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서궁상국
서궁상국(西宮商局).
중원오대상국은 영산현의 초입에서부터 그 위세가 달랐다.
전방에 발 디딜 틈 없이 쫙 깔려 있는 노란색 물결.
그 뒤로 북소리와 나팔 소리가 울렸다.
둥! 둥! 둥!
뿌우우웅-!
한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수백 명의 사람들이 동원된 환영 인사.
펄럭!
붉은색 천에 크고 유려하게 적힌 글씨가 노란색 물결 위로 나타났다.
#NAME?
#NAME?
“세상에, 저게 전부 뭐야? 돈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노는 거예요? 와아아, 저 글은 뭐다냐?”
“엄청난 환영인사네. 멋있다.”
“누구 작품인지 몰라도 보통 사람이 아닌 건 확실하다야.”
팽유도는 엄청난 문화 충격을 받았다.
반면 성철각은 환영 인사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남하림이 걸음을 멈췄다.
“하아아아- 내가 이래서 오기 싫었다니깐.”
한숨에 땅이 꺼질 듯했다.
‘어렸을 땐 몰랐는데. 좀 유난이긴 하지.’
남천상국에 있을 당시, 서궁상국에 서너 번 다녀간 적이 있었다.
똑같이 화려하기 짝이 없는 환영식을 받았었지만, 그땐 정작 별생각이 없었다.
여기는 떠들썩한 걸 좋아하나 보다 여겼을 뿐.
저벅저벅.
환영 인파 사이에서 중년인이 앞으로 나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상총관 정초.
그는 먼저 천궁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태상호법님.”
“정 상총관, 그대가 나왔구려.”
“남 공자님을 모시고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지금부터서는 상정당(商政黨)에서 공자님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정초는 천궁자과 나란히 선 남하림 앞으로 한 걸음 옮겼다.
“남하림 공자님을 뵙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만나뵌 적이 있습니다.”
“기억납니다. 귀엽다면서 용돈을 주시던 분이시지 않습니까?”
“후후, 기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상국에 들어가실 때까지 제가 모시도록 하지요.”
휘익.
정초의 손짓 한 번에,
우르르르-
노란색 물결이 좌우로 쫙 갈라졌다.
그사이로 나타난 황금색 가마.
여의주를 문 용두 손잡이에 사방으로 오색 천으로 치장한 사인교(四人轎)가 그 엄청난 위용을 드러냈다.
“잠깐만, 이걸 타고 가는 건 아니겠지요?”
“국주님께서 특별히 내어주신 가마입니다.”
“됐어요. 성의는 고맙지만, 이제 가마를 타고 갈 나이는 아니니 걸어가겠습니다. 아니면 천궁자 할아버님께서 타고 가시면 되겠군.”
“껄껄껄, 노부도 됐네. 그렇지 않아도 요즘 하루 만 보(萬步)로 수련 중이라. 걷는 것이 건강에 좋으니라.”
남하림에게 다가오던 가마꾼들이 정초의 눈치를 봤다.
휘익!
“물러가게.”
그는 손짓으로 가마꾼들을 물렸다.
“남 공자님, 예전과 달리 조금 바뀐 듯합니다.”
“하하,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십니까? 그때는 열 살밖에 되지 않았어요.”
“성인으로 자라신 남 공자님을 뵙고 보니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는군요.”
“저도 그러네요. 아차, 우선 제 동료들과 인사부터 나누세요.”
스윽.
두 손을 올리며 포권을 하는 정초의 동작은 군더더기조차 없이 깔끔했다.
“무림의 영웅이신 걸협오성을 뵙습니다. 서궁상국에 잘 오셨습니다.”
“반갑소이다. 환영을 해주시니 감사하외다.”
이휘연은 대표로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뿌우우우우우우-
두우우웅! 두우우웅! 두우우웅!
선두에서부터 노란색이 물결 쳤다.
동시에 나팔 소리와 북소리가 다시금 서궁상국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부님은 왜 이렇게 눈에 띄는 걸 좋아하시지?’
* * *
서궁상국은 마치 하나의 마을과 같았다.
“하림 형, 혹시 남천상국도…… 이렇게 생겼어?”
오대상국이 크다고 듣긴 했지만.
그 규모가 상상했던 것보다 몇 배 이상이었다.
