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서궁상국 살리기
쿵쿵.
묵휴궁의 정문을 제법 세게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흠…….’
어중성은 내력을 실어 문을 두드렸다.
쿠우웅!
문 전체가 흔들거렸다.
끼이익-
그때서야 팽유도가 밖으로 나왔다.
“누구요?”
‘도천걸이군.’
어중성은 팽유도의 등에 반도를 힐끗 보고는 입을 열었다.
“난 흑화단의 어중성이오. 호무궁 총단장이신 진강충님을 모시고 왔소. 국주님의 둘째 사위가 되시는 분이기도 하오.”
스윽-
팽유도는 그의 뒤로 서 있는 세 명의 사내들을 확인했다.
“어느 분이오?”
“본인이네.”
진강충이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일로 찾아왔습니까?”
“후개를 만나고자 왔네. 들어가도 되겠는가?”
“으음, 들어오세요.”
* * *
늘 그랬듯, 다섯 명은 비는 시간에는 가벼운 수련을 했다.
특별한 수련은 아니었다.
가볍게 몸을 움직이는 기초적인 수련법.
주로 신체를 단련하는 수련이 대부분이었다.
“하림 형.”
팽유도의 목소리에 남하림이 동작을 멈추며 돌아섰다.
휙!
벗어놓은 수건을 목에 휘감았다.
팽유도와 함께 온 사내가 누구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진 형님이시네요.”
“나를 기억하는 모양이지?”
“얼추. 형님을 보면 여기 검흔이 멋지다고 생각했거든요.”
남하림이 왼쪽 눈썹 아래를 가리켰다.
“하하, 그렇군. 이제 생각나네. 그때도 멋있다고 했었지.”
“여전히 강렬해서 멋집니다.”
“세상 편하게 지낼 녀석이 무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인생이 제 뜻대로 안 되더라고요. 죄송하지만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조금 씻고 오겠습니다.”
“알겠다. 기다리마.”
* * *
이각 후.
두 사람이 묵휴궁 앞마당 정자에 나란히 앉았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니다. 생각할 것도 있고 해서 지루하지는 않았다.”
잠시 둘 사이에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크흠, 어제 여 형님을 만났다고 들었다.”
“아항. 둘째 형님께서도 국주 자리에 관심을 가지시는 줄은 몰랐군요.”
“방금 후개가 말하지 않았나.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네.”
“후후.”
옅은 웃음.
남하림의 그 웃음이 진강충의 마음 한 곳을 건드렸다.
“왜 웃지?”
“형님이 한 말은 저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
“자연스러운 것과 억지스러운 것이라 할까요?”
남하림의 말에 진강충은 반박하지 못했다.
“……네가 보기에 내 그릇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느냐?”
국주 자리에 어울려 보이느냐는 뜻.
“흠.”
또 한 번의 미소.
‘녀석의 웃음은…….’
네까짓 놈이 국주위에 넘보는 것이 우습다는 비웃음인가?
가슴에 충격을 받았다.
“지금 계시는 그 자리가 최적입니다.”
“……!”
피식.
진강충은 자조적인 웃음을 뱉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군.”
남하림은 멀리 떨어져서 자신들을 주시하는 세 명을 가리켰다.
“많은 사람이 아니라 저들이겠지요.”
“…….”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 대화를 들을 수 없으니까.”
그 또한 무인.
남하림의 내력에 감탄했다.
“하나만 묻자. 내가 억지로 떠밀렸다고 생각한 것이냐?”
“간단하죠. 아침 일찍부터 찾아오셨고. 그것도 혼자가 아닌 저들과 같이. 스스로의 뜻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이게 제일 중요할 것 같은데, 진 형님에게서 자신감이 보이지 않아요.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남의 말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으니까.”
틀린 말이 아니다.
남하림의 말이 가슴을 짓눌렀다.
“만약에 저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대총관 여 형님께서 자신 대신 검무를 출 수 있느냐 묻더군요.”
“……!”
“허락을 했습니다.”
‘그와 손을 잡았어?’
순간 다급함이 밀려왔다.
진강충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가 무엇을 준다고…… 하더냐?”
“하아.”
이번에는 실망스러운 웃음이다.
“제가 생각했던 그릇보다 점점 작아지는군요.”
“…….”
“저에겐 죽을 때까지 펑펑 써도 돈은 충분합니다. 욕심이라는 것은 충분하지 못할 때 생기는 것이지요.”
“형님의 그릇은 상국을 담을 수 있다는 말인가?”
“사실대로 말하면,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럼…… 왜?”
“그분은 자신의 그릇을 아는 분이더군요.”
“…….”
“상국을 혼자서 담을 수 없는 사실을 알고, 다른 그릇 또한 필요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남하림의 눈빛.
끝이 보이지 않는 심해의 바다와 같다.
‘……빠져들 것 같군.’
진강충의 표정이 달라졌다.
“하하……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가요? 유쾌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니. 내 고민을 해결할 정도로 명쾌했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군.”
“다행이네요. 저도 형님을 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진강충은 세 명의 단주를 보았다.
“저들에겐 내가 말을 잘 하겠다.”
