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황무적-148화 (149/328)

148. 재회

끼이이익-

‘허…… 억…… 허억.’

마을에서 잡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창석이 나무수레를 힘들게 끌었다.

‘엉…… 차!’

주름이 깊은 이마와 검게 탄 팔뚝에 땀방울이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스르륵.

나무 수레가 갑자기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뭐지?’

수레 뒤로 인기척이 들렸다.

“거 누구요?”

“밀어드릴게요. 힘들어 보여서요.”

수레를 미는 사내의 목소리.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젊었다.

“아이구…… 고맙네. 조금만 부탁하겠네. 얼마 멀지 않네.”

“괜찮습니다.”

수레를 당길 필요도 없이 손잡이만 잡아도 쑥쑥 굴러갔다.

“허어. 자네, 힘이 세구만.”

“원래 우리 집안이 강골 집안이거든요.”

중원 무림에서 강골세가라면 황보세가와 하북팽가를 빠뜨릴 수 없다.

“허허허.”

평소라면 이각이 걸려야 하지만 도착지까지는 반각이면 충분했다.

“도착했네. 여기가 우리 집일세.”

수레 뒤로 젊은 사내가 나왔다.

의외의 모습에 창석은 살짝 당황했다.

“어…… 자네, 거지였나?”

“하하하! 그러네요!”

팽유도가 호탕하게 웃었다.

‘아이고, 개방도로구만.’

언뜻 보기에 거지 차림새였지만, 등에 무시무시한 도를 메고 있었다.

“이런……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요. 개방의 제자이신지 몰라 뵈었습니다.”

창석은 허리를 바짝 숙이며 얼른 사과했다.

무림인은 사람 죽이는 것을 밥 먹듯이 한다.

이것이 보통 일반인들의 견해다.

그들이 횡포를 부려도 관부에서조차 손을 대지 못하는 게 잘난 무림인들이었다.

팽유도가 허겁지겁 그를 일으켰다.

“무슨 실수를 하셨다고요. 개방 방도도 거지가 맞는데요.”

“아…… 예에.”

팽유도의 목소리에 창석은 안도했다.

평소에 소문으로 들었던 무림인과는 다르게 보였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창석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창석이 아저씨군요.”

“아저씨는 무슨…….”

창석은 마당 한편에 있는 의자를 얼른 닦았다.

“아 참, 내가 정신이 없어서…… 여기에 앉으시면 됩니다. 제가 물이라도…….”

“오! 고맙습니다.”

매끈하게 닦아놓은 나무의자에 앉자, 얼른 주방으로 들어간 창석이 쟁반을 들고 급하게 나왔다.

“시원할 것입니다.”

벌컥!

“정말 시원하네요! 감사합니다. 아, 혹시 백진상국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마을 북쪽에 있는 백진상국을 말하시는 겁니까?”

“아시는군요!”

“그 앞을 가끔 지나가곤 합니다.”

“오오, 혹시 백진상국이 장사를 잘하는 곳인가요?”

“장사라…… 그걸 물으시니 신기하구만요. 사실…… 우리 마을 사람들도 저기가 장사를 하는지 안 하는지 가끔 내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원래 저 자리가 황동표국이라고, 오래전부터 표국업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아하, 그럼 황동표국은 이제 없어졌나요?”

“음…….”

창석은 기억을 떠올렸다.

“아, 맞다. 홍수가…… 났을 때니깐…… 오 년 전에 갑자기 표국주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때 표국업을 접었지요.”

“에구, 안타깝네요.”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달도 안 돼서 그 자리에 백진상국이 들어왔습지요. 얼핏 듣기로는 하북에 있는 돈 많은 집안이라고 했습니다.”

‘하북?’

팽유도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도 하북 출신이지만, 사천성까지 와서 상국을 세울 필요가 있던가?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다행이라 생각을 했지요. 표국은 망해도 상국이 들어왔으니 일자리는 있을 거라고…… 근데…… 몇 개월에 한 번 정도 물건들이 들어오지 뭡니까. 그때도 물건을 옮겨 싣고 떠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헛, 정말 이상하네요. 상국이라면 하루에도 수없이 물건들을 사고팔아야 하는데.”

“네. 맞습니다.”

‘뭐…… 이건 안 봐도 이상하잖아.’

* * *

이휘연, 당무독, 팽유도가 백진상국에 대해 알아낸 내용은 비슷했다.

#NAME?

간단한 내용인 듯하지만 많은 것을 내포하는 내용.

“백진상국은 오직 서장상회에서 받은 물건만을 취급한다는 거야.”

“무독 형, 그 물건이 무엇일까요?”

“그건 부장이 알아냈을 거야. 우리가 조사할 건 백진상국이 과연 어떤 놈들인지 확인하는 거지.”

“그럼 어떻게 하죠?”