“아마도. 거의 비슷할 거야.”
“와아아- 진짜 장난 아니네. 본 문 보다 열 배 이상은 큰 것 같아.”
“하하, 당연하지. 여긴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야 모인 곳이야. 대량의 물건들이 왔다 갔다 하는 상국과 하북팽가는 목적부터가 다르잖아.”
서궁삼성.
두 개의 거대한 성문을 통과하고,
마지막 서궁상국 내성에 들어서기 직전.
“남 공자님, 국주님께서 나와 계실 것입니다.”
상총관 정초의 말대로, 내성에 들어서자 서궁상국 최고의 인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금빛 의복이 눈부시다.
상군(商君)이라 불린 채태황의 신위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대부.’
쿵쿵쿵.
상군 채태황이 한 걸음씩 다가왔다.
거인의 발걸음.
무공은 익히지 않았지만, 그에게서 흐르는 기운은 절대자의 기에 비교해도 못지않았다.
“국주께서 나와 계셨구려.”
“태상호법님, 괜한 일로 귀찮게 했습니다.”
“아닐세. 국주가 예상한 대로 다른 곳으로 튈 뻔한 걸 잘 잡아왔다네.”
“하하하! 그럴 거라 여겼습니다.”
스윽.
채태황이 미소를 지으며 남하림 앞에 섰다.
“오호…….”
어느새 자신과 눈높이가 같아져 있다.
기다리는 동안만 해도, 그의 기억 속엔 열 살짜리 작은 꼬마가 서 있었다.
“대부님을 뵙습니다.”
“반갑다. 네놈의 소문은 늘 듣고 있었지. 훌륭하더구나.”
“소문이 다 거기서 거기죠. 그냥 흘러 버리면 됩니다.”
“하하하하!”
쓱쓱쓱.
채태황은 남하림의 몸을 토닥거렸다.
툭툭.
“후후, 다 컸어. 몸도 좋은데?”
“뭐…….”
“사천에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언제 올까 오매불망 기다렸다.”
“급한 일들이 많아서요. 아 참.”
남하림은 얼른 주제를 돌려 함께 온 네 사람을 가리켰다.
“소문을 들어 아시겠지만 저와 함께 하는 가족이자 동료들입니다.”
“당연히 알지. 이제 중원에서 걸협오성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느냐.”
채태황이 네 사람을 보며 가볍게 맞이했다.
“반갑네. 다들 하림이와 동고동락하는 사이라 들었네. 이 녀석은 나를 대부로 부르지만, 조만간 내 대를 이어줄 녀석이지.”
“……!”
채태황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네 명의 시선이 남하림에게 집중됐다.
* * *
상군 채태황과 인사를 한 뒤.
걸협오성은 곧장 묵휴궁으로 자리를 옮겼다.
남하림은 잠시 여유를 가지고 싶다면서, 이 대부와 함께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자는 채태황의 권유를 물리쳤다.
털썩!
남하림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에고, 죽겠네.”
스윽.
네 방향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끈질겼다.
네 사람의 얼굴에는 정문에서 들은 이야기가 대체 뭔지 너무 궁금하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다, 다들 왜 이래?”
“부장, 상군께서 하신 말씀이 뭐냐? 채하림이 된다고 했잖아.”
“아, 진짜. 이게 사기라니깐. 내가 어릴 때 아버지와 대부님이 술 마시면서…… 어휴, 대부님이 아버지한테 아들 한 놈만 달라고 하셨나 봐.”
“엥, 아들을 달라고요?”
“……으으.”
차르르르르-
팽유도는 얼른 무림대사전을 꺼내 펼쳤다.
“루루루룰…….”
기분이 좋을 때 저절로 나오는 흥얼거림.
“유도야, 기분이 좋으냐?”
“당연하죠. 상군님의 아들이 되면 형이 서궁상국도 얻을 수 있잖아요.”
스삭.
“찾았다!”
팽유도는 중요한 부분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상군 채태황. 서궁상국의 국주. 사처(四妻). 와, 대단한 분이신데. 으으음…… 자식은 아홉 명. 와우…… 완전 정력왕이시네요.”
팽유도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뱉었다.
무림대사전을 한 줄씩 짚어가던 손이 문득 멈추었다.
“허어어어얼, 초대박.”
“뭔데, 뭔데?”
