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무극도신공
소융의 죽음은 하북소가를 혼란에 빠트렸다.
대부분의 세가인들은 그가 죽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만 신녀의 죽음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할 뿐.
* * *
파드득-
무림맹의 군사전으로 날아든 전서구.
“이리 오너라.”
두 손으로 잡는 사내의 손길에도 전서구는 가만히 있었다.
인종은 전서구의 다리에 묶인 통에서 조심스럽게 전서를 꺼냈다.
붉은 통은 하북에서 날아왔다는 의미.
“후후후.”
가만히 있는 전서구가 귀여웠는지 가볍게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가장 얇은 종이로 잘라서 만들었는지, 전서는 안에 내용이 빽빽이 적혀 있음에도 손가락 두께만 했다.
“이런…….”
인종은 단번에 인상을 썼다.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군사님께 보고를 빨리 해야겠군.’
휘익!
인종의 신형은 바람과도 같았다.
* * *
군사 제갈령이 의자에 앉아 봉황선을 가볍게 흔들었다.
당장에라도 폭발할 듯한 무림의 상황.
누군가 일부러 조절하는 듯,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유지하며 흘러가는 중이었다.
그때,
사색에 잠긴 그를 방해하는 기척이 문밖에서 들렸다.
“군사님, 인종입니다.”
“들어오게.”
인종은 조심스럽게 들어서, 의자에 앉아 있는 군사 제갈령의 모습을 슬쩍 살폈다.
“군사님, 하북에서 전서 한 통이 날아왔습니다.”
“중요한 내용이 적혀 있었나 보군. 당장에 달려올 정도면.”
“네. 그렇습니다.”
인종이 전서를 내밀자, 제갈령이 얇은 종이를 펴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변함이 없으시구나.’
전서를 보고 놀란 자신과 달리 군사 제갈령은 담담했다.
“소융이 죽었군.”
“네, 그렇습니다. 큰일이지 않습니까?”
“호들갑을 뜰 정도로 큰일은 아니네. 그는 하북소가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지.”
제갈령은 연이어 봉황선을 두세 번 흔들었다.
하북소가와 신녀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었다.
신녀의 존재는 상황에 따라 이용도 가능하지만, 문제가 될 요지도 충분했다.
‘신녀 때문에 망하는군.’
결국 문제가 생기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하나 소융이 죽었다고 하북소가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당분간은 하북이대세가로 명맥을 유지할 터.
다만 오래 가지는 못하겠지.
지금까지 그 정도의 위세를 세운 사람이 소융이다.
‘하북소가에는 그의 뒤를 받칠 인재가 없어.’
제갈령의 머릿속으로 하북소가 인물들이 스쳐 지나갔다.
전서 끝 부분의 적힌 내용을 다시 읽었다.
“인종, 소융을 죽인 자가 후개라고 추정하는 것 같군.”
“조사를 철저히 하겠습니다.”
“후개가 나섰다면 이유가 있을 법. 그 부분도 알아보는 게 좋겠어.”
“명을 받들겠습니다.”
인종이 제갈령 앞에서 물러났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어제도 한 장의 전서를 받았다.
북방상국에서 일어난 일.
구천신품을 박살 낸 후개의 어이없는 짓에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 녀석은 무언가 알고 있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구천신품이 나타난 곳은 경매다.
돈은 얼마든지 있는 놈인데.
구천신품을 부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주기 싫다는 뜻일 터.
‘후후후, 굳이 물건이 없어도 된다는 뜻인가?’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변해갔다.
“이 녀석은 좋은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군.”
* * *
팽유도는 하북팽가에는 다음번에 들르겠다는 서신을 보내고
문득 중원이 급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님 폭풍전야라고 봐야 할지.
하북소가에서 출발한 일행은 단성에 도착해, 준극남과 사전에 만나기로 한 장소를 찾았다.
“하림 형, 이곳이 단성호라고 합니다.”
약속 장소인 단성호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쌍버들이라…….’
단성호 주위로 빽빽한 나무들 사이에 서 있을 쌍버드나무.
하지만 호숫가에 도착하자, 굳이 약속 장소를 찾지 않아도 되었다.
버드나무보다 사람들이 눈에 잘 띄었으니까.
남하림이 십여 명의 사내들 사이에서 준극남을 찾았다.
“공자님을 뵙습니다.”
“경치 좋은 곳을 잡았군요.”
“조용한 곳을 찾다 보니 이곳만 한 장소가 없었습니다.”
“잘했어요. 조용하고 좋네요.”
준극남과 남하림은 호숫가를 구경하듯 걸었다.
그사이 준극남은 마전에 대해 찾아낸 것들을 보고했다.
“대두파…….”
“북방상국에서 나온 약을 중원에 푸는 조직들입니다.”
