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원공
슈우우우욱-
퍼어어엉!
십 초의 비무.
무공을 주고받은 시간은 고작 일각.
남하림과 검후 정화진은 완벽한 십 초의 비무 동안 상대의 무공을 보았다.
누가 이기고 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동시에 내력을 거둔 그들은 서로 상대방에 감탄했다.
‘무림맹의 전대 검후와 또 다른 느낌이야.’
검후 정화진의 내력과 검은 강맹했고, 전대 검후 예설란의 무공은 경쾌한 느낌을 주었다.
검문삼대비검 중 하나인 봉황무궁검법(鳳凰無窮劍法).
적수를 찾을 수 없다고 알려진 절대무적의 검법을 상대로 남하림이 펼친 것은, 오직 개방 절기 강룡십팔장뿐.
‘약관의 나이에 강룡십팔장을 이 정도 위력으로 펼치다니…… 믿기지 않는군.’
정화진이 강룡십팔장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맞상대를 해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남하림이 펼친 강룡십팔장은 생전처음 보는 듯했다.
‘같은 무공이라 할지라도 펼치는 무인에 따라 다른 무공처럼 보일 수도 있지. 그만큼 후개가 뛰어나다는 것인가.’
남하림의 무공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림아. 하나만 물어보자.”
“의모님, 말씀하시지요.”
“방금 비무에서 전신의 내력을 펼쳤느냐?”
“구단의 내력이었습니다.”
“구단이라…… 나를 봐주면서 싸운 모양이구나.”
“아닙니다. 의모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구단과 십단의 차이는 거의 없습니다.”
“힘의 차이는 없지. 하나 무공의 완성도는 당연히 십단의 내력으로 펼친 무공이 뛰어나지 않느냐.”
“네. 맞습니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내력의 소모도 많지요. 제가 힘이 달려서…….”
“후후, 겨우 그것으로 엄살을 피울 정도는 아닐 텐데.”
“하하, 제가 어찌 어머니를 다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녀석, 말이라도 고맙구나. 확실히 네 나이에 이 정도의 위력을 펼칠 수 있는 무인은 없을지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하하!”
“겸손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이라 그런 말도 못하겠구나.”
스윽-
검후 정화진은 남하림의 손을 잡았다.
“정말로 자신이 있느냐?”
“어머니께서 보시기에 아들인 제가 미덥지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니라. 너무나 좋아서 자꾸 물어보는 게다. 나 또한 맹주를 꺾기 위해 수많은 수련을 했지만 이길 수 없어 단념했다. 그런데…… 네가 그를 이기겠다고 하니 무인으로서 가슴이 뛰어 자꾸 물어보는 것이니라.”
“기다려 주십시오. 오 년, 아니, 이제는 사 년 안에 어머니의 염원을 기필코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덥석.
그녀는 두 손을 벌리며 남하림을 안았다.
“무림에 나가거든 항상 조심해야 하느니라. 혹시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달려가마.”
“정말 고맙습니다.”
* * *
사내, 원공은 상자 안을 열었다.
황금색의 빛이 반짝거렸다.
‘천괴성…….’
하북소가 하연에게 후개를 죽이라는 살인 명령을 받은 뒤.
그를 완벽하게 죽이기 위해 계속해서 뒤를 따라왔다.
‘허어…… 여기까지 올 줄은…….’
중간중간 어디로 갔는지 놓친 적도 많았지만, 워낙 소문이 자자한 이들이라 다시 뒤를 쫓을 수 있었다.
그동안의 고생에 원공의 눈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는 걸협오성의 뒤를 쫓는 것도 문제였지만, 죽일 기회를 잡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이건 노력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연 소저께서 성화가 장난 아닌데…….’
남하림을 죽이기 위한 원공의 시도.
야밤에 기습을 하려고 하면 걸협오성의 기감에 걸려 시도조차 하지 못했고.
하는 수 없이 지나가는 중간중간에 독을 뿌려도 크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번에도 안 된다면 그만둘 수밖에…….’
아무리 생각해도 걸협오성은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인물들이었다.
‘이번이 딱 마지막이다.’
멀리서 마을로 들어서는 다섯 명이 보였다.
“좋아! 이번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천괴성을 죽일 것이다.”
스윽-
그때,
“어떻게 죽일 생각인데?”
“……!”
원공의 뒤로 귀신같이 나타난 인영.
바로 귓가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원공의 온몸이 경직되었다.
“손에 들고 있는 건 뭘까?”
바로 뒤로 접근할 때까지 전혀 기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떻게 하지? 앞으로 몸을 숙인 후 벗어나야 하나?’
식은땀이 흘렀다.
‘세…… 번을 센 후…… 하나…… 둘…… 세에에엣!’
타앗!
한순간 내력을 끌어 올려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공할 줄 알았건만.
“커억……!”
다급히 달려 나가던 몸이 휘청거렸다.
순식간에 뒷덜미를 잡힌 원공의 목이 졸렸다.
“이보게, 어딜 가는가? 내가 분명 말을 걸었는데. 섭섭하게 할 텐가?”
“이, 이거…… 조오오오옴!”