당무독은 궁금증이 폭발할 듯했다.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완전 반전이네요. 아홉 명의 자식들 중 아홉 명 모두가 따님이에요.”
“어디, 어디…… 한번 보자. 와아…… 진짜네. 어떻게 아홉 명이 전부 딸만 나올 수 있냐. 이게 확률적으로 가능하구나.”
남하림은 입이 삐쭉 튀어나온 채로 창밖을 보았다.
타악!
팽유도는 무림대사전을 덮으면서 중얼거렸다.
“딸 아홉 집안이라 대를 물려받을 아들을 원하셨구나.”
“그 아들로 부장을 점찍었단 말이네. 그럼 좋은 일 아닌가?”
당무독은 고개를 갸웃했다.
채태황의 아들이 되면 뭐든 얻을 수 있지 않나?
이미 많으니까 괜찮은 건가?
“무독, 만일…… 너한테 누나만 아홉 명 있다고 생각해 봐.”
“으아아아아악!!”
당무독은 비명을 질렀다.
남하림의 처지가 갑자기 불쌍해졌다.
당무독의 비명에 팽유도가 갸웃했다.
“누나가 많으면 안 좋아? 알아서 챙겨주는 사람도 많아지잖아……?”
“유도야. 그 환상은 둘째 치고, 단적으로 네가 나중에 결혼한다고 생각해 봐라. 아내 될 사람이 퍽이나 좋아하겠다. 아홉 명이나 되는 시누이가 눈을 시퍼렇게 뜨면서 노려볼 텐데…… 안 그러냐?”
“아…… 하…….”
“너 평생 혼인 못 할 수 있어.”
“하하하!”
이휘연도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평소에 이런 웃음을 짓지 않았다.
성철각도 이해가 된다는 듯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에게도 누나가 두 명이나 있었으니까.
“부장, 완전 최악이잖아. 둘인 나도 어릴 때 힘들었어. 근데 아홉 명이라니…… 어떻게 해?”
“철각이 생각해도 사기 맞지? 난 원래 누나가 둘이야. 까딱 잘못하면 열하나가 된다고. 내내 별말 없어서 그냥 지나가면서 한 소리라 생각했는데. 크윽, 내가 안일했어.”
“으음…… 아버지들끼리 약속을 한 거라…… 잘 모르겠네. 물론 당사자의 뜻도 중요하긴 하고…… 아…… 모, 모르겠다. 난 이 일에서 빠질래.”
남하림이 탁자에 벌러덩 엎어졌다.
네 사람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남하림을 바라보았다.
* * *
똑똑똑!
문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누구시오?”
“남하림 님을 만나고자 친히 왔습니다.”
또르르 굴러가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드르륵-
한 명도 아닌 네 명의 여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각각 연홍, 청, 황, 백색의 의복에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들.
연홍여인 셋째 채야희.
청의여인 다섯째 채문희.
황의여인 여섯째 채유희,
마지막으로 백의여인 여덟째 채미미.
그녀들이 의자에 푹 기대고 있던 남하림을 발견했다.
“호호호, 우리 귀염돌이가 온 모양이네!”
“…….”
귀염돌이가 된 남하림은 머리가 찌근거리기 시작했다.
‘남천에서 못난이 둘을 안 봐서 좋았는데…… 왜 불어나는 거지.’
여인들이 남하림의 곁에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하아아아리이이이임아아아아!!”
“으으…… 제발 나가주면 안 될까.”
“어머, 오랜만에 보는 누나들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네. 우리 귀염돌이가.”
“꺼져주세요.”
* * *
벌컥벌컥!
시끌벅적.
묵휴궁의 접객실은 순식간에 술판으로 변했다.
“아하하하!”
“미미 소저, 한잔 받으시오.”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채미미는 순식간에 동년배인 이휘연과 편하게 지내기로 했다.
“소문으론 다들 무서운 무인들인 줄 알았는데 말짱 전부 헛소문이었네! 자자, 팽 아우님도 한 잔 마셔. 요게 우리 집 천주창(天酒倉)에서 제일 귀한 옥봉주(玉峯酒)라고 하는 건데, 아버지 몰래 가지고 왔어.”
