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황보궁을 맡다
오…… 저들이 걸협오성이군.
기개가 달라.
멀리서만 보던 걸협오성이 자신들 앞을 지나가는 모습.
황보세가 일개 무인인 그들이 봐도 다섯 명은 하늘과 같았다.
감탄과 존경이 섞인 시선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황보인은 가주전으로 걸협오성과 함게 들어섰다.
“자리에 앉게.”
남하림은 의자에 앉았다.
어린아이가 어른 의자에 앉는 듯한 느낌.
‘흠.’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자신뿐만 아니었다.
다른 네 명도 마찬가지.
‘의자가 큰 게 맞구나.’
황보세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큰 신체를 지니고 있었다.
“허어…… 의자가 조금 크지 않는가?”
“널찍해서 좋습니다.”
황보인은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말하는 후개가 마음에 들었다.
“개방에서 도움을 줘서 고맙네. 때마침 오지 않았다면 큰 낭패를 당할 뻔했네.”
“개방이 없어도 황보세가는 이겼을 것입니다.”
황보인은 미소를 지었다.
겸손까지 했다.
훌륭한 인성까지 갖춘 진정한 걸협이 아닌가.
“후개, 바로 물어봐도 되겠는가?”
“괜찮습니다. 말을 하세요.”
“개방에서 우리 본 세가를 위해 도움을 준 이유가 있을 것이라 보네.”
황보인의 눈빛에 기대감이 비쳤다.
예상하는 답이 아닌 다른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
후개는 남들과 다른 대답을 하지 않을까?
“무극도신공이었다면 답이 되겠습니까?”
“단지 그 이유였던가?”
“실망인가 보네요.”
내가 실망을……?
거창한 이유가 있기를 바랐는지 몰랐다.
후개라면 더 중요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을지도.
“그대도 무극도신공에 욕심이 있는 모양이지?”
기대감이 무너진 느낌에 황보인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가주님. 전 개방의 후개입니다. 배부르고 등 따시고 하루에 목욕만 하면 부러울 게 없지요.”
“그럼…… 관심이 없다는 말인가? 그런 사람이 무극도신공을 원하는 이유가 뭔가?”
“가주님도 아시다시피 피바람 부는 물건을 가질 이유가 있습니까? 산동제일 황보세가가 무엇이 아쉽다고 무극도신공에 연연하겠습니까.”
“흐음.”
산동제일세가란 말에 딱딱해졌던 목소리가 다시 풀렸다.
“그렇지. 아암, 우린 그저 무림에 분란을 막고자 했을 뿐이네.”
“제가 군사에게 이상한 방법으로 코를 꿰이는 바람에 심부름꾼이 되어버렸습니다.”
“군사라면 무림맹의 제갈 군사를 말하는 것인가?”
“맞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무극도신공이 무림에 돌아다니면 시끄럽게 되니 가지고 오라더군요.”
후개는 단지 스스로를 심부름꾼이라 자청했다.
황보인은 안심이 되었다.
무림맹이라면 충분히 명분이 있었다.
황보세가의 명예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넘겨줄 수 있을 터.
스윽.
황보인은 품에서 한 권의 책자를 꺼냈다.
무극도신공.
구천마제의 무공이 두 번째로 눈앞에 나타났다.
“여기 있네. 군사에게 가져다주게. 후개, 그대라면 맡길 수 있겠군.”
“저를 믿어줘서 고맙습니다.”
남하림은 무공서를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 * *
‘이거 마음에 안드는데.’
가주전이 내려다보이는 황보세가의 건물 위.
청극도왕 윤고중을 죽였던 청년이 비딱한 눈길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청년이 고개를 옆으로 내저었다.
생각지 못한 의외의 인물이 튀어나왔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연합사문이 황보세가를 완전히 찢어놓아야 했다.
그 후 연합세가가 서로 피 터지게 싸운 다음.
무극도신공은 산동악가로 넘어가야 했다.
완벽한 계획이 개방의 거지들이 끼어들면서 틀어졌다.
‘할 수 없군. 저놈이 가지고 나올 때 다시 빼앗아서 다른 놈에게 줘야겠어.’
스륵.
어라.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상황이지?
“큭.”
청년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누군가에 뒤를 잡힐 줄은 몰랐다.
“이상한 놈이군.”
