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황무적-131화 (132/328)

131. 천궁자

정문 폭파 사건.

분타로 다시 들어온 남하림은 오히려 차분했다.

[휘연 형, 부장이 이상하지 않아?]

[왜?]

[범인을 잡으려고 날뛰어야 정상인 것 같아서.]

[음…… 무슨 생각을 하고 있겠지.]

[형이 한 번 물어봐 주면 안 될까요?]

[그래.]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듯.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는 남하림의 모습.

이휘연이 말을 걸어보려고 할 때였다.

“하,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짓을 할 놈은 그 녀석이 틀림없어. 깜찍한 짓을 하네.”

“누군지 알겠어?”

“아마 문령이란 녀석일 확률이 가장 높아요.”

“그럼 당장 잡아야지.”

“그냥 잡는 건 안 돼요. 생각이 있어요.”

“그게…… 뭔데?”

“우리도 그놈 문파에 가서 천 배 만 배 부숴 버려야죠.”

“아.”

“두고 보세요. 꼭 빚을 돌려주고 말겠어요.”

조용히 분노하는 모습.

이휘연은 처음 보는 남하림의 모습이다.

짝!

그때, 남하림이 박수를 쳤다.

“……뭐! 일단 불에 탄 건 접어두고. 우리, 간식이나 뭐죠.”

“간식?”

동도들이 전부 모인 분타 앞이다.

남하림은 휙 몸을 돌렸다.

어둠이 밀려오기 전.

분타를 향해 떨어진 개방도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통실통실한 돼지들이 실려 왔다.

“우와아아아아!!”

환호 소리가 울렸다.

화르르르-

분타 앞마당에서 통돼지 열 마리가 어지럽게 빙글빙글 돌아갔다.

고기가 익어가는 냄새에 침이 뚝뚝 떨어졌다.

쓰으읍-

후르르릅!

개방도들은 입맛을 다시며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통돼지가 완전히 익기만을 기다렸다.

“크아! 역시 후개님의 배포는 천하를 가슴에 담고도 남는 분이시지.”

“정문이 불에 탔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시잖아.”

“그러게. 난 누가 쳐들어오나 해서 간이 덜컹거렸는데…… 거기다 간식을 먹자고 하셔서 간단한 당과 같은 걸 줄 알았다고.”

“당연히 후개님의 고매한 눈높이라면 돼지 열 마리 정도는 간식 수준이시겠지!”

“하하하! 후개님 덕분에 목에 기름칠을 하는구만!”

“크크크, 어쩐지 어제 똥꿈을 꾸더라니. 배 터지게 먹어보자꾸나!”

오조융은 수하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불필요한 긴장감이 사르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후개님, 제가 한잔 따라 올리겠습니다.”

“분타주, 고맙소이다.”

남하림이 술잔을 내밀었다.

“오늘 저놈들이 가벼운 간식을 먹을 수 있게 되어서 정말로 기쁜 듯합니다.”

“아하하, 우리도 겸사겸사 먹는 거지요.”

“아 참,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그자의 용모파기를 그려 중원 방도들에게 돌리도록 했습니다. 비밀리에 그자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천하제일대개방을 건드린 놈입니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지요.”

“그자를 찾게 돼도 위험한 인물이니 함부로 다가가선 안 됩니다. 될 수 있는 한 우리에게 빨리 연락을 부탁하겠습니다.”

“네. 후개님의 명을 중원의 모든 방도들에게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남하림은 받은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잔을 채웠소이까?”

“넵. 후개님.”

“그럼 술잔을 높이 드시오.”

개방도들은 남하림을 따라 술잔을 하늘 높이 올렸다.

“선창은 본인이 하겠소이다. 흐으으음!”

목소리에 내력을 끌어 올렸다.

“어어어어어어어어얼…… 씨구나!”

“저어어어어어어어얼씨구, 조오오오오오타아아아아!!”

난충분타는 개방도의 건배에 출렁거렸다.

타아아앙!

나무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술이 비워지고.

