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혈사천주 설백진
다수와의 대결.
황보궁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두려움이었다.
저들을 전부 이길 수 있을까?
적은 수백 명인데?
두려움에 몸이 움츠러들어야 정상 아닌가?
콰아아아아앙!
대형의 강룡십팔장은 강했다.
개방의 일절!
다가오는 족족 불사단의 용병들이 나가떨어졌다.
대형의 곁에서 용병들을 상대했다.
이제 변칙적인 움직임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용병들의 공격을 상대할 때는 화려한 초식이 불필요했다.
단순하고 효율적으로.
가장 빨리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허초와 실초.
단 두 가지 방법 사이에서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해야 했다.
“궁아, 백 명이든 만 명이든 어차피 싸우는 놈은 결국 한 놈이다. 멍청하게 가만히 서 있으면서 싸울 필요 없어.”
황보궁은 용병을 상대하면서도 대형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살펴보았다.
대형은 단 한 번도 가만히 한자리에 서서 상대하지 않았다.
용병들은 신출귀몰하게 날아다니는 대형을 쉽게 잡지 못했다.
결국 상대는 한 명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머지 형들은?’
다른 네 사람도 마찬가지.
가장 화려하게 싸우는 형은 성철각이었다.
긴 다리에서 펼쳐지는 철선각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굉장하다.’
걸협오성 중 명성에 비해 약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 오산이었다.
착각한 이는 황보궁만이 아니었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
불사단 단장 빈경무는 역위천의 전음을 들었다
[빈 단장, 물러나라.]
주군의 말을 무시했다.
다섯 명, 아니, 덩치 큰 애까지 합하면 다섯 명 반이다.
밀어붙이면 금방 끝날 것 같았는데.
이미 물러날 기회를 놓쳤다.
슈우우우욱-
빈경무의 눈동자에 공중에서 유성처럼 떨어지는 묵흑반도가 비쳤다.
천하일도(天下一刀)의 기세.
‘이건…… 주군의 일검과 비슷하다……!’
콰아아아앙!!!
바닥에 발자국 자국이 쭈욱 이어지며 일 장 정도 뒤로 밀려났다.
찌이이이잉-
철부를 타고 흐르는 감각.
양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이고,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이러다 내 밥줄 끊어지겠군!’
역위천은 내력을 끌어 올리며 소리쳤다.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불사단은 뒤로 물러나라!!”
* * *
싸움이 끝난 현장은 신음 소리로 가득했다.
“빈 단장, 자네는 다 좋은데 충성심이 너무 강해.”
“죄송합니다. 소신은 단지…….”
“알아. 내 명예를 지켜주고 싶다는 것을. 이해는 해. 다만 물러나라고 했을 때 따라야 했다.”
“주군…….”
“됐다. 어차피 일어난 일. 돌아가자. 당분간 몸을 추스르고 난 뒤 생각하자고. 용병 생활도 할 만큼 했지 않았느냐.”
“명을 따르겠습니다.”
역위천은 먼저 길을 떠난 후개의 모습을 떠올렸다.
‘시간이 부족하지 않다면 유극지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태산과도 같았던 뒷모습.
‘균천의 은하궁에 대항하기 위해…… 양천의 상 형께서 후개를 눈여겨보신 이유가 이해되는군.’
호천(昊天)의 천주인 용병왕 역위천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 * *
하남성이 들끓기 시작했다.
구천마제의 무공.
무극도신공에 이어 무극수신공까지 나타났다.
소림사의 속가제자 출신이 모이는 청산무관에 무극수신공이 있다는 소문이 갑자기 나돌았다.
그동안 걸협오성이 보여준 위력에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세력들이 소림사로 눈을 돌렸다.
얼마 후.
소림사에서 무림에 공표했다.
#NAME?
“미친…… 이젠 소림사까지. 중원이 미쳐 가는구나.”
남하림은 침상에 누워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덜컹!
객실 문을 열고 황보궁이 들어왔다.
커다란 입은 아직도 오물거리고 있었다.
“배부르냐?”
황보궁은 대답 대신 씨익 웃었다.
“대형, 밖에 사람들이 많던데요.”
“아직 미련이 많은가 보다.”
무림맹으로 가까워질수록, 그동안 눈에 띄지 않던 정파 소속 무림인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중원오문도인 ‘하북팽가, 도천문, 혈도곡, 대도문, 산서류가’를 비롯한 도문(刀門)들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궁아, 요게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할까?”
남하림이 무극도신공을 가리켰다.
“전 이게 더 좋은데요.”
황보궁은 쟁반에 육포를 하나 들어 입에 넣었다.
“흐, 그러냐?”
“하나 드릴까요?”
“괜찮아. 다른 사람들은 뭐 하고 있어?”
“객잔에서 술을 마시고 계십니다.”
“넌?”
“전 아직 어리다고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술을 마셔봤는데, 제 입맛에는 안 맞아요.”
“체질에 안 맞는 사람도 있긴 하지.”
