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새로운 부탁
털썩.
남하림은 침상에 코를 박으며 쓰러졌다.
온몸에 힘이 쫘악 빠졌다.
‘망할…….’
짜증이 순간적으로 올라왔다.
게다가 기분이 더러웠다.
자신의 모든 행동들이 일거수일투족으로 알려지는 것처럼 보였다.
‘군사만 신경 쓰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를 다시 보니 맹주 유극지가 더 괴물이었다.
‘하긴 그러니 무림맹주겠지.’
지금 무림맹에서 자신의 상황은 맹주와 군사의 사이에 끼어 있는 형국이었다.
휙!
엎드렸던 몸을 틀어 바로 누웠다.
‘피곤한데…… 잠이 안 오네.’
멀뚱멀뚱.
손을 들어 팔찌를 보았다.
붉은색의 천령신옥에 내력을 올리자 바로 반응을 보였다.
‘신기하긴 해. 지금까지 이유를 몰랐는데. 내력을 증폭시킨다고 할까?’
슥.
이번에는 허리에 요대를 만졌다.
‘요건…… 단전을 더욱더 묵직하게 만들어주고 있어.’
강룡십팔장 같은 강기를 펼친 뒤 들끓는 내기를 다스리는 데 유용했다.
‘음…… 이렇게 좋은 것을…….’
구천마성의 구천마제는 무림맹주에게 당했다고 했다.
‘이해가 안 되네. 왜…… 이걸 안 차고 싸웠을까?’
유극지와 구천마제가 싸우는 동안 구천마성에서 사라졌던 열 개의 구천신품들.
남하림은 자신이 구천마제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생각을 해보았다.
마지막 대결.
그들의 결전은 구천마성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구천마제와 무림맹주가 싸운 곳은 구천마성에서 십 리 정도 떨어진 하마곡(下魔谷).
대결이 끝난 후 무림인들은 구천마제라는 인물의 시체만을 봤을 뿐.
그가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을 아는 이는 맹주 유극지밖에 없었다.
‘맹주가 구천마제라고 하면 믿어야 돼?’
절레절레.
남하림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당연히 군사가 안 믿는 게 정상이야. 맹주와 군사는 같은 배를 타기 위해 서로 도왔을 뿐, 이제는 다른 목적지에 내릴 생각이겠지.’
“…….”
그들이 각자 원하는 목적에 대해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 현재로서는 아쉬웠다.
‘좋아, 맹주가 안 죽었다고 치자. 그럼 왜 죽은 척을 하는 거지? 그것도 이십 년 동안이나…… 이것도 말이 안 돼.’
결국은 답은 하나.
구천마제의 정체를 직접 알아내는 방법밖에 없다.
‘하아, 이놈이나 저놈이나 모두 믿을 수 없는 놈들뿐이야.’
* * *
‘급했던 모양이군.’
아침 일찍 영화당으로 군사전에서 연락이 왔다.
“알겠소. 곧바로 군사전으로 가겠습니다.”
“여기에서 기다리겠소이다.”
“…….”
피식.
남하림은 옷을 걸치면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인종의 기다리겠다는 말은 재촉하겠다는 뜻.
‘어제 우리들이 맹주를 만난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군. 하긴 군사도 맹주라면 신경이 쓰이겠지.’
딸깍.
갈색 요대를 마지막으로 옷을 다 챙겨 입었다.
‘음, 전승 아저씨 솜씨는 대단해.’
허리를 받쳐주는 부분이 마치 몸의 일부분처럼 불편하지 않았다.
“이걸 챙겨야겠지?”
휘익!
탁자에 올려놓은 두 개의 물건을 집었다.
“가볼까나.”
드륵-
남하림이 문을 열었다.
‘으익.’
인종의 얼굴이 바로 나타났다.
“거 너무 붙어선 게 아니오? 깜짝 놀랐습니다.”
“미안하오.”
“가시죠.”
* * *
군사전으로 곧장 들어섰다.
널리 퍼진 후개의 명성.
그래서인지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흐음, 저번과는 다른 시선이군. 전에는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이런 눈빛이었는데.’
군사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후개를 모시고 왔습니다.”
