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황무적-188화 (189/328)

188. 은하궁

“으하하하하핫!”

항걸 장두철의 시원한 대소가 터졌다.

자신의 제자 남하림은 역시 인물임에 틀림없다.

소림사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근본적인 이유.

그 무극수신공을 모든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직접 불에 태워 버렸다.

구천마제의 사대절대무공 중 하나가 중원에서 사라졌다.

한 장씩, 한 장씩 불꽃에 타들어가는 무극수신공의 무공서.

소림사 무승들이 체면도 잊은 채 멍하니 바라볼 정도로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남하림이 자신 있게 했던 말.

‘허허, 빼앗기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게 이런 뜻이었구나.’

소림사 방장 명허는 욕심을 버리는 남하림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똑똑하도다.

탐욕을 이기다니…….

후개야말로 진정한 부처가 아니던가.

화산파 장문인과 개방 방주에게 신무맹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후개라면 맹주감으로 확실했다.

혈겁을 부르는 욕심이 없는 인물이라면, 신무맹의 맹주로 오르기에 충분했다.

개방과 화산에 이어, 소림사도 신무맹에 함께할 것을 결정했다.

세 문파는 그렇게 다음을 기약하며 숭화삼지에서 돌아섰다.

개방도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제자야, 괜찮겠느냐?”

“저희들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를 만나려는 이유가 무엇이더냐?”

“물어보려 합니다. 중원 무림에서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이번에는 방주 오종이 나섰다.

“유극지, 그자가 개방의 후개를 만나주겠느냐? 맹주가 아닌 은하궁의 궁주이지 않느냐.”

“은하궁에 가보면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위험할 수도 있다. 이제 그는 무림맹의 맹주가 아니다.”

“물론 조심해야겠습니다만, 아직 은하궁은 정도 무림과 적이 아닙니다.”

오종은 품 안을 뒤적였다.

기회가 되면 후개에게 꼭 줘야 할 물건이 있었다.

스윽.

여덟 개의 자루매듭.

홍팔겹이다.

“의미는 없다마는…… 혹시나 내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다.”

“……알겠습니다.”

“고맙다. 이번에는 임시가 아닌 정식으로 결정된 일이다.”

“방규를 보니 제가 그만두고 싶다면 물러날 수도 있던데요.”

“……그렇긴 하지.”

어쩐지 홍팔겹을 너무 쉽게 받는 것이 수상했다.

“후훗, 잘 받겠습니다.”

남하림은 개방 목패에 홍팔겹을 달았다.

항걸 장두철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흐흐흐, 네놈은 그만둘 수 없다. 왜냐고? 이제 네놈이 가는 곳이 곧 개방이니라!’

* * *

다시금 시작되는 여정.

걸협오성과 함께하는 길은 어디에 간들 즐거웠다.

“궁아, 기분이 좋은 모양인데?”

“대형이 돌아와서 기분이 좋습니다.”

“나도 함께하니 좋다.”

여섯 명의 목적지는 정주의 은하궁.

숭화삼지에서 발발한 소문은 곧 온 중원으로 퍼져 나갔다.

그 자리에 개방도가 우글우글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천사회에게 첫 패배를 안겨준 중원 무림의 영웅.

후개 남하림의 특이한 복장은 어디에 간들 한눈에 띄었다.

“아하하, 인기남은 너무 피곤하군.”

보통은 불필요한 시선이 집중되면 귀찮아하거나 불편한 상황이라 여기겠지만, 남하림은 달랐다.

“궁아. 내가 말했지? 하림 형은 저걸 은근히 즐겨. 신분을 위장한다거나 할 필요 없어.”

“그러네요. 제가 생각한 거랑 다른데요.”

보통의 사람은 타인의 이목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괜히 눈치도 보고 몸짓도 부자연스러워지게 마련.

하지만 남하림은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생긋 웃음까지 지었다.

재미난 놀이처럼 한껏 즐기는 모습.

“유도 형, 저도 대형처럼 강한 정신력을 지닐 거예요.”

