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계약하다
덜컹. 덜컹.
‘음…… 무슨 꿍꿍이속인지 모르겠군. 천진루 천관에 지내는 일행이 있으니 그들의 수장을 만나보면 안다고?’
한 잔 술을 마신 뒤.
백후는 태원평의 원주가 어찌 이런 중급의 객잔에서 지낼 수 있느냐며 당장 방을 옮겨주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천관에 머물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나면 된다고 밀어붙였다.
‘거참, 누굴 만나야 되는 것인지 모르겠군.’
마차 안에 탄 명왕고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그의 앞에 앉은 여인.
명화진도 마차 창문을 통해 지나가는 밖을 멍하니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장걸…… 그 사람에게 말이라도 걸어볼걸.’
그는 하늘보다 더 높아 보였다.
마차 안의 부녀는 마차가 멈출 때까지 한마디 말도 없었다.
이윽고,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천진루에 도착했다.
자신들이 며칠 동안 지낼 천진루의 지관은 천관 옆에 붙어 있었다.
‘여기가 천관이군.’
백후가 말하기를, 중원에서 최근 유명한 인물을 만나보면 손해는 보지 않을 것이라던가.
‘그래. 만나보는 건 어렵지 않지.’
명왕고와 명화진이 마차에서 내렸다.
“저, 아버지, 그 객잔도 나쁘지 않았잖아아요…….”
“모르겠다. 거긴 저녁이 되면 시끄럽다고 하더구나.”
“전 시끄러운 게 좋은데…… 으음, 사람도 많이 지나다니고…… 다시…….”
끼이익-
그때,
천진루 천관의 문이 열리면서 두 명의 사내가 밖으로 나왔다.
“어?”
명화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두 명의 사내 중 한 명.
그는 어젯밤 잠시 만났던 천장걸이 틀림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운이 없어 보이던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 저, 안녕하세요.”
“어, 아하…….”
성철각이 건너편에서 손을 흔드는 명화진을 발견했다.
“철각 형, 아는 여자야?”
“응, 어젯밤에 소매치기당하는 걸 찾아줬어.”
명화진이 얼른 명왕고의 팔을 잡고 성철각을 소개했다.
“아버지, 저기 키 큰 분이 천장걸이세요.”
“흠? 저들을 어떻게 알았느냐?”
“어젯밤에 저를 구해줬어요.”
“구해줘……? 어젯밤에 그런 이야기는 없었지 않니…….”
“그, 그냥…… 걱정하실까 봐.”
“아이구, 되었다.”
명왕고가 두 사람에게 다가섰다.
“저 녀석의 애비가 됩니다. 천장걸께서 큰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지관에 들어오신 모양입니다.”
“북방상국의 총내국주가 이곳에서 지내도록 하더군요.”
“우리도 그가 여기에서 지내도록 했습니다.”
“……!”
명왕고는 걸협오성이 천관에 있을 줄은 몰랐다.
“천관에 걸협오성께서 계시겠군요.”
“네. 맞습니다.”
“아…… 그렇군요. 혹시 다른 분들도 계시는지요?”
“우리들밖에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명왕고는 지관으로 들어섰다.
그는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걸협오성을 왜?’
* * *
걸협오성의 수장이자 개방의 후개.
명왕고를 마주 보며 앉은 청년.
중원 무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후개 남하림의 이름을 한 번도 듣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여전히 의문이 들었다.
“총내국주가 왜 그대를 만나려고 했는지 모르겠소.”
“아, 그건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환금호 때문입니다.”
‘환금호!’
뜻밖의 이유에 의문이 더 심해졌다.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기에 그대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지 모르겠소이다.”
“간단합니다. 제가 환금호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
명왕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북방상국의 인물이 다른 인물에게 자신을 소개시켜 주는 이유가 궁금했던 것.
‘백후, 그는 돈귀신이라 불리는 인물인데…… 절대로 손해 보지 않을 사람이 왜?’
“원주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압니다. 그건 그와 제 문제. 원주님께서는 상관이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음…… 굳이 알 필요 없다는 말이군.’
“환금호를 북방상국과 거래하는 이유가 의리라고 한다면 제가 물러나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저희 쪽에서 환금호에 대한 합당한 금액과 조건을 제시하고 싶군요.”
‘상왕의 삼남. 남천상국 출신이라는 말이 맞군. 남천상국은 거래에 있어 호탕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 후개는 무림인 이전에 장사꾼의 아들일 터.’
“북방상국과 의리는 없소이다. 의리가 있었다면 본인은 여기에 찾아오지도 않았소.”
“오, 알겠습니다. 제가 제시하는 조건이 마음에 드시면 좋겠군요.”
“말해보시오. 후개는 환금호에 대한 대가로 태원평에 무엇을 주겠소이까?”
씨익.
남하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 * *
반시진이 지났다.
슥슥슥-
남하림은 두 장의 계약서를 만들었다.
계약서 마지막 남은 한 구절.
#NAME?
쿡.
쿡.
두 사람은 각각의 계약서에 인장을 찍었다.
