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사천신교
“흐으음…….”
“으으으음.”
국주 채태황과 태상호법 천궁자는 입도 열지 못하고 신음처럼 소리를 냈다.
남하림은 국주궁으로 오는 길에 살수와 싸운 이야기를 먼저 풀었다.
천궁자는 괴수에 푸른빛이 나는 무공에 대해서 생각하는 중이었고,
국주 채태황은 상국 내에 살수가 들어왔다는 사실에 고민했다.
‘고수들은 이 정도로 방어를 준비해 놔도 힘들군.’
서궁상국은 가장 바깥 성문에서부터 수많은 무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을 뚫고 들어왔다는 것은 경계가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다.
‘돈이 더 들더라도 좀 더 강한 무인들을 고용해야겠어.’
“저어…… 또 말을 해도 되겠습니까?”
남하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들 너무 심각한 표정들이라 분위기를 깰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느냐?”
“제가 왜 화미 누님을 류향궁에서 데리고 나왔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아…… 그래. 그걸 물어봐야지. 살수 때문에 정신이 없구나.”
“허허, 이젠 국주도 나이가 든 모양이네. 예전에는 그런 적이 전혀 없었거늘.”
“태상호법님,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남하림은 자신을 향한 두 사람과 시선을 마주했다.
“대부님은 그동안 화미 누님의 상태가 어땠는지 아십니까?”
“나도 그 아이에게 걱정이 많았다.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소용이 없더구나.”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누님은 누군가에 중독되었기 때문입니다.”
“……!”
채태황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천궁자가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화미가 중독이 되었다고 했느냐?”
“네. 무독이 말하기를, 유령혈혼사독이라 했습니다.”
“뭣이!”
천궁자가 목청이 울리듯 소리쳤다.
“정말이더냐? 화미를 중독시킨 독이 유령혈혼사독이 맞단 말이지?”
“확실합니다. 서너 번 확인했다고 합니다.”
타앗!
천궁자는 탁자를 쳤다.
“신교. 사천신교의 무공이었어. 청강괴수공(靑罡怪手功).”
천궁자와 채태황은 믿기지 않는 소식에 아연해졌다.
‘그 아이가 중독이 되었는데도 아버지인 내가 눈치채지 못하다니…… 얼마나 아팠을꼬.’
벌떡!
채태황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미, 화미를 만나러 가야겠다.”
마음이 급한 채태황의 걸음걸이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 * *
채태황은 묵휴궁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그녀가 누워 있는 방으로 찾아갔다.
창백하고 너무나 가녀린 채화미의 손.
“화미야…… 아버지가 너무 미안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여기 하림하고 무독 아우가 치료를 하고 있으니까요. 며칠 지나면 나을 수 있다고 했어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래, 그래. 알겠다. 몸조리 잘해라.”
툭툭.
채태황은 자리에서 일어나 당무독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맙네. 자네가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네.”
“아닙니다. 부장이 화미 누님의 상태를 바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천만다행이구나. 하림이를 부르지 않았다면 이유도 모르고 화미가 죽었을 테지.”
남하림을 중간에 잡아온 덕에 당무독까지 서궁상국으로 오게 된 것이 천운이었다.
“대부님, 무독이 치료하는 동안 접견실로 가시죠.”
접견실.
천궁자가 누군가를 찾는 듯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아까부터 한 명이 보이지 않는구나.”
“잠시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그런가? 멀리 나간 모양이지?”
“업무상 비밀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흐으음, 그러니 더 궁금하구만.”
“나중에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남하림은 화제를 바꾸었다.
“대부님, 화미 누님의 일에 대해서는 저에게 맡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어달라는 뜻이다.
하지만 채태황은 당장에 기현을 잡아다가 족치고 싶었다.
“이유가 있느냐?”
“그가 아직 화미 누님을 중독시킨 범인이라고 확신할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그가 범인이라 해도 혼자서 이런 짓을 계획하진 못했을 것입니다.”
“으으음…… 알겠다. 이번 일은 너에게 맡기도록 하겠다.”
남하림의 일행이 채화미가 중독된 것을 알아냈다.
범인이 혹시 상국 안에 있는 것이라면, 협의로 위명이 자자한 걸협오성이 끼어드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다.
채태황은 이번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남하림에게 믿음이 생겼다.
“고맙습니다. 화미 누님을 아프게 만든 놈들을 꼭 찾아내겠습니다.”
* * *
드륵.
접객실의 문이 열렸다.
난충분타로 떠났던 팽유도가 생각보다 빨리 돌아온 것.
“하림 형, 나 왔어.”
“수고했다.”
척.
팽유도와 함께 들어온 중년 거지가 절도 있게 인사했다.
“오조융, 후개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하하, 다시 보니 반갑네요.”
“저도 후개님을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희들을 불러주셔서 고맙습니다.”
“방도들은?”
“상국 주위에서 놀고 있으라고 말해놨습니다.”
“잘했어요. 혹시나 필요한 게 있으면 찾아오시고.”
“넵. 알겠습니다. 그럼 전 물러가겠습니다.”
