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황무적-166화 (167/328)

166. 혼령안

나란히 앉은 두 사람.

하연의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천인의 상(像)이다.’

남하림의 관상을 봤다.

단번에 알았다.

그는 하늘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사람.

하연의 표정이 우울해졌다.

‘이자가 있는 한…… 가주님께서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시다.’

만지작.

하연은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물건을 쓰다듬었다.

“나를 만나자고 한 이유가 무엇이오?”

“천괴성의 주인이 어느 분인지 뵙고 싶었습니다.”

“천괴성이라……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오?”

“…….”

“천괴성, 천살성…… 뭐 이런 게 왜 중요한 것인지 모르겠소.”

“그건 하늘에서 정해주신 운명입니다. 운명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개똥 같은 말을 하는 거요? 하늘이 정해주긴 뭘 준다는 말인지. 천살성의 기운을 받은 자는 사람들을 주야장천(晝夜長川) 죽여야 하는 것이오?”

“…….”

“신녀라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앞일을 내다본다고 하던데. 분명 나를 만나러 오면서 내 신괘를 봤겠지요? 어떻소?”

“…….”

남하림의 말처럼 신괘를 뽑았다.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선 모습을 보았다.

“그대는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

“흐음…… 좋게 봐줘서 고맙소이다만 틀렸소. 난 굳이 힘들게 만인지상 자리에 오르지 않을 겁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난 혼자 먹고 살기에도 바쁜 사람이오.”

“…….”

스윽.

하연은 가지고 왔던 상자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이게 무엇이오?”

“사과의 의미로 가지고 왔습니다.”

팽유도가 천을 풀기 위해 손을 뻗었다.

“주인이 아닌 사람이 손을 대면 부정을 타는 물건입니다.”

멈칫.

팽유도의 손이 허공에서 딱 멈췄다.

“됐어. 내가 열어보지.”

스윽.

남하림이 천을 풀었다.

그러자 흑단목으로 만들어진 상자가 나타났다

“신성한 물건입니다.”

“무엇이오?”

“천명을 지닌 사람의 혼을 가두는 혼령안(魂靈眼)입니다.”

‘혼령안이라…….’

슥.

남하림이 상자를 열기 위해 상단을 잡았다.

“열기 전에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상자를 연 순간, 잘못하면 깨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혼령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후 그대에게는 세상의 어떠한 사술도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후후, 생 과 사. 둘 중 하나를 택해라.”

“…….”

“당신이 나를 찾아온 목적은 사과가 아니라 나를 죽이기 위해서였군.”

“맞습니다. 당신을 죽이기 위해 왔습니다. 하북소가를 위해서.”

하연은 담담히 사실대로 밝혔다.

남하림이 눈꼬리를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걸 열지 않는다면?”

“열게 될 것입니다. 그게 당신의 운명입니다.”

‘쯧, 이 여자…… 고단수구만. 이러면 안 열 수 없잖아.’

그녀에게 운명을 믿지 않는다고 선언했으니까.

“후, 좋아. 난 운명을 믿지 않지만, 당신이 말하는 운명을 한번 따라보지. 과연 내가 죽을지 살아날지는 그대의 천명이 정할 테니까.”

팽유도가 다급히 나서며 말렸다.

“형, 안 돼!”

“괜찮아. 저 여자가 말한 대로 여기서 내가 죽는다면 내 운명도 별 볼 일 없는 것이겠지. 아, 혹시 모르니까 한 가지 부탁하자. 내가 죽으면 이 여자도 죽여. 억울해서 혼자는 못 가지.”

“……형…… 알겠어. 내가 꼭 죽여줄게.”

“고맙다.”

스윽.

남하림은 상자를 열기 전 마지막으로 하연과 시선을 마주쳤다.

“당신의 생사(生死)는 나와 같소이다. 내가 죽으면 당신도 죽는 것이오.”

“운명이 그렇다면.”

휙!

‘운명은 개뿔.’

남하림은 상자를 열었다.

파아악!

혼령안이라 불린 원형의 백색 돌.

‘눈동자처럼 생겼군.’

스으으으으-

새하얀 돌의 중앙에 검은색 점이 점점 커져 갔다.

‘욱.’