차가운 목소리에 뒷골이 싸늘해졌다.
세상에 이런 기운을 가진 놈은 천살성밖에 없다.
천살성.
그럼 이놈은……!
“한심걸이군. 걸협오성이 대단한 이유를 알겠어. 크큭.”
청년은 여유롭게 뒤로 돌아섰다.
설마 별일이 있을까.
한심걸이 대단하다고 하나, 그만큼 자신이 있으니깐.
스걱-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귀를 스쳤다.
‘허엇!’
청년은 허리를 돌렸다.
태극흑검은 정확히 한 치가 모자랐다.
스윽.
가슴 부위 상의에 실선이 생기며 속옷이 보였다.
“이…… 자식이…….”
청년이 눈썹을 찡그리며 노기를 뿜었다.
“한심걸, 죽고 싶은 거냐?”
파아아앗!
단숨에 일으킨 내력의 크기가 위협적이다.
이휘연이 반 발짝 물러나게 만들 정도.
‘부장…… 과 비슷하다.’
이휘연이 본 남하림의 내력은 절대로 정상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눈앞의 청년도 마찬가지였다.
괴물들이 왜 이리 주변에 많은지.
남들의 시선에 나도 괴물이거늘.
이들에 비하면 어린애 수준이다.
자신이 비록 천살성이라 할지라도, 세상에는 괴물 같은 놈들이 더 많이 있었다.
이제 천살성이라는 것은 이휘연이 자신을 괴롭힐 이유가 되지 못했다.
“어이, 한심걸. 웬만하면 싸워주겠는데, 지금은 좀 곤란해. 우리 다음에 제대로 겨뤄보자고.”
파앗!
청년의 신형이 사라졌다.
“……빠르군.”
천살성의 기감을 지닌 이휘연도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
“확실한 건 저놈도 좋은 놈이 아니군. 부장이 갈수록 강해져서 위험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게 안일했어. 저런 놈들이 계속 나타난다면…… 부장을 도우려면 우리도 좀 더 수련해야겠군.”
* * *
드륵-
밖으로 다급하게 나갔던 이휘연이 들어왔다.
별다른 표정이 없는 이휘연의 얼굴.
하지만 남하림은 알았다.
“휘연 형의 심각한 표정을 보니 잘 안 된 모양이구나.”
“강한 녀석이었다. 부장만큼.”
“나만큼? 갑자기 궁금해지는걸?”
“조만간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 그런 놈들은 항상 주위를 살피다가 나타나잖아.”
“하긴, 몇 놈이 있었지. 수고했어.”
남하림은 확실히 깨달았다.
구천마제의 무공은 우연히 발견되는 게 아니었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무공.
만일 그것까지 중원에 나타난다면…….
중원은 대혼란의 시기로 접어들 것이다.
아니, 이미 혼란에 빠져들지 않았나.
‘세상은 너무 피곤하구나.’
황보인 또한 옆에서 걸협오성의 대화를 들었다.
중간에 조용히 빠져나가는 이휘연을 보면서도 그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누가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음을 인지 못 했으니까.
이들 다섯 명은 훨씬 전에 자신의 능력을 아득히 뛰어넘어 있었다.
* * *
문령의 손에 들린 한 장의 서신.
발신자는 혈군사 기성.
서신에는 해야 할 일이 적혀 있었다.
#NAME?
한 줄의 간단한 명령과 무극도신공이 있는 장소가 적혀 있었다.
황보세가.
그리고 눈에 띄는 이름.
걸협오성.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꽈아악!
서신이 가루로 만들어 버릴 듯 힘을 주었다.
그를 보는 주작령존의 시선은 염려스러웠다.
“몸은 괜찮으냐?”
“완전히 나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에게 가겠군.”
“무극도신공을 찾아서 가지고 올 것입니다.”
“주천암신(朱天暗臣)의 명 때문이냐, 아니면 그들에 대한 복수 때문이냐?”
“그건 제 운명입니다. 주작령은 명을 수행할 뿐입니다.”
주작령존은 가슴이 아팠다.
임무를 위해 한 명씩 주천을 나간 아이들이 몇이었던가.
그들 중에서 돌아온 주작령은 한 명도 없었다.
‘이 아이도…….’
자신도 주작령존이라는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거늘.
주천암신에게 주작령은 바둑판 위에서 놀아나는 바둑돌일 뿐.