“들여보내게.”
“알겠습니다.”
스르르르-
인종은 열린 문 옆으로 물러났다.
‘군사…… 여전하군.’
봉황선을 든 채 미소를 띤 얼굴.
“반갑습니다.”
“후개, 잘 왔네. 너무 이른 시간에 부른 게 아닌가 모르겠군.”
“빠른 시간이긴 하지만 깨어나 있었습니다.”
“후후후. 이해를 해주니 고맙네.”
스윽.
제갈령이 반대편 문으로 다가섰다.
“아침 공기도 좋은데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떻겠는가?”
“상관없습니다.”
제갈령을 따라 소정원으로 나갔다.
남하림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런 곳이 있을 줄 몰랐습니다.”
“내 개인 정원이라네. 생각이나 고민이 많을 때 여기에서 쉬곤 하지.”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아침부터 술은 그렇고…… 차를 준비시켜 놓았네.”
“감사합니다.”
제갈령의 말이 끝나자 시녀들이 곧바로 차를 들고 들어섰다.
각자의 앞에 차를 따르는 동안 조용하게 서로를 바라볼 뿐.
“드시면 되십니다.”
시녀가 뒤로 물러났다.
스윽.
제갈령이 한 손을 살짝 들었다.
“한 잔 마시게나. 천천히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세. 아, 아침에 급한 일은 있는가?”
“없습니다.”
“잘됐네.”
남하림과 제갈령은 차를 마셨다.
말없이 차만 마실 것 같았던 두 사람.
먼저 제갈령이 말문을 열었다.
“어제 맹주를 만났다고 들었네.”
“정문에 갑자기 찾아오셨더군요. 잠시 금지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습니다.”
“그분께서 뭐라고 하시던가?”
“별말씀 없었습니다. 사천을 다니면서 우리들이 한 일에 대해서 물어보시더군요.”
“으음…….”
살랑.
제갈령이 봉황선을 가볍게 흔들었다.
“아 참, 여기에 있습니다.”
스윽.
두 개의 물건.
홍옥 반지와 홍요대를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내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네. 자네가 이렇게 일을 잘할 줄은 몰랐어. 어렵지 않던가?”
“처음에는 몰랐는데, 이런 물건들은 무림맹에서 관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인가?”
“사람들이 상당히 욕심이 많더군요. 이것 때문에 무림에 분란이 생긴다면 무림맹에서 나서는 게 맞겠지요.”
“허허허, 후개가 그런 생각을 해준다니 고맙네.”
“별말씀을요.”
제갈령은 반지와 홍요대를 하나씩 살폈다.
“자네는 이것들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던가?”
“구천신품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맞네. 그자가 사용하던 물건이라 했지. 중원에는 그의 기연이 담긴 물건으로 소문이 나서 여기저기서 욕심들을 내기도 하고.”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 가지 물건들을 살펴봤는데, 일반 물건들과 같았습니다.”
타악!
제갈령은 탁자에 물건을 내려놓았다.
“그러게. 별반 다를 게 없거늘. 사람들에 의해 탐욕의 물건으로 바뀐 것이지.”
살랑살랑.
봉황선의 움직임이 조금 빨라졌다.
“맹주에게도 이것을 보여주었는가?”
“한번 보자고 하시더군요.”
“이것들을 보고 난 뒤 뭐라고 하시던가?”
“좋은 물건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후후후.”
제갈령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자네도 알지 않은가? 구천신품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다만 웬만하면 신경을 안 쓰고 싶은 물건들이라서요.”
“구천신품을 가지고 있으면서 궁금하지도 않던가? 자네같이 머리 좋은 사람이라면 찾아봤을 텐데.”
“…….”
“오래전에 구천마제가 열 개의 구천신품을 공신 해정에게 만들도록 시켰다고 했지?”
“네.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구천마제가 원한 것은 문양이었어.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해정은 그의 뜻대로 구천마제의 물건임을 증표하는 문양을 새겨 넣어 주었지.”
남하림은 숨도 거의 쉬지 않았다.
