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마교 나서다
영화당으로 들어섰다.
잠시 뒤.
예설란과 마주 앉았다.
그녀를 유심히 살피지 않아도 되었다.
첫눈에 봐도 예전의 모습과 달랐다.
딱히 몸에 이상은 없어 보였지만 마음고생이 심한 듯 기력이 상했다.
남하림은 가볍게 말문을 열었다.
“궁주님을 만나 뵙고 왔습니다.”
“그랬군요. 그분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요?”
“반가워서 오늘은 가볍게 인사만을 나누고자 불렀다고 했습니다.”
남하림은 예설란을 똑바로 보았다.
“그리고…… 전 두 분이 같이 계실 줄 알았습니다.”
“그분께서 홍화전에서 지내는 게 좋겠다고 하셨지요.”
“실례가 되는 질문일지 모르겠습니다. 두 분 사이에 무슨 문제가 일어났습니까?”
금지에서 두 사람이 검무를 나누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보다 아름다운 모습은 없다고 생각했거늘.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은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분과 난 문제가 없어요. 항상 나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분이지요.”
예설란의 눈빛과 목소리는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로 유극지를 사랑하고 있었다.
하나…….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남하림은 유극지에게 던졌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그분께 왜 함께 지내지 않으시냐고 물었습니다.”
“뭐라고 대답을 하던가요?”
“사랑하는 분을 잃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아…….’
예설란은 대답이 없었다.
울컥거리며 가슴에 억눌려 있던 감정이 쏟아질 듯했다.
“난…… 어쩌면 잃은 것 같아요.”
예설란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의심에서 점점 확신으로 굳어가는 단계처럼 보였다.
금지에서 유극지에게 받은 이질적인 기운.
‘나와 같은 느낌을 받으셨구나.’
그는 변함이 없었지만 변해 있었다.
당무독의 전음이 들려왔다.
[부장, 방금 전 그놈들이 예설란 님께서 정신이 온전하지 않다고 말했었어.]
[감금을 했다는 말이야? 그런 것 같지는 않는데?]
[감금까진 아니지만 예설란 님께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시도록 지키고 있던 것은 확실해.]
[음…… 이유가 있겠지? 함부로 밖에 다니지 못하도록 하는 이유.]
[아마도…….]
예설란이 홍화전으로 가야 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남하림은 그녀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후개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요.”
“말씀하시지요.”
“정말로 양천의 전인이 맞나요?”
“솔직히 양천에서 무단을 익혔지만, 제가 양천의 전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누구냐? 그 백발 노인장이 양천지인을 보여달라고 하는데…… 그게 뭔지도 모르겠습니다.”
“풋.”
예설란은 영화당에 들어선 후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
남하림이 말하는 백발 노인장이 누구를 말하는지 잘 알았다.
은하궁에서 천귀(天鬼) 용명한을 백발 노인장이라고 부를 정도로 간 큰 인물은 없다.
예설란이 본 남하림은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똑똑한 청년이었다.
게다가 순수한 마음을 지녔다.
‘정 아우는 좋겠어.’
남하림을 아들로 삼은 당대 검후 정화진이 부러웠다.
스윽.
“후개, 손을…….”
남하림의 손을 잡은 예설란이 손바닥을 가리켰다.
“정확히 무단이 뭔지 모르겠지만 여기에 기를 보내세요.”
“알겠습니다.”
단전에서 나오는 내력아 아닌, 손바닥에서 바로 무단을 일으켰다.
예설란은 신기한 듯 무단의 기를 바라보았다.
‘빠르다. 이게 무단?’
그녀 또한 절대 무공을 지닌 검후였다.
고수들에게 찰나의 순간은 목숨과 직결된다.
예설란은 놀라움을 애써 참았다.
“잘했어요. 그 기를 손바닥에서 두 치 정도 위로 뭉치면 자연적으로 알게 될 거예요.”
‘기를 뭉친다…….’
남하림의 손바닥 위로 무단(無丹)의 힘이 일어났다.
뭉실뭉실.
둥근 모양이 만개하듯 피어올랐다.
“양천지인화(陽天之絪化).”
예설란이 중얼거렸다.
