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비무
검후 정화진은 두 번의 비무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후개의 무공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도천걸의 무공이 이 정도일 줄이야.’
팽유도의 반도는 검후의 시선으로 보기에도 충격적이었다.
‘도법으로 중원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겠어.’
도는 보통 검에 비해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있지만.
반도를 쓰는 팽유도의 경우, 이 점을 충분히 만회할 수 있었다.
‘팽가에서 배우지는 않았을 터. 개방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궁금하군.’
그녀의 시선은 다시 비무대로 향했다.
남하림은 비무대를 오르려는 성철각을 불러 세웠다.
“철각. 잠깐만.”
“왜?”
턱!
남하림은 두 손으로 성철각의 어깨를 잡으며 얼굴을 맞댔다.
“철각이 비무할 상대는 누구?”
“……?”
“싸울 때는 여인이 아니라 무인이다. 알지?”
“응. 알겠어.”
남하림은 마음이 여린 성철각에게 재차 주문을 입력시켰다.
“그럼 다녀와.”
휘익!
성철각은 긴 다리로 비무대에 성큼 올라섰다.
성철각과 서소화의 비무.
바로 전 비무와는 반대로, 이번엔 성철각이 길쭉하고 서소화가 아담했다.
“잘 부탁하겠습니다.”
“…….”
성철각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반면 서소화의 표정은 새침했다.
“천장걸, 나와 싸우는 것을 영광으로 아세요.”
“아, 누구십니까?”
“지금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올라온 건가요? 이래서 제대로 못 배운 개방의 제자들을 싫어하는 거예요.”
“저는 말 많은 여자를 싫어합니다.”
“……!”
서소화의 이마에 순간 주름이 생겼다.
“흥, 얼마나 무공이 강한지 보겠어요. 미리 말하지만 앞의 두 사람과는 다를 테니 다쳐도 몰라요.”
타앗!
서소화는 뒤로 물러나며 허리에 찬 요대에서 연검을 뺐다.
차르르르-
둥글게 휘어져 있던 봉황연검이 서늘한 소리를 내며 곧게 퍼졌다.
태애애애앵!
은빛의 봉황연검에서 맑은 소리가 울렸다.
곧바로 날아오는 서소화의 공격!
피잇!
성철각을 향해 봉황연검이 똑바른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연검답지 않은 검의 움직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모를 것이다!’
연검의 특징은 어느 시점에서 변화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것.
타악!
하지만 성철각은 간단히 선풍각을 펼치며 날아오는 봉황연검을 매우 쉽게 막아냈다.
“아앗!”
길게 휘어져 나오는 선풍각의 힘에 밀린 그녀는 손에서 봉황연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어떻…… 게 알았지?’
마치 검이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읽어낸 것처럼.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서소화가 순간 당황하여 멈칫했다.
찰나의 방심.
하지만 성철각의 공격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파아앗!
봉황연검을 쳐낸 오른발이 바닥에 닿는 동시에, 성철각이 몸을 회전시켰다.
휘리리릭!
왼발이 길게 돌아 나오면서 서소화의 어깨로 떨어졌다.
슈우우우우-
바람 소리를 뚫고 날아오는 성철각의 발이 채찍처럼 보인다.
‘피해야……!’
서소화가 공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뒤로 날렸지만,
팟.
미세한 차이.
서소화의 오른쪽 어깨에 성철각의 발끝이 스쳐 지나갔다.
‘크읏.’
비명을 겨우 참은 그녀가 봉황연검을 앞으로 겨누었다.
타앗!
성철각은 쉬지 않았다.
남하림의 말은 그에게 항상 진리였으니까.
“철각, 적이 죽거나 항복하지 않은 이상 싸움은 절대로 멈추면 안 돼.”
그는 싸울 때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오직 자신만의 무공을 펼칠 뿐.
하선고벽주출해(何仙姑霹宙出海).
번쩍!
검을 겨눈 그녀를 향해 공중에서 내리찍은 일각.
뇌전이 터지며 서소화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이 자식이……!’
쉴 틈 없이 다가오는 공격.
우아하고 멋진 대결을 펼치는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싸움 유형이다.
하지만 상대는 일격필살을 노리는 듯, 묵직한 한 방 한 방을 정신없이 몰아쳤다.
서소화는 무식하게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좋아. 원한다면!’
서소화는 번쩍이는 뇌전을 향해 봉황연검을 펼쳤다.
휘리리릭-
파도 물결처럼 꼬리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봉황연검.
수십 마리의 봉황이 솟구치며 뇌전을 빠져나갔다.
스으으윽-
그녀가 뇌전일각을 뚫고 성철각의 앞에 다가선 순간,
‘이겼다!’
완전한 무방비 상태의 성철각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서소화는 자신했다.
하지만,
‘왜 웃지?’
당황해야 하는 거 아냐?
봉황연검 앞에 마주 선 성철각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휘릭!
지나쳤다고 생각했던 성철각의 발이 뒤로 꺾이기 시작했다.
‘아니…… 어떻게……?’
환보걸선각의 한상자반형무각(韓湘子反形舞脚).