불쌍한지고…….
그의 가슴이 답답해져 갔다.
* * *
나이 열일곱.
청년이라고 하기에 아직 어렸다.
하나,
키는 성철각보다 작아도 그들 가운데 가장 덩치가 좋았다.
황보인의 늦둥이 막내아들.
황보궁이 어깨에 커다란 가방을 맸다.
황보세가를 떠나기 전, 황보인이 간곡한 부탁했다.
남하림은 당연히 열입곱밖에 안 된 어린 녀석의 보모가 되기 싫었다.
정중하게 거절을 하려던 찰나,
남하림에 눈에 모습을 드러낸 황보궁이 딱 들어왔다.
오우…… 딱 짐꾼으로 쓰면 좋겠네.
“궁아.”
“넵, 대형.”
막내로 자랐는지 붙임성이 좋았다.
몇 시진도 지나지 않아 남하림을 대형이라 부르며 따랐다.
“힘들지 않아?”
“가벼운데요?”
“넌 뭘 먹고 덩치가 좋으냐?”
“전…… 소식을 해요.”
“소식(小食)?”
“네. 일단 아침에 간단히 육향으로 된 고기전을 딱 한 그릇만 먹고, 점심 먹기 전에 간단히 육전이 든 소면을 먹어요. 점심이 되면…….”
……하루 여섯 끼?
“그만해라.”
“아…… 네에…… 대형.”
슥 눈치를 보던 황보궁이 슬쩍 팽유도에게 다가섰다.
“유도 형, 소식(小食)이 잘못된 거야?”
“뭐어…… 그렇다기보단 궁이가 말한 소식과 우리가 아는 소식이 다를 뿐이지.”
남하림은 어이가 없었다.
당했어.
누가 황보세가가 무식하게 힘만 쓴다고 했지?
이번 경우처럼 터무니없이 당한 적은 없었다.
손에 든 몇 푼 안 되는 돈주머니.
황보인이 얼마 되지 않는다며 건네주었을 때 설마 했다.
하루도 안 돼서 밥값으로 전부 나갈 게 분명했다.
‘따로 기재를 해놔야겠어.’
“저어…… 대형.”
“무슨 일이냐?”
“우리 밥 언제 먹나요? 아까부터 배가 고파서요.”
순간 남하림은 황보궁을 보며 네가 거지냐고 소리칠 뻔했다.
* * *
하남으로 향하는 길목을 따라 중원에 흐르는 소문.
#NAME?
“이것들이…….정말…….”
개방의 후개 귀에 소문이 안 들어갈리 없다.
염려는 했다만.
은연중에 소문이 나돈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 피곤해질 수 있겠어.”
“군사에게 이야기해서 가지고 가라고 하면 안 될까?”
“믿을 놈이 없다고 하잖아. 아니, 무림맹 군사가 되어가지고 믿을 놈이 없다는 게 말이 되냐고. 사람이 진실성이 없으니깐 중요할 때 옆에 사람이 없는 거라고.”
후룹!
남하림은 투덜거리며 옆 탁자에 아직 식사 중인 황보궁을 바라봤다.
‘먹긴 시원하게 잘 먹네.’
먹는 모습은 귀엽긴 했다.
덩치만 컸지 아직 애였다.
“형들, 여기 진짜 맛있는 집이네요. 다음에도 한 번 더 오고 싶어요.”
“너 머리 좋냐?”
“아뇨. 공부하다 보면 자꾸 까먹어요.”
“그럼 여기 동네하고 객잔 이름을 적어놔라.”
“아…… 아하,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대형은 역시 최고입니다.”
“이건 덩치 큰 철각 형을 보는 것 같네.”
“하하하, 내가 그렇게 귀여웠어?”
한편 객잔에 들어설 때부터 이휘연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주위에서 흐르는 따가운 기.
그렇다고 모두 죽일 순 없었다.
차라리 살기였다면 움직였을 텐데.
“부장, 여기서도 전부 우릴 노려보는 것 같군.”
“알고 있어요. 주의하면서 반격하는 수밖에 없겠어요.”
“그렇게 하지.”
남하림은 다시 황보궁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진지한 표정.
“황보궁.”
“넵. 대형.”
황보궁도 눈치가 없지 않았다.