회식이 아닌 가벼운 간식 시간이 시작되었다.

반시진 후.

대부분 얼큰하게 기분이 좋아진 개방도들은 뭐가 아쉬운지 눈치를 보며 쭈뼛댔다.

세청이 술잔을 내려놓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개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요!”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오조융의 술이 확 깨버렸다.

“야, 세청! 갑자기 왜 그래? 술이나 마셔, 인마!”

“아이, 분타주님도……! 가만히 계십시오!”

‘아니, 저 자식이 취해서 눈에 뵈는 게 없나!’

세청을 노려보는 오조융의 시선에서 불길이 솟구치는 듯했다.

하지만 세청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 청이 무엇이지요?”

“개방 하면 흥이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술과 맛있는 음식이 있습니다요. 후개님의 은혜에 감사히 마시고 먹고 있습니다만! 딱! 하나가 빠진 듯합니다!”

“흐음?”

“음주가 있다면 항상 빠지지 않는 게 가무(歌舞) 아니겄습니까?”

“오호라. 세청, 그대의 말이 맞소이다. 개방은 흥이지요. 흥이 없으면 개방이라 할 수 없지. 하하, 그럼 본인을 따라 한바탕 놀아보시겠소이까?”

“예! 후개님! 좋습니다요.”

오조융은 혹시나 실례가 되지 않았는지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못했다.

“후, 후개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아하하! 이렇게 좋은 자리에 가무가 빠지면 안 되지요!”

남하림이 앞으로 나서자 한바탕 가무를 위한 자리가 만들어졌다.

“신나게 놀아봅시다!”

슥슥슥-

남하림은 중앙으로 나온 뒤 허리에서 타구봉을 뽑았다.

파아아앙!

파아아앙!

허공을 향해 내력을 연이어 펼치자 불꽃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이이이이일짜나…… 한 잔…… 들고나 보오오오오오니- 일타에 처어어어어언하가 벌벌 뜨으으으은다-”

남하림이 장단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앗!

삼십육초 타구봉법.

봉타쌍견(棒打雙犬)의 초식.

남하림의 타구봉이 눈앞 허공을 두들겨 패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퍼어어어엉!

퍼어어어엉!

절대고수가 펼치는 타구봉법을 보면서 개방도들의 몸이 들썩거렸다.

벌떡!

성철각이 자리에서 일어나 남하림의 옆으로 취영화류팔선보를 펼치면서 다가섰다.

흐느적-

휘리릭!

술에 취한 듯한 걸음걸음이 이 자리에 가장 잘 맞았다.

남하림과 성철각이 보여주는 가무에 내적으로 우쭐우쭐하던 개방도들은 더 이상 가만히 앉아 구경할 수가 없었다.

하나둘씩 손에 들린 타구봉과 나무 작대기.

휘이익-

딱따아아악!

흥에 겨운 개방도들이 털렁털렁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타구봉을 마주치고 두드려 댔다.

광란의 환장판!

“지이이이이리구 지리리리리리구 저한대 품바하고도나 자아아아알헌다.”

“가아아아안다- 가아아아아안다- 잘 가아아안다-!”

난충분타의 앞마당이 밤을 잊은 듯 불타올랐다.

* * *

쑤우우욱!

“으어어어어-”

남하림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근질근질했다.

“어휴, 어제 하루 안 씻고 잤다고 찝찝하네.”

무림행 중이라도 가능한 한도 내에서 최대한 목욕해야 했다.

위생은 중요하다.

‘어으, 잠자리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데…… 씻지 않으면 개운하질 않아서 못살겠네.’

끼이익-

남하림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풉.”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바닥에 쓰러져 죽은 듯한 난충분타 소속 개방도들.

“하긴 밤새도록 마셨으니.”

스윽.

남하림은 개방도들이 더 잘 수 있도록 조용히 몸을 돌렸다.

다그닥다그닥다그닥!

‘뭐지?’

분타 정문으로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

덜덜덜.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오조융의 귓가에 강한 진동이 전해져 왔다.