“그렇게 하세요.”
“시간이 되면 형님과 함께 술이라도 마시자.”
“오, 좋지요.”
* * *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초인관은 정자에 앉은 두 사람을 보면서 속이 답답했다.
청력을 끌어 올려 집중했지만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화가…… 끝났군.’
서로 환하게 웃는 두 사람의 분위기로 봐서는 이야기가 잘된 듯 보였다.
휘익!
초인관은 얼른 진강충 앞으로 나가 그를 맞이했다.
“총단장님!”
“그만 돌아가세나.”
“아……? 네, 알겠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물어보려던 것을 멈췄다.
네 사람이 묵휴궁을 나섰다.
초인관이 추궁을 하듯 물었다.
“어떻게 되셨습니까?”
“…….”
진강충의 안면 근육이 경직되었다.
전에는 미처 몰랐던 것이 갑자기 눈에 띄었다.
“총단장님. 그가 뭐라고……?”
“됐네. 여기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니 돌아가세.”
휙!
진강충은 그를 앞에 두고 돌아섰다.
‘총단장?’
주저 없이 걸어가는 진강충의 뒷모습.
‘대체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기에 변하셨지?’
* * *
호무궁에 돌아온 네 사람이 한자리에 앉았다.
초인관은 시종일관 말없이 굳은 표정이었다.
“세 단주는 잘 듣게. 자네들이 나를 진심으로 믿는다는 것을 아네. 우선 후개는 상국의 국주 자리에는 관심이 없다고 단언했네.”
“…….”
“그리고 자네들 생각처럼 대총관을 도와주기로 했다더군.”
“그렇다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꾹 참고 있었던 게 터졌다.
초인관은 인상을 쓰면서 소리를 높였다.
“무엇이 큰일인가?”
“총단장님, 후개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을……!”
스윽.
진강충은 손을 올려 그의 말을 막았다.
“그만하게. 나도 대총관 형님을 밀어주기로 했네.”
“허어……?”
초인관은 무방비 상태에서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했다.
“총단장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초인관이 호무궁이 떠날 듯 소리쳤다.
“허어. 지금 나에게 추궁을 하는 것인가? 초 단주, 선을 넘지 말게나.”
“아니…… 그게 아니라……!”
“됐다. 그만 물러가라.”
부들.
초인관은 손을 꽉 쥐고는 이를 꽉 물며 밖으로 먼저 나갔다.
“총단장님, 죄송합니다. 초 단주가 성격이 다혈질이라서…… 다른 뜻은 없을 것입니다.”
반경천이 대신 나섰다.
“자네도 초 단주처럼 내가 상국주에 무조건 올라야 한다고 보는가?”
“국주에 오르시면 당연히 기쁘겠지만, 전 단장님을 모실 뿐입니다. 자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고맙네.”
“아닙니다. 제가 초 단주를 만나보겠습니다.”
반경천과 어중성은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갔다.
‘……이제야 총단장을 원한 것이 훤히 보이는군. 욕심이 자랐던 게야.’
* * *
스윽.
진강충이라 적힌 이름 위에 붓을 그었다.
‘어쩌면 가장 힘들 거라 생각한 인물을 제일 빨리 정리해 버렸네.’
대총관 여의한이 보내온 삼인 중 남은 자는 두 명.
일곱째 장시영과 아홉째 교신.
두 명은 특이한 집안의 자식들이었다.
장시영은 사천성부 도지휘사 장한주의 아들이며,
교신은 한림원의 전대 학사인 교우명의 외동아들이었다.
“이보게, 진 아우보다 일곱째와 아홉째가 더 힘들지도 모르네. 워낙 특이한 성격들이라서.”
“저와 비교해서는요?”
“누가 네 녀석을 따라가겠느냐?”
“그렇습니까? 난 또.”
아직 그들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었다.
‘음…… 누구부터 만나볼까?’
꼬르르륵-
남하림은 배를 쳐다보았다.
“이놈의 배꼽시계는 틀리는 날이 없군.”
갈 땐 가더라도 밥은 먹어야 했다.
“아하하, 겸사겸사 대식장에 가볼까나.”
“으으, 망할 놈의 조수라는 놈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다치고 지랄이야!”
그때.
“안 숙수!”
안중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후개님이시다!’
대식장으로 들어온 남하림이 마치 구세주 같았다.
“후개개개님!”
“허어, 보아하니 또 일손이 모자라는 모양이네요.”
“예에! 맞습니다요!”
휙휙.
남하림은 안으로 들어오면서 소매를 접었다.
“어떻게 하면 되오?”
“후개님, 여기로 와주십쇼……!”
“오우.”
스윽.
남하림은 튀김거리를 잡았다.
“기름에 넣었다가 삼분의 일쯤 기름 위로 올라온다 싶으면 재빨리 끄집어내면 됩니다요.”
“어엉, 알겠어요.”
퐁당!
치이이이-
밀가루로 반죽한 새우와 소고기를 끓는 기름에 빠트렸다.
‘흐음…… 맛있는 냄새.’
남하림은 눈을 떼지 않고 튀김이 기름 위로 떠오르기를 주시했다.
