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구천비밀
만통자의 침이 튀었다.
쉴 새 없이 설명이 이어졌다.
처음 듣는 무림의 비사.
흥미로웠다.
방바닥에 누워 있는 손자를 재울 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신기한 이야기였다.
아홉 개로 이루어진 구천(九天)이 무림을 조용히 다스리고 있었다는 것.
무림은 그렇게 오랫동안 구천의 그늘 아래 존재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며, 구천은 방관자로 변해갔다.
그러는 사이.
구파일방과 십대세가, 마교와 사파의 힘이 점점 커지며 구천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구천마제가 구천마성을 세웠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구천의 힘을 한곳에 모아 무림을 재정비하려고 했던 것.
‘중요하지 않아.’
하나 구천이 무엇을 위해, 왜,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남하림에겐 상관없는 문제였다.
남하림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만통자는 솔직히 특별한 반응을 기대했다.
누가 들어도 까무러칠 듯한 무림의 숨은 비사들이다.
남하림은 간간히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부분을 빼고는 흘려버리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통자는 내심 실망했다.
“네 녀석에게는 그다지 놀랄 정도는 아닌 모양이군.”
“재미는 있네요. 흥미도 있고. 특히 상무우 사부가 양천이었다니 당연 놀라지 않을 수 없고요.”
뭐랄까?
귀찮은 듯했다.
그냥 하기 싫은데 해야 하는 것처럼 의무적 대답.
‘쩝. 놀랍다는 녀석이 반응이 왜 이래?’
시큰둥한 반응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놈은 잘나가다 이유 없이 샛길로 빠져 버리는 게,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관심이 없다는 것이냐?”
“관심이야 당연히 있죠. 다만 노인장께서 해준 이야기에선 내가 궁금해하고 있는 문제의 답들이 전혀 나오지 않아요.”
“무엇이 궁금하다는 것이더냐? 전부 말했거늘.”
“노인장이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창천의 수장이 구천마제라 하지만 그의 신분을 모른다고.”
“그렇긴 하지. 그래도 창천이라는 것을 알지 알았느냐?”
남하림은 잠깐 대답을 멈춘 뒤 말을 이었다.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그가 창천이든 현천이든 어떤 인물인지 존재 자체를 모르는데. 참 답답하시네요.”
‘흠.’
똑바로 노려보는 남하림의 시선에 주눅이 들었을까.
‘주눅이 들어? 허어…… 눈빛이 이렇게 매서웠나?’
내 신세. 답답하다는 소리도 듣고 있다.
젠장. 화도 못 내겠군.
게다가 화를 내고 싶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맹주와 혈사천주, 또 누구냐? 아…… 군사와 혈군사, 그 양반들도 구천의 일원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이상 해결될 수 없어요.”
“그게 구천마제의 존재라는 것이냐?”
“그것 말고 다른 게 있습니까?”
아니…… 없었다.
만통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구천의 인물조차도 가장 궁금한 문제가 그것이니까.
그러기에 구천신품을 찾고자 했다.
온 중원을 다니면서 찾고자 했지만 보이지 않던 구천신품.
그런데 이십 년의 시간이 지난 후 거짓말처럼 구천신품이 나타났고, 최근에는 구천마제의 무공까지 무림에 나타났다.
왜 이십 년일까?
고민이 멈추었다.
남하림이 툭 말을 던졌다.
“이제 진짜로 내 앞에 온 이유를 말하세요.”
쿵!
만통자는 가슴이 철렁했다.
알고 있었어.
여우같이 모른 척하면서 내가 어떻게 나올지 보고 있었군.
“만통자의 별호는 내가 아니라 후개에게 필요하겠군.”
“정중하게 사양하겠습니다.”
만통자의 얼굴에 평소와 달리 힘이 들어갔다.
“내가 온 건 네가 가지고 있는 무극도신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노인장도 도둑이군요.”
화락!
만통자의 백회혈에서 김이 솟구치는 듯했다.
“누굴 보고 도둑이라는 것이냐?”