후개는 양천의 전인이 확실했다.
“……이게 양천지인이군요.”
남하림은 예설란이 이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예설란 님께서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분도 균천의 전인이지요. 아마 비슷할 것이라 여겼어요.”
“구천은 다 같은 모양인가 보네요.”
“후개를 보니 대부분 비슷한가 봐요.”
예설란은 걱정이 되었다.
“후개, 앞으로 조심해야 해요. 그대가 양천의 전인이라고 알려진 이상 구천의 표적이 될 수 있어요.”
‘왜 양천의 전인만 표적이 된다는 거지?’
표적이 될 때 되더라도 이유는 알아야 했다.
“예설란 님께서는 그 이유를 아십니까?”
“그건…… 구천에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문구가 있다고 했어요.”
구천의 시작은 창천이며 끝은 양천이니라.
구천의 전인들은 이 문구의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 말대로라면, 구천이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양천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이거…… 피곤한데.’
하필 왜 양천이 끝이라고 하는 거야?
마음에 전혀 들지 않았다.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 봐도 양천이 표적이 될 수밖에 없는 문구다.
남하림은 손 위에서 무단의 힘을 거둬들였다.
아직 두 사람에게 본론이 남아 있었다.
예설란이 영화당을 찾아온 이유.
사람을 보내면서까지 자신들이 은하궁에 오지 못하도록 한 이유가 궁금했다.
“예설란 님. 저에게 하실 말씀이 없습니까? 우리들이 오지 못하도록 사람을 보낸 확실한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예설란은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습니다. 말씀을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건…… 그대를 죽이겠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에요.”
예설란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영화당에 찾아오면서도 후개에게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명확하지 않다는 것.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부군, 유극지가 관련되어 있는 것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누가 저를 죽인다는 것인지요?”
“……내가 홍화전으로 들어간 건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 전까진 금지에서 그분과 지냈지요.”
예설란은 그날을 기억하며 말을 꺼냈다.
“깊은 밤이었어요. 이상한 기운에 눈을 떠보니 그분이 옆에 계시지 않더군요. 잠시 볼일을 보러 가신 줄 알았는데…… 밖에서 기척이 들렸어요. 궁의 인물이 가끔 찾아왔었으니, 그들 중 한 명이라 생각했습니다.
꽤 시간이 걸리기에 무슨 대화를 나누나 싶어 다가갔는데…… 신비인이 양천의 전인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그자가 누구인지 보셨습니까?”
“보지 못했어요. 겨우 목소리만을 들었을 뿐. 그리고 떠나면서…… 상공을 향해 창천주라고…….”
예설란은 말을 하면서도 그날의 기억에 안색이 굳어졌다.
잠시 동안, 방 안에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잘못 들으신 건 아닙니까?”
“아니에요. 상공께서 들어오신 후, 조용히 제 옆에 누운 뒤 한마디 하셨어요. 내일 일찍 홍화전으로 가는 게 좋을 듯싶다고…….”
예설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스윽-
남하림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온기에 떨리던 가슴이 진정되는 듯했다.
“……후개, 고마워요.”
“마음을 편히 놓으세요. 그분이 홍화전으로 보내신 이유는 예설란 님을 너무나 은애하셔서일 겁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쏴아아아아아아-
밖은 여전히 비가 내렸다.
“영화당에 방이 꽤 많지? 궁아, 옆방에서 예설란 님이 편히 주무실 수 있는지 보고 와줘.”
“네, 대형. 알겠습니다.”
황보궁이 얼른 복도를 나갔다.
“오늘은 여기에서 주무시지요. 제가 내일 홍화전으로 모시다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 * *
밤이 깊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예설란은 은하궁 유극지가 균천의 전인이라 했다.
그런데 야월객은 유극지를 창천주라 불렀다.
창천주가 누구인가.
구천마성의 주인이자 창천의 전인.
구천마제가 창천이다.
‘대체…… 어떻게 되는 거냐고.’
유극지를 왜 창천주라고 부른 걸까.
속 시원히 직접 물어보는 것이 제일 빠른 방법이지만, 섣불리 물어봤다 답도 못 듣고 죽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유극지는 구천마제를 이겼다는 인물이니까.