두웅.
‘지금!’
휘익. 휘리릭.
팔뚝 정도 길이의 젓가락이 휘황찬란하게 움직였다.
한 번의 움직임에 수십 개의 튀김들이 뜨거운 기름에서 구해졌다.
“와아, 예술이구만요!”
도마 위에서 칼질을 하던 안중이 그 모습을 보며 감탄을 뱉었다.
휘이익. 슈우우욱.
튀김옷을 입은 새우튀김과 소고기튀김이 쟁반 위에 쌓여 갔다.
“끝.”
“후개님, 끝났으면 여기를 이렇게 부드러울 만큼 다듬어주세요.”
“알겠어.”
탁탁탁탁!
남하림은 방망이를 들고 도마 위에 올라간 두꺼운 고깃살을 두드렸다.
“안 숙수. 내가 적성을 찾았나 봐. 재미있어.”
“아하하하, 그렇습니까?”
또 한 번의 전쟁이 끝이 났다.
“역시 이 맛이군.”
식주를 한 잔 거하게 마신 뒤 새우튀김을 베어 먹었다.
바싸아아악!
입에 들어가는 식감 소리가 식욕을 자극했다.
“오늘도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숙수는 항상 바쁜 것 같군요. 사람 좀 많이 쓰지.”
“요즘 이 일을 하는 놈들이 많이 없어서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어째 남일 같지 않네요. 예전에는 개방도 더럽다고 무림인들이 입방을 안 하고 그랬거든요. 그나마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그게 후개님 덕분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내가 잘나서 개방이 팔자가 핀 거죠.”
‘참 일관된 자랑을 하신다니깐. 하긴 후개님 정도면 세상 떠들고 다녀도 되긴 해.’
안중은 식주를 담은 병을 흔들었다.
“딱 한 잔은 나오겠습니다. 어떻게 한 잔 더 마시겠습니까?”
“안 숙수가 마시세요. 대신 재미진 얘기가 있음 나도 알려줘요. 최신으로.”
안중은 마지막 잔에 식주를 따르면서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참. 우장이 녀석이 자하단에 식사를 갖다 주러 갔다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자하단요?”
“자하단의 무사들이 대총관이 어쩌고저쩌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더군요.”
“으음.”
그냥 넘기기에는 뭔가 있는 듯했다.
직전에 진강충과 만났으니, 꽤나 공교로운 움직임이 아닌가.
“다른 사람에게도 말을 했나요?”
“아닙니다. 후개님께 처음 했습니다.”
“잘했어요. 그리고 우장, 그에게도 입단속을 잘 시키도록 하세요.”
“안 그래도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주의를 줬습니다.”
스윽.
남하림은 일어났다.
‘가만히 있는 것보단 조사를 해보는 게 좋겠지.’
* * *
슥슥슥.
자화당에서 소리를 죽이며 몰래 빠져 나오는 다섯 명의 인기척.
그들은 몸을 최대한 감추며 움직였다.
‘움직이는 것인가?’
멀리서 흑의인 다섯 명을 지켜보는 시선.
‘우선 후개님께 연락을 하고…….’
개방도 상유가 품 안에서 꺼낸 무음소(無音簫)를 불었다.
찌잉.
오조융의 허리에 찬 무음소통이 울렸다.
“후개님, 예상대로 자하단이 움직입니다.”
“정말로 참을성이 없군요. 무독과 철각은 오 분타주와 함께 자화단을 처리해 줘.”
“알겠어, 부장.”
두 사람은 개방의 방도들과 함께 묵휴궁을 나섰다.
그러자 접견실에는 남하림과 이휘연 둘만 남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대총관을 죽인다고 해서 총단장이 국주에 오르는 것이 아닌데.”
“욕심을 부리면 판단력이 떨어지는 법이죠.”
스윽.
두 사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연 형은 둘째 형님을 만나주세요. 전 대부님을 뵙고 오겠어요. 미리 말해 놓지 않으면 내일 일어나시자마자 뒷골을 잡으실 겁니다.”
“후후, 알겠다.”
* * *
슥. 스윽.
남하림은 밤길을 천천히 걸었다.
서궁상국.
오대상국 중 한곳이라 하나, 중원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 창해일속(滄海一粟)이다.
‘여기서도 욕심이 가득한데 중원은 오죽할까?’
“흐.”
싱겁게 웃었다.
차라리 거지 팔자가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타악!
남하림은 두 손으로 자신의 볼을 가볍게 쳤다.
“안 돼, 정신 차려. 남하림. 넌 거지가 될 팔자가 아니다. 중원의 모든 산해진미(山海珍味)를 두고 떠날 수는 없지.”
철이 들면서 생긴 목표.
살기 위해 먹는 게 아니라
먹기 위해 살리라.
‘흐…… 근데 불길해. 세상이 다 맘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
짜아악!
“헉.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난 할 수 있다. 남하림, 거의 사 년만 더 고생하면 세상이 널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남하림이 다시 눈에 힘을 주며 다짐했다.
하지만 이내 눈에 힘이 사륵 풀렸다.
‘하아아…… 개방의 그분들이 놓아줄지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