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황무적-127화 (128/328)

127. 의모로 모시다

‘잘됐어.’

어차피 검후가 되는 사람은 한 명이다.

유미령 또한 봉황오영에 속해 있었지만, 다른 네 명의 승패는 그녀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흐으응, 무공이 대단한 것처럼 나서더니…….’

청영 유미령은 비무대에 오르기 전 온몸에 기운이 빠져 있는 네 명을 바라보았다.

“잘난 체하는 대신 무공이나 더 수련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겠지.”

“청영, 비꼬지 않아도 돼. 하지만 그 말은 비무가 끝나서 해도 늦지 않아.”

고미진은 비웃는 그녀를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상대를 읽지 못하고 잘난 체를 했을진 모르지만, 단 한 번도 수련을 게을리한 적은 없었다.

“내가 질 것 같아 보이는 모양이지?”

“…….”

“착각은 자유라는 말을 아는지 모르겠네.”

“청……!”

고미진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려고 하다 멈췄다.

백리희가 그녀의 소매를 잡은 것.

돌아선 고미진은 가만히 말리는 그녀의 눈빛을 읽었다.

‘훗.’

유미령은 두 사람을 보며 실소가 나왔다.

‘난 너희들과 달라.’

유미령이 비무대에 올라섰다.

‘한심걸.’

동시에 비무대 반대편 끝에서 올라온 이휘연을 보았다.

‘단 한 수에 끝을 낸다.’

이 비무를 끝내고 나면 다음 대 검후는 자신이 되어 있을 것이다.

스르릉-

왼손으로 검집을 잡아당기며 천천히 검신을 드러냈다.

봉황천검.

전대 검후였던 예설란의 애검.

찌이이이잉-

검신에 새긴 봉황에 내력이 스며들자, 심후한 검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휘연은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감을 읽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이번 기회에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보여주려는 것인가?’

샤르르르-

다가오는 그녀를 향해 태극흑검을 겨누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상대해 주지.”

찡!

태극흑검의 검미에 스며드는 붉은 점(點).

쓰으으윽-

붉은 점이 허공을 흐르면서 붉은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붉은 선은 어느덧 원이 되었고, 붉은 태극의 모양으로 또렷하게 변해갔다.

“무공에서 강함의 차이는 무공을 제대로 깨우치느냐에 있느니라.”

“깨우침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믿음이니라. 나를 믿지 못하는데 어찌 무공을 믿겠느냐.”

무당산을 내려가기 전 장문인 진무진인이 그에게 한 조언.

상대의 무공이 화려하고 강한들 내 길을 갈 뿐이다.

시익만천(翅翼滿天)의 초식.

봉황의 날개가 한번 펼쳐지자 세상이 돌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창공(蒼空)을 날아오른 봉황의 날갯짓.

마치 세상이 부르르 떨리는 것 같다.

‘대단하군.’

절로 감탄이 나올 법한 광경이었지만,

이휘연의 마음은 파문 하나 없이 고요했다.

‘나의 검을 갈 뿐이다.’

태극혜검은 심공(心功)이며, 믿음으로 펼치는 검이다.

채애애앵!

태극흑검의 맑은 소리가 스스로 울려 퍼졌다.

휘리리릭!

청명하게 울리는 소리가 매섭게 다가오는 봉황천검을 홍태극 안으로 휘감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흐르는 것처럼.

휘청.

유미령의 검이 흔들렸다.

‘큭, 여기서 물러나면 안 돼!’

섣불리 뒤로 물러났다가는 위험하다.

유미령은 극성으로 내력을 일으키며 강하게 이휘연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반발하는 힘만 더욱 세졌다.

잔뜩 구겨진 그녀의 표정과는 달리 이휘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대는 강하오. 무리를 하지 않았다면, 제대로 비무에 임했다면 서로 승패의 결정을 내지 못할 정도로. 당신은 과했소.”

스륵-

이휘연의 몸이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유미령을 향해 내력을 튕겼다.

“크으윽!”

그녀의 몸이 뒤로 밀리는 동시에 봉황천검이 손에서 떨어졌다.

챙그랑!

유미령은 멍하니 이휘연을 보았다.

‘내가…… 밀리다니……? 있을 수 없어!’

휘이익!

단 한 수 만에.

그녀는 비무대 끝까지 밀려나 있었다.

‘검을……!’

유미령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떨어진 봉황천검을 잡으려 몸을 숙였지만.

그 자리에서 움직임을 멈춰야 했다.

척!

똑바로 목을 겨눈 이휘연의 검.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그대로 숨통이 끊어질 위치다.

‘졌…… 다고?’