남하림의 눈동자가 혼령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슈우우욱-

‘큭, 나를 끌어당기고 있어.’

혼령안에서 잡아당기는 힘에 전혀 대항할 수 없었다.

내력을 올려 보았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으으으으…….’

남하림의 혼백이 마치 혼령안으로 사라지는 듯, 정신이 희미해져 갔다.

‘이겨…… 야…… 해. 끌려가면…… 안 돼. 밀어내야…… 한다!’

우우우우우-

그때,

남하림의 팔과 허리에서부터 꿈틀거리는 기운이 느껴졌다.

‘천령신옥에서……?’

천령신옥에서 나온 기가 곧바로 남하림의 눈을 향해 치고 올라갔다.

파아앗!

그 순간, 남하림의 눈동자에서 붉은빛이 쏟아졌다.

‘어, 어떻게……?’

남하림을 지켜보던 하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찌지지직-

혼령안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

번쩍.

남하림의 눈동자에서 또 한 번 붉은 폭광이 터졌다.

쫘아아악!

혼령안이 산산조각 나며 바닥에 흩어졌다.

‘믿을…… 수 없어.’

하연은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혼령안이…… 깨졌어?’

자신의 마지막 희망이 무너졌다.

털썩.

뒤이어 남하림도 정신을 잃은 채 탁자에 엎어졌다.

“부장!”

“하림 형!”

당무독이 쓰러진 남하림의 손을 잡았다.

“무독, 어떻게 된 거야?”

“부장은 괜찮아?”

스윽-

급하게 맥을 짚었던 당무독이 남하림의 손을 내려놓았다.

“자는 것 같은데?”

“……잔다고?”

“엉.”

* * *

벌떡!

남하림은 눈을 뜨자마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디에 있는지 주위부터 살폈다.

‘방이군.’

목이 뻐근해져 가볍게 돌렸다.

“내가 정신을 잃은 모양이군.”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울 줄 알았던 몸이 생각보다 가벼웠다.

‘개운한데?’

혼령안을 본 뒤 정신을 잃기 직전.

천령신옥에서 뿜어진 기를 느꼈던 것까지 기억이 났다.

‘휴우…… 이것들이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어.’

팔찌와 요대를 쓰다듬었다.

드륵.

그때, 방문이 열렸다.

방에서 난 기척을 듣고 안으로 들어선 네 사람.

“이제 일어난 모양이네.”

“형, 하루 종일 잔 거 알아?”

“하루 종일?”

“엄청 자더군.”

“아…… 그래서 몸이 가벼웠구나.”

당무독이 다가와서 손을 잡았다.

“특별히 이상 없어?”

“전혀.”

“다행이네. 맥박도 잘 뛰고 있고.”

“아 참, 신녀는?”

혼령안을 가지고 온 하연이 생각났다.

“부장이 쓰러진 뒤 얼마 안 있다가 하북소가에서 왔어. 상황을 듣더니 또 미안하다면서 말하고는 끌고 갔다.”

“잘됐군. 그 여자는 하북소가에서 알아서 하겠네.”

“그리고…… 백진묵한테서 연락이 왔어. 오늘 저녁에 만나고 싶다던데 어떻게 될지 몰라서 대답은 안 했다.”

“그래? 뭐, 급하면 다시 연락이 오겠지.”

꼬르르륵-

“이런…….”

“흐, 안 그래도 식사 준비가 됐어.”

휘익!

남하림은 침상에서 일어났다.

“가자. 어제는 내 인생 최악의 날 중 하나로 기억될 거야.”

“왜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밥 굶은 날.”

“아…… 하, 밥은 중요하죠.”

* * *

손에 검을 든 사내.

온몸에는 검상이 가득했다.

“으…… 으…….”

열 명의 무사들이 신음을 내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연습은 실전같이…… 최고의 명언이야.”

“공자님, 수고하셨습니다.”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중년인.

백진묵의 최측근으로 삼신(三臣) 중 한 명인 사마조희다.

모든 정책의 결정을 그가 처리할 정도로, 백진묵의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다.

“어떻게 됐지?”

“잠을 자느라 답을 못 한다고 했습니다.”

“큭, 귀엽게 노는군. 하긴 잠을 자는데 깨울 순 없어. 그지?”