“그놈들이 중원으로 직접 풀지는 않겠지요?”
“네, 그렇습니다. 대두파에서 나온 물건들이 중원의 각 지역 판매처에 나가고 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마전의 유통은 밤잠을 설치지 않고서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마약을 공급하는 북방상국.
북방상국에서 단성까지 운반을 책임지는 하북소가.
단성지부에서 중원 총판매처인 대두파.
마전은 총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조만간 두 번째 단계인 하북소가가 빠질 것이었다.
물론 대두파가 직접 북방상국과 거래를 할 수도 있다.
하나 그렇게 되면 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북방상국이 대두파와 마약을 직접 거래한다면, 오대상국의 다른 네 곳에서 분명 제재가 들어가니까.
“준 호위. 믿을 만한 사람들이 있나요?”
“넵. 소신이 하북 출신이라 예전에 알던 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잘됐네요.”
남하림은 그들을 시켜 북방상국과 대두파의 거래 현장을 지켜보도록 했다.
두 곳에서 거래를 하는 순간, 치고 갈 계획.
그 일은 개방에서 할 것이다.
중원에는 개방의 분타들이 많이 퍼져 있었다.
‘그들이 더 이상 발뺌을 하지 못하게 완벽한 증거를 잡아야 해.’
* * *
구천마제의 사대절대무극공(四代絶代無極功) 중,
이번에는 무극도신공(無極刀神功)이 무림에 출현했다.
우연이 이어지면 필연이라.
구천마제의 무공이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풀리고 있는 것인가.
중원의 일부 문파들은 이 같은 걱정에 잠겼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원 무림인들은 무극도신공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또다시 온 중원의 시선이 한 인물에게 고정되었다.
청극도왕(靑極刀王) 윤고중.
구천마제가 구천마성을 이루었던 시기.
구천마제를 주군으로 모시며, 한 팔을 도왔던 도법의 청년 무인.
청년은 시간이 지나면서 중년인이 되었고.
별호 또한 청극도왕으로 변했다.
싸늘한 살기가 숨 막힐 정도로 가득 찬 사방.
그를 맞닥뜨린 상대의 귀에 음산한 목소리가 분명히 들려왔다.
“미친놈들은 죽어야지.”
* * *
무극도신공에 눈이 먼 자들.
구천마제의 무공은 죽음까지도 눈을 멀게 만들었다.
청극도왕의 일도일단일사(一刀一斷一死).
한 번 펼친 도는 세상을 자르고 세상을 죽였다.
피비린내가 연기를 타고 위로 올라왔다.
시체들이 널려 있어 제대로 밟을 땅바닥도 보이지 않았다.
번쩍!
청극도왕 윤고중의 청박도가 빛을 쏟아냈다.
쏴아아아아-
차가원 바람은 죽은 자의 뜨거운 피에 물들어 열기를 품었다.
스윽-
윤고중이 얼굴에 묻은 피를 소매로 닦았다.
“네놈은 누구냐?”
이십 대 후반의 사내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후후, 당신이 청극도왕 윤고중이오?”
“젊은 녀석이 예의가 없군. 패기는 칭찬하지.”
“노땅이 뭐라는 거야?”
파앗!
청년의 신형이 윤고중의 앞으로 달려 나갔다.
까아아앙!
청박도로 막지 않았다면 청년의 검에 목이 잘려 나갔을 것이다.
“크크크, 노인장이 제법인데?”
“이노오오오옴!”
청박도에서 내력이 터지며 청년을 밀어냈다.
슈우우우욱-
청년이 뒤로 서너 걸음 밀러났다.
‘어디서 이런 놈이 나왔지?’
“키킥, 내가 누군지 궁금한가 보군?”
휘릭!
청년이 검을 움직이며 초식을 펼쳤다.
윤고중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가 펼친 무공을 단번에 알아보았으니까.
아니, 모를 리가 없었다.
“설…… 마……? 그분을 모시는 자들의 무공이거늘…… 왜?”
“당신이 너무 강하잖아. 원래는 무림의 다른 놈들이 그걸 가지고 가는 게 우리 계획인데.”
“계획이라니…… 대체 무슨 계획이라는 것이더냐? 주군의 뜻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큭, 누가 주군이라는 거야? 난 그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이노오오옴! 누구 짓이냐?! 감히 주군의 뜻을 대항하는 네놈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히지 못할까?!”
“역시…… 늙은 놈들은 말이 많다니깐. 빨리 끝을 내주겠소. 크큭.”
청년은 검 끝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윤고중은 믿기지 않는 장면에 온몸이 떨렸다.
주군께서…….
일이 잘못되셨단 말인가?
이들이…… 왜……?
의문 속에 의문.
그럼에도 윤고중은 쇄도하는 검 끝을 향해 청박도를 펼쳤다.