“으아아, 누님들, 이렇게 귀한 술을…… 고맙습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이야, 고맙긴 뭘. 이 귀염돌이 옆에서 항상 도움을 주고 있잖아. 앞으로도 이 친구 잘 좀 부탁해.”
“걱정 마세요! 하림 형은 우리들이 목숨보다 더 귀하게 모실 겁니다.”
“좋아, 좋아. 우리 오늘 밤을 지워 버리도록 마시자고!”
채미미는 빈 술잔을 머리 위에 털었다.
‘어휴…… 저 못난이들.’
남하림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휘익!
그때, 채야희는 남하림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그녀의 볼은 이미 연홍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봐아아, 귀요미. 한 잔 마셔. 충분히 나이가 됐으니 마셔도 되잖앙…….”
“아아, 알겠어요. 손 좀 치우고.”
“으헤헤, 요만했는데 벌써 요만큼 자라서 우리랑 술도 다 마시네에에.”
스윽.
채야희가 두 손으로 남하림의 볼을 잡아 사정없이 쭈욱 당겼다.
“크크큭, 그때와 또오오옥같애!”
“슷쯔 몬는으, 그믄 손 뜨즈.”
“이게에에! 누나한테 자꾸 그러면 뽀뽀한다?”
“…….”
“아하하하하!”
다른 세 명의 여인들이 채야희와 남하림을 보며 대소를 터뜨렸다.
“그나저나 언제 우리 집에 올 거니? 난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문희 언니 말대로 쪼오옴 빨리 와라! 형부 몇 명이 싫어하겠지만…….”
“휴, 맞아. 빨리 와. 즐기면서 살면 되는데, 왜 힘들게 가지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여기 우리 귀염돌이가 오면 끝나는데……!”
채야희는 간절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아이고.’
드디어 속내를 드러냈군.
“난 개방의 제자야.”
“아니던데? 이제 사 년밖에 안 남았잖아.”
‘칫, 어떻게 알았지?’
남하림은 시치미를 떼며 고개를 흔들었다.
“사 년은 무슨. 아직 많이 남았어. 개방에서 할 일도 얼마나 많은데. 사 년 동안 전부 못 해.”
“그러니? 개방에 찾아가서 물어봐야겠다.”
“뭐? 못난이 누나들이 거기 왜 가?”
“어머, 여기 못난이가 어디 있니? 너 거짓말하면 엉덩이에 뿔 나.”
“…….”
남하림은 할 말을 잃었다.
[허어…… 천하의 부장도…… 저분들한테는 안 되는구나.]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보는 걸협오성 네 사람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 * *
국주궁.
서궁상국의 화려한 분위기와는 달리, 안으로 들어서자 차분하면서도 아담한 정원이 나타났다.
“어서 오너라.”
채태황은 안으로 들어서는 남하림을 맞아주었다.
“부르셨습니까?”
“아무 곳이나 대충 앉도록 해라.”
통나무를 잘라놓은 듯한 의자들이 주위에 널려 있었다.
‘돈도 많으면서…… 어디서 주워 오셨나?’
남하림은 주위에 놓여 있는 나무 의자에 앉았다.
“속으로 요걸 주워 왔다고 생각했겠지만, 청해 봉황산에서 자란 천년고목으로 만든 의자들이지. 백만 냥을 줘도 구할 수 없는 귀한 의자다.”
‘흥, 누가 믿을 줄 알고. 장사꾼들 말은 일단 거르고 봐야 해. 요걸 백만 냥을 주고 샀을 리가…… 일부러 베어 가지고 온 건 아니겠지?’
슥슥.
“흠, 만져 보니 조금 좋아 보이긴 하네요. 요 귀한 걸 어떻게 구했습니까?”
“번개에 맞아 부러진 고목이다.”
“…….”
세상에.
대체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번개에 맞는 건지 모르겠네.
“설마 내가 일부러 고목을 벤 뒤 번개에 맞아서 부러졌다는 변명을 한다고 생각한 것이냐?”
“그럴 분은 아니시죠.”
씨익.
아니라고 하면서 의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크흠, 어제저녁에 거하게 한 잔 마셨다고 들었다.”
“네. 네 분 누님들이 오셔서 한턱 쏘셨습니다. 귀한 술도 대접받았지요.”
“그렇지 않아도 억쑤우우우우우로 귀한 옥봉주를 털어 마셨다는 소리를 들었다. 맛은 있더냐?”
