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황무적-173화 (174/328)

173. 소융

황공과의 싸움 이후, 석가장으로 들어서는 길은 평탄했다.

하북소가로 온 이유는 하나.

북방상국의 마전을 무너뜨리기 위함이다.

해가 산을 뉘엿뉘엿 넘어갈 쯤.

일행은 드디어 석가장에 도착했다.

“여기가 석가장이란 곳이야. 하북소가는 저기 동쪽 끝에 있어.”

석가장에 들어서자 팽유도가 앞장섰다.

어릴 적 석가장에 서너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흐음.’

이미 마을 초입에서부터 그들을 조심스럽게 따르는 인영이 있었다.

“우릴 따라오는 것 같군.”

“하북소가 인물이겠지요.”

“그런 것 같다. 어떻게 하지?”

“그냥 두세요. 우리에게 볼일이 있다면 앞에 나타나겠지요.”

남하림의 말이 맞았다.

반 시진 뒤.

객잔으로 하북소가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안으로 들어선 인물들은 감영단 소진화 단주와 일장로 소양구.

개방의 젊은 청년 방도들을 맞닥뜨린 소양구의 안색이 착잡했다.

‘허허…… 직접 보니 이해가 되는구나.’

삼장로 소추가 왜 당했는지 이해가 갔다.

무림인들의 운명이야 죽음과 삶에 늘 가깝다.

그는 이미 원한과 복수심은 젊었을 때의 산물이란 생각이 들 만큼 나이가 든 인물.

하나 소추의 죽음에 마음이 심란하기는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두 분께서 저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북소가를 살리기 위해서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개방의 제자라 능청을 떠는 모양이군. 우린 알고 있네.”

소양구의 눈가에 수많은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역시 늙은 생강이 맵다.

그는 이미 남하림의 생각을 꿰뚫고 있었다.

“하북소가를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살릴 생각도 없지 않은가.”

“흐음, 글쎄요. 우리가 원하는 거라…….”

“시원하게 말을 해보게. 본 가에 원하는 것이 있지 않은가?”

소양구가 도중에 말을 멈춘 남하림을 재촉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당장 들어줄 것처럼 절박하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마전을 없애는 일입니다.”

마전?

처음 듣는 말이었다.

소양구와 소진화는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엉뚱한 대답을 하는구려. 본인은 마전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며, 본 세가에는 있지도 않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겐가?”

두 사람의 시선에 의문이 잠겼다.

“마전은 북방상국에서 운영하는 하북소가의 조직입니다.”

남하림의 설명은 또 하나의 의문을 만들었다.

하북은 무엇이고,

북방은 갑자기 왜 튀어나온 것인지.

소양구는 눈을 껌뻑거리며 남하림의 설명을 기다렸다.

“북방상국에서…….”

그는 이내 남하림의 설명에 빠져들었다.

인상을 썼다 풀기를 반복하길 잠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망할 놈이…… 하북소가를 개망나니 소굴로 만들었구나.’

결국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소숭의 사건도 넘어가주었건만.

“후개, 그게 사실이란 말인가?”

“비밀리에 확인해 보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어느덧 하북소가는 북방상국의 개가 되어 있었다.

이는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이제 세가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후개, 어려운 부탁을 해도 되겠는가?”

“말씀하시지요.”

“그에 대해서 우리에게 맡겨줄 순 없겠는가?”

“맡겨달라고 하심은?”

“하북소가의 일이지 않은가? 특히나 가주의 일이네.”

이해는 되었다.

중소방파의 수장도 아닌 하북이대가문 하북소가다.

그들이 나서준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그렇게 하시지요. 하북소가 내에서 스스로 결정짓는 게 좋은 일이겠지요.”

“후개, 고맙네.”

소양구는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안도했다.

어렵게 발걸음을 한 보람이 있었다.

목적을 달성했는지, 소양구는 한동안 조용히 듣고 있던 소진화와 시선을 마주쳤다.

끄덕.

소진화가 나섰다.

“후개, 이번 일에 연관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신녀가 죽었소이다.”

‘그녀가 죽었다고?’

하북소가에서 그녀를 잡아갔었다.

죽인 게 아니라 죽었다니.

미묘하게 어감이 달랐다.

“신녀를 누가 죽였다는 뜻인가요?”

“음…….”

소진화가 대답을 쉽게 못하고 머뭇거렸다.

세가의 사람이 알아도 부끄러운 일.

외부인이 알면 그야말로 망신이다.

“굳이 하고 싶지 않다면 안 해도 좋소. 보아하니 좋은 일도 아닌 것 같군요.”

“이해해 줘서 고맙소이다.”

하북소가의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거워 보였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걸세.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겠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양구와 소진화는 가볍게 포권을 한 뒤 객잔을 나섰다.