팽유도는 한자리에 모인 걸협오성을 보며 물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 재미난 일은 없었겠죠?”
“간단하게 두 개 정도?”
“간단한 거라면 다행이네요.”
스윽.
팽유도는 탁자 위로 남하림이 부탁했던 자료들을 올려놓았다.
“사천총타에서 이미 서궁상국에 대해 정리한 게 있더라고요.”
“개방은 이런 일을 은근히 잘한다니깐. 날마다 밖에서 자고 노는 것 같은데.”
정보력 하나만큼은 무림에서 부러울 게 없었다.
“한번 볼까. 그 양아치가 어떤 놈인지.”
남하림은 가장 먼저 기현에 대한 신상을 찾았다.
“여기 있군.”
#NAME?
표국주 기종의 출신이 서장이기에, 운송이 편리하다는 이유로 서장 무역을 하는 서궁상국과 오랜 세월 동안 거래.
표국주 기종의 둘째로 상국주 채태황의 넷째 여식. 채화미와 정략적인 혼인.
처음에는 셋째와 하려고 했지만, 모르는 사람과 혼인하기 싫다는 이유로 셋째 채야희가 거절하자 넷째 채화미가 받아들임.
“그렇군.”
남하림은 기현이 무공을 익힌 이유를 알았다.
표국 출신이니 무공은 기본으로 익혔을 것이다.
‘정략혼인을 했구나.’
넷째인 채화미는 아홉 명 중 가장 순종적이고 얌전했다.
‘쯧, 하필이면 개양아치 같은 놈을 만나다니…….’
“유도야, 오 분타주와 함께 그 새끼가 밖으로 나가는 즉시 무슨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지 알아내도록 해.”
“알겠어요. 다른 건요?”
“다른 건 제쳐두고, 유도는 오직 그 양아치 녀석을 맡아.”
“오, 완전 제대로 찍혔네요.”
“그러게. 다른 사람도 아닌 부장에게 찍히다니…… 그놈 앞날이 쌤통이구만.”
* * *
휘비적.
기현은 신경질적으로 귀를 후볐다.
‘어떡하지? 실패인 것 같아.’
손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후개를 죽여달라고 연락을 보냈건만.
그놈은 아직 묵휴궁에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후개가 데리고 간 채화미도 신경 쓰였다.
‘설마 해독은 하지 못했겠지?’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으으…… 만일 그년이 중독됐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모든 화살이 자신에게 쏟아질 게 틀림없다.
“아, 안 되겠다. 그분을 만나 봐야겠어.”
기현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 *
날도 따뜻하고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주는 날.
“흐으응으응.”
콧노래가 저절로 나온다.
거적때기를 늘어놓고 옆으로 드러누운 거지.
동냥 그릇에는 동전 한 닢이 들어 있을 뿐.
번쩍.
눈을 가린 머리카락 사이로 표적이 나타났다.
‘키키키, 역시 개문으로 나오는군.’
오조융은 만일을 위해 서궁상국 비상문에도 방도 하나를 잠복시켜 놓았다.
‘오랜만에 일 좀 해볼까?’
개방도 호장은 옆으로 누웠던 몸을 세웠다.
‘오늘은 얼마나 있는고…… 에게, 겨우 동전 하나? 에잉, 상국 바로 앞에 사람도 많이 다니는 동네인데. 짜다, 짜. 있는 놈들이 더 짜다는 말이 맞네. 퉤퉤.’
둘둘둘.
호장은 바닥에 펴 놓은 거적때기를 천천히 말았다.
휘리릭!
그리고 누웠던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팽유도와 오조융이 수하의 연락을 받았다.
‘개구멍으로 다니는 놈치곤 좋은 놈이 없지.’
표적을 따라 거리를 유지하면서 미행.
웅성웅성.
기현은 사람들이 많은 시장으로 들어갔다.
툭툭.
그는 앞으로 걸으면서 일부러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쳤다.
일반인들은 무공을 익힌 기현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넘어지거나 뒤로 물러났다.
처억!
옆에서 자신의 소매를 잡았다.
“누구……! 아 씨벌, 거지잖아. 이거 안 놔?”
기현은 신경질적으로 소매를 잡은 팔을 떨쳤다.
“에이…… 더럽게…….”
“나으리…… 한 푼만…… 적선 좀 하십시오.”
“좋게 말할 때 꺼지지? 거지 새끼야.”
“아이고, 아이고…… 죄…… 송합니다요.”
기현은 거지가 잡았던 소매 부위를 먼지를 털어내듯 툭툭 치며 발을 재촉했다.
튕겨 나간 거지는 고개를 숙인 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천향수를 뿌려놓았으니. 네놈이 천 리를 가봐라, 우리가 찾아낼 수 없나!’
* * *
마을 사이의 건물을 지나던 기현은 오만상 짜증이 났다.
“오늘따라 거지들이 많군. 세상에서 가장 필요 없는 종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 거지 소굴. 개방이지!”
스윽.