원공은 양손으로 목이 졸린 옷을 잡아당기며 발버둥 쳤다.
스륵-
갑자기 뒷덜미를 잡던 손에 힘이 빠졌다.
휘청!
뒤로 잡아당기던 힘이 사라지자 몸이 확 앞으로 쏠리면서 자빠질 뻔했다.
“아 씨, 어떤 새끼가……!”
원공은 재빨리 허리에 찬 검을 잡으며 돌아섰다.
“히히히.”
젊은 사내가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나요? 문령.”
“문령이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알지? 뭐 하는 놈인지 밝혀라.”
“내가 누군지 알려줘도 당신은 몰라.”
원공은 신분을 제대로 밝히지 않는 그를 보며 살기를 뿜어냈다.
“당신, 오래 살고 싶으면 상대가 누구인지 제대로 봐야 할 거야.”
우우우웅-
‘이, 이놈의 기운이…… 어떻게 계속 세지는 거지?’
점점 더 강해지는 기의 압박감이 원공을 내리눌렀다.
이미 자신이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다.
‘나, 나보다 강하다……!’
바로 도망가야 하나? 아님 한 발 물러나야 하나?
원공이 우왕좌왕하고 있는 그때,
“보아하니 거지 새끼들에게 볼일이 있는 것 같은데…… 네놈은 어디서 왔지?”
“…….”
“나도 저놈들에게 받을 게 많이 있거든. 우린 같은 목적이야.”
‘같은 목적?’
원공은 도망가는 것을 포기했다.
도망갈 수도 없었다.
‘하긴…… 내게 적의가 있었다면 말로 하지 않았겠지.’
문령의 신분이 의심스러웠지만 원공은 살짝 긴장을 풀었다.
“후개를 죽이기 위해 따라다니고 있는 중이오.”
“이유는?”
“…….”
“허어, 세상이 각박하다지만 나 또한 저놈을 죽여야 하는 입장이라고 했잖아? 서로 진실성 있게 털어놓는 게 어떻소?”
“그럼 당신부터 말을 해보시오. 후개를 쫓는 이유가 무엇이오?”
“죽일 짓을 하고 돌아다니니깐.”
“어디 소속이오?”
“난 혈군사님의 명을 받고 움직이는 사람이지.”
‘혈…… 군사라면…….’
원공의 눈이 커졌다.
“설마 천사회에서……!”
“오우, 정답.”
대단한 것 같으면서도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한 분위기.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선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기가 보였다.
‘천사회라면 충분히 후개를 죽이려고 할 만하다.’
원공이 문령을 쳐다보며 신분을 밝혔다.
“난 하북소가에서 왔소.”
“하북소가? 하북에 있는 사람이 멀리도 왔군. 으으음…… 무슨 일일까?”
딱!
문령은 재미있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그렇군. 산동악가와 생긴 문제라면 거지 놈한테 원한이 있겠어. 어찌 되었든 저놈 때문에 가주의 쪽팔린 과거가 알려졌으니까.”
“……크흠.”
원공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저놈이 하북소가의 과거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지?
문령은 그의 표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 정도는 알고자 하면 금방 알 수 있어. 뭐 대단한 일이라고. 키킥.”
비웃는 듯한 웃음에 원공은 불편한 심기를 내보였다.
“본 문을 무시하는 발언은 그만하시오.”
“어쭈, 한 대 치겠는데? 내가 만만하게 보이는 모양이지?”
퍽! 퍽! 퍽!
순식간에 일어난 세 번의 타격.
얼굴과 가슴, 그리고 복부.
“커어어억-”
원공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상대방이 어느 정도인지 알면 고분고분 잘 따라야지. 이 새끼가 어디서 목소리를 높이고 지랄이야?”
“죄, 죄…… 송…… 합니다.”
파악!
문령은 발을 위협적으로 치켜들었다.
“화악……! 밟아서 죽여 버려?”
덥석.
원공은 살기 위해 순간적으로 몸을 바짝 바닥에 눕혔다.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고인을 몰라 뵈었습니다.”
“마음에 없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문령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살려두면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됐어. 일어나.”
벌떡!
원공은 단번에 몸을 일으켰다.
“그건 뭐야?”
바닥에 떨어져 있는 손바닥만 한 상자.
“저, 저건…….”
“시끄럽고, 가지고 와봐.”
스윽.
문령은 안에 들어 있던 물건을 꺼냈다.
피식.
손에 든 돌멩이를 보니 실소가 절로 나왔다.
“이걸로 거지 새끼가 천괴성인 걸 알았군.”
빠지지직!
문령이 손에 힘을 주자, 돌멩이가 가루로 변하기 시작했다.
‘어…… 어……?’
원공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쯧, 멍청한 새끼. 어차피 후개가 천괴성인 줄 알고 있잖아? 귀찮게 이걸 왜 가지고 다니지?”
“제, 제 물건이 아니라 하연 소저께 돌려줘야 해서…….”
“하연? 아아, 하북소가주의 정부(情婦)라 불리는 그 여자?”
“……!”
원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의 상관인 하연에 대해 함부로 말하자 몸이 저절로 반응한 것.
퍽퍽! 퍽!