“대형은 안 내려가세요?”
“음…….”
남하림이 어떻게 할지 생각할 때였다.
콰아아앙!
“엇!”
일 층 객잔에서 거친 소리가 터졌다.
‘터졌군.’
조용할 리 없었다.
무림맹에 가기 전까지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경쟁자는 많아지고 있었다.
“대형, 아래에서…….”
“시작됐군.”
“우리도 내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궁아. 따라와.”
“넵. 알겠습니다.”
휘익!
남하림은 객잔이 아니라 창문을 넘어 밖으로 내려섰다.
* * *
도객들이 남하림과 황보궁을 감쌌다.
대도십도(大刀十刀)로 불리는 열 명의 대도문 고수들.
“어디서 왔소?”
척.
“우린 대도문에서 왔소이다.”
중앙에 선 중년 사내.
대도문 일도 고남양이 포권했다.
“대형, 정파로 하남 남양의 도문이에요. 하북팽가처럼 중원오문도 중 한 곳이고요.”
황보인의 열렬한 사전 교육에, 황보궁도 일반적인 무림 지식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래? 잘 아는데, 고마워.”
칭찬을 받자 황보궁의 입이 함지박하게 벌어졌다.
“대도문에서 무슨 볼일로 본인을 찾아왔소이까?”
“후개, 무극도신공을 잠시 볼 수 있을까 해서 왔소이다.”
“하.”
남하림은 조소를 흘렸다.
잠시 보겠다는 말.
차라리 사실대로 달라고 했다면 비웃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말이 우스운 모양이군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한다면 내가 왜 웃었는지 아실 겁니다.”
고남양은 눈썹에 힘을 주었다.
“그대가 상대했던 자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린 다를 것이외다.”
그 말대로 그들은 한 명, 한 명의 내력이 이미 절정에 이를 만큼 강했다.
대도문의 힘은 대도십도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궁아, 뒤로 물러나라.”
황보궁은 두말없이 떨어졌다.
저들이 강하다고 해도 대형을 이길 수 없다.
‘대형은 용병왕까지 꺾은 분이라고!’
남하림은 몸을 가볍게 털었다.
“휴우…… 당신들이 정파라고 해서 봐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인 건 알지요?”
“후개,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외다.”
“잘됐군요. 금방 우리가 나눈 말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들었을 거고.”
짝!
남하림이 박수를 쳤다.
“먼저 갑니다.”
타앗!
휘이이이잉-
만리추풍신법이 쏟아졌다.
남하림의 신형이 분신술을 쓴 듯 대도십도 앞에 나타났다.
타앗! 타앗!
좌측에서. 우측에서. 전방에서. 후방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구용성의 움직임을 응용한 움직임.
‘이거 꽤 유용한걸.’
일초도 지나지 않는 찰나.
고남양의 눈이 더 이상 뜨일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커억!”
그의 뒤로 아홉 명의 대도십도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으니까.
“후…… 개. 무슨 사술이냐?”
“그게 만리추풍신법의 초음극의(超音極義)라는 것이오.”
개방의 무공이라고? 이게?
“개방에 이런…… 절기가…… 있을 수 없는 일이외다…….”
“큰일 날 사람이군요. 당신이 천하제일대개방의 무공에 대해 얼마나 안다는 말인지. 타구봉법을 보면 놀라 자빠지겠군.”
허리춤에서 빼낸 타구봉에 내력을 흘려보냈다.
검보다 날카로운 것 같은 기세.
우우우우우웅-
타구봉 끝에 뭉친 강기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고남용을 납작하게 눌러버릴 듯한 타구봉의 강기.
한 번도 보지 못한 타구봉법에 몸이 떨렸다.
슈우우웅-
“헛!”
고남용이 차원이 다른 강기를 멍하게 쳐다보고 있는 사이.
어느새 타구봉이 그를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막아야 해!’
고남용은 이를 악물고 대도를 올려쳤다.
그의 대도에도 절정에 어울리는 강기가 흘렀지만.
쿠우우웅-!
굉음과 함께 내장이 쏟아지는 듯한 충격이 온몸에 퍼졌다.
‘젠…… 장…….’
정신이 점점 사라져 갔다.
이윽고.
휘릭!
다섯 사람이 객잔을 빠져나왔다.
이미 안에서도 정리가 끝난 듯 사위가 조용했다.
“하림 형, 벌써 끝났어요?”
“열 명밖에 안 되잖아.”
“저놈들은…… 대도문 같네요?”
“대도십도라더군. 안은 누구였지?”
“혈도곡에서 나왔다던데요.”
“유도야. 어디 적어놔라. 시간 날 때 따지러 가야겠다.”
“알겠어요.”
남하림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 * *
화르르르-
객잔 앞에 불을 피웠다.
남하림의 손에 무극도신공이 들려 있었다.
‘아…… 저…… 미친놈.’
찌이익!
한 장씩 찢은 후 불속에 던져 넣었다.
화르륵!