하지만!
샤르르르-
거칠었던 도풍(刀風)도 푸른빛의 도(刀)도 사라졌다.
스걱-
황망한 눈빛.
윤고중은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주…… 군…….’
쿠우우웅!
그대로 쓰러지는 육중한 소리가 났다.
“조용히 죽어주면 얼마나 좋아.”
터억! 쓰윽-
청년이 앞으로 쓰러진 윤고중의 시체를 발로 바로 눕혔다.
파앗!
그러고는 거침없이 허리에 묶여 있는 끈을 잘랐다.
“찾았군.”
그가 검 끝에 무공서를 살짝 걸친 뒤 끌어 올렸다.
무극도신공.
“이걸 어느 놈에게 줄까?”
휘익!
무공서를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신 사이로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크큭, 다시 한바탕 피를 흘리며 싸워야지.’
휘익!
청년의 모습이 사라졌다.
“끄으으응-”
얼마 후.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내가 신음을 내며 겨우 정신을 차렸다.
지독한 혈향이 겨우 숨을 쉬게 된 콧속으로 훅 들어왔다.
‘커억.’
항상 피를 곁에 두고 사는 무인이지만 이 혈향은 견딜 수가 없다.
모두 죽었어.
황보세가 천황대가 전멸이었다.
사방에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눈물이 흐르려고 하는 순간.
시야에 한 권의 무공서가 들어왔다.
그는 다시 숨이 막혔다.
‘허…… 억……! 무극…… 도…… 신공!’
휘익.
정신없이 기어간 그가 무공서를 재빨리 몸 안에 숨겼다.
엎드린 채로 눈동자를 굴려 주위에 기척이 있는지 살폈다.
‘흐, 흐흐, 흐흐흐흐.’
이제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이걸 내가 익혀? 아니야. 괜히 익히다가 잘못될 수 있어. 차라리 세가에 가지고 가면 가주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다!’
황보세가의 방계 출신인 그는 곧 직계와 비슷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황보동은 꿈에 물들었다.
* * *
구천신품을 찾기 위해, 떠났던 개봉으로 다시 향하는 도중이었다.
무림이 또 한 번 들끓었다.
“이번엔 무극도신공이래.”
“하나씩 잘도 나오는구나.”
무림에 갑자기 나타난 구천마제의 무공들.
그것도 하나씩, 하나씩 중원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보도 아니고…….”
“알면서도 당하는 사람이 더 바보라고 봐야지.”
남하림의 말이 맞았다.
차라리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되련만.
무극도신공이 주는 무게가 무시하기에 너무나 무거웠다.
팽유도 또한 다른 무공도 아닌 무극도신공에 관심을 보이는 듯했다.
“유도의 표정을 보니 궁금한 모양인데?”
“나도 바보인가 봐요. 궁금하긴 해요…….”
“그럼 나도 바보지 뭐. 무극창신공을 보니 그것도 어떤 무공인지 궁금하긴 해.”
일행은 무극도신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언덕을 올랐다.
언덕 끝 길가에 앉아 있는 거지.
걸비천하 소속의 개방 방도가 오랜만에 자신들을 찾아왔다.
‘무슨 일이시지?’
남하림이 점점 가까워지자, 걸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쩍 허리 안쪽이 보이도록 웃옷을 올렸다.
숫자 삼십팔(三十八).
허리에 달린 정보신패.
“후개님을 뵙습니다.”
“걸비에서 오랜만에 나왔군요. 본 방에 큰일이 생겼나요?”
“본 방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럼?”
“무림맹의 군사가 본 방을 통해 부탁을 해왔습니다.”
‘나 참, 무사히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북방상국을 끝으로 구천신품에 대한 정보는 더 이상 없었다.
군사는 제독동창이 구천신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다행히 모르고 있었다.
“그가 뭐라고 하던가요?”
“황보세가에 가서 무극도신공을 받아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진짜 이 사람이…….”
순간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해도 해도 너무했다.
간단한 물건도 아닌 무극도신공을 가져오라는 제갈령의 명령.
황보세가가 내어줄지도 알 수 없지만, 받는다고 해도 상황을 봐서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후개님, 방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좋다고요.”
“그래? 역시 방주님이 최고야. 군사의 명조차도 시원스럽게 무시하는 배짱!”
“하지만…….”
“……하지만?”
뒤에 따라붙는 말이 싸하다.
“중원에서 그 일을 사심 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은 후개님과 걸협오성님밖에 계시지 않는다고…….”
“참 나!”
군사 제갈령의 부탁을 들어줬으면 한다는 오종 방주의 돌려서 말하기가 시전됐다.
‘사심이 없기는 뭐가 없어! 거참, 좋다 이거야. 이번에도 눈에 뜨인다면 무극도신공을 외워버려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