두 사람이 떠난 객잔.

남하림을 중심으로 걸협오성이 모여 앉았다.

“알아서 처리하겠다니 잘된 것 같지 않아?”

“당연히…….”

당무독은 차라리 이렇게 되어 다행이라 여겼다.

사실 타 문파의 일에 관여하는 자체가 부담이다.

더구나 상대는 가주 소융.

“무독 형 말에 동의해.”

팽유도도 곧바로 찬성의 뜻을 밝혔다.

하북소가 쪽에서 움직여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남은 것은 북방상국뿐이다.

“그들이 잘 처리를 해준다면야 나도 찬성이지. 힘들게 움직일 필요도 없고.”

* * *

가주 소용이 절암정에 홀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싸늘한 두 사람의 시신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머뭇거리지만 않았다면…….’

하북소가에서 나가는 하연을 바로 죽였어야 했거늘.

모든 것을 정리하기로 마음을 정했었다면…….

“하경이…… 죽지는 않았을 것을…….”

항상 마음이 여린 아이였다.

다른 형제들보다 착했던 녀석은 무림에 관심이 없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

가슴이 찢어졌지만, 그는 슬픔만으로 지낼 수 없었다.

“미안하다. 지금은 이 아비가 너무나 어렵구나.”

스윽-

고개를 돌렸다.

절암정으로 올라오는 인영들.

십여 명 정도의 하북소가 주요 인물들이 절암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소양구, 일장로께서 어인 일로 여러분들과 오셨습니까?”

“가주, 여기에서 무엇을 하는가?”

소융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저벅저벅.

한가롭게 산책하듯 절암정에서 내려온 소융이 그들 앞에 섰다.

한 명, 한 명과 마주하는 시선.

‘허어…… 이자들이…….’

평소와는 다르다.

“그냥 찾아오신 게 아니군요.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 어느 분께서 본인에게 말을 하겠소이까?”

“흐음.”

일장로 소양구가 기침을 했다.

“가주, 내가 하겠네.”

“그렇게 하시지요.”

“방금 장로전에서 회의를 마쳤다네.”

“그렇습니까? 무슨 회의를 하셨습니까?”

“하북소가는 새롭게 태어나고자 한다네. 그래서 그대를 가주위에서 폐위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지.”

소융은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앞에 모여 있는 그들은,

자신이 가주가 된 뒤 그 자리에 올려준 이들이다.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소이다.”

“소융, 모든 게 끝났네. 서로 구차하게 마무리를 짓고 싶은가?”

“크. 큭큭, 크하하하핫!”

대소가 터져 나왔다.

이것들이…….

토사구팽도 이유나 알려주고 하는 법.

하북소가를 하북이대세가로 만든 인물이 바로 자신이다.

“그럼 내가 어떻게 나올 거라 생각했는지 묻고 싶군요.”

“소융, 그만하게. 그대가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고 해도 우리들을 모두 이길 수는 없네.”

“일장로님, 그 부분까지 생각을 하고 왔습니까?”

대답이 없다.

“하하, 대단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원하는 대로 해드리지요.”

화아아아-

소융이 내력을 단번에 끌어 올렸다.

“소용없네!”

휘이익!

절암정 위로 수십 명의 하북소가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척척척척!

소융의 앞을 막아서며 검을 겨누는 이들.

수십 개의 날카로운 검이 그 하나만을 겨누고 있었다.

“하하…… 이렇게 될 줄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소이다.”

“소융. 그만 검을 버리게. 물러나면 그만인 것을. 서로 죽여야겠는가?”

“후후, 아직은 검을 버릴 때가 아니지요.”

타앗!

소융이 몸을 날렸다.

그 모습을 본 소양구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저자가……!”

그의 신형은 떨어진 곳은 자신들의 방향이 아닌 반대쪽 절암정의 절벽.

아무것도 없는 까마득한 절벽을 향해 몸을 날린 것이다.

남아 있는 인물들은 아연히 구름에 묻힌 절벽 아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목숨을 스스로 내던질 인간이 아니거늘…….’

* * *

타앗!

만일을 위해 준비한 비상 장치.

절암정 절벽에서 뛰어내린 소융이 줄을 잡았다.

“큿, 이게 오늘에야 쓰일 줄은 몰랐군.”

휘익!

소융이 건너편으로 뛰어내렸다.

그러자 절벽 사이로 작은 길이 나타났다.

하북소가 뒤를 돌아서 내려가는 길.

오래전에 우연히 발견한 곳이다.

스윽.

그가 멀리 절암정의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허어.’

가주에서 쫓겨 내려온 처량한 신세.

“불쌍한 처지가 되었군.”

벌써 먼 일처럼 느껴졌다.