종이가 불에 떨어질 때마다 불꽃이 잠시 강하게 타올랐다.
벌써 반쯤 찢겨 나가 너덜너덜해진 무공서..
“후개…… 너무하지 않나? 그건 무극도신공일세…….”
“아닙니다. 이건 괴공서입니다. 착한 사람의 마음에 악함이 스며들도록 만드는 괴공서요. 이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물건입니다.”
찌이이익!
종이 두 장이 다시 불속에 던져졌다.
휘익!
타닥, 타닥.
표지와 남은 한 장까지도 불에 타 한 줌의 재로 흩날렸다.
화르륵!
꺼져가던 불꽃이 다시 살아났다.
“아하하! 속이 시원하구만!”
남하림이 대소를 터뜨렸다.
구천마제의 사대절학 무극도신공이 중원에서 사라지는 순간.
“모두들 봤지요? 이젠 나에게 없습니다.”
남하림의 밝은 목소리가 울렸지만, 주변에서 그들을 염탐하던 인물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굳어 있었다.
‘저 새끼…… 혼자 신났어.’
‘세상에서 제일 겁나는 게 미친 거지라고 하더만.’
‘사실이었어.’
훠이. 훠이.
남하림은 양손으로 휘휘 내저었다.
“이제 그만들 가시오. 무극도신공은 더 이상 없소이다.”
떠나라는 성화에, 결국 하나둘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이제야 홀가분하네. 진작 불태워 버릴걸!”
객잔의 앞마당을 물러나는 인물들은 남하림의 웃음소리가 짜증 났다.
‘불태울 바에야 차라리 아무한테나 주면 되잖아!’
멀리서 이 장면을 보던 한 사람 또한 노기가 충천했다.
‘감히…… 천황님의 물건을……!’
사내의 임무는 무극도신공을 찾아오는 것.
남하림에게 무극도신공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에 잔챙이들이 많길래 그들을 처리할 때까지 기다린 것이 실수였다.
빠드득.
‘후개, 이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 * *
한 줌의 재가 되어버린 무극도신공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남하림의 행동에 대해 호사가들의 이런저런 소리 또한 얹어졌다.
하지만 이것만은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짓을 했다.
후개의 머릿속을 보고 싶군.
무림맹으로 가는 남하림의 발걸음으 날아갈 듯 가벼웠다.
‘흐. 대도문과 혈곡문이 제때 잘 나타나줬어. 공개적으로 불에 태울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말이지.’
만족스러운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뒤에서 보기에도 남하림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저놈……. 작정을 한 게 틀림없군.’
만통자는 어제부터 화가 진정되지 않았다.
‘천주가 한 소리 하겠어.’
후개에게 무극도신공이 있음을 알고 곧바로 달려왔다.
현천의 정체를 밝히며 황제의 명이라고 하면 얻어내기 어렵지 않을 거라 확신했건만.
불에 태워 버릴 줄은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멈칫.
만통자가 걸음을 멈췄다.
“멈춰!”
여섯 명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만통자를 바라보았다.
부들부들.
만통자의 눈동자와 손이 떨렸다.
‘어딜 보는 거지?’
남하림은 전방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특별한 사람은 없었다.
특이한 기를 가진 사람도 없었다.
이상한 느낌을 주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저 사람을 보는 것 같은데. 누구지?’
만통자를 긴장시킬 정도의 인물.
중원 무림에 누가 있을까?
만통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후개…… 잘 들어라. 저기…… 저자는…….”
만통자가 가리킨 인물.
나무 아래에서 발을 뻗은 채 길게 앉아 있는 중년인.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얼굴이지만, 실제 그의 나이는 육십에 가까웠다.
너무나 젊은 모습에 만통자조차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그가 분명했다.
“혈사천의 수장이자 천사회 수장인 혈사천주 설백진이다.”
“혈사천주…… 저자가?”
“……혈사천은 구천의 유천(幽天)이기도 하지.”
휘익.
나무 아래에 앉아 있던 그가 일어났다.
혈사천주 설백진.
슈우우우욱-
서 있는 자체만으로도 무한의 압력을 뿜어내는 자.
걸음은 가벼웠지만…….
쿵, 쿵.
귓가에 발소리가 울렸다.
남하림은 그를 똑바로 보았다.
‘무림맹주도 대단하지만…… 혈사천주도 그에 못지않아.’
그저 감탄만 나올 뿐.
남하림이 설백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혀어어어엉…….”
팽유도가 떨리는 목소리로 남하림을 붙잡았다.
혈사천주의 기세에 눌려 다들 발을 떼지 못하고 있는 상황.
길가에 마주 선 두 사람.
“후개, 혈군사를 많이 괴롭혔다고 하더군.”
“……어른이 치사하게 일러바친 모양이군요.”
치사하다? 혈군사가?
강렬하던 설백진의 눈에 웃음기가 서렸다.
“하하하하!”
곧바로 대소가 터졌다.
후개 남하림.
듣던 대로 대단한 녀석이다.
이제, 천외천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