기현은 도착한 집 앞에 서서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인기척이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아무도 없군.”
끼이이익-
닫혀 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개방도 한 명이 기현이 사라진 집 앞을 멈춰 섰다.
스윽.
고개를 돌린 개방도는 허리끈을 풀고는 벽에 바짝 붙어 섰다.
쉬이이이익.
주루루룩.
바닥 아래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스윽.
툭.
그는 허리끈을 다시 묶으면서 돌멩이 하나를 떨어뜨렸다.
집 앞을 떠나간 개방도.
끼이익-
기현은 문을 열고 다시 고개를 내밀었을 땐.
바닥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저…… 드러운 거지 새끼가…… 많이도 쌌군.”
있는 대로 인상을 쓰던 그는 안으로 들어간 뒤, 문 안에서 잠시 기다렸다.
타아앙!
그러고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세게 닫았다.
다시금 반각이 지났다.
팽유도와 오조융의 신형이 나타났다.
“도천걸님. 여기입니다.”
“그렇군요.”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그가 누구를 만나는지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십니까?”
끄덕.
직접 확인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
“그럼…… 저도……!”
“아닙니다. 분타주님은 혹시나 표적이 도망갈 경우 잡아주시면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휘리릭!
팽유도는 비취류신법 공허취장(空墟取障)의 구결을 펼치며 집안으로 가볍게 사라졌다.
샤르르르-
킁킁킁.
오조융은 코를 실룩거리며 팽유도가 사라진 곳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 냄새를 맡았다.
“취향이 주향을 가리도다.”
약관의 나이인 걸협오성의 무공.
‘허어, 내가 잘못 생각했군. 더 이상이다.’
담을 넘어간 팽유도의 무공이 이 정도라면.
‘……나머지 분들도 최소한 이 정도란 말이잖아.’
오조융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걸협오성을 만난 개방의 동문들이 감탄하는 이유.
‘히히, 진짜 이러다 천하제일대개방이 되는 거 아녀?’
무림인이라면 한 번은 꾸는 꿈.
자신의 문파가 천하제일문파가 되거나, 자신이 천하제일인이 되거나.
오조융은 킬킬 웃으며 자리를 잡고는, 도천걸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 * *
스으윽-
팽유도는 내력을 죽이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벽을 통해 들려오는 미세한 음성.
‘헷, 개방은 신법 하나만큼은 남부럽지 않지.’
비취류신법의 무영무음보(無影無音步)를 밟으며 한 걸음씩 들어서자,
점점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기 시작했다.
“기현, 내가 적당히 하라고 했을 텐데.”
“사, 사부님, 죄송합니다.”
“별일 아닌 것처럼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을. 후개를 왜 만나러 가서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들었는가!”
“그놈이 양자로 들어서면 모든 게 틀어지게 될까 걱정이 되어…… 죄송합니다.”
“멍청한 놈. 본 신교가 서궁상국을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
“사부님, 아닙니다.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시끄럽다! 상군 채태황을 만만하게 보는 모양이구나. 어쩌면 이미 너에 대해 모든 것을 조사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후개를 죽이려고 갔던 네 사형이 당했다.”
“사, 사형이 후개에게 당했다는 것입니까?”
“그렇다.”
그의 사형은 강기도 만들 수 있는 인물이다.
후개 정도는 당연히 상대할 줄 알았다.
“조만간 저들도 네가 악산표국주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기현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
지금까지 서궁상국에 있는 동안 못할 것이 없었다.
상군의 넷째 사위란 이유만으로 중원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이것들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고? 아니, 절대로 못해. 최소한 돈이라도……!’
“여기서 떠날 준비를 해야겠다. 잘못되면 본 문에 피해를 줄지도 모른다.”
“아, 아, 알겠습니다. 잠시 한 시진만 시간을 주십시오. 제가 필요한 물건들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쯧, 미련한 놈. 마음대로 하거라.”
기현은 굳은 표정으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욕심이 하늘에 닿는군. 그토록 주의를 시켰건만…….”
사천신교의 십년지계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서궁상국을 먹은 뒤, 그들의 상권을 이용하여 사천 전역으로 신교를 전파하려는 계획에 제동이 걸렸다.
“교주께서 노하시겠군. 어쩔 수 없다면 기현, 이놈을 제물로 삼을 수밖에.”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도 마지막이군. 그만 가야…….”
“어딜 간다는 말인가요?”
뚜벅뚜벅.
갑자기 들려오는 발소리.
“누구냐?”
이곳에 찾아오는 인물은 기현 외엔 아무도 없어야만 한다.
드르륵.
문이 열리면서, 젊은 청년의 얼굴이 나타났다.
씨익.
“사천에서 신교라는 말을 하는 걸 보니 사천신교의 인물 같은데. 내가 맞혔습니까?”
‘이…… 놈은…… 도천걸?’
반도를 든 거지.
그런 인상착의는 중원에 오직 한 명밖에 없다.
걸협오성 도천걸 팽유도.
“시간도 없겠다, 빠르게 한바탕 놀아볼까요? 괜찮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