“끝났습니다. 앞으로 좋은 관계가 되었으면 합니다.”
“음…… 그대는 무림인보다 상계 쪽에 더 적합한 것 같소이다.”
“후후, 배운 게 도둑질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명왕고는 남하림과 함께 기분 좋게 문을 나섰다.
‘이 녀석은…… 어디에 있지?’
밖에서 기다릴 줄 알았던 딸 명화진이 보이지 않았다.
“따님께서는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철각 형님과 밖에서 기다리시겠다고 했습니다.”
“크흠, 그렇군요.”
수염을 쓰다듬던 명왕고는 남하림의 곁으로 슬쩍 가까이 붙어 섰다.
“혹시…… 천장걸께서는 정인이…….”
“없습니다.”
“계약이 확정된 후 본인이 여러분들을 초대해도 괜찮을는지요?”
“아, 언제든지 불러주시면 고맙지요. 그리고 그 건은 제가 나중에 슬쩍 물어보겠습니다.”
“크으으흠, 고맙소이다.”
* * *
벌떡!
북방상국 외국주 백현은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후 형님이……? 그들을 천진루에 옮겼다고?”
“네, 총내국주님께서 아침 일찍 찾아가서 숙소를 옮겼다고 했습니다. 태원평원주를 중급에 어찌 모시냐면서 호통을 치셨습니다.”
“끄으으응.”
백현은 신음을 냈다.
‘왜 그를 천진루에 옮겼지?’
이번 일은 이 공자 측에서 나설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는 서장에서 환비균장의 일이 잘못되어 있는 상태가 아닌가.
후다다닥-!
외정국실을 향해 수하가 다급히 들어왔다.
“외국주님, 천진루의 천관에 걸협오성이 머물고 있습니다!”
“젠장!”
백현이 곧바로 밖으로 나가면서 소리쳤다.
“지금 당장 천진루에 간다.”
“넵. 알겠습니다!”
백현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갔다.
‘형님, 무슨 짓을 하려는 것입니까?’
* * *
두두두두-
백현은 눈썹이 휘날리도록 말을 몰았다.
천진루가 눈앞에 나타났다.
“외국주님. 그들은 지관에 있습니다!”
타앗!
그는 곧장 지관으로 말을 몰았다.
휘익.
지관의 정문에 도착한 후, 다급히 말에서 내렸다.
쿠우웅!
닫혀 있는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건물 안으로 목청껏 소리쳤다.
“원주는 계시오? 원주!”
스윽-
건물 안에서 명왕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휴우…….’
그의 모습을 보자 안심이 되었는지 백현이 숨을 내쉬었다.
“외국주가 여기엔 무슨 일이시오?”
“본인이 잡아준 객잔에 있어야 할 분이 여기에는 왜 왔소이까?”
“그거야 총내국주가 여기로 가라고 해서 왔소이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이까?”
“문제는…… 아니고…… 백후 형님께서 무슨 이유로 보내셨소이까?”
“외국주가 잡아준 객잔이 작다고 해서 여기로 옮긴 줄 아오.”
“…….”
‘단지 그 이유만인가?’
“여기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났습니까?”
“우리가 이곳에 아는 사람들이 어디 있소이까?”
‘으음.’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건가?
“그러지 마시고 안으로 드시오.”
“아니…… 바쁜 일이 있어서…….”
스윽-
그때, 백현의 뒤로 인기척이 나타났다.
“바쁜 사람이 여기에는 무슨 일이냐?”
‘헉!’
언제 다가왔는지 등 뒤로 백후가 서 있었다.
“형…… 님.”
“아, 내가 자네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게 잊고 있었네.”
“…….”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그곳도 좋기는 하지만 최소한 명 원주께서 지내실 곳은 아니지 않는가.”
백현은 인상을 썼다.
‘쳇. 그곳이나 여기나…….’
“그만 가보시게.”
“아닙니다. 잠시 시간은 됩니다.”
“방금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마무리만 남아서 수하들이 하면 됩니다.”
끄덕.
백후는 고개를 짧게 서너 번 움직였다.
“그럼, 들어가세나.”
* * *
반시진이 지난 후
백현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백후와 함께 천진루를 나왔다.
백후가 바로 옆에서 떨어지질 않으니,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북방상국으로 돌아가는 그의 표정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상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어. 근데…… 왜 이리 기분이 이상하지?’
머릿속에 든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휴우, 우선 삼 공자께 가서 보고를 드려야겠어. 내일 있을 계약에 대해 손을 보는 게 좋겠군.”
총내국주라면, 반드시 무슨 짓을 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 * *
“하하하!”
백진묵은 대소를 터뜨렸다.
오랜만에 속 시원하게 웃음이 나왔다.
“이게 바로 일거이득(一擧二得)이지 않습니까?”
“허허허, 그렇지요.”
“과연 숙부님이십니다. 일을 잘 마무리하실 줄 알았습니다.”
백진묵은 백후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윽.
계약서를 보며 마음에 들었는지 웃음이 나왔다.
“백경묵, 이 자식이 나를 밀어내려고 수를 썼군.”