“실전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잘하면 오늘 실전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네가 굳이 나설 필요는 없지만, 황보 가주가 널 우리에게 맡긴 이유를 알지?”
“네엡. 잘 압니다. 아버지께서 열심히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일단 오늘은 한 가지만 가르쳐 주겠다.”
“알겠습니다.”
“첫 번째 주먹을 쥐고.”
“쥐고…….”
“눈에 보이는 대로 온 힘을 다해 쳐라. 이해했지?”
“이해했습니다.”
“머리가 좋군.”
“헤헤헤, 대형에게 칭찬을 받으니 좋네요.”
* * *
밤이 깊었다.
멀뚱멀뚱.
황보궁은 남하림과 함께 방을 썼다.
집을 떠나서 잠을 자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라.”
‘에고. 어떻게 알았지?’
침상에서 조용하기에 자는 줄 알았다.
“밖을 돌아다니다 보면 잠을 자고 싶어도 못 자는 경우가 있다. 무림인들은 잘 수 있을 때 푹 자야 한다고.”
“아…… 넵. 알겠습니다.”
황보궁은 억지로라도 자기 위해 눈을 꼭 감았다.
‘푸훗.’
억지로 자기 위해 숫자를 세는 모습이 귀여웠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잠결에 누군가 건드리는 느낌.
황보궁이 눈을 뜨는 동시에, 남하림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일어나.”
아…….
깊은 밤에 깨울 때는 한 가지 이유 밖에 없다.
“적인가요?”
“맞다. 아까 가르쳐 준 그대로 하면 돼.”
끄덕끄덕.
밖에 나온 지 하루 만에 실전이라니.
흥분되기도 하고 떨리기도 했다.
“강호초행 때 왜 많이 다치는 줄 아냐? 그건 무작정 흥분해서야.”
황보궁은 숨을 크게 내쉬고 가슴을 진정시켰다.
“옳지, 잘했어. 이젠 정신을 집중한다. 적이 들어오는 순간까지 집중을 풀면 안 되고.”
끄덕끄덕.
황보궁은 주먹에 힘을 주며 문을 노려보았다.
슥슥슥.
객실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고.
문 앞에 그림자가 모여들었다.
침입자들이 동시에 들어오기 위해 준비를 하는 듯 보였다.
타앗!
한순간,
객실의 문과 창문으로 열 명의 자객들이 들어왔다.
“내 뒤에 있다가 한 방씩 날려라.”
“넵.”
휘이익!
타타타타타-
자객들이 펼친 검이 뻗어 나오기 전에, 타구봉이 기다렸다는 듯 자객들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퍽퍽퍽퍽!
“아악.”
짧은 외마디의 비명을 지른 자객들이 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떨어진 검을 줍기 위해 몸을 숙히자,
대형이 말했어.
전신의 힘으로 때리라고!
슈우우욱-!
황보궁의 신력, 그리고 내력이 담긴 일권은 바위도 단번에 깨뜨릴 수 있었다.
퍽! 퍽! 퍽!
일권필살(一拳必殺).
대형이 싸우는 도중엔 어떠한 생각도 하지 말랬어!
내가 살기 위해서는 오로지 패면 된다고!
퍽! 퍽! 퍽!
“쾍.”
자객들이 그 자리에서 괴성을 지르며 쓰러졌다.
휙휙.
황보궁은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돌렸다.
“또…… 또 어디 있지?”
“이야, 잘하는데? 이러다 권왕이 되겠어.”
“정말요?”
* * *
대산장(大傘莊)에서 나온 자객들은 착각에 빠져 있었다.
걸협오성이 강하다고 해도, 일백 명이 급습하면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무릎을 꿇은 인물.
자객들 수장 두경소는 코뼈가 부러지고 얼굴은 온통 멍이 들어 있었다.
“오늘 일은 나중에 책임을 묻겠소. 조용히 돌아가서 기다리는 게 좋을 게요. 아, 도망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오산인 걸 알지요? 중원 천지에서 개방의 눈을 피할 곳은 없소이다.”
“소인들이 간이 부어서 고인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를 해주신다면 정말로 착하게 살겠습니다.”
두경소는 바짝 엎드렸다.
“음,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죠. 돌아가시오. 피곤하오.”
반각 뒤.
대산장의 자객들은 세상이 무너진 표정으로 객잔 밖을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