문령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원공의 얼굴에 그대로 직격했다.
주룩.
원공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호신강기를 일으킬 시간조차 주지 않을 만큼 빨랐다.
“컥.”
그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마지막 경고다. 내 말에 적절하지 못한 반응을 보이면 바로 목을 따 주지.”
“죄…… 송합니다.”
“하연이라 했나? 어차피 그년은 우리 눈엔 그렇게밖에 안 보여. 얼마나 잘났는진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나?”
“네…… 맞습니다.”
대답을 하지 않으면 당장 목이 떨어졌을 것이다.
“가주가 아니고 그년이 보냈다…… 거지 놈을 죽이려는 이유가 뭐지?”
“하, 하북소가를 해칠 수 있는 인물이라…… 사전에 없애고자 했습니다.”
“엥? 큽, 크하하하핫!”
문령은 대소를 터뜨렸다.
한참을 웃은 그는 원공에게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이봐. 하북소가에서 그놈들을 잡을 수 있다고 보는 모양이지? 자네, 그년에게 뭔가 잘못한 게 많은 것 같군.”
“무,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 실력으로 거지 놈들 앞에 나타났다? 바로 이승하고 작별이야.”
“…….”
“크큭, 그래도 이왕 죽겠다면 더 좋은 방법이 있지. 한번 해볼까?”
“그게…… 무엇입니까?”
“히히히, 나만 믿어. 그럼 잘될 거야.”
문령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웃음이 지어졌다.
* * *
힐끔.
스윽.
“이거…… 참.”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마을 길가에 위치한 야외 객잔.
주위의 시선들이 몰래몰래 그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하림 형, 우리 복장이 너무 알려져서 부담스럽네요.”
“그것도 있지만, 부장이 현상금을 걸어서 더 그런 것 같다.”
“흐음,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사기꾼 가짜 걸협오성을 잡아 대령하면 팔자를 고칠 만큼 큰돈을 준다는 방이 널리널리 퍼진 이후.
진짜 걸협오성이 가는 길에도 주의 깊게 살피는 시선들이 매번 따라붙었다.
저벅저벅.
건장한 육체를 가진 사내가 다가왔다.
쿠우웅!
손에 든 철봉이 탁자 위에 살짝 올려졌다.
“따악 보아하니 가짜 놈들 같은데, 사고 친 게 있는지 본인이 확인을 해봐야겠어.”
“없는데요?”
“없어? 있을 것 같은데? 맞기 전에 이야기를 해보라고.”
팽유도가 사내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조금 있으면 사고를 칠지도 모르겠군요.”
“사고를 칠 거라고?”
“아마도.”
얼굴에 힘을 주고 인상을 쓰던 사내의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
‘이놈들이 사고치는 것을 목격한 뒤 잡으면, 황금이 내 손에……!’
스윽-
사내는 의자를 하나 옆에서 가지고 온 뒤 자리를 잡았다.
“언제 사고 칠 거지?”
“빠른 시일 내에.”
“내용을 알 수 없을까?”
“사람을 팰 것 같아요.”
“누굴?”
“아직은 모르죠.”
“어…… 그런가?”
사내의 얼굴에 아쉬움이 살짝 묻어 나왔다.
스윽-
‘전부 반반하게 생겼군. 보아하니 걸협오성 놀이 하는 놈들 같은데?’
남하림이 손으로 턱을 괴고는 사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흠, 소문에 의하면, 며칠 전 진짜 걸협오성이 검문에 있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게요. 여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이네요.”
“……?”
일행의 대화 소리.
사내는 순간 흠칫했다.
‘검문에 걸협오성이 있었다고?’
처음 듣는 소식이다.
당무독이 중얼거렸다.
“어제 그들이 검문을 나왔다면,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사내의 눈동자가 맹렬히 굴러갔다.
‘검문에서 여기 두상촌까지 거리는…… 하루?’
벌떡!
사내는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급한 일이 생각났소.”
“그런가요? 그럼 얼른 가보시오.”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커어, 주, 죽을 뻔했다. 저들은 진짜 걸협오성이었어.’
멀리 사라지는 사내를 보며 팽유도가 한마디 했다.
“휴우, 하림 형. 이러다가 어디 들를 때마다 이런 일이 생기겠어.”
“재미있잖아. 심심하지도 않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긴장감도 있고.”
“그건 부장 말이 맞다. 조용한 것보다 훨씬 좋은 것 같아.”
당무독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때.
“아아아악!”
“꺄아아아!”
갑자기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가까이서 울려 퍼졌다.
길 한복판에서 겉옷을 벗어 던진 사내.
원공이 온몸에 폭탄을 두르고 나타났다.
휘익!
그는 혼비백산하여 도망가는 모녀를 덥석 잡아챘다.
“사, 살려…… 주…….”
“으아아아앙! 엄마!!”
마을 주민들은 슬금슬금 그 자리에서 눈치를 보며 물러났다.
원공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다섯 명을 향해 다가섰다.
팽유도가 앞을 막아섰다.
“멈춰.”
번쩍.
콰아아앙!
묵흑반도가 허공을 찢으며, 한 줄기 굉음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