“여러 가지 술을 섞어서 마셨더니 그게 그 맛이라 못 느꼈습니다.”
“…….”
“술은 마시고 기분만 좋으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휴우…… 그놈을 구하느라 일 년을 생고생했거늘…….”
매우 안타깝고 아쉬운 표정.
채태황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사라진 술이 생각한다고 다시 생기는 것도 아니고…… 인연이 여기까지니 이젠 잊어야겠지. 내 옥봉주.”
‘은근히 미련을 남기는 성격이시네.’
“흠흠, 술은 술이고…… 내가 바쁜 너를 부른 이유는 알고 있겠지?”
“구천신품의 행방을 아신다고 들었습니다.”
“맞다. 네가 그 쓰잘머리 없는 물건들을 찾고 다닌다고 들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서 청해상국에 사람을 보냈지.”
“청해상국에서 구천신품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처음부터는 아니고. 십 년 전에, 청해 국주인 처남 생일에 마땅히 보낼 선물이 없어 귀한 등잔을 보냈지.”
“그게…… 구천신품이었습니까?”
“뭐, 구천신품이라 하더만은 자세히 살펴보니 특별한 건 없었다. 그냥 평범한 장식품이라 할까.
나도 처음에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별게 없었어. 등잔이면 불이 붙어야 저녁에 사용하기라도 하지.
불도 제대로 안 붙고 해서 창고에 던져 놓았는데, 처박혀 있는 것보단 생색내는 게 좋지 않느냐?”
“대부님은 그걸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구천마성이 무너질 당시 유 맹주한테 투자를 많이 했잖느냐. 그날 함께할 수 있었지.”
“슬쩍 하셨군요.”
“허어, 슬쩍은 무슨. 등잔 하나에 얼마나 한다고. 기념품이란 좋은 단어가 있다. 아무튼 구천마성이 완전히 무너지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게 구천신품인 줄 알았지. 장사꾼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는데, 내 것이 아니면 절대로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는 철칙이다. 거기에다 남들이 욕심을 부리는 물건이라면, 꼭 필요하지 않는 이상 차라리 없는 게 좋지.”
“청해상국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래서 급하게 연락을 보냈는데, 며칠 전에 답이 왔다. 처남도 나하고 같은 생각을 했다더군. 처음엔 구천마제가 쓴 물건이라니 신기해서 살펴보다가, 아무리 봐도 단순한 등잔이라 던져놓았다고 했다.
그러다 이 년 전 북방상국과 마찰이 생기는 바람에 화해의 선물로 줘버렸다고 하더군. 북방과 싸우기엔 청해상국은 힘이 모자란 편이지. 구천신품을 준다고 하니 좋다고 하면서 받아갔다고 하더구나.”
‘북방상국…… 하필이면…….’
남하림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북방상국 백진만의 둘째 백진묵, 그 녀석한테 넘겼다고 했다. 혹시나 돌려달라고 연락은 해보겠다는데…… 내 생각엔 어렵지 않을까 싶구나.”
“하아…… 북방의 대욕(大慾) 백진묵. 당연히 어렵겠죠.”
돈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오대상국 안에서도 소문이 날 정도로, 돈 욕심이 지나칠 정도로 많은 인물.
“혹시나 모르니 한 번 기다려 보자. 좋은 소식이 있지 않겠느냐?”
“세상이 무너져도 그냥은 주지 않을 겁니다. 작은 틈만 보여도 물어뜯는 종류의 사람이거든요.”
“미안하다. 그냥 가지고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괜찮습니다. 제가 무림인이 될 줄 아셨겠습니까? 저도 몰랐는데요.”
“허허허, 그렇지. 아우님도 하필이면 개방의 요구를 받아들여 가지고…… 요 귀여운 녀석을 거지로 만들다니.”
“제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중입니다. 구천신품에 대해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아 참, 이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이 몰랐으면 합니다.”
“나도 그 정도는 잘 아네. 청해 처남과 단 두 명만 알고 있는 내용이네.”
“그럼, 그만 일어…….”
척!
채태황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남하림의 손을 잡았다.
“이건 별개의 문제이고, 우리에겐 중요한 일이 남아 있지 않느냐?”
“…….”
“이제 때가 된 듯싶구나.”
남하림은 자리에 다시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