무단만 완벽하게 대성했다면 물어봐도 되는 건데…….
남하림은 아쉬웠다.
‘휴우…… 구천마제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구천신품을 모두 모으는 게 제일 빠른 방법인가?’
당무독이 개방에 있던 구천신품의 문양까지 모두 확인해 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했다.
열 개의 구천신품 중 확보한 신품은 여섯 개.
나머지 네 개를 모두 찾아야 했다.
‘젠장…… 결국 찾으러 다녀야 한다는 말이 되잖아.’
일단 한 개는 어디에 있는지 안다.
황궁 제독동창이 가지고 있다고 했다.
나머지 세 개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하아아아-’
한숨이 나오는 이유가 있었다.
중원에서 구천신품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인물은 오직 그 사람밖에 없을 테니까.
전대 무림맹 군사 제갈령.
현재 그는 오대세가연합을 이끌고 있다.
‘쉬운 일이 없구나.’
제갈령을 만나러 가면 분명 이상한 일에 휘말릴 게 뻔하다.
그동안 제갈령에 의해 겪은 사건이 대체 몇 개인가.
무림맹이 와해된 마당에도 여전히 똑같다는 느낌이 들다니.
하지만 구천신품을 찾아야 비밀을 풀 수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중원행이 다시 시작될 판이다.
‘내 사주팔자에 역마살이 끼어 있는 거 아냐? 부적이라도 한 장 써야 하나?’
* * *
신강의 십만대산.
중원인들은 그들을 마교라 부르지만 그들은 스스로는 천마신교라 일컫는다.
마교의 가장 깊은 곳 중 한 곳.
극마의 경지를 이루지 않고서는, 들어서는 순간 마기에 머리가 터질 수 있다.
심공실(深功室)은 한 줄기 햇빛조차 들지 않아 어둠으로 가득했다.
그곳에서 전신 나체의 상태로 수백 개의 바늘이 꽂힌 채 서 있는 사내.
“우우욱.”
십이경맥(十二經脈)은 물론 기경팔맥인 임독맥, 충대맥, 음양교맥, 음양유맥의 모든 혈 자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
천마신공의 완벽한 대성을 이루기 위한 마지막 단계, 마천심침대법(魔天心鍼大法).
심공실을 가득 채운 마기가 바늘을 통해 사내의 몸속에 끊임없이 흘러 들어갔다.
“아아아아악!!”
사내의 비명조차 마기가 가득했다.
투둑. 툭.
이윽고,
전신에 박혀 있던 바늘들이 하나둘씩 튕겨 나오기 시작했다.
파아앗!
심공실 둘레 벽에 수백 개의 바늘이 튕겨 나가 세차게 박혔다.
울컥.
사내는 검은 피를 토해냈다.
하지만 곧 세상을 가진 듯한 표정으로 광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큭, 크하하하핫!”
우두두두두-
심공실의 벽이 갈라지며 무너져 내렸다.
* * *
사내가 구릿빛 상체를 드러냈다.
척.
그를 맞이한 인물들이 허리까지 머리를 조아렸다.
“천마님의 성취를 감축드리옵니다.”
천마호령 호장악이 양손으로 천마도포를 공손하게 내밀었다.
휘익!
피보다 붉은 도포를 걸친 사내.
십만대산 천마신교 지존이자 천마 초강유가 삼 년의 폐관을 마치고 나왔다.
“공기가 확실히 맑아.”
초강유는 밖으로 나오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얼마나 지났지?”
“삼 년에 한 달 모자랍니다.”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군.”
“그만큼 뛰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능력이 없어 더 빨리 끝내지 못했다는 것이겠지.”
“아닙니다. 본 신교 역사상 마천심침대법을 성공하신 분은 당대 천마님 외에는 없습니다.”
“무림은 조용한가?”
호장악은 잠시 머뭇거렸다.
“곧장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시끄러운 모양이야.”
“네, 그렇사옵니다.”
“좋아. 자네가 대답을 잘 못 하는 걸로 봐서 흥미로울 것 같군.”
“천마님, 이 자리에서 바로 보고를 드리려면 길어질 듯합니다.”