“일단 백진상국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살펴보자. 그들이 어떤 놈들인지 알 만한 증거들을 캐는 거지.”

“좋아. 그렇게 하자.”

끼이이익-

팽유도가 나무수레를 끌고 백진상국 앞을 지나가려 했다.

“저 자식이……!”

그런데, 갑자기 정문의 위사가 다급하게 뛰어왔다.

“야, 멈춰!”

“무슨 일이십니까?”

“빨리 돌아가.”

“예? 여기서 어디로 갑니까?”

위사는 눈을 부릅뜨며 팽유도를 노려보고는,

휙휙!

왔던 방향을 가리켰다.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

팽유도는 느낌이 왔다.

‘좀 중요한 사람이 오는 모양이네? 좀 개겨 볼까?’

“에이, 이 길이 당신 길도 아닌데 왜 자꾸 못 가게 막습니까? 나도 이걸 제때 안 갖다 주면 오늘 일당을 못 받는다고요!”

“이 자식이…… 갑자기 왜 소리는 질러?”

태도가 돌변한 팽유도를 보며 위사는 당황했다.

“아 씨…… 내가 나중에 일당 챙겨 줄 테니까 빨리 돌아가. 어서! 나 죽는 꼴 보고 싶냐?”

“쳇, 정말입니까?”

“그렇다니깐……!”

팽유도는 꾸물거리며 수레를 천천히 돌렸다.

‘휴우…….’

위사가 안도의 숨을 내쉬는 순간,

빠지직!

공교롭게도 나무수레의 한쪽 바퀴가 부서졌다.

“아아악!”

팽유도는 일부러 크게 소리를 내며 바닥에 굴렀다.

와자자장창!

나무수레에 실려 있던 물건들이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아…… 조…… 때…… 따.’

“아아야! 사람 살려!”

바닥을 뒹굴며 죽는 소리를 내는 팽유도.

다다다다!

멀리서부터 바닥이 울리며, 먼지가 하늘 위로 솟구쳤다.

‘온다.’

백진상국을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무리들.

‘저놈은…….’

선두에서 말을 타고 오는 백의사내.

그가 누구인지 모를 리 없다.

‘하북에 돈 많은 집안이라더니…… 북방이었나?’

중원 북방의 상권을 쥐고 있는 북방상국의 인물.

국주 백진만의 사촌 동생 백후였다.

‘이런 거물이 왜 사천에 있지? 대체 서장상회에서 뭘 거래하는 거야?’

* * *

번뜩.

‘기습?’

남하림은 눈을 떴다.

스윽.

침상에서 일어나 기척이 들린 방향으로 돌아앉았다.

“누굽니까?”

창가에 등을 맞대고 있는 그림자.

옆으로 움직이자, 사내의 얼굴이 천천히 드러났다.

사천신교 명왕종.

“후후, 아쉽군. 바로 보낼 수 있었거늘.”

“농담이 심하네. 보아하니 신교에서 찾아온 모양이오.”

여유로운 그의 표정.

언제든지 상대를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명왕종에게서 느껴졌다.

그는 강했다.

‘어떻게 이런 자가 신교에 있지?’

“후개라고 했나? 취향이 특별하군. 계집들처럼 분홍 베개라니…….”

팡팡!

남하림은 베개를 두드렸다.

“고작 색깔 가지고. 이만큼 푹신한 베개도 없거든. 내가 수면의 질에 생각보다 까다로워서.”

“있는 집안 자식은 자는 것도 사치스럽군.”

“내가 좋은 것을 알아보는 습관이 있죠. 근데 당신은 누구지?”

“명왕종이라 한다. 별로 긴장을 하지 않는군.”

“긴장은 강한 사람 앞에서 하는 거니까.”

“크하하하!”

명왕종은 대소를 터뜨렸다.

“중원에서 후개의 무공이 대단하다고 들었다만, 간 덩어리도 부은 줄은 몰랐다.”

“말이 많은 걸 보니 싸우러 온 것 같지는 않고. 할 말이 있으면 하시오.”

“교주님의 명이 떨어지긴 했지만, 내가 조금 특별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서. 후개란 인물이 정상적이지는 않더군. 혹시나 말이 통하지 않을까 싶었지.”

“아아아함.”

명왕종의 눈살이 찢어졌다.

“…….”

“아, 미안요. 자다가 일어난 거라. 계속해 보세요.”

“본 신교는 지금까지 개방과 부딪힌 적이 없는 걸로 안다. 이왕 서로 잘 지내면 좋을 듯하군.”

“흐음…… 글쎄. 내가 사람을 가리는 편이라서.”

훗.

어이없는 웃음.

“할 말 없게 만드는 재주가 있군.”

“기분 나빴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 사실이니까. 더 할 말이 있소?”