“내가 보기에 넌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다.”

황보세가 출신이라고 하기에 황보궁의 넉살은 굉장히 뛰어났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어디 출신이셔?”

문득 궁금해진 팽유도가 물었다.

“아! 제가 말씀을 안 드린 모양이네요. 강소유가 출신이십니다.”

강소유가는 중원의 십대세가에 비하면 한 단계 아래의 무가.

“강소성 사람들이 낙천적인 면이 있지. 넌 어머니의 혈통을 많이 닮았나 보다.”

“어머니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행이 대화를 나누면서 마을 중간 정도 들어설 때였다.

여상히 지나가던 남하림의 시선이 옆을 스쳤다.

‘흐음.’

고개를 숙인 채 지나가는 인영.

군중들 사이로 사라졌다.

“나 잠깐만 볼일 좀 보고 올게. 형, 저기 객잔이 보이는데 쉬고 있어요.”

“그렇게 해.”

이휘연도 사라진 인영을 눈치챘다.

휘이익!

남하림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황보궁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력이 없으니 어디로 갔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궁아, 그냥 객잔에 가서 기다리자.”

* * *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골목.

투욱.

동전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도오오온?’

고개를 돌려 동전이 날아온 방향을 올려다보자,

방금 전에 스쳐 지나갔던 인물이 바로 위에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눈빛을 제대로 읽었다.

“후…… 개.”

“당신은?”

사내는 주위를 살폈다.

“조용한 곳에서 드릴 말씀이…….”

“따라오시오.”

사내는 조심스레 앞장선 남하림의 뒤를 따랐다.

잠시 뒤.

“여기는…….”

“이런 곳이 제일 조용한 곳이오. 일부러 찾아올 사람도 없지요.”

남하림과 사내가 하천 다리 밑으로 내려왔다.

“우리 목소리는 밖으로 퍼지지 않을 테니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아…… 네.”

털썩!

남하림은 주저 없이 편한 자리에 앉았다.

사내도 대충 걸터앉았다.

“어디에서 오셨소?”

“전 전대 검후이신 예설란 님을 곁에서 모십니다.”

“그렇군요. 그럼 그대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분께서 후개에게 부탁을 하셨습니다.”

“무슨 부탁?”

“은하궁으로 오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뜻밖의 말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전대검후 예설란의 부탁.

어느 누가 들어도 이상함에 틀림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요? 혹시 다른 말씀은 없었습니까?”

“죄송합니다. 그분께서는 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알겠습니다.”

다른 말이 없다는 건 오직 이것 하나만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무작정 오면 안 된다는 뜻임을 분명히 파악했다.

“하나만 물어도 되겠소이까?”

“네. 후개님.”

“최근에 그분 주위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알려줄 수 있겠습니까?”

“그거야…… 은하궁으로 변한 것 외에는 특별한 게 없습니다.

“그렇군요. 딱히 변화가 없었군요. 대답을 해주어 고맙습니다.”

“은하궁으로 오시지 않을 것입니까?”

“글쎄요. 그 부분은 일행과 의논을 해봐야겠소이다.”

“……후개님,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분께서 무언가 알고 계시다면 은하궁으로 가지 않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서 만나뵈어야겠지요. 내가 보기에 그분은 도움을 받아야 할 듯합니다.”

사내는 대답이 없었다.

어쩌면 후개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자신의 임무는 여기까지였다.

“네, 알겠습니다. 돌아가서 그분께 후개님의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평소처럼 하세요.”

남하림은 예설란이 자신의 움직임을 모르고 있는 게 나을 것이라 여겼다.

“조심해서 가세요.”

* * *

덜컹.

남하림은 사내와 헤어진 후 약속했던 객잔에 들어섰다.

정주성에 들어서기 전 마지막 성 밖의 마을이라 사람들이 많았다.

웅성.

남하림의 등장으로 안 그래도 모여 있던 객잔의 시선이 그들 자리에 집중 포화되었다.

이휘연이 물었다.

“볼일은 다 봤나?”

