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황보세가를 구하다
습관이라는 게 무섭다.
중원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디에 간들 상관이 없었다.
일반 거지다운 거지 생활은 아니지만, 남천상국에 지냈을 당시와 비교하면 역시 상거지 생활임에 틀림없다.
일각 이상 시간이 걸리는 장소에 갈 때는, 마차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던 시절도 있었는데.
하나 이제 그런 시절이 돌아올까 싶다.
걸음도 자주 걷다 보니 빨라졌다.
무림인이 되니 신기한 재주도 생겼다.
말을 타고 달리는 것보다 꾸준히 신법을 펼치면서 걷는 게 더 빨랐다.
내력이 받쳐줄 때까지 힘껏 달린다면, 천릿길도 단숨에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았다.
* * *
하북성에서 곧장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산동성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황보세가.
목표는 무극도신공.
뚝.
밥을 먹던 남하림의 손이 멈췄다.
“형, 무슨 일이 있어?”
“우리 무료 봉사를 하고 있지 않냐? 군사에게 받아야 할 대가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어.”
“음…….”
나머지 네 명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정말 없는 것 같은데?”
“그렇지? 난 우리가 너무 열심히 다녀서 엄청 좋은 걸 받은 줄 알았잖아.”
갑자기 밥맛이 떨어졌다.
한 번도 식욕이 떨어진 적은 없었는데.
맨 처음 부탁의 경우는 협박 비슷한 협박이라 쳐도!
그 이후로는 홀린 듯 딸려간 셈이 아닌가.
이번에도 마찬가지.
“방주님의 부탁만 아니었다면 그냥 돌아갔을 텐데.”
못마땅한 표정이던 남하림이 내려놓았던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휴우…… 그래도 먹어야 사니깐 일단 먹어야겠지.”
우루루루루-
그때, 객잔 밖으로 한 무리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팽유도가 단번에 알아보았다.
“하, 이번에는 천형방(天炯房)이네요.”
산동성 정사 중간의 문파 천형방.
그들이 가는 방향은 태산.
황보세가가 있는 곳이다.
“난리도 아니군. 산동성 어정쩡한 문파들이 몽땅 황보세가에 모여드는 것 같지 않나요?”
팽유도는 살짝 걱정이 되었다.
그들이 연합을 하면 황보세가도 피곤할 터.
이런 마당이라면 황보세가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탁자 앞에 느긋하게 밥을 먹는 자신들은 고작 다섯 명.
이미 자신이 본 것만 해도 세 곳의 문파에서 대인원을 보냈다.
천형방. 자성문. 삼웅각.
황보세가의 위명에 비해 각각으로는 세가 약할지 모르지만.
세 문파가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겨룰 수 있을 것이다.
“하림 형, 어쩌면 이들이 동맹을 맺을 수도 있어요.”
구천신품을 받으러 가는 문제와는 달랐다.
무극도신공을 지키기 위해 황보세가는 목숨을 걸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일행이 황보세가에 들어가서,
군사 왈, 그것을 주시오.
#NAME?
솥뚜껑만 한 주먹에 터지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다.
그럼, 우선 황보세가에 들어가기 전에 치울 건 치우고 가야겠지.
탁!
남하림이 다시 숟가락을 힘차게 내려놓았다.
“유도야, 안 되겠다. 모두 집합시켜.”
“네에?”
“요즘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개방의 장점이 뭐냐? 우리가 다른 곳보다 인원이 좀 많잖아?”
중원 무림에서 보는 개방의 인식.
타 문파에 비해 살짝 무력은 낮지만 대인원으로 부족함을 채우는 문파?
“이번 기회에 몰려가서 싹 쓸어버려야지.”
“부장, 그렇게 되면 개방이 나서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어?”
무림에 나온 후, 남하림이 자발적으로 개방을 부르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과연 무림 전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를 일.
“무독, 중원인들에겐 부장이 곧 후개이자 개방이다.”
이휘연의 대답은 명확하고 확실했다.
남하림과 걸협오성이 중원을 주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원인들의 머릿속에선 이미 개방이 중원을 종횡무진 활보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모일 수 있을까?”