“헉…… 적?!”

난충분타주는 누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적이 나타났다! 빨리 일어나라!!”

평소에 많은 훈련을 한 덕분에, 여기저기 자빠져 있던 개방도들도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입니까?!”

“적이라고?”

“미친 새끼들이, 걸협오성님들이 계시는데! 죽고 싶어서 환장했군!”

개방의 방도들은 우르르 굴러와 한마디씩 했다.

“어……? 아니구나.”

오조융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휘휘 돌리다가 남하림과 시선이 마주쳤다.

“헉!”

몸이 저절로 바로 세워졌다.

“후개님, 일어나셨습니까?”

“정문에서 들려온 소리입니다. 누군가 분타에 찾아온 모양이군요.”

“예, 옛!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나갔다 오겠습니다.”

다다다다-

오조융은 수하들과 함께 정문으로 달리면서 소리쳤다.

“빨리 치워라!”

“옙.”

분타주의 명에 개방도들은 단숨에 난장판인 앞마당을 정리했다.

싸아아악-

바닷가로 한 번에 파도가 밀려왔다가 쓸려 나가는 듯한 체계적인 움직임.

한 명은 술잔을 치우고, 다른 한 명은 술병을 치우는 식이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네요.”

“깔끔하네.”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깨끗해진 앞마당.

다가닥. 다가닥.

분타 안으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

다섯 명의 인물들이 말을 탄 채 들어서고 있었다.

그 뒤로 곤란한 표정의 분타주가 다시 나타났다.

타앗!

팽유도는 불청객들의 앞으로 내려서 노기를 발산했다.

“그만 멈춰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말을 타고 있느냐. 어서 내리지 못할까?”

히이이잉!

팽유도의 기세에 다가오던 말들이 그 자리에서 주춤거리며 어쩔 줄 몰랐다.

“워어어……!”

중년 사내가 말을 두드리며 진정시켰다.

‘저자의 복장은…….’

남하림은 사내들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상의 자락에 또렷이 새겨진 노란색 영춘화(迎春化).

‘서궁상국(西宮商局)이군. 같은 난충이라도 영산현에 있을 텐데. 내가 여기에 있는지 어떻게 알았지?’

하림 일행은 난충에 들어온 뒤 봉안현에 위치한 분타로 곧장 왔다.

‘쯧, 서궁의 정보도 제법이군. 하긴 사천에서 장사하려면 이 정도 정보력은 가지고 있어야겠지.’

툭툭.

말을 진정시킨 중년사내.

서궁상국 호무궁(護武宮) 소속 백화단주 반경천이 눈을 아래로 뜨며 팽유도를 보았다.

등에 가려져 있는 반도(半刀).

‘이 청년이 도천걸 팽유도인가.’

팽유도는 나이는 어려도 이제 무림에서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다.

“반갑네. 본인은 서궁상국에서 왔네.”

하지만 반경천이 중원의 소문에 반신반의한 것이 문제였다.

스르르릉-

팽유도는 등 뒤로 손을 옮기며 반도를 천천히 잡아당겼다.

“서궁상국이라고 밝히면 예의가 없어도 되는 모양이오?”

“……?!”

팽유도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적대감이 느껴졌다.

‘어린놈이…….’

반경천은 어이가 없었다.

서궁상국에서 검생검사(劍生劍死)로 살아온 지 이십 년이 넘었다.

“겨우 나이가 약관인 놈이 무림대선배에게 반말을 하는 것인가?”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무림에는 예의라는 게 있소. 주인의 허락 없이 남의 집에 말을 타고 들어갈 수 있던가?”

“…….”

“그것도 천하제일대개방의 분타에서.”

“……이곳이? 천하제일? 훗, 말 같지도 않는 소리를 내뱉는군.”

“당신, 큰 실수를 하네.”

스으으으-

팽유도가 왼손으로 말의 머리를 짚었다.

‘미안해. 네놈의 주인이 맞을 짓을 했다.

퍼억!