“예전에 그 누구냐? 화산파에서 그 여자도 도둑이더니…… 노인장도 역시 한패이니 도둑이 맞네요.”
“뭣이라? 지금 네가 못 하는 말이 없구나. 누구에게 망발을 하는 게냐?”
만통자가 벌컥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본색이 나오는군요.”
스윽-
남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번 해볼까요? 이 자리에서? 아니면 밖에서?”
비웃는 조소.
남하림의 목소리에 만통자는 부들거렸다.
“후개, 우리를 적으로 삼으면 큰일 날 것이다. 후회할지도 모른다.”
“현천이라는 곳이 대단한 곳인가 보네요.”
만통자가 알려준 구천.
맹주 유극지의 은하궁이 균천이며,
군사 제갈령의 제갈세가가 염천이듯.
현천도 이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구천의 존재들은 중원 어딘가에서 또 다른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후개, 현천…… 은…….”
만통자는 사실대로 알려줘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무극도신공을 받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겠지.
“현천은 황궁수천(皇宮守天)이다.”
남하림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상상외의 대답.
중원 무림의 문파나 세력이라 예상했는데.
“황제를 수호하는 조직이지.”
“그렇군요.”
“약간 놀란 모양이지?”
“놀라기는 했어요. 현천의 수장이 황제일 줄은 몰랐거든요.”
“잘못 알고 있다. 물론 황제의 명을 받기는 하지. 다만 그는 현천의 보호를 받는 인물일 뿐이네. 현천의 천주는 따로 계시지.”
남하림은 단번에 의문을 가졌다.
황제가 아니라고?
황궁수천이라 해서 황제를 수호하는 세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의외네요. 황제는 보호를 받을 뿐 수장은 아니다?”
이거…… 엄청난 조직이잖아.
황제를 협박한다면 하지 못할 게 없을 터.
“지금까지 들은 말들 중에서 제일 놀랍네요.”
“허허허, 현천이 어떠한 곳인지 알겠느냐? 황제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느니라.”
“……엄청 피곤한 곳이네요.
중원 무림에 황궁이 나선다면 귀찮은 일이 많이 생길 수 있었다.
“황제가 그 무공을 원하는 모양이더구나.”
찌끈.
남하림은 머리가 아파왔다.
정사에 바쁜 황제가 괜히 필요하지도 않을 무극도신공을 챙긴다는 건 말이 맞지 않았다.
황제는 무공이 필요 없음에도, 괜히 그 이름을 들먹이는 것이었다.
“황제에게 가시거든 선약이 있어서 어쩔 수 없다고 전해주세요.”
황제까지도 바로 무시해 버렸다.
‘황당한 녀석이야.’
“후개, 무극도신공을 군사에게 주면 안 되네. 그에게 주는 건 무림맹이 아니라 염천에게 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하하!”
남하림은 웃었다.
사람들은 항상 자신밖에 생각하지 않눈군.
그래도 만통자는 조금 다를 것이라 여겼건만.
흔들흔들.
그에 대한 실망에 남하림은 고개를 내저었다.
“염천은 안 되고 현천에게 주는 것은 괜찮은 모양이죠?”
“우린 그들처럼 무림에 뜻이 없기 때문이지 않느냐? 천주께서는 항상 무림의 안녕을 위하는 분이시다.”
만통자는 무극도신공을 받아야 하는 정당성을 주장했다.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세상에 나는 해도 되고 타인이 하면 안 되는 것은 없다.
남하림은 곧바로 거절했다.
“미안합니다. 나에게는 두 곳 모두 같은 구천입니다.”
“허어…… 그토록 무림맹을 믿지 말라고 했건만. 정녕 무극도신공을 바치겠다는 것이냐? 그동안 구천신품도 몇 개나 바치고선.”
“됐습니다. 남의 일에 굳이 신경을 안 쓰셔도 됩니다.”
“고얀 놈.”
휙.
만통자는 뒤를 돌아섰다.
“멀리 안 나가겠습니다.”
“흥. 누가 간다고 하더냐? 나도 무림맹에 갈 테니 그리 알아라.”
“몰래 훔쳐갈 생각이라면 잘못 생각하시는 겁니다.”