“다시 연락을 하겠습니다.”

“굳이 왔다 갔다 할 필요 없잖아. 시간도 아까운데.”

“그러시다면…… 공자님께서 천진루에 가시겠습니까?”

“오랜만에 바깥 구경도 해볼 겸 가보지.”

“알겠습니다. 백후 님께도 연락을 하겠습니다.”

“됐어. 아버지 생일에 바쁠 텐데. 우리끼리 가는 걸로 하자고.”

* * *

어둠이 밀려들어 올 시간.

천진루에 거대한 황금 마차가 멈췄다.

갑작스럽게 도착한 황금 마차를 보며 루주가 빠르게 내려왔다.

“둘째 공자님께서 직접 행차를 해주시니 영광이옵니다!”

“거지들 어디 있어?”

“아…… 네에. 소인이 모시겠습니다.”

“그럼 앞장서.”

후다닥!

루주는 바쁘게 움직였다.

곧바로 천관에 도착을 했다.

“여기입니다.”

“수고했어. 그만 가봐도 돼.”

스윽.

사마조희가 먼저 문을 열고 천관으로 들어섰다.

‘저놈들이 뭘 하는 거지?’

마당에 둥글게 모여 있는 다섯 명.

휙.

기척이 느껴지자, 다섯 명의 고개가 동시에 움직였다.

“누구요?”

“본인은 사마조희라 하오 북방상국의 백진묵 공자님과 함께 왔소이다.”

“그렇습니까?”

남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억!

백진묵이 한 걸음 나섰다.

‘훗, 소문은 그럴듯한데 하는 짓은 완전 거지군.’

모닥불에 고기를 굽는 모습이라니.

‘생긴 건 말짱하네.’

백진묵은 남하림을 보며 간단하게 인사했다.

“백진묵이외다.”

“처음 보는군요. 남하림입니다.”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 처음 보는데도 초면이 아닌 듯하군요.”

“같이 앉으시겠소?”

남하림은 스스럼없이 자리를 권했다.

“내 자리가 있을지 모르겠어서.”

“자리야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스윽.

팽유도가 건너편에 가서 나무토막 두 개를 가지고 왔다.

“앉으시오.”

“고맙소이다.”

백진묵은 앉으면서 다섯 명을 스치듯 보았다.

“한 개 드시겠소?”

“사양하겠소. 많이 드시오.”

“맛있는데. 나도 예전에는 못 먹었는데, 한 번 먹으면 끊기 힘들지요.”

백진묵이 고기를 한 입 베어 먹는 남하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서로 이야기 중인 것 같던데,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소이까?”

“사소한 이야기들이지요. 가끔씩 서로 어릴 때 이야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난 또…… 무림영웅 걸협오성이시니 무림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서 토론하는 줄 알았소이다.”

휘비적.

툭!

남하림은 모닥불이 꺼지지 않도록 쪼갠 장작을 하나씩 넣었다.

‘이런 녀석이 무림 영웅이라고…….’

아무리 봐도 평범해 보이는 모습이다.

뭐, 멀끔하긴 하지만.

“후개, 우리 사업 이야기도 한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많이 바쁘십니까?”

“…….”

“쪼개놓은 장작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걸 태운 뒤 안에 들어가서 사업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알겠소.”

백진묵은 한 발 물러났다.

그러다 무심코 장작이 얼마 남았는지 보았다.

‘……이 새끼가.’

쩌어어억!

팽유도가 허리께까지 쌓아 올린 장작더미에서 하나씩 하나씩 장작을 꺼내 손으로 찢고 있었다.

* * *

방으로 들어온 두 사람.

“한 시진이 지났소.”

백진묵은 화가 났다.

“내가 얼마 걸린다고 말한 적은 없소이다.”

‘참 나…… 쯧, 오냐. 바보같이 확인을 안 한 내 잘못이지.’

“……알겠소이다.”

‘이야아, 웬만해선 돌아갔을 놈인데. 참는 걸 보면 어지간히 환비균장을 구하고 싶은 모양이군.’

남하림의 생각대로, 백진묵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을 위해서는 환비균장이 꼭 필요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그대는 무림인인가, 아니면 장사꾼인가?”

“그게 의미가 있습니까?”