“잠깐만…… 요!”
팽유도는 무림대사전 뒤편에서 중원 개방 분타 부분을 펼쳤다.
산동성 태산에 위치한 황보세가.
주위로 각각 네 개의 분타가 있다.
“형, 한 분타당 최소한 일천 명이 모인다면 총 사천 명의 방도들을 모을 수 있어요.”
“사천이라…… 그 정도면 충분해.”
“바로 연락을 띄울까요?”
“띄워. 가동할 수 있는 모든 인원을 태산 황보세가에 집합시킨다.”
“알겠어요!”
* * *
걸인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중원 무림의 정보력을 가진 문파들은 산동성을 주시했다.
파드드득!
후루루루-
산동성 하늘을 날아오르는 수많은 전서구들.
하늘이 무너져도 꿈쩍도 하지 않을 듯한 개방의 걸인들이 태산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핫!”
개방 방주 오종은 목청껏 대소를 터뜨렸다.
걸비가 전해온 소식.
#NAME?
드디어……!
드디어 원하던 소식이 날아왔다.
중간중간 함께 움직인 분타도 있긴 하지만, 그동안 남하림은 걸협오성만으로 중원을 활보했다.
걸협오성은 무림에서 존경을 받았지만, 실상 개방의 이름은 항상 뒷전에 있었던 셈.
“방주,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군.”
방주 오종 앞에 일장로 장두철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이제야 개방답지 않습니까?”
“클클. 그렇지. 그동안 구심점이 되어줄 녀석이 없어서 못 움직였지만 지금은 달라! 그놈들이 앞에서 나서준다면! 이제 밀고 나가면 그만인 게야.”
장두철과 오종이 원하던 인물.
걸협오성의 존재만으로 중원 십만 방도들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클클클, 그 녀석이 이번에 재미를 보면 물리지 못할 게야.”
“맞습니다. 일장로님의 말씀처럼 개방의 이름이 중원으로 퍼져 나가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중원은 개방천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크크크크.”
“키키키키! 방주씩이나 되는 사람의 웃음이 왜 그런가?”
“일장로님께서도 웃음이 이상합니다.”
“아하하핫! 그런가?”
쉬지 않고 웃는 두 사람.
개방이 중원에 퍼져 나갈 날이 머지않았다.
* * *
황보세가 가주 황보인은 고뇌에 빠졌다.
청극도왕를 상대하기 위해 천황대를 보냈다.
충분하다고 여겼건만.
황보세가 최고의 무인들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몰려가면 그냥 줄 것이라 순진하게 생각한 게 천추의 한이 되었다.
천황대가 전멸했다.
겨우 한 녀석이 살아 한 권의 무공서를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라고.
이게 뭐라고, 수많은 목숨과 바꿔야 했는지.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은 세가의 사람들이 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두 번 당한다면 그건 순진한 게 아니었다.
그는 멍청한 사람이었다.
한 권의 무공서가 준 파장이…….
‘이 정도까지…….’
정말 몰랐다.
황보세가에 달려들 것이라고는 예상조차 못했다.
상황은 그의 예상과 정확히 반대였다.
태산 주위로 수천 명의 승냥이들이 눈을 부릅뜨고 달려들 추세였다.
‘괜히 욕심을 부렸다.’
후회한다고 한들 이미 늦었다.
무극도신공을 던져줄 수도 없는 일.
천황대까지 전멸하여 얻은 무공서였다.
무력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황보세가의 이름에 먹칠을 할 수 없었으니까.
무극도신공을 노리는 저놈들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주군, 송구하옵니다.”
군사 전유가 머리를 숙였다.
그가 무극도신공을 얻도록 권유했었다.
“군사의 책임이 아니오. 탐욕에 절은 밖에 저놈들이 문제이지 않소이까?”
“소신이 욕심을 부렸습니다.”
“군사뿐만 아니오. 나 또한 마찬가지였소. 결정을 내린 사람은 가주인 나였으니…… 책임은 내가 져야 하겠지.”
스윽-
황보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군,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싸워야지 않겠나?”