“그 정도로 할 이야기가 많다는 것인가. 얼마나 재미있을지 기대되는데. 여기서 해라.”
호장악은 고개를 숙인 채, 최근 급격하게 변화된 무림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설백진 그 녀석이 폐관을 마쳤다고 설쳐댔군.”
“은하궁주 유극지, 그도 동조를 했습니다. 제갈령도 오대세가연합을 조직했습니다.”
“난리 났군. 그 말인 즉, 중원 정파 무림이 산산조각 났다는 말이지 않는가? 하하하!”
통쾌한 웃음이 터졌다.
“창천의 구천마제가 차지했던 중원은 무림맹이 와해되고 천사회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주인이 비어 있습니다.”
“이럴 때 중원에 들어가면 재미를 보겠고.”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능성이 있는 것 가지고는 안 되지. 확실하지 않으면 위험해.”
“알겠습니다. 한 번 더 따져보겠습니다. 그리고 중원에 구천의 전인들이 모두 나타났습니다.”
“큭, 서서히 나올 때가 됐지. 구천마제가 사라진 지 이십 년이 지났으니…… 또 한바탕 피바람이 불 때가 된 거야.”
“그뿐 아니라 중원에서 다시금 창천이 움직이는 듯합니다.”
“한 번 해먹었으면 다른 사람을 위해 비껴서야 하는 게 아닌가? 욕심이 많군.”
“그는 절대로 물러날 인물이 아닙니다. 이번 기회에 물러나도록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기대하게. 이번에는 저번과 다를 테니까.”
중원을 두고 싸우기엔 신강은 지리적으로 너무 멀었다.
교두보가 꼭 필요한 것.
무림맹이 와해된 이상 중원에 들어서는 것은 어렵지 않을 터.
“천마호령, 이번 기회에 최소한 사천 땅까지는 먹어도 괜찮을 것 같지 않나?”
“사천 땅이라면 다른 곳에서도 신경을 쓰지 않을 것입니다.”
“좋아. 자네가 준비를 해보게. 가볍게 사천은 먹고 시작하는 게 좋겠어.”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큭, 그놈들이 알아서 도와주는군. 정파 놈들은 뭉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지.”
이번에는 느낌이 좋았다.
어차피 무림의 패권은 구천에서 다툴 수밖에 없다.
적수는 은하성의 균천과 혈사천의 유천, 그리고 중원에 숨어든 창천밖에 없다.
“구천의 전인들이 모두 나왔다면 양천에서도 나왔겠군.”
천마 초강유도 양천의 전인에 관심을 가졌다.
그 역시도 변천(變天)의 전인이었으니까.
“양천의 전인은 누구지?”
“개방의 후개입니다.”
“어디?”
초강유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알고 있는 그 거지 놈들…… 맞나?”
“맞습니다.”
“양천의 전인이 개방에서 나올 리 없을 텐데?”
“후개가 남천상국의 셋째 아들입니다.”
“상왕의 아들이? 똑바로 설명해라.”
구천의 전승은 무가(武家)에 의해 이루어졌다.
“소신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전대 양천의 전인이었던 천강신인(天鋼身人) 상무우가 남천상국에서 지냈던 모양입니다.”
“흐음, 그가 이유 없이 남천상국에서 지낼 리 없지. 보아하니 상왕 아들놈에게 전수를 한 모양이군.”
천마 초강유는 상황을 빠르게 이해했다.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하필이면 개방에 들어가서 후개가 되다니.
양천은 특이하게도 다른 구천과 달리 지금까지 세력이 없었다.
‘양천의 전인에게 거지들이라…….’
거지들이 떼로 뭉쳐 달려들면 피곤할 수 있다.
‘거지 문제는 아직 남아 있으니 그때 생각해야겠군.’
마교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은 중원을 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다.
“천마호령, 우선 중원에 우리의 존재를 알릴 때가 되지 않았나?”
“네, 맞습니다. 사십 년 동안 너무 조용히 지냈습니다. 명을 내리신다면 당장에라도 달려 나갈 것입니다.”
“좋군. 사천을 먹으려면 가장 가까운 곤륜의 도사부터 밀어볼까? 준비하도록.”
“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