“구천마제는 만족을 했지. 그런데…… 해정은 구천신품을 만들면서 열 개의 물건에 그에 대한 비밀을 몰래 담아놓았다네. 구천마제도 알지 못하도록. 하나 언젠가는 누군가 알아낼 수 있도록.”
‘군사는 문양에 비밀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어.’
“구천신품에 그의 모든 것이 있다는 소문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거야 내가 어찌 알겠나? 그분의 뜻이었지.”
‘그…… 분?’
남하림은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은 건가?
남하림이 군사를 빤히 쳐다보자,
“후후후, 내가 구천마제를 그분으로 지칭한 것이 놀랍나? 나도 갑자기 그렇게 나왔군.”
“……그렇습니다.”
“자네가 모르는 이야기들이 정말 많지. 후후후.”
“…….”
“모두를 말해줄 수는 없지만 이건 알려주겠네. 맹주와 나, 천사회의 혈사천주와 혈군사. 우리 네 사람은 한때 그를 밑에서 모셨지.”
턱.
남하림은 짧은 순간 숨이 멈췄다.
구천마제를 모셨다는 그들 네 명은 현 무림의 최고 인물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린, 아니…… 맹주만 제외하고는 구천마제의 생김새도, 정확한 신분도 모른다네. 웃기지 않나?”
“……웃긴 게 아니라 ‘놀랍지 않나?’라고 묻는 게 정확하겠습니다.”
“후후후, 그렇게 되는가?”
“이런 이야기를 저에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네도 이미 무림 속의 소용돌이 빠져들었네. 마음속으로 아니라고 해도 부정을 해도 벗어날 수 없지.”
“조용하게 살지 못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어허, 일은 자네가 벌여놓고 조용하게 살고 싶다는 말이 나오는가?”
“제가 무슨…… 일을 벌였다고 그렇게 무서운 말을 하십니까?”
살라랑.
제갈령은 미소를 지었다.
“한동안 조용했던 무림일세. 그런 무림에서 갑자기 구천신품이 나타났지.”
“백리세가가 잘못한 일이 왜 제 책임입니까?”
“훗. 산동악가는?”
“그것도 제가 먼저 나선 게 아닙니다. 하북소가와 둘이서 싸우는 통에 괜히 중간에 끼었던 겁니다. 저를 거기 보낸 사람이 군사시지 않습니까.”
“신려세가는?”
“그 녀석이 가출을 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죠.”
“참으로 일리가 있는 말이네. 자네는 가만히 있는데 남이 들이박아서 일어난 일이지.”
“…….”
남하림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화산파와 검문도 군사님이 협박을 해서 시킨 게 아닙니까?”
“협박이라는 말은 빼게. 난 그런 일 없네.”
“신려세가로 협박하셨습니다.”
“허허, 정중하게 부탁을 한 것이네.”
‘이거 은근히 짜증 나게 하네.’
톡톡.
남하림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바닥을 두 번 두드렸다.
“다섯 개의 구천신품이 단기간에 무림에 나타났네.”
“…….”
할 말이 없었다.
모두 자신과 연관된 일은 맞으니까.
“이제 알겠나? 중원의 모든 일들이 자네와 자네 동료들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지. 그리고…….”
“또 무엇입니까? 더는 없는 것 같은데요.”
“무극창신공.”
“진짜 그건 저하고 상관없습니다.”
“상관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를 일이지. 물론 자네에게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군사님께선 저에게 믿음이 없는 것 같군요.”
“하하하하! 후개, 난 아무도 믿지 않네. 가끔 내 자신도 못 믿을 때가 있지.”
“그 부분은 저와 닮았군요. 저도 남을 안 믿거든요.”
미소를 짓는 남하림의 표정.
“후후, 서로 믿지 않는 사람들끼리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렇지요.”
“노파심으로 하는 말이니 듣게. 남궁세가가 이대로 물러날 것이라 생각하지 말게. 은근히 뒤끝이 센 사람들이거든.”
“호탕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호탕은 하지. 앞에서는…… 다만 자존심이 살짝 금이 갔을 때가 문제라는 것이지. 지금쯤이면 자네에게 당한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을 게다.”
“군사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사람들이 쪼잔한데요?”
