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비무를 하다
비무대 중앙에 나온 검후가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함성 소리가 고요해졌다.
비무대 양 끝에 자리 잡은 봉황오영과 걸협오성.
스윽.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한 번씩 돌렸다.
‘음…….’
느긋하게 앉아서 각자 편할 대로 기다리는 걸협오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은 이휘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조잘거리는 팽유도와 성철각.
가방을 열고 뒤지면서 안을 뚫어지게 보는 당무독.
마지막으로 앉은 자리에서 두 팔을 쭉 뻗으면서 몸을 푸는 남하림을 보았다.
그에 반해 반대편의 다섯 제자들은…….
‘모두 긴장하고 있군. 오히려 긴장은 저들이 해야 하거늘.’
서로 한마디 말도 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휙!
정화진은 손을 들어 비무 시작의 신호를 보냈다.
둥! 둥!
북소리가 좌우에서 울렸다.
“검문의 제자들은 들어라. 두 문파의 친선을 위해 검문의 봉황오영과 개방의 걸협오성과의 비무를 시작하겠다.”
둥! 둥! 둥! 둥! 둥!
다섯 번의 북소리가 다시금 울렸다.
“와아아아아!”
“우우우우우!”
“검문 만세!”
“봉황오영 만세!”
비무대를 향해 검문의 무인들이 환호를 쏟아냈다.
그들의 기대는 하늘을 뚫을 듯 솟아올랐다.
다음 대 검후 후보인 봉황오영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
그들은 개방이란 문파의 무공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예전부터 개방은 검문의 상대가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부님도 괜한 일을 하시네.”
마음에 들지 않는 목소리.
양영 단목영하가 투덜거렸다.
그녀는 성격상 귀찮은 일을 하는 게 싫었다.
“맞아. 아무리 걸협오성이라 해도 개방의 무공으로는 우리의 상대가 되지 않잖아.”
묵영 서소화도 마찬가지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직접 상대하는 다섯 명이 더러운 몰골은 아니라는 것 정도.
“은영, 저들과 아는 사이라고 했어?”
슥슥.
어깨 뒤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묶는 여인.
성영 고미진이 다섯 사내들을 한 명씩 바라보았다.
“개방 제자라 해도 제법 강하게들 보이는데?”
“착각하지 마세요. 걸협오성은 정말 강해요. 절대로 무시해선 안 됩니다.”
백리희는 기분이 나빴다.
이곳에 팽배한, 은근히 상대방을 무시하는 분위기가 싫었다.
백리희가 그녀들과 달리 검후의 제자가 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어울리지 못하고 늘 벽을 두었다.
“강하다? 그건 너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겠지. 우리와 동급으로 생각하진 않았으면 좋겠어.”
“…….”
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있다.
백리희는 더 이상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네.’
두우우웅!
한 번의 북소리가 길게 울렸다.
첫 번째 비무의 시작.
양쪽 진영에서 각자 한 명씩 일어났다.
“와아아아……!”
“은영이시다!”
“상대는?”
“후개! 후개가 일어났다!”
백리희를 보며 검문의 무인들이 환호했다.
그녀의 상대는 후개 남하림.
‘저자가……?’
유미령은 단번에 인상을 썼다.
걸협오성 중에서 가장 강한 인물은 남하림이 틀림없다.
그런데 왜?
‘왜 나를 택하지 않았지?’
오영 중에서 가장 강한 자신과 비무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내 그녀는 알 듯한 미소를 지었다.
‘흥, 나하고 싸우는 것에 자신이 없어 도망갔군.’
아무리 생각하도 백리희를 선택할 만한 이유는 그것뿐이다.
‘비겁한 사내야. 나를 이길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지? 아니면 걸협오성이 한 번이라도 이기고 싶었던 것이든지.’
유미령뿐 아니라 다른 세 사람도 같은 생각을 했다.
“훗, 정상적으로 붙으면 우리에게 한 번이라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네. 아무리 최소한 한 번은 이기고 싶었다 해도, 은영을 택하다니.”
단목영하는 비무대로 나오는 후개를 보고 비웃었다.
스윽.
백리희는 그녀들의 말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직접 저들을 보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그녀는 걸협오성의 능력을 잘 알았다.
잠시 뒤에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백리희는 천천히 비무대로 올랐다.
동시에 중앙에 멈춘 두 사람.
“남 대협님, 최선을 다해주세요.”
“알겠소이다.”
백리희는 남하림이 모든 전력을 다해 싸워주기를 바랐다.
백리희가 백리세가를 떠난 후.
그녀와 함께하던 호월위 문백구는 백리희의 진심을 읽고, 오랜 지인이었던 검후 정화진을 만나게 해주었다.
무림맹 군사에게 도전하여 십년봉문을 풀기 위해.
그녀의 굳은 결심을 읽은 검후는 백리희를 다섯 번째 제자로 삼았다.
잠자고 있던 그녀의 무공은 검후의 무리(武理)를 배우고 깨우치면서 실력이 급격하게 올라섰다.
가장 짧은 기간 동안 검후에게 수련받았음에도 말이다.
채애앵!
백리희는 자전진기(紫電振氣)를 이끌어냈다.
육체적인 힘을 필요로 하는 자전진기는 백리세가에선 사내들이 익혔던 신공.
하지만 백리희는 그녀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백리세가를 떠난 이후, 오직 자전진기만을 익혀왔던 것.