“대충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누굴 만났는데요?”

남하림은 다섯 명에게 전음을 보냈다.

[예설란 님께서 사람을 보내왔어.]

[네에?]

[그분이 왜?]

[은하궁에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하시더군.]

[왜…… 그분이 그런 말을?]

[모르겠어. 무슨 일인지는 그분을 만나뵈어야 알지 않을까 싶다.]

[음…… 그렇긴 한데…… 그분께서 일부러 오지 말라고 전한 거면, 위험해서 그런 게 아닐까?]

[위험해도 가야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도와야지 않겠어?]

[알겠어. 부장이 간다면 당연히 우리도 가야지.]

전음을 나누던 남하림이 문득 빈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먹을 게 없네? 궁아, 맛있는 거 뭐 있나 보고 시켜라.”

“넵, 대형.”

황보궁은 벌떡 손을 들며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아까 시켰던 음식들 주세요!”

“아, 벌써 시킨 모양이구나.”

“헤헤헤.”

* * *

객잔을 나온 지 일각도 지나지 않았다.

두두두두두두두-

멀리서 기마대의 무리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은하(銀河).

은색의 깃발이 바람을 타고 뒤로 펄럭거렸다.

이휘연과 팽유도가 앞으로 나섰다.

“은하궁의 사람들이군.”

“설마 우리에게 볼일이 있는 것은 아니겠죠?”

“저들이 시선이 우리를 정확히 향하고 있으니, 우리 존재를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꽤 정보가 빠른데요? 전대검후님도 그렇고. 우리가 여기 올 줄 알고 있는 것을 보면요.”

“우린 앞으로 몰래 다니지 않는 이상 누구라도 알아볼 거다.”

“이거 참 피곤하네요.”

은하궁 주위 일대의 치안과 경비는 은하기호군의 임무.

히이이잉!

은하기호군 소속의 삼기대가 겁을 줄 요량인 듯 거칠게 말을 멈추었다.

삼기대주 나성저.

그가 말 위에서 거만하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무림맹 소속으로 있을 때와 은하궁 소속인 현재는 분명 달랐다.

“후개, 본 궁의 영역에 무슨 일인가?”

목소리 또한 거만했다.

남하림은 그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은하궁의 궁주를 만나고자 왔소이다.”

“약속이 되어 있는가?”

“약속은 없지만 은하궁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니면 그대가 보고를 해주면 좋을 듯한데…… 부탁 좀 하겠소이다.”

“내가 굳이 그런 부탁을 들어줄 이유가 없다.”

“그렇군요. 할 수 없네요. 은하궁에 가서 말을 할 수밖에 없겠군.”

“그대들은 상부의 허락 없이는 여기에서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다.”

남하림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허어, 궁주께서 본인을 만날지 아닐지를 당신이 어찌 판단하는 것이오? 상부의 허락도 전달해야 받을 수 있는 것인데. 내가 당신 때문에 그냥 갔다는 사실을 궁주가 알면 좋아하시겠소이다?”

“……좋다. 여기서 기다려라.”

나성저는 은하궁으로 수하를 빠르게 보냈다.

수하가 은하궁에 갔다 다시 오는 시간은 대충 반시진이 소요되는 거리.

“조금 걸릴 것 같은데 앉아서 쉬죠.”

남하림을 따라 길옆으로 한 명씩 앉았다.

“무림맹에서 은하궁이 되더니 엄청 빡빡하게 구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귀찮은데 그냥 만나지 말까? 궁주가 되었다고 해서 축하하려고 왔더니…… 아, 아니다. 우리가 쫓겨났다고 하면 은하궁이 중원에 망신살이 터질 텐데. 고민이구만.”

남하림이 혼자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자연히 나성저의 귓가에도 들어갔다.

하지만, 걸협오성이 은하궁 영역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뛰쳐나온 나성저에겐 곧이곧대로 들릴 말이 아니었다.

그는 걸협오성을 싸워야 할 은하궁의 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은하궁의 최종 목표는 무림일통이기에 정파 무림과는 결국 적이 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스윽-

그때.

