사실을 바꿀 수 없으며, 죽음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다.
척.
관통은 그 자리에서 부복했다.
“수하들이 실수를 한 듯합니다. 따끔하게 혼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관 군장이 먼저 사과를 하는군요.”
예설란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소신이 똑바로 확인을 하지 못한 탓입니다. 제대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관 군장께서 알아서 처리하겠다니 다행이네요. 그만 일어나세요.”
예설란의 뒤로 남하림이 바짝 붙어 섰다.
‘검후의 실력은 사라지지 않는군.’
내력을 펼친 예설란의 모습을 목격했다.
관통을 기세만으로 제압했다.
“관 군장, 후개는 본녀를 도와준 것밖에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은하궁에서 남하림을 건드리지 말라는 강한 압박.
“알겠습니다.”
관통은 그녀의 뜻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예설란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후개, 그만 가보겠어요.”
“제가 홍화전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혼자서 그분께 가겠어요. 어제 고마웠어요.”
예설란은 알았다.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은 오직 사랑하는 사람 곁이었다.
“알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시지요.”
금지로 걸음을 옮기던 예설란이 문득 뒤돌아섰다.
“후개, 시간이 나면 주화궁에 가줄 수 있을까요?”
“주화궁에 누가 계십니까?”
“미령이가 있어요.”
뜻밖의 이름에 남하림은 당황했다.
검문에 있어야 할 인물이 은하궁에 있었다.
“며칠 전에 그 아이가 잠시 돌아왔어요. 어려울까요?”
“어렵지는 않지만…… 저를 별로 반기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건 아닐 거예요. 비무에 졌다고 오래 의기소침할 아이가 아니거든요.”
검문에서 봤던 그녀의 느낌은 도도하고 자부심이 강했다.
그녀는 걸협오성이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패배를 털어내고 평상시와 같이 무공에 전념했다.
“음…… 그렇다면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후개, 고마워요. 미령이가 왔을 때 우리 부부가 상황이 이래서 챙기지 못했어요. 무림맹에서 은하궁으로 바뀐 것 때문에 온 듯한데…… 그분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요. 무슨 일인지 많이 궁금해하고 있을 것 같네요.”
남하림은 대충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갔다.
“바로 주화궁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금지로 가는 예설란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남하림은 사라지는 예설란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스윽.
그러고는 관통의 앞에 불쑥 다가섰다.
흠칫.
‘이…… 녀석이……!’
노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예설란의 명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주화궁이 어디요?”
* * *
“대체 뭐야? 하나밖에 없는 딸내미가 왔는데 만나주지도 않고…….”
유미령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창을 응시했다.
은하궁에 온 지 십 일이 지나가는 중이었다.
무림맹이 와해되었다.
갑작스럽게 온 중원을 떠들썩하게 만든 소식에 검문 또한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곧이어 무림맹은 예전의 은하궁으로 돌아갔다.
유미령은 은하궁에 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도착한 첫날, 부모님의 분위기를 보자 곧장 주화궁에 들어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사이가 좋은 두 분이…… 왜 서로 따로 지내시는 거지?’
첫날에 아버지 유극지를 스쳐 가듯 만난 것이 마지막.
금지에 가서 만나려고 해도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어머니인 예설란은 힘이 빠진 채 홍화전에 누워 있을 뿐.
유극지가 무림맹주로 추대되기 전 은하궁의 궁주란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 확인해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녀가 은하궁보다 검문을 택한 이유는 예설란의 뜻이었다.
게다가 은하궁의 무공은 양강공(陽强功)이기에 여인의 몸으로 맞지 않았다.
이상하게 그녀는 은하궁과 접점이 없어서,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자신의 집에 온 듯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냥…… 돌아가라는 뜻인가?’
유미령은 여러 가지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후다다닥!
그때, 주화궁을 향해 다급히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시녀가 다급히 안으로 들어섰다.
“아가씨!”
“무슨 일이지?”
“밖에 후개께서 만나뵙기를 청한다고 합니다.”
후개가 은하궁에 왔다고? 언제?
유미령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내가 왜?’
순간 멈칫한 그녀는 그대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잠깐. 후개가 언제 궁에 왔지?”
“어제 궁에 도착했습니다.”
“그걸 왜 내게 알려주지 않았지?”
“죄송합니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해서…….”
“……그렇군. 하긴, 볼일이 없다면 굳이 알릴 사항은 아니지.”
시녀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어…… 그리고 어제…….”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해봐.”
“저도 방금 들었는데…… 영화궁에서…….”
시녀는 유미령에게 은하수호군과 후개가 부딪친 사건에 대해 들은 대로 알려주었다.