“이 자식이…… 자꾸 도둑으로 볼 테냐?”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 * *
펄럭!
언제부터인지 몰랐다.
중원의 수많은 각 성마다 흑창기(黑蒼旗)가 성문에 휘날렸다.
복양성의 성문 누각 위.
‘큰일이다. 창천이 일어났다.’
흑창기는 곧 창천(蒼天)이다.
이십 년 동안 잠자고 있던 흑창기가 걸려 펄럭이고 있다는 것은 창천이 움직인다는 신호였다.
중원 무림인들은 몰랐다.
이십 년 전, 그 싸움은 중원 무림이 강해서 이긴 게 아니었다.
중원 연합 무림과 싸우기 전 창천의 힘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그럼에도 무림은 구천마성의 힘에 밀릴 뻔했다.
당시 구천마성의 일축을 이루었던 아홉 성 중 네 개의 성.
은하성 무림맹주 유극지.
천사성 혈사천주 설백진.
주작성 혈군사 기성.
화백성 무림군사 제갈령.
이들이 중원 무림의 편으로 가지 않았다면, 창천의 힘이 없다고 한들 구천마성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당황한 것 같은데.’
만통자의 당황한 시선을 따라간 남하림이 흑창기를 보았다.
펄럭펄럭.
“노인장, 저 깃발이 뭡니까?”
“……흑창기라고 한다. 네 녀석은 처음 보겠지. 하지만 이십 년 전에는 중원 무림인들이 수없이 봤을 깃발이다.”
“이십 년 전이라면…… 구천마제와 관련된 모양이군요.”
“눈치는 빠르군. 개방의 거지라서 그런가?”
“개방이 눈칫밥만 먹는 줄 아십니까?”
“흥, 한마디도 안 지는군.”
“노인장은 좋지 않는 습관이 있으시네요. 굳이 승패를 따지지 말고 세상을 너그럽게 보세요. 내일모레면 언제 떠나실지 모르는 분이…….”
“참…… 말도 예쁘게 한다.”
남하림을 보며 ‘에라이, 썩을 놈이’라고 소리칠 뻔했다.
“흑창기는 구천마제와 연관되어 있지만, 실은 창천의 깃발이다. 성문에 꽂혔다는 것은 창천이 무림에서 움직일 거라는 뜻이지.”
“창천이라던 천령자는 이미 움직이지 않았나요?”
당문에서 만났던 인물.
천령자는 아미파를 이용해 사천을 어지럽게 만들고자 했었다.
“맞다. 아마 그때는 비밀리에 움직였겠지. 하지만 지금 저기 깃발을 꽂아 놓은 것을 보면, 예전 창천의 힘을 다시 모으겠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천사회와는 다른가요?”
“창천은 강하다. 당문에서 보지 않았느냐? 천령자란 놈들은 창천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녀석들이다.”
아직 만통자의 입에서 나오지 못한 마지막 말.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후개,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창천이 움직인다는 의미는 구천마제의 명을 받았다는 뜻이다.”
만통자와 남하림의 시선이 마주쳤다.
‘눈빛이 흔들리고 있어.’
만통자가 두려워하고 있었다.
구천마제가 살아 있다는 확신이 없는 마당에, 추측만으로 겁을 먹는 모습이라니.
‘정말 강한 인물인 모양이군.’
만통자가 두려움에 떨 정도의 인물.
“후개…… 내가 왜 겁이 나는지 아는가?”
구천마제가 강해서 겁을 내는 것이 아닌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건가?
만통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구천마제가 한마디 남긴 말이 있다. ‘만일 내가 다시 중원에 나가는 날이 온다면 무림은 사라질 것이다’.”
……무림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사무치기에 말살까지 언급한 것인지.
다른 인물이었다면 웃고 넘어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구천마제라면 정말 가능할지도 모른다.
“정말로 살아 있다면 우린 망하는 거네요.”
“제대로 망하겠지…….”
“그래도 모르죠. 무림맹주께서 확실히 죽였다고 했으니…… 믿어보죠.”
“훗.”