“…….”

백진묵은 남하림을 노려보았지만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순간 영혼이 사라지는 듯 멍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서로 거래를 하는 데 무림인이라서 못할 것은 없소이다.”

“그럼, 됐소.”

백진묵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본인이 사업을 하는데 그대가 가진 물건이 필요하오.”

“정확히 말씀하시오. 무엇을 필요로 한다는 겁니까?”

“환비균장.”

“북방상국에서 그 물건을 필요로 하는 용도는 무엇입니까?”

“…….”

남하림의 질문에 백진묵의 말문이 막혔다.

‘이놈…… 알고 있으면서 굳이 내게 확인을 하다니.’

“환비균장을 이용해서 약을 만들고 있소이다.”

“좋은 일은 아니군요.”

“장사꾼이 이런저런 일을 따지면 안 되는 법. 돈만 벌면 좋은 일이 아니오?”

“북방상국에서는 모두 그런 식으로 가르칩니까?”

“남천상국도 돈에 미친 것으로 알고 있거늘. 본 상국을 더럽게 매도하지 마시오.”

“제가 아는 남천상국은 선을 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북방상국은 자꾸 선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하하하하! 그 선을 누가 정한 것이오? 남천상국에서? 아니면 네가 정한 선인가?”

“무림에는 무도(武道)란 게 있고, 상계에는 상도(商道)가 있소이다. 그리고 사람에겐 도리(道理)가 있지. 그게 바로 당신이 말한 선이라는 것입니다.”

“크핫, 후개를 성인(聖人)이라 하더니 정말로 네놈이 성인인 줄 아는군. 넌 무림인이자 거지일 뿐이다. 진정한 장사꾼이란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팔아서 돈을 벌면 될 뿐!”

“돈이 된다면 당신 스스로도 팔 사람이군요.”

“큭, 당연한 말이외다.”

백진묵에게 세상은 오로지 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게 환비균장이 필요한 건 맞소. 하나 네가 가지고 있는 환비균장을 팔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물러날 것 같은가? 세상에는 수많은 환비균장이 있소이다.”

“오호, 잘됐군요. 저번에도 말했지만 팔 생각도 없었으니까. 결정을 짓게 만들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군요. 세상에 환비균장이 많다는 말도 맞는 말이니, 어디 그 전부를 구할 수 있을지 보겠소.”

“후개…… 그건 무슨 말이지?”

“우리도 환비균장이 제법 많이 필요해서 구하는 중이외다. 중원에 떠도는 환비균장을 모두 사버릴 계획이라고 해야 하나?”

콰아앙!

백진묵이 탁자를 내리쳤다.

“지금…… 전쟁을 하자는 것인가?”

“무슨 말입니까? 이미 전쟁 중이 아니오? 난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휙!

백진묵은 결국 소매를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개, 자네에게 구천신품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

‘이 자식…… 알고 있었어? 쳇, 하긴, 중원 무림 여기저기서 떠들썩하게 돌아다녔는데 모르면 등신이지.’

“군사가 필요하다고 해서 찾으러 온 것이죠.”

“무림맹 군사를 들먹이지 않아도 된다. 난 그자가 두렵지 않으니깐. 잘 들어. 경매 전까지 좋은 대답을 가지고 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구천신품을 부숴주지.”

“…….”

“큭, 천하의 후개가 당황하는군? 내 말 똑바로 새겨들어라. 난 한다면 하는 놈이니까.”

타아앙!

백진묵은 문이 부서지도록 밀어젖혔다.

사마조희가 얼른 뛰어왔다.

“공자님……!”

“가자.”

“알겠습니다.”

생각대로 되지 않았는지 화가 난 채로 천진루를 떠난 백진묵이었다.

밖에서 기다리던 네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왜 저래. 부장, 무슨 얘기 했어?”

“안 팔겠다고 하니 엄청 열 내면서 구천신품을 경매 자리에서 부숴 버리겠다고 협박하더군.”

“와아, 정말?”

“부장, 진짜 부숴 버리면 어떻게 하지?”

“아, 상관없어. 우리한테 필요한 건 물건이 아니라 문양이잖아.”

“……그러네? 진짜 깨는지 구경 가야겠다.”

“아하하! 그거 재미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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