소융은 잠시 동안 그 자리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이 저들끼리 결정을 내리고 절암정에 몰려온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가주의 직위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명분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 그들에게 명분을 준 거군.”

누군가라면……?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은 단 한 명.

맞아. 걸협오성의 후개.

‘그 녀석들이 왔어. 여기에…….’

가주에서 물러났지만 살 만큼 살았고, 돈은 충분히 다른 곳에 모아두었다.

‘하연…….’

마지막 인생을 그녀와 즐기면 어떨까 생각하면서, 혹시나 준비했던 것들.

하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기엔, 마음 한편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놈만은……!’

남은 인생을 미련없이 즐기기 위해.

가주 소융은 마지막 할 일을 해야 했다.

* * *

‘저곳이군.’

소융은 어렵지 않게 걸협오성이 머무는 객잔을 찾았다.

그를 만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남하림이 나올 게 분명하니까.

객잔을 노려본 지 반각도 지나지 않은 시간.

‘나왔군.’

멀리 객잔 창문가에서 인영이 나타났다.

후개 남하림이 분명했다.

휘익!

소융은 곧바로 신형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객잔에서도 기가 움직였다.

마을 입구 밖.

소융아 커다란 고목 아래에 내려섰다.

하늘을 가린 나뭇가지 때문인지 어둠에 몸을 가려졌다.

타악!

남하림이 정확히 그의 앞으로 내려섰다.

그의 주변으로 또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후개, 생각대로 자신감이 강하군. 역시나 혼자 왔어.”

“그대도 혼자가 아닙니까?”

소융은 모습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묘하게 흐트러진 데다, 옷자락은 어딘가에 스친 듯한 자국들이 잔뜩 남아 있었다.

“하북소가에서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요.”

“놀랍군.”

어둠 속에서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번에 알아본 것이 신기했다.

“하나 별일 아닐세.”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혹시나 가주님의 신상에 이상이 생겼나 싶었는데.”

“허허, 걱정을 해주니 고맙네.”

소융은 문득 잊었다는 듯 다시 말했다.

“아 참. 말을 안 했군. 가주직에서 물러났다네. 음…… 쫓겨났다고 해야 하나?”

“……안타까운 일이군요. 그동안 하북소가를 위해 많은 일들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정중한 듯한 목소리.

불쌍한 처지를 놀림받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가주의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게 만든 가장 큰 당사가가, 이 일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고생은 많이 했지. 그래서 본의가 아니지만. 결국 이리 떠나게 되었군.”

“굳이 저에게 인사하러 오셨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후후후, 인사라……! 맞네. 그냥 떠나려고 하니, 뭔가 섭섭한 게 있더군.”

스르르르릉-

소융이 요대에 찬 검을 잡아당겼다.

하연이 구해준 사령혼검.

상대의 혼을 벨 수 있다는 신검이라 했지.

남하림은 검이 뿜어내는 기가 예사로운 것이 아님을 알아챘다.

‘이런 기를 지닌 검은 또 처음이군.’

사령혼검 주위로 흐르던 기가 소융을 팔을 통해 몸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오히려 검의 기운이 지배하고 있어.’

일반 무림인들은 볼 수 없는 사령혼검의 기가 남하림의 눈동자엔 비치고 있었다.

“후개, 사령혼검이 빠져나온 이상 나 또한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번쩍!

사람의 혼을 거두어야 움직임을 멈추는 사령혼검이 빛을 뿌렸다.

휙!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온 검 끝!

타악!

언제 손에 들렸는지, 남하림의 타구봉이 사령혼검의 검로를 막아내며 옆으로 공격을 흘렸다.

간단하게 막아내는 남하림의 동작에 소융이 순간 멈칫거렸다.

‘어떻게 된 거지?’

남하림에게 전혀 변화가 없었다.

사령혼검을 상대하는 자들은 정신을 잃거나, 머릿속이 혼미하게 변해 몸이 둔해져야 했다.

휘익!

사령혼검이 다시 펼쳐졌다,

소융은 초식의 변화보다 사령혼검의 힘을 믿었다.

단 한 번도 그러한 일이 없었기에.

“가주. 아직도 모르고 있군요.”

‘무엇을……!’

타구봉이 또 한 번 사령혼검을 막았고.

동시에 남하림의 왼손이 일장을 뻗어냈다.

“나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콰아아아아아앙!

소융의 가슴에 떨어진 강룡십팔장의 위력.

“커억!”

온몸이 부서지는 충격과 함께, 몸이 부웅 날아올랐다.

툭.

투둑.

‘……누구지?’

아래로 떨어져 붉게 번진 소융의 눈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지나갔다.

털썩.

바닥에 떨어진 소융.

그의 손에 들린 사령혼검만이 작게 울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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