흑마의 머리가 날아오는 팽유도의 주먹이 지나가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타아아앗!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흑마가 그대로 쓰러졌다.

‘억, 이런……!’

반경천이 재빨리 바닥에 내려섰다.

채애앵!

“이런 미친!”

타악!

“도천걸, 이게 무슨 짓인가? 난 후개를 만나러 온 서궁상국의 사람이다!”

“후개를 만나고자 한다면 더욱더 예의를 갖추어야 하지 않소? 당신은 너무 건방지군.”

“……!”

“서궁상국에서는 교육을 잘 못 시키는 모양인데, 다시 한번 묻지. 남의 집에 방문할 때 말을 타고 들어가던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서궁상국에 왔다.”

“누가 그걸 못 알아들었소? 그대의 말을 들어보니 개방의 분타 정도는 무시한다는 뜻인데. 그렇다는 건 천하제일대개방의 후개 또한 무시하는 것으로 보면 될까?”

팽유도의 목소리는 덩치에 비해 우렁찼다.

‘이놈…… 왜 이리 기가 세?’

전혀 물러날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내 말에 똑바로 대답해라. 당신은 천하제일대개방을 무시하는 것이오?”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은 눈빛.

‘어떻게 하지?’

그는 개방과 싸우러 온 것은 아니었다.

국주님의 명을 받아 후개 남하림을 만나러 왔다.

중원의 오대상국은 정파의 구파일방이나 십대세가와 비교해도 충분히 견줄 수 있는 힘을 가진 곳이다.

그랬기에 지금까지 개방의 분타 정도는 무시하고 살았다.

하지만 그는 팽유도의 눈빛을 이길 수 없었다.

“개방을…… 무시한 것은 아니오.”

반경천은 한 발 물러났다.

툭툭.

남하림은 팽유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독거렸다.

어느새 남하림이 다가섰다.

“수고했어. 역시 유도가 본 방에 대한 애정이 제일 강해. 서궁상국에서 나에게 볼일이 있는 모양이군.”

팽유도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대가 후개요?”

“그렇습니다만.”

“본인을 따라오시오. 본 상국에 갈 것이외다.”

“하아아아-”

강요하는 듯한 말투.

남하림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채 국주님께서 왜 당신을 보냈는지 이해가 안 가는군.”

“무슨 말이오?”

“최소한 채 국주님이 날 만나고자 하는 이유를 알려줘야 할 게 아니오? 그냥 가자고 하면, ‘예, 그럽지요’ 하고 쪼르르 갈 것 같습니까?”

남하림의 거부.

반경천은 단번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국주님께서…… 데리고 오라는 명이 있었소.”

“그만. 아까부터 같은 말만 하는 앵무새도 아니고. 아침부터 남의 집에 와서 시끄럽게 굴지 말고, 조용히 나가시오.”

“……후, 후개…….”

“나를 서궁상국에 데리고 가려면, 그 이유를 똑바로 알고 찾아오시오.”

휙.

남하림은 신경을 쓰기 싫어 몸을 돌렸다.

그가 분타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껄껄껄!”

이휘연의 손이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걸려 있는 타구봉으로 향했다.

‘스스로 드러낼 때까지 전혀 기를 느끼지 못했다. 무림에 이런 인물이……?’

분타에 모습을 드러낸 인물.

청의 차림의 노인이다.

고희(古稀) 정도로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걸음걸이는 정정했다.

반경천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천궁자님을 뵙습니다.”

“껄껄, 반 단주, 내 밖에서 듣자니 남 공자에게 무례를 했네.”

“……죄송합니다.”

“자네에게 이런 일은 맞지 않는 모양일세. 서궁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좋으나, 상대를 알아볼 줄 아는 것이 우선이네.”

“죄송합니다. 제가 많이 부족한 듯합니다.”

천궁자는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린 남하림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지 않느냐? 어제까지만 해도 똘망하던 녀석이 지금은 중원 무림에서 날고 기는 녀석이 되었군. 껄껄껄!”