허무할 정도로 순식간에 정해진 비무의 승패.

검문에 숨 막히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 인정할 수 없어!’

유미령은 다급히 떨어진 봉황천검과의 거리를 쟀다.

그리고 웅크린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은 채, 이휘연의 검에서 벗어날 기회를 엿봤다.

‘여기서 물러나면 다시 기회를 잡는다!’

그러나 태극흑검은 유미령의 목 앞에서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휘연의 눈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였다.

“그만하시오. 비무가 아니라면 그대는 이미 죽었소.”

‘아니야…… 아니야! 난 할 수 있어!’

유미령은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비무대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다른 네 명과 자신은 분명 달랐다.

꾸욱.

유미령이 손에 힘을 주었다.

목에 상처를 입는 한이 있어도 빠져나갈 것이다.

그때.

“한심걸, 검을 물리게. 청영은 졌네.”

검후 정화진이 비무대에 내려섰다.

“사부님! 전 아직……!”

“허허, 네 욕심이 과한 것을 알면서도 이러느냐?”

“……!”

충격을 받은 듯 부들부들 떨던 유미령은 천천히 손에서 내력을 거두었다.

찰깍.

그제야 이휘연은 유미령을 겨누었던 태극흑검을 내렸다.

방금 전까지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줬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여상한 태도다.

정화진은 비무대 아래에 선 남하림과 시선을 맞췄다.

“후개, 그대들이 이겼네.”

척!

남하림이 포권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검문에서 일부러 손님 체면을 세워주신 모양입니다. 재미있는 비무였습니다.”

“후후후, 그렇게 생각을 해주니 고맙네.”

정화진은 미소를 지은 후 돌아섰다.

‘이런, 아직도 승복을 하지 않는구나.’

그녀의 제자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두 검후전으로 찾아오너라.”

“네…… 사부님.”

분을 이기지 못한 듯, 유미령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 * *

봉황오영과의 비무가 끝이 났다.

개방과 걸협오성에 대한 검문의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내화당으로 돌아온 걸협오성은 휴식을 가졌다.

“흐으으응.”

기분 좋은 콧노래 소리.

차를 준비하는 허류향의 표정이 밝았다.

그녀 또한 검문의 일인이었지만, 이번 비무의 결과가 분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오영에게는 뼈아픈 일이겠지만 검문의 훗날을 위해서는 좋은 계기가 될 거야. 그동안 너무 안하무인격으로 지내왔으니…… 걸협오성이 제때 와줬어.’

드륵.

그녀는 귀홍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오전부터 힘을 쓰느라 힘들었을 텐데 가볍게 차를 마시면서 쉬시지요. 기운을 차리는 식사를 준비할 테니.”

“매번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탁자에 쟁반을 올려놓은 허류향은 한 잔씩 차를 따랐다.

“정말 대단하더군요. 오영을 너무 쉽게 이겨서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요.”

“쉽게 이겼다기보다는, 그들이 방심을 한 탓이죠. 우릴 만만하게 보고 있었으니까요.”

“호호호.”

살짝 난처한 듯 웃는 허류향이었지만, 남하림의 말에 틀린 부분이 없었다.

또로로롱-

허류향이 이휘연의 앞에 놓인 찻잔에도 천천히 차를 따랐다.

가장 놀랐던 비무는 이휘연과 유미령의 대결이었다.

“태극혜검의 진수를 본 듯했어요.”

“미미한 실력입니다.”

겸손한 이휘연의 말에 허류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개라면 아주 당당하게, 자신은 원래 잘난 실력이라고 말했을 터.

“미미한 실력이 절대로 아니지요. 오늘 무당의 검이 왜 뛰어난지 알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경지를 견식하게 되어 감사하더군요.”

“그건 무당의 검이 아닙니다.”

“무당의 검이 아니라고요? 그게 무슨……?”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본인의 무공입니다.”

이휘연과 마주친 허류향의 시선이 순간 멍해졌다.

본인의 무공이라면…….

자기가 대단해서라고 말하는 건가?

허류향은 방금 전 이휘연에 대한 생각을 수정했다.

겸손은 무슨.

“아…… 그렇군요. 당연히 한심걸의 무공이지요.”

어째 전부 똑같았다.

‘참 이러기도 힘들 것 같은데.’

다섯 잔을 다 채운 허류향이 찻주전자를 내려놓았다.

남하림이 먼저 찻잔을 들었다.

“다들 수고했어. 우리의 앞날을 위해 건배! 유도가 선창을 해.”

“네! 얼씨…… 구나아아아아아!”

“저어어어어씨구나-! 좋다!”

검문에 울려 퍼지는 구수한 타령.