처음부터 이것을 노렸다.
퍼어억!
서소화의 허리에 둔탁한 타격 소리가 몰아쳤다.
까다다다당!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면서 몸을 굴렸다.
빠르게 호신강기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허리뼈가 그대로 부러졌을 터.
슈우우욱-
성철각은 멈추지 않았다.
넘어진 그녀를 향해 사정없이 발뒤꿈치를 내려치려는 순간!
“철각. 그만.”
“…….”
뚝.
서소화의 얼굴 한 치 앞에서 발이 멈췄다.
만일 남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중상을 입었을지도 몰랐다.
타앗.
성철각은 얼른 뒤로 물러났다.
‘하아…….’
서소화는 심장이 떨렸다.
실력의 차이가 문제가 아니라, 정말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에 욱하고 화가 났다.
“지금…… 나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죽지는 않아요. 다쳤겠지만. 그리고 항복을 안 했잖아요. 당연히 할 수 있는 한 제대로 해야 하지 않나요?”
성철각은 대답은 틀린 게 없었다.
“……쳇, 됐어요. 나중에…….”
서소화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돌아섰다.
세 번째 비무까지 지켜본 검문의 무인들은 상황을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
그동안 중원 무림에서 들려온 걸협오성의 위명.
용병림과의 비무.
산동악가주와의 비무.
수많은 고수들과 싸워 이긴 그들이었다.
봉황오영 중 누구라도 악 가주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이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남하림은 내려오는 성철각을 반갑게 맞이했다.
“후후, 잘했어.”
“저어…… 괜찮을까? 너무 세게 때렸는데.”
“에이, 그 정도는 괜찮아.”
팽유도가 다가왔다.
“철각 형, 엄청났어요! 형의 각법은 점점 더 겁나게 진화하고 있는 거 같아요.”
“고마워.”
스윽.
당무독이 일어나면서 몸을 풀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인가?”
“앗, 형! 가방은 왜 안 내려놔?”
팽유도는 가방을 내려놓지 않고 메고 있는 당무독을 보며 깜짝 놀랐다.
“응? 내 무기잖아.”
“으아 형, 여기서 독은 아니잖아.”
“한 번만 뿌리면 되는데. 안 그래?”
“안 그렇다니깐. 그거 없어도 이길 수 있잖아요!”
“에잉, 알았어, 알았어.”
당무독은 가방을 풀며 팽유도에게 넘겼다.
“혹시 몸 안에 독 같은 거 숨겨놓은 건 없죠? 아마 있을 것 같은데요.”
“허 참, 귀신이네.”
당무독은 발목에서 두 개의 옥병을 꺼냈다.
그리고 허리에서도 두 개.
마지막으로 소매 안에서 각각 한 개씩 두 개의 옥병이 나왔다.
“…….”
“갔다 올게. 진짜 이번 비무는 차포 다 떼어주고 하는 거라고.”
휘익!
당무독은 비무대 위로 가볍게 신형을 날렸다.
* * *
성영 고미진은 긴장이 되었다.
걸협오성에 대한 선입견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
서소화와 단목영하는 풀이 죽은 듯 조용했다.
스윽.
백리희가 고미진의 앞으로 다가섰다.
“긴장 푸세요.”
“…….”
“평소 실력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예요.”
“고…… 마워.”
말 한마디였지만, 덕분에 굳었던 그녀의 몸이 풀리는 듯했다.
“휴우…….”
그녀는 크게 호흡을 한 후 비무대로 올라섰다.
먼저 올라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당무독을 보았다.
멀리서 봤을 때와 달리, 가까이 다가서자 이목구비가 또렷하게 보였다.
“당무독이라 하오.”
약간 중저음의 목소리.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당무독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고미진입니다.”
“반갑소. 본의 아니게 그대와 비무를 하게 되었소이다.”
“…….”
“우린 이전 비무와 달리 무식하게 싸우지는 맙시다.”
당무독의 한마디 한마디에 고미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독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스윽.
고미진은 흠칫했다.
언제 손에 옥병이 들렸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이걸 뿌리면 싸우지 않고도 금방 끝이 나니까.”
“……!”
고미진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어느새 중독된 것은 아닌지 급히 몸을 살피는 동안,
“아, 걱정 마시오. 이번 비무에서는 독을 사용하지 않겠소이다. 다음에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하하.”
“아…… 네.”
휘익!
당무독은 옥병을 뒤에 서 있는 팽유도에게 던졌다.
“그럼 비무를 하시겠소이까?”
스르르릉-
고미진은 조용히 뒤로 물러나며 성화검을 천천히 검집에서 빼냈다.
그녀의 주위로 성스럽고 고결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뭔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기운이군.’
당무독은 그녀의 기운에 몸이 절로 움츠러드는 느낌을 받았다.
이내 스산한 느낌을 털어버린 그가 양손을 올렸다.
두우우우우우웅-
당무독의 전신에서 천천히 빠져나오는 비검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린다.
‘한번 놀아볼까?’