“교주님께서는 무림과 관부 사이에서 고통받는 백성들을 가엽게 여기는 바 신교를 세우셨다. 사천성에서 뜻을 시작하여 중원으로 신교의 세를 넓히고자 하심은 전 중원에 백성들이 고통을 받지 않게 위함이지.”

“흐흠, 숭고한 뜻을 지녔네요.”

“중원으로 세를 넓히는 과정에서 약간의 돈이 필요했을 뿐. 사천성에서 이루어지는 외부 거래는 서궁상국을 거쳐야 하기에 면양지부를 이용한 것이지, 신교는 서궁상국과 싸울 생각이 없다.”

“지금 하는 말들이 모순된다는 건 압니까?”

“무슨 말이지?”

“당신들은 서궁상국을 먹으려고 했소.”

“거래를 할 수 없다는 말이군.”

명왕종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아니죠.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슈욱!

명왕종이 갑자기 손을 뻗었다.

투명할 정도로 빛나는 그의 손이,

멈칫.

남하림의 얼굴 앞에서 멈췄다.

“……대단하군.”

“당신도…… 신교의 다른 인물들과는 좀 다르네요.”

남하림을 향해 뻗은 그의 오른손.

동시에 남하림의 일장도 명왕종의 가슴 앞에서 멈춰 있었다.

스윽.

명왕종은 뻗었던 손을 거두며 뒤로 물러났다.

“오늘은 그만하는 게 좋겠군. 인사차 온 것이네. 후개가 누군지 궁금하기도 했고.”

“궁금증은 풀렸는지?”

“알고 싶다면 말해주지. 자만심이 하늘 끝까지 오른 허세꾼.”

“쯔쯔, 사람 볼 줄 모르네요. 다시 보세요.”

“……제대로 미친놈.”

“사람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 같아 안타깝네요. 혹시 이런 건 안 보이나? 신교를 때려잡을 무림의 영웅?”

“…….”

피식.

어이없는 실소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개방 거지라 말발 하나는 인정해 주마 말장난은 여기까지. 서로의 뜻을 알았으니 오늘은 그만 가겠다. 후개, 이후에도 여전히 같은 생각이라면 둘 중 하나는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휘릭!

명왕종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흠, 의외네. 사천신교에는 모두 정신 나간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남하림은 침상에 걸터앉았다.

“명왕종, 제대로 싸워볼 사람이야.”

털썩.

남하림은 돌아서 침상에 누웠다.

말똥말똥.

천장 위에 그려져 있는 꽃 모양이 또렷하게 보였다.

남하림은 얼마 있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 진짜! 중간에 깼더니 잠이 안 오잖아! 이게 진짜 네놈이 싫은 이유다, 잠도 없는 새끼들…….”

* * *

아침이 밝았다.

드륵.

문을 열고 얼굴이 부은 남하림이 방을 나왔다.

“어…… 부장, 왜 그래?”

“어젯밤에 이상한 놈이 들어와서 잠을 깨우는 바람에 지금까지 한숨도 못 잤어.”

“누가 왔는데?”

“명왕종.”

“그게 누구야?”

“사천신교에서 왔더라고. 개방하고 손잡으면 안 되냐고 물어보더군.”

“웃긴 사람이구나.”

“그러게 말이다.”

깜빡깜빡.

남하림은 부은 눈을 풀기 위해 움직였다.

“이럴 때 얼음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뭐 없나?”

“왜?”

“눈, 여기를 시원하게 해주면 붓기가 바로 빠지거든.”

“그럼 한빙장 익히면 안 돼?”

“한빙장?”

“손을 차갑게 해서 눈에 대면 되잖아”

“야……! 철각이…… 너 천재구나! 여태까지 왜 그런 생각을 안 해봤지?”

“내가? 하하, 고마워.”

“양삼한테 연락해서 빙공을 구해보라고 해야겠다.”

씨익.

남하림은 기분이 좋아졌다.

서궁상국 면양지부 정문.

“아하핫!”

우렁찬 웃음소리가 울렸다.

끼이익-

“어떤 미친 녀석이 아침 일찍부터 남의 집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거여?”

정문으로 빗자루를 들고 나오던 행랑아범이 투덜거렸다.

문을 열자 보인 것은 두 팔을 벌리며 환하게 웃는 팽유도.

걸협오성 세 사람이 문 앞에 서 있었다.

“행랑아범. 잘 지냈소?”

“에고! 어서 오십시오!”

휘리리릭-

팽유도는 비취류신법을 극성으로 펼치며 동명전으로 향했다.

“하림 형, 철각 형!”

익숙한 청년의 목소리.

“아, 유도다.”

타앗!

성철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밖으로 사라졌다.

‘나 참, 남들이 보면 몇 년은 못 만난 줄 알겠네.’

남하림도 미소를 지으면서 밖으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