갑자기 남하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잔뜩 경계하고 있던 나성저는 깜짝 놀랐다.

“아이고, 허리야.”

남하림은 그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두 팔을 뻗어 허리를 좌우로 돌렸다.

그렇게 이각의 시간이 지나갈 무렵.

두두두두두두두-

“아, 궁에서 사람이 나온 모양이구려.”

‘헉.’

나성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삼기단 수하와 함께 선두에서 달려오는 인물은 은하기호군 군장 곡종찬이 틀림없었다.

‘군장님이…… 왜? 후개가 와서?’

그는 순간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정파 무림을 주름잡는 은하궁 소속이라는 자부심이 너무 컸던 것이 문제였다.

‘저 새끼가……!’

달려오는 곡종찬의 눈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겨우 삼기단의 단주밖에 안 되는 놈이 건방지게 은하궁을 등에 업고 후개를 무시하고 있었다.

휘익!

그는 말 위에서 아래로 내려섰다.

저벅저벅.

나성저는 여전히 말 위에 타고 있었다.

“이봐, 내가 계속 올려봐야 하나?”

나성저는 재빨리 아래로 내려섰다.

“죄송합니다, 군장님.”

퍼어억!

곡종찬의 주먹에 나성저의 얼굴이 돌아갔다.

“네놈 주제에 후개에게 함부로 할 수 있다고 여겼나?”

“죄송합…… 니다.”

“후개이니 망정이지, 만일 다른 인물에게 이처럼 함부로 대했다면 네놈은 지금 저승길에 올라갔을 것이다. 멍청한 놈.”

“…….”

“궁에 돌아가거든 네놈의 멍청한 짓에 대해서 다시 묻도록 하겠다.”

휙!

곡종찬은 매정하게 돌아선 후, 남하림을 향해 포권을 했다.

“본 궁에서 실례를 한 것 같소이다.”

“괜찮습니다. 별일도 아닌데요.”

“궁주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궁까지는 제가 안내를 하겠습니다.”

“부탁하겠습니다.”

* * *

은하궁의 성문.

저번까지만 해도 무림맹이 깃발이 걸려 있던 곳에, 은하궁의 깃발이 펄럭거렸다.

‘유극지, 정말로 똑똑한 사람이다.’

그가 무림맹의 맹주직을 받아들인 이유가 이것이 아닐까.

‘완전 계획적이었어.’

그야말로 무림맹을 통째로 삼켜 버린 것이다.

‘이거 참 색다른 기분이군.’

예전에 찾아왔던 무림맹의 느낌이 아니었다.

구우우우웅-

육중한 성문이 열리고,

걸협오성을 맞이한 것은 처음 보는 백발의 노인이었다.

‘누구지?’

남하림은 백발노인과 시선을 마주했다.

‘허허, 혼령안을 지녔군.’

남하림의 눈동자를 본 백발노인의 표정에 한순간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혼령안 때문에 후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노부는 은하궁에서 궁주님의 잔심부름을 맡아보고 있네.”

“후개 남하림이라 합니다. 과거 무림맹에 서너 번 온 적이 있는데, 한 번도 뵙지 못한 듯하군요.”

“허허, 그때는 다른 곳에 있었다네. 노부는 무림맹 소속이 아니지 않는가.”

백발노인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남하림은 그의 웃음 뒤에 숨은 야차(夜叉)의 광기를 보았다.

‘무서운 노인네군.’

혼령안이 아니었다면 백발노인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을 것이었다.

“허허허, 후개의 눈을 보니 혼령안을 받아들인 것 같군. 기연을 어디서 얻었을꼬?”

소리장도(笑裏藏刀).

백발노인의 웃음 속에 살기가 진하게 묻어 있었다.

온몸에 닭살이 돋을 정도의 섬뜩함.

노인장이 장난 아니네.

씨익.

남하림은 미소를 지으며 백발노인의 웃음을 밀어냈다.

“후후, 그건 비밀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