쉬이이익-
손의 움직임에 따라 비검들이 원을 그리며 좌우로 흔들거렸다.
고미진도 내력을 끌어 올렸다.
화락!
성화검의 끝에 피어난 성령의 불꽃.
먼저 성화검령의 초식이 펼쳐졌다.
청명한 성화의 불꽃이 순식간에 전방을 가득 메웠다.
‘이게 성화검문의 성령화군.’
소문으론 많이 들었지만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
‘대단한데.’
성령화를 끄기 위해서는 고미진을 완벽하게 제압해야 한다.
위이이이잉-
비검들이 당무독의 앞에서 원을 그리며 세차게 회전했다.
성화검의 불꽃은 그녀가 내력을 거두지 않는 한 꺼질 수 없다.
‘비검들을 모두 태우면…… 더 이상 성령화를 막을 수 없을 거야,’
파아아아-!
성화검의 불꽃이 점차 푸르게 변해갔다.
불꽃이 뜨거워지며 열을 더해가자, 비검이 하나씩, 하나씩 녹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대는 성화검을 막을 수 없을 거예요. 그만 포기하세요.”
‘이거 참…… 독만 있으면 간단한데…….’
당무독은 웬만하면 힘들게 내력을 끌어내서 싸우고 싶지 않았다.
효율적이고 간편한 독이 자신의 적성에 맞았다.
‘그냥 독을 뿌려 버릴까 보다.’
투둑.
비검들이 하나둘씩 힘을 읽고 흐물거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고미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마지막 일검, 성령유정(聖靈有情)을 뻗어냈다.
성화의 불꽃이 피어오르며 비검이 사라진 당무독을 향해 날아갔다.
후우우우-
화아아륵-!
삼사 장 정도 떨어진 곳까지 고요하면서도 폭발적인 화염의 기운이 느껴졌다.
‘쯧. 할 수 없군. 힘을 아껴놓으려고 했는데…….’
당무독은 내력을 올린 뒤 전신으로 퍼뜨렸다.
우우우웅-
몸에 흐르던 기가 서서히 유형화되며 날카롭게 변했다.
걸협오성 진영에서 그 장면을 보던 팽유도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앗, 무독 형도 언제 저런 걸 익힌 거지?”
“무형비검이라고 해야 하나?”
당무독은 복부에 힘을 주며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흐읍!”
피이이잉-
피웅-!
연쌍비투법(燕雙飛投法)의 만무비강(萬舞飛罡).
무형의 비강 수십 수백 개가 성화의 불꽃을 향해 단숨에 쏟아졌다.
팟팟팟팟!
쒸에엑! 쒸에에엑!
성화검의 불꽃이 점점 약해졌다.
‘이런……!’
그녀의 성화검이 상대방의 공격에 막혀 꺼지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우우웅-
고미진은 단전에 남아 있던 내력을 전부 끄집어냈다.
파앗!
약해졌던 성화령의 불꽃이 다시 꿈틀거리며 힘을 더했다.
하지만,
‘이러다 다치겠는데…….’
성화령이 살아났다고 해도, 당무독이 계속해서 비강을 펼치면 막을 수 없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을 보니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하는 수 없군.’
당무독은 만무비강을 거두는 동시에 타구봉을 꺼내 들었다.
타앗!
광견복창(狂犬伏悵).
고미진의 앞으로 달려간 당무독이 타구봉법을 펼쳤다.
화르르르-
성화의 불꽃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겠다는 듯 타구봉을 향해 방향을 바꾸었다.
타구봉을 타고 손으로 번지는 성화령!
‘욱…….’
당무독은 호신강기를 끌어 올리며 성화령을 참아냈다.
두두두두-
성화검을 향해 타구봉이 내리쳐졌다.
푸른 불꽃을 가르며 당무독의 타구봉이 고미진의 정면으로 내리꽂히는 찰나,
“……!”
코앞에서 타구봉이 멈췄다.
당무독과 시선이 마주친 고미진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따악!
당무독은 타구봉으로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앗!”
고미진은 그 순간, 멍하니 정신이 나가 버렸다.
“내가 이겼소.”
“…….”
찌이이직-
당무독은 성화령의 화염에 타들어간 상의를 찢은 뒤 옆으로 벗어 던졌다.
펄럭!
기합을 일으키며 성화령의 내력을 밀어내자 팔에 달라붙은 불꽃이 사그라졌다.
“따끈하고 좋은 비무였소.”
당무독은 포권을 한 후 돌아섰다.
짝짝짝짝!
팽유도는 신난다는 표정으로 아래로 내려온 당무독을 향해 박수를 쳤다.
“무독 형, 봐요! 독 없어도 잘 싸우잖아!”
“아니…… 움직이는 거 힘들어. 다음에는 독을 뿌리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당무독이 팔을 쑥 내밀었다.
“여길 봐. 뜨거워 죽는 줄 알았다고.”
“저도 소문만 들었지 성령성혼검은 처음 봤어요.”
네 번째 비무가 끝이 났다.
결과는 마찬가지.
걸협오성의 승리였다.
이제 마지막 한 번의 대결만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