“여전히 정정하시네요. 천궁자 할아버지.”

“끌끌, 살만큼 살았거늘 아직 위에서 부르지 않는구나.”

“더 오래 사셔야죠.”

“이리 오너라. 한 번 안아보자.”

천궁자가 두 팔을 벌렸다.

“저는 이제 다 컸습니다.”

“푸하하하! 이놈아, 내 눈에는 아직도 기어 다니는 모습이 선하구나.”

“…….”

“못 본 지 구 년 하고도 삼 개월째이니라.”

“그걸 세고 계셨습니까?”

“하하하하! 마지막으로 본 게 채 국주 생일이지 않느냐.”

“와, 진짜 정정하시네요.”

천궁자는 다가온 남하림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껄껄, 잘 자랐도다. 네 모습을 보아하니 상국보단 개방이 적성에 맞는구나.”

“제가 어디 간들 적응력이 좋아서요.”

“껄껄껄.”

재미있다는 듯 웃던 천궁자가 말을 이었다.

“아 참,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지. 현판이 불에 탔더구먼.”

“저를 따라다니는 미친놈이 한 명 있습니다.”

“심심하지는 않겠구나.”

“그렇다고 봐야죠. 조만간 잡아 족칠 예정입니다.”

천궁자는 남하림 뒤로 멀뚱히 서 있는 네 사람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제 친구이자 동료이자 형제들이에요.”

“허허, 전부 한 인물들 하게 생겼군.”

남하림은 얼른 일행에게 소개를 시켰다.

“이분은 서궁상국의 태상호법이신 천궁자 할아버지라고 해.”

‘천궁자라면…….’

팽유도의 머릿속에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무극창군(無極槍君) 천궁자.

무림맹주에게 도전한 뒤, 승패를 비밀에 묻어두고 무림을 떠났다고 알려진 전대 절대고수.

‘어, 어떻게 된 일이지?’

그런 사람이 서궁상국의 태상호법으로 있을 줄이야!

“껄껄. 표정을 보니 내가 누구인지 아는 모양이구나.”

“저, 정말로 무극창군이십니까?”

“그 이름은 버린 지 이십 년이 되었네. 이제는 늙은 무인일 뿐. 이 자리에서 굳이 그 이야기는 할 필요는 없으니 그만하세나.”

천궁자는 미소를 지었다.

“국주는 네놈이 사천에 나타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느니라.”

“…….”

“검문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찾아올 거라 생각했다고 하더군.”

“죄송하네요. 바쁜 일이 있어서요.”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지. 그때는 모든 일이 중요하고 바쁜 일밖에 없거든. 막상 지금 돌아보면 왜 아등바등 살았는지 모르겠구나.”

“무림맹 군사가 사람을 귀찮게 하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남하림은 할 일 없이 서궁상국에 갈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국주가 말하기를, 바쁜 줄은 알지만 구천신품인가, 뭔가 하는 물건을 찾는다면 만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던데.”

“……!”

천궁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구천신품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서궁상국으로 가야 한다는 뜻이다.

“설마 거짓말은 아니겠죠?”

“국주는 장사꾼이니 아주 조금은 사기를 쳐도 거짓말은 안 한단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같은 말이잖아요.”

“허어, 아직도 사람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해야겠구나. 사기란 것은 진실 사이에서 남의 이익을 빼앗아 먹는 것이니라. 거짓말을 가지고 사기를 완벽하게 칠 수는 없느니.”

“…….”

“그래서 사람들이 사기에 당하는 것이지.”

“뭐…… 그런 식으로 본다면 맞네요.”

천궁자의 말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상국에 가면 중요한 일이 한 가지 더 있단다. 네가 기억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느니라.”

‘……모르긴 뭘 몰라요. 어떻게 할까 고민 중인 문제인데.’

서궁상국으로 가는 것이 망설여지는 이유.

서궁상국의 국주 채태황이 남하림을 상국으로 데리고 오도록 천궁자를 보낸 이유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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