허류향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건…… 또…… 뭐라는 거야?’

* * *

내화당에서 휴식을 하던 중.

검후에게서 다시 독대 요청이 전해졌다.

남하림은 다시 검후전을 찾아갔다.

“으음…….”

이전에 박살 냈던 복도가 흰색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아직 공사를 시작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아…… 네. 비무가 끝나면 시작할 것이라 했습니다.”

봉황철검단 부단주 궁학여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봉황오영과의 비무는 걸협오성에 대한 존경심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왕 짓는 거 튼튼하게 만들면 좋겠군요. 공사비는 얼마든지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궁학여와 남하림이 검후의 방 앞에 도착했다.

“검후님, 후개를 모시고 왔습니다.”

“알겠네.”

드륵.

남하림이 안으로 들어섰다.

자리에서 일어난 검후 정화진이 환하게 남하림을 맞이했다.

“늦은 시간에 귀찮게 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주위의 시선을 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부른 이유를 아는군.”

“그 이유가 아니라면 굳이 이 시간에 부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후개, 그대의 말이 맞네. 어째든 약속은 약속이지 않는가.”

그녀는 미리 준비한 상자를 올려놓았다.

“자네가 찾는 물건이네.”

“고맙습니다.”

남하림은 탁자를 당겨 앞에 놓았다.

딸깍.

자물쇠 부분을 치켜 올려 상자를 열자.

붉은빛의 요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중간중간 붉은색의 보석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름답네요.”

남하림은 홍요대를 들어 안쪽을 확인했다.

‘여기 있군.’

구천마제의 문양이 또렷하게 보였다.

스윽.

남하림은 겉옷을 들어 올려 안쪽으로 홍요대를 찼다.

“흠…… 좋은데…….”

몸에 완전히 달라붙는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완전 내 건데.’

오래전에 붉은빛 요대를 하나 구하고 한 적이 있었다.

개방으로 오면서 잊어버렸지만.

올렸던 겉옷을 다시 내리자 외관상으로는 전혀 홍요대가 보이지 않았다.

“이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들고 다니기 불편해서요.”

홍요대를 담은 상자를 옆으로 밀어냈다.

“후개, 그대로 가지고 갈 생각인가?”

“네. 들고 다니는 것보다 차고 다니는 게 편합니다.”

“그렇긴 하지만 중요한 물건이지 않는가? 조심해서 다루는 게 좋지 않을까?”

“장식품도 아니고 허리에 쓰라고 만든 게 아닙니까. 차고 있다가 주면 됩니다.”

“…….”

남하림의 말에 여태까지 보물인 양 조심스럽게 관리했던 자신이 좀 우스워졌다.

문득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각난 남하림이 말했다.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

“홍요대는 어떻게 가지고 계셨습니까?”

“구천이 무너지던 날, 전대 검후를 따라 구천마성에 갔네.”

“아하…… 그때 하나 주워 오신 모양이네요.”

“그렇다고 봐야지. 물욕이 없는 줄 알았는데, 나도 사람인지라 홍요대를 보는 순간 욕심이 생기더군.”

“저도 보는 순간 좋아 보이던데요.”

“후후, 난 구천신품에 욕심이 생겼지만 후개를 보니 나와는 다른 욕심인 것 같네.”

“그게 그거죠. 근데…… 다른 사람이 어떻게 검후님께서 이걸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을까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군사이지 않은가?”

“…….”

“그 인간이 모르는 게 어디 있나? 누군지는 모르지만 내 주위 인물이 요대를 챙기는 것을 봤겠지. 나도 그 정신없는 상황에서 주위를 제대로 신경 쓰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말이네.”

“이제 이해했습니다.”

남하림은 고개를 서너 번 끄덕거렸다.

“그럼…… 왜 제게 넘겨주시는 겁니까?”

“나이가 들고 보니 굳이 이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 전대 검후이신 예 언니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이곳을 떠난 것이 이해가 되기도 했네.”

“검후님께 다시 한 번 더 고맙다는 씀을 드립니다. 사실 그 사람 말을 듣고 검문에 오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거든요.”

“이제야 사실대로 말을 하는군. 제갈령이 시켰구먼.”

“죄송합니다.”

남하림은 고개를 숙였다.

“됐네. 내 물건도 아니지 않는가? 나도 소문을 들어 그의 기연이 있는지 확인했지만, 결론은 단순한 물건이었네.”

“맞습니다. 저도 몇 가지 물건을 봤지만 단순한 물건이었습니다. 왜 그런 소문이 나돌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남하림은 구천신품으로 구천마제의 신분을 알 수 있다는 비밀은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후개는 이것도 그자에게 가져다줄 것인가?”