‘예전부터 무데뽀인 줄은 알았지만…… 설마 은하궁 한가운데서 사고를 칠 줄이야.’
“알겠어. 그를 데리고 와.”
“네, 아가씨.”
잠시 뒤.
밖으로 나갔던 시녀가 남하림과 함께 돌아왔다.
환하게 미소를 띤 얼굴.
그가 분명했다.
주화궁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
“유 소저, 반갑소이다.”
“반갑습니다.”
“검문에 있을 줄 알았습니다.”
“저도 중원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을 거라 여겼군요.”
남하림과 유미령은 여전히 서 있었다.
남하림이 먼저 의자를 가리켰다.
“우리 앉으면 안 됩니까?”
“아, 그러죠.”
두 사람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유미령의 시선은 남하림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제는 사고를 제대로 친 모양이더군요.”
“여기까지 소문이 퍼졌습니까?”
“그 정도 사고면 은하궁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예설란 님께서 나서주셔서 잘 해결이 된 듯합니다.”
“어머니가?”
남하림은 어젯밤에 예설란이 영화당에서 하룻밤을 지낸 사실을 알려주었다.
다음 날 영화당을 나서기 전, 따로 부탁을 한 것까지.
“어머니가 보내셨단 말인가요?”
“유 소저가 걱정이 되신 모양입니다.”
유미령은 마음이 착잡했다.
그녀가 보기에 걱정을 받아야 할 사람은 어머니 예설란이었다.
‘하…… 어머니도…….’
“전 괜찮습니다. 아무 문제 없어요. 다만 무림맹을 와해한 이유와…… 두 분이 왜 그런지 알고 싶었을 뿐이지요.”
예설란이 자신을 보낸 이유였다.
“내가 알려줄까요?”
“그걸…… 후개가 알고 있습니까?”
“어느 정도까지는.”
유극지와 예설란은 구천에 대한 신분을 유미령에게 알리지 않았다.
“말해보세요.”
“해줄까요?”
남하림의 입가에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지어졌다.
‘이자가…….’
그녀는 매섭게 남하림을 노려보았다.
“난 장난하고 싶지 않아요.”
“헛, 너무 째려보는 게 아닙니까? 겁이 나서 말을 하겠습니까?”
“…….”
“아, 알겠습니다. ……혹시 구천에 대해 아십니까?”
“구천마제를 말하는 건가요?”
“구천마제도 맞긴 하죠. 구천이란…….”
남하림은 구천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유미령은 이해가 빨랐다.
‘은하궁도 구천…… 균천이라는 거야?’
처음 듣는 사실에 유미령은 적잖이 놀랐다.
동시에 수많은 의문이 우후죽순 떠올랐다.
“당신도 구천 중 양천의 전인이란 말이죠. 현재 중원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창천인 구천마제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고요.”
“맞아요. 개인적으로는 그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게 구천신품을 찾는 이유군요. 구천마제가 누구인지 알면 정말로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있을 테니.”
“그렇죠.”
유미령은 생각에 잠겼다.
구천신품이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게 있었다.
검문에 제자로 가기 전의 일.
금지에서 우연히 엿들은 말이 기억났다.
아버지는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분의 물건을 저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후후, 그런가? 소문이 나지 않도록 잘 가지고 있게. 시끄러울 테니.”
“후개, 구천신품을 모두 찾는다면 구천마제가 누구인지 알 수 있나요?”
“아마도…… 일단 모두 찾고 봐야겠지요.”
은하궁과 균천.
두 사람이 왜 그동안 그녀에게 말을 해주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내가 딸이라서…… 그런 것일까?’
……내가 직접 알아내야 해.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더는 할 말이 없는 듯했다.
남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는가요?”
“아, 내가 가는 게 아쉬운가요? 소저가 나를 못 떠나게 잡는다고 소문이 날 텐데.”
유미령은 단번에 발끈했다.
“됐어요. 빨리 가세요.”
“예설란 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심심하면 영화당으로 놀러 오시고,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남하림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주화궁을 나섰다.
유미령의 표정은 언제부터인가 조금 밝아져 있었다.
* * *
곤륜산을 향해 날아오는 전서구들.
곤륜대전으로 수십 명의 도인들이 다급하게 모여들었다.
곤륜파 장문인을 기다리는 곤륜도인들의 얼굴에는 많은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곤륜비선들의 연락.
수십 명의 도인들이 모였지만 어느 누구도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했다.
마교의 등장.
거의 일 갑자 동안 신강에서 나오지 않았던 그들이 움직였다.
무림맹이 와해된 중원 무림.
곤륜파의 명운(命運)은 풍전등화(風前燈火)에 처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