만통자의 웃음이 튀어나왔다.
무림맹주를 믿는 후개가 순진해 보였다.
“후개, 정말로 맹주의 말을 믿는 모양이지? 네놈도 그의 말의 구멍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 않느냐?”
“믿어봐야죠.”
‘믿어본다라…….’
거짓을 알면서 믿는다는 말인지.
아니면 확실하지 않기에 우선 믿는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스륵.
남하림은 애매한 대답을 툭 던지고 성문에 들어섰다.
* * *
정문을 향해 노려보는 시선.
‘저들이군.’
며칠 동안 후개가 복양성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가볼까.
중년 사내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벅지에 찬 요대에 불사검(不死劍)이 흔들거렸다.
저벅저벅.
중년 사내의 발걸음에 힘이 느껴졌다.
반들거리는 거지복을 입은 후개.
점점 거리가 가까워졌다.
‘벌써…… 내 기를 읽었군.’
몇 걸음 걸어가지 않았다.
내력도 없이 평범하게 걸었거늘.
‘살기?’
심지어 히죽 웃는 저놈의 미소에 묻어 있는 것은 살기가 분명했다.
자신도 모르게 허벅지에서 흔들거리는 불사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다섯 명의 눈빛이 그에게 집중됐다.
불사검을 잡아당기는 순간.
한 명도 아닌 다섯 명 모두가 동시에 달려들 것 같았다.
쯧, 너무 쉽게 생각했군.
귀찮게 줄줄 데리고 올 필요 없다고 자신했건만.
걸협오성의 기에 눌리고 있다.
휘이이익-
중년인은 고개를 숙이며 그들을 지나쳤다.
중원의 용병왕이라는 ‘불사무혼 역위천’이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이 사실은 누가 알면 대단히 쪽팔릴 일이었다.
“저어…… 혹시 용병왕이 아니십니까?”
뚝.
역위천은 걸음을 멈추었다.
저놈들은 자신을 알고 있었다.
쯧, 일부러 어떻게 하는지 보고 있었던 거야.
후개는 상당히 약은 놈이 틀림없었다.
역위천이 천천히 돌아섰다.
“맞네. 본인이 역위천이네. 그대가 후개군.”
“용병왕의 위명은 많이 들었습니다. 남하림입니다. 반갑습니다.”
남하림이 곧바로 예로 포권을 했다.
“후개는 본인을 어떻게 알아보았나?”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화경에 든 분들 중에서 허벅지에 검을 차고 다니는 무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용병왕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눈썰미가 정말 좋군.”
역위천은 인정을 했다.
“용병왕의 칭찬도 받아 보는군요.”
“사실이니깐.”
만통자는 몇 발자국 떨어진 뒤에서 상황을 살폈다.
그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용병왕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용병왕이 이 시간에 우연히 나타날 수 없다.
후개를 찾아온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을 터.
이자도 무극도신공을 노리고 있다.
‘허어…… 자신의 물건이 아니면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하거늘.’
만통자는 지금까지 자신도 이와 같은 상황이었다는 것을 또 잊어버렸다.
마주 보고 선 남하림과 역위천이 서로의 내력을 살폈다.
‘음.’
용병왕의 무위에 대해 논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남하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자도 무극도신공을 원하는 것인가?
용병왕이라면 최소한 무림에서 한 획을 긋는 무림강자였다.
웃기는군.
무극도신공이 용병왕까지 끌어당길 줄이야.
앞으로 얼마나 별의별 사람들이 몰려들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럼, 가던 길 가시지요.”
귀찮아진 남하림은 산뜻하게 말했다.
이걸로 끝나면 편하고 좋지 뭐.
‘가던 길을 가라고?’
역위천은 검을 잡은 이후 이처럼 모독을 받은 적이 없었다.
“……자네, 사람 열받게 하는 재주가 상당히 뛰어나구만.”
낮게 으르렁거리는 역위천의 말에도 여상히 미소 짓는 남하림과 달리, 만통자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역시 나만 열받는 게 아니었구먼. 저 녀석이 원래 저런 성질머리여서 그랬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