“가지고 오라는데 줘야지요. 하지만 그의 뜻대로는 잘 안 될 겁니다.”

“…….”

정화진은 남하림의 눈동자에서 장난기를 스쳐 가는 것을 읽었다.

‘으음, 뭔가 일을 꾸미고 있군. 하긴 후개와 같은 사람이 제갈령의 말을 순순히 따른다는 게 이상했어.’

남하림을 만나본 그녀는 계속 의아했다.

그는 쉽게 말해 자화자찬(自畵自讚)이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 할 수 있는 성격.

그런 그가 천성적으로 남의 말을 잘 들을 리 없었다.

특히나 모든 것을 자신의 종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제갈령과는 천적이라 할 수 있었다.

“후후후.”

정화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내가 혼인을 했다면 이만한 아이가 있었겠지?’

젊었을 당시, 정화진은 단 한 번도 사내를 사귄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이 부끄러워 어느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다.

세월이 지나, 언니처럼 따르던 전대 검후가 천하제일인과 혼인하여 여아를 데리고 찾아왔을 때.

자신도 귀여운 아이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 해봤을 뿐이다.

그랬기에 무공에 더욱더 매진했다.

하지만 세월만 속절없이 지나갈 뿐.

검후가 된 뒤엔 제자들을 받았다.

정화진은 그들을 마치 딸처럼 대했지만 제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달랐다.

정이란 주고받는 것이었다.

그나마 최근에 얻은 다섯째 제자인 은영 백리희가 네 명의 제자와 달랐지만, 그녀 또한 어느 적정한 선 이상은 넘지 않았다.

두 번밖에 만나지 않은 사이지만 남하림과는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혹시나 무림맹을 적으로 삼을 생각이라면 군사를 조심하는 게 좋을 게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여쭤도 됩니까?”

“직감이라는 게 있지 않는가?”

“고맙습니다. 좋은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허어…… 정말로 그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이군.”

“전 그렇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남하림.

“다 큰 후개에게는 미안한 말이겠지만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구먼.”

“제가 어릴 때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많이 들은 말이지요. 괜찮습니다. 똑똑한 짓을 하다 보니 많이 귀여워해 주시더군요.”

“하하하! 후개의 어머니가 부럽군. 나도 그대 같은 아들이 있다면 부러울 게 없겠네.”

“아, 죄송한 말씀이지만, 혹 여태까지 혼인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지.”

“직접 뵙고 보니 소문과 다른 분이신데…… 젊었을 때도 상당히 매력적이셨을 겁니다.”

정화진은 남하림의 표정을 읽었다.

어른을 놀리려는 의도는 아니다.

“자네, 특이한 여성관을 지녔구만.”

“글쎄요. 특출하게 미모가 뛰어나시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외모란 단지 그것뿐이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보는 눈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흐음, 예쁘지는 않다라. 은근히 까는군.”

“엇, 그런 뜻은 아닙니다.”

“후후, 나도 아네. 해본 말이네.”

“아버지가 혼자라면 소개를 시켜 드리고 싶지만 곁에 두 분이 계셔서…….”

“상왕에게? 하하하! 정말 웃긴 말이군!”

그녀는 최근에 이보다 더 크게 웃어본 적이 없었다.

“만일 그와 혼인을 한다면 자네는 내 아들이 되는구만.”

“그렇다고 봐야지요.”

“난 자네 같은 아들이 생기는 게 더 마음에 드는군. 얼마나 든든하겠나.”

“음…… 그럼 제가 아들 해드릴까요?”

“…….”

툭 말을 던지긴 했지만, 남하림은 그녀가 진지하게 받아들일 거라고 여기진 않았다.

“하! 좋네. 후개가 아들을 해주면 나야 고마운 일이지.”

“정말…… 이십니까?”

“허어, 검후인 내가 농담으로 말을 하겠는가?”

“너무 쉽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서요.”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진심.

‘와우…… 정말 이렇게 된다고?’

내심 깜짝 놀란 머릿속과 달리, 남하림은 벌떡 일어나 바로 그 자리에서 절을 했다.

“의모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부로 남하림은 검후이신 정화진 님을 세상이 허락하는 한 어머니로 모시겠습니다.”

정화진은 방금 전까지도 해도 허전했던 가슴이 순식간에 꽉 찬 듯했다.

‘자식이라는 게 이런 기분이었나?’

토닥토닥.

정화진은 일어선 남하림을 안으며 등을 두드렸다.

‘세상을 가진 느낌이군!’

전대 검후에게서 느꼈던 부러움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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