“주군. 알겠습니다. 세가의 모든 이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뒤를 따르겠습니다.”
“아니네. 싸울 사람은 나 혼자네.”
“안 됩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가 혼자 싸우겠다는 의미.
죽음으로 황보세가의 명예를 잃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이 방법밖에 없네. 나 혼자 목숨을 걸면 황보세가는 살아날 수 있다네.”
털썩!
전유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가주님. 안 됩니다.”
“이 방법밖에 없네.”
황보인은 그의 모습을 애처롭게 본 뒤 밖으로 나섰다.
이제 황보세가 건물 안에서 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인들까지 몽둥이를 들고 건물 밖으로 나가 적들과 대치했다.
‘저들까지 죽을 필요는 없지.’
정문으로 향하는 황보인의 모습.
무거운 마음인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열려 있는 정문 사이로 나서자, 전방에 도적들이 가득하다.
네 군데의 연합문파.
천형방. 자성문, 삼웅각, 혈건당.
‘도적놈들…….’
무극도신공의 존재는 중소방파인 그들에게 필요한 절대상승무공을 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연합사문은 태산으로 오기 전부터 공동으로 무극도신공을 익히기로 결정을 내린 후였다.
천형방 방주 해무용이 소리를 높였다.
“황보 가주는 결정을 내렸소이까?”
척.
황보인은 무공서를 들어 올렸다.
“그대들이 원하는 게 이것이다.”
“하핫! 우리에게 그것을 넘기기로 결정을 내린 모양이구려.”
해무용의 말이 끝나자마자 황보인의 곁으로 한 명의 인물이 다가섰다.
“가주님. 저놈들에게 넘겨줄 수 없습니다.”
황보정의 표정이 다급했다.
세가에서 가장 충직한 인물.
누구보다 명예를 중시하는 그는 무조건 죽음을 택할 사람이었다.
“자네의 마음을 아네. 나 또한 같은 심정이지. 하지만 우리만 생각하면 안 되는 걸세.”
“가…… 주님.”
“주위를 보게. 저 녀석들도 세가를 위해 죽음을 무릅썼어.”
황보인이 가리킨 인물들.
무공도 모르는 세가의 하인들까지 벌벌 떨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살아남아야지 않겠나.”
터억!
가주가 황보정의 어깨를 짚었다.
“가만히 있게. 이 일은 내가 마무리를 지어야지.”
마지막으로 미소를 띤 그가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어느 분께서 나와 겨루어…….”
황보인의 목소리가 중간에 멈추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굉음.
뿌우우우웅-
둥! 둥! 둥! 둥! 둥!
수천 명이 움직이는 소리들이 태산을 흔들고도 남았다.
후방에서 다가오는 떼거리의 무리들을 발견한 연합사문의 수장들의 눈이 커졌다.
망할…….
보기 힘든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누군가 그들을 보면서 소리쳤다.
“거지들이다!!”
황보인은 물론, 황보세가의 모든 인물들도 괴상한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개방 방도들을 보며 입을 벌렸다.
개방이라면…… 다행이다.
일단 정파 소속이라는 사실에 긴장이 풀렸다.
“가주님. 개방에서…… 원군을 나섰습니다.”
“그렇구려.”
다행이긴 하다만.
개방에 원군을 요청한 적은 없었다.
평소에 눈여겨보지도 않았던 개방인데.
어떻게 된 것인지 몰랐지만.
개방의 거지가 이리도 반가운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 * *
남하림은 전방에 가득한 무리들을 보았다.
“무극도신공이 대단하긴 한가 봐. 엄청 모였군.”
“형, 저 정도면 황보세가가 밀리겠는데?”
“우리가 딱 적당한 시기에 온 것 같아. 저기 봐.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
“형은 저기 사람들 얼굴이 보여요? 난 점밖에 안 보여요.”
“마음으로 보면 다 보여.”
“아…… 네에.”
팽유도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긴장감이 감도는 현장에서도 부장은 항상 여유로웠다.
“시작해 볼까.”
휘익!
남하림은 돌아서며 개방 방도들을 향해 소리쳤다.