“너무 잘난 집안이라서 자존심은 창천을 찌를 정도지. 자네가 강자라고 인정하지 않는 한 계속 도전할 거야.”
“생각지도 못했는데. 여하튼 걱정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고맙긴. 내 부탁을 들어줘서 내가 더 고맙네.”
남하림은 이제 손을 떼고 깔끔하게 군사와 헤어지기로 했다.
더 엮이면 분명 피곤해진다.
“이제 우리 사이에 정리할 것도 없으니 그만 가볼까 합니다.”
“아, 이젠 북방상국에 가려는 모양이군.”
‘이건 또 뭐야……?’
“북방의 대욕이라고 했나? 잘됐네. 그놈에게 구천신품이 있다더군.”
“그…… 말은 어디에서 들었습니까?”
“무슨 말? 북방상국에 간다는 사실을 말하는가?”
“그것도 있지만…… 둘째 백진묵에게 구천신품이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듣긴 어디서 듣겠나? 방금 들어온 따끈한 정보지. 북방상국 국주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경매로 물건을 내놓겠다고 하더군.”
가끔씩 상국의 주요 인물의 생일이나 연회가 필요한 날이 오면, 많은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도록 상국의 물건들을 경매에 내놓기도 했다.
“구천신품을 경매로 내놓을 줄은 나도 몰랐지만.”
“……북방상국 주위로 난리가 나겠군요.”
“후후후, 많은 일들이 일어날지도…… 이번에도 우리 후개님께서 나서주겠지.”
비밀리에 구천신품을 챙겨둘 계획이 무너졌다.
‘하아아아…….’
스윽.
남하림은 두 손을 내밀었다.
“후개, 뭔가?”
“구천신품을 가지고 오라는 말이 아닌가요?”
남하림은 구천마제의 정체를 밝히고 싶었다.
부탁을 가장하는 저 태도는 열받지만, 그가 부탁하지 않아도 구천신품엔 관심이 있었다.
“맞네.”
“경매에 그냥 갑니까?”
“굳이 돈이 필요한가?”
“경매가 뭔지 모르시지는 않을 테고…… 돈이 필요 없다는 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제갈령은 답답한 듯 말했다.
“허어, 경매가 시작되면 자네가 한마디 따아악 하게. 우선 한 냥을 부른 뒤, 무림맹 자격으로 왔으니 한 냥 이상을 부르는 이들은 맹에서 지켜볼 거라고.”
“완전 쌔애애애애앵양아치짓 아닙니까?”
“말이 심하구먼.”
“이런 물건은 기본적으로 황금 열 냥부터 시작가입니다.”
“그런가? 황금 열 냥이라…… 아, 혹시 자네가 대신 빌려주면 안 되겠나? 요번에 금광권도 하나 장만한 것 같던데.”
* * *
군사 제갈령을 만난 지 하루 만에 무림맹을 떠났다.
“망할…… 내 인생에 절대로 도움이 안 될 사람이야.”
“누구?”
“군사.”
“아. 인정.”
당무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사전에서 서로 만난 뒤 나누었던 이야기를 들었다.
“근데 왜 양 총관이 남양에 있냐?”
북방상국의 백진묵에 대한 서신을 보낸 게 있었다.
개봉에 있어야 할 양삼이었다.
“그게…… 우리가 부탁을 했어.”
“나 몰래?”
‘무슨 부탁이지? 함부로 움직일 양삼이 아닌데……?’
분위기를 봐선 자신 외에는 모두 알고 있는 듯했다.
“뭐야, 왜 나만 모르냐? 대충 내가 알 만하게 말해줄 수 없는 문제야?”
“좋은 거야. 아주…….”
성철각이 밝게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래? 뭐 너희들이 좋다면야…… 그래도 아직은 모르겠는데? 너희도 좋은 일이야?”
“우리의 미래가 달린 일이라고 할까?”
“우리의 미래까지? 허어, 엄청 거창하잖아.”
“하림 형, 그런 게 있어요. 가서 절대로 놀라면 안 돼요?”
“……아니, 절대로 놀랄 것 같다. 야아, 무슨 엉뚱한 짓을 한 거야?”
남하림은 남양에 가까이 갈수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