“맞네. 후경당의 백소경 숙부님을 이용했지.”
“하, 이번 일만 제대로 됐다면 그놈이 차기 국주의 자리에 유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처지가 반대가 되겠지요. 난 환비균장을 얻는 동안, 그 녀석은 환금호를 잃게 되었지 않습니까?”
“이 공자. 그렇다고 너무 좋아할 것은 아니네. 환비균장만으로 모든 수요에 공급을 맞추어줄 수 없지 않는가?”
“후후후, 당분간입니다. 최소 일 년 만 기다리면 굳이 환비균장이나 환금호가 없어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요.”
백진묵의 입가에 득의의 미소가 나왔다.
“오호. 벌써…… 그 정도까지 연구가 되었단 말인가?”
“그날이 오면 중원 곳곳에 내가 만든 물건이 퍼져 나갈 것입니다.”
* * *
북방상국 국주의 생일 당일 전날.
천진의 인파는 최고조에 달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거리에서 저마다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다그닥. 다그닥.
태원평 원주 명왕고와 일행이 천진루를 나와 북방상국에 도착했다.
백현이 정문으로 마중을 나왔다.
그의 뒤로 총내국주 백후도 함께 자리했다.
마차 문이 열리며 명왕고가 내렸다.
스윽-
백현은 포권을 하며 그를 맞이했다.
“원주님, 오셨습니까?”
“정문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후후후. 고맙소이다.”
“들어가시지요. 삼 공자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백현이 뒤로 돌아섰다.
‘흠.’
무표정한 백후와 시선이 마주쳤다.
‘형님, 이번 건은 삼 공자가 이겼소이다.’
환비균장을 얻는 데 실패한 이 공자.
반면 삼 공자는 곧 환금호에 대한 계약을 맺을 것이다.
계약을 하기 위해 모인 장소는 외정국.
드륵-
문이 열리고, 명왕고가 백현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삼 공자 백경묵이 그를 보며 일어섰다.
“어서 오시오. 백경묵이라 하외다.”
“반갑소이다. 명왕고라 하오.”
“직접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소이다. 굳이 오시지 않아도 되는 것을 힘들게 오셨소이다.”
“국주님의 생신도 축하드릴 겸 왔소이다.”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그들 뒤로 주요 인물들이 자리를 잡고 섰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색하군요. 바로 계약 건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는 게 좋겠소이다.”
“좋소이다.”
스윽.
백현은 미리 준비했던 것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건…… 저번 계약서가 아니오?”
“맞소이다.”
“삼 공자께서는 이번에도 같은 조건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오?”
명왕고는 기분이 언짢았다.
“하하하, 아닙니다. 세상에 물가라는 있지 않소이까? 당연히 우리 계약에도 적용이 되어야 하지 않겠소이까?”
흠칫.
백후는 순간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니……? 원래대로 계약을 하기로 결정이 났거늘!’
백후의 모습을 백현이 지켜보았다.
‘후후후, 당황했군. 분명 계약 조건에 대해서 말한 게 틀림없어.’
백현은 자신만만했다.
척.
백경묵이 손가락 두 개를 폈다.
“환금호 한 관에 황금 두 냥을 주겠소.”
“삼 공자. 그게 무슨 말인가? 두 냥이라니……!”
백후가 소리를 높였다.
“백후 총내국주님, 이번 계약은 제가 하는 것입니다. 물러나시지요.”
“백경묵. 국주님의 허락 없이 함부로 할 수 없다!”
“어허, 숙부님, 이미 허락을 맡은 일입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으니 조용히 계시지요.”
“…….”
‘국주께서…… 젠…… 장.’
백후는 주먹을 꽉 지었다.
‘후후후. 형님. 이번은 제가 이긴 듯합니다.’
백현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원주님, 어떻습니까? 괜찮은 조건이 아닙니까?”
“좋군요.”
스윽.
백경묵은 새로운 계약서를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서로 도장만 찍으면 되는 일이다.
명왕고는 계약서를 훑어보았다.
‘전혀 변한 게 없군. 금액만 빼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자신들을 이용할 뿐.
백경묵은 고심하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원주님,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두 배로 가격을 올려주었습니다. 이 정도면 본 상국에서도 손해를 보면서 해드린 가격입니다.”
“손해라…… 북방상국에서 말하는 손해가 어느 정도의 손해인지 알고 싶습니다만…….”
“……?”
‘뭐지?’
백현은 순간 느낌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계획대로라면 얼씨구나 하면 도장을 찍어야 하는데.
그런데……?
명왕고는 표정이 굳은 채로 오히려 묻고 있었다.
“원주, 계약을 하기 싫소?”
백현이 그를 향해 소리쳤다.
스윽.
명왕고는 고개를 돌리며 백현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조건이라면 북방상국과 계약을 할 수 없소이다. 같은 조건이면 의리상 계약을 하려고 했는데, 이건 너무나 차이가 나는군요.”
“지금 뭐라 했소? 계약이 차이가 난다고? 대체 누구랑 차이가 난다는 것이오?”
“그들은…….”
명왕고의 입술이 실룩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