“천하제일대개방의 방도들이여!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무리가 전방에 있으니, 중원 무림의 하늘과 땅에 개방의 협의를 보여주고자 한다. 모두 나를 따르라!”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개방 만세!”
“후개 만세!.”
두두두두두두.
사천 명의 개방 방도가 달리기 시작했다.
선두에서 달리는 다섯 명.
그들의 신위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과도 같았다.
저분들이 걸협오성이다.
저분들이 개방의 걸협오성이시다.
우린 저분들과 함께할 것이다.
콰아아아아아앙!
개방 방도들은 보았다.
천형방 무리들의 사이로 날아올라 강룡십팔장을 펼치는 후개 남하림의 신위를.
* * *
황보인은 멍하니 전쟁터를 보았다.
주인은 가만히 있거늘.
객이 놀고 있는 격이다.
손에 들었던 무공서를 품에 넣었다.
군사 전유가 다가왔다.
“가주님, 후개와 걸협오성입니다. 개방과 함께 싸우는 게 좋겠습니다.”
“나도 그 생각을 했네.”
개방이 모든 것을 끝내게 할 수 없었다.
산동의 주인은 황보세가다.
“황보세가는 모두 들어라! 태산에 발을 들인 저놈들을 한 명도 살려 보내지 마라!”
타아앗-!
황보인은 단숨에 전장으로 달려 나가 천왕삼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 * *
‘이놈의 거지들.’
해무용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수천의 거지들이 움직이는 장면들.
이놈이 저놈 같고
저놈이 이놈 같았다.
진법도 아닌 것이, 마치 환영 속에 빠진 듯했다.
따아악!
빠아아악!
머리가 깨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들이 사방에서 울렸다.
또한 웃음소리도 괴상했다.
“캬캬캬캬!! 왜 이리 좋노……!!”
나무 작대기가 이리도 무서울 줄 누가 알았을까.
‘젠장…….’
어디를 둘러봐도 거지들 세상.
슬금슬금.
해무용은 빠져나가기 위해 뒤로 물러나는 중이었다.
턱!
“이보슈, 어딜 가시나?”
해무용은 고개를 돌리자,
퍽!
옆에서 날아온 커다란 주먹이 그의 얼굴에 떨어졌다.
털썩.
해무용이 바닥을 뒹굴었다.
“앗, 당신 뭐요?”
먹잇감을 놓친 남하림이 주먹을 날린 황보인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후개. 본인은 황보세가의 가주 황보인이오.”
“내가 먼저 찜해놓은 사람이지 않소.”
“미안하외다. 이자는 내가 손을 좀 보게 부탁하겠소.”
“흠, 그럼 나에게 빚 진 것입니다.”
빚졌다고?
황보인은 후개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알겠소.”
“나중에 딴말하기 없소이다!”
황보인은 이미 도망가는 천형방 방주 해무용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 * *
“와아아아아아아아!!”
“천하제일대개방 만세!”
개방 문도들이 타구봉을 위로 던지면서 소리쳤다.
연합사문의 무인들은 개방의 무위에 개 맞듯이 맞았다.
겨우 살아남은 자들만이 태산에서 물러났다.
모든 싸움이 끝난 태산.
그곳에서 한바탕 놀이가 시작되었다.
“후개님, 대승입니다!”
요성 분타주 막걸 금곡서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수고들 했습니다. 다친 방도들은 어떻습니까?”
“독광걸님께서 간단한 치료를 해주시고 계십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금곡서는 오늘 같은 날은 밤새도록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눈이 초롱초롱거리는 게 원하는 게 있어 보였다.
“아, 마을에 가서 내 이름 대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마음껏 드셔도 됩니다.”
“하하하, 역시 후개님이십니다.”
남하림은 개방 방도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일개 방도와도 일일이 손을 맞잡으면서 안부를 묻는 모습.
멀리서 황보인이 이를 지켜보았다.
‘후개는 다정한 사람이군.’
소문으로는 미처 담아내지 못한 후개의 매력이었다.
개방은 좋은 후계자를 가졌어.
남하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그의 마음 한구석에 부러움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