월진검에 자전진기가 스며들면서 강한 자성을 띠기 시작했다.
찌직, 찌지지직!
뇌전이 흐르는 소리.
그녀의 손에서 자전십이파월월검(紫電十二破月劍)이 펼쳐졌다.
열두 가지 초식에 뇌전의 기운을 담아내는 검공.
강한 힘을 순간적으로 내는 무공이라, 신체적 힘이 약한 여인의 경우 수련하면서 부상이 빈번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결심이 강하다는 뜻이겠지!’
남하림은 타구봉을 들었다.
그 순간,
백리희의 월진검이 움직였다.
“그럼 한 수 부탁하죠.”
쏴아아아아-
남하림의 향해 휘몰아치는 뇌검풍.
휘릭!
휘리리릭!
퍼러러러럭!
남하림의 옷과 검은색의 머리카락이 뒤로 휘날렸다.
핏! 핏! 핏!
자전무월파(紫電無月破)의 초식.
바람 속에서 뇌전의 검기가 휘감겨 남하림을 향해 소용돌이쳤다.
‘멋진 검공이다.’
남하림도 맞서며 내력을 전신에 흘려보냈다.
우우우웅-
타구봉에 은연한 황금색의 기(氣).
뇌전의 검기가 눈앞에 나타나자 남하림의 눈동자에서 빛이 났다.
허공에 길게 이어진 황금 선을 그려내는 타구봉!
타다타탁!
월진검기가 하나씩 부서지며 사라졌다.
휘이이이잉-
슈우우우웅-
둘 사이에서 부딪힌 기의 충격에, 파동풍이 회전하며 위로 솟아올랐다.
파아아앙!
공중에서 불꽃놀이처럼 터진 두 기운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백리희의 공격을 너무나 편안하게 막아낸 남하림의 한 수.
‘남 대협은…… 내게 오 할의 힘도 사용하지 않았어.’
백리희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에 반해 구 할의 내력을 다한 자신의 일검.
한 수의 부딪힘만으로 둘 사이의 승패는 정해져 있었다.
“대단하시네요. 예전보다 훨씬…… 강해지셨어요.”
“아닙니다. 오히려 소저의 무공에 놀랐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수련하셨군요.”
“감사해요.”
그에게 칭찬받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남하림은 이미 절대고수의 반열에 들어서 있었으니까.
한순간이었지만, 남하림에게서 느껴지는 내력은 검후보다 강했다.
‘내가 잘못 보지 않았을 거야. 내력만큼은 사부님보다 확실히 높을지도.’
“휴우…….”
그녀는 호흡을 길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제가 오래 끌 필요가 있을까요?”
“억지로 완성되지 않은 무공을 펼치면 위험합니다.”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아요.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전력을 다하지요.”
“…….”
남하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슈우우우욱- 슉.
그녀의 단전에서 보랏빛의 선기가 비쳤다.
자전신기의 내기.
자전천월파검식.
현재 자신의 역량 내에서 펼칠 수 있는 최고의 무공.
슈우우우웅-!
만월의 붉은 테두리가 점점 커져 나갔다.
‘자전의 기에 봉황의 검. 파검이 더욱 강해졌다.’
남하림의 호신강기를 밀어내는 파검의 기가 뇌전을 흘려보낸다.
‘완전한 만월이 되면 오히려 내가 당하겠는데.’
무시할 수 없는 월진검의 위력.
여기선 움직일 수밖에 없다.
타앗!
타구봉에 팔단공의 내력을 올렸다.
두두두두두!
마치 천계의 여의봉처럼.
강력한 내력으로 감싸인 남하림의 타구봉이 몇백 년 묵은 고목과 같은 압박감을 뿜었다.
타구봉법 봉두거타(棒頭巨打)의 초식이다.
슈우우욱!
구구구구궁-
“크윽!”
월진검의 만월이 타구봉을 이겨내지 못하고 비무대 끝까지 밀렸다.
주르르르륵!
“……!”
멈칫.
눈앞에 보이는 가느다란 타구봉.
남하림이 내력을 거두지 않았다면 타구봉에 밀려 밖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이것이 후개의 위력인가.’
백리희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시끄러웠던 관중석이 고요해졌다.
당연히 은영이 이길 것이라 여기던 그들 또한 후개의 무공에 넋을 잃었다.
검문 무인들의 눈에 들어온 후개의 무공은 그야말로 차원이 달랐다.
개방이 이렇게 강했던가?
그들은 타구봉법의 위력에 온몸이 떨려왔다.
걸협오성 후개의 대한 소문은 진실이었다.
백리희는 월진검을 거두며 남하림에게 고개를 숙였다.
“졌습니다.”
“그대의 검도 대단했소이다.”
“남 대협께서는 위로를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남을 위로할 사람으로 보입니까?”
“후후, 잘 아시네요.”
백리희는 비무에선 졌지만 마음이 시원해 웃음이 나왔다.
“다음에 다시 도전하겠어요.”
“언제든지.”
두 사람은 돌아서서 비무대를 내려갔다.
단목영하는 비웃는 표정으로 백리희를 맞이했다.
“쳇. 지고도 웃음이 나오는 모양이지?”
“…….”
“하긴…… 어차피 한 번 정도는 질 패였으니깐. 같은 오영이라 부끄럽다.”
“부끄럽게 해서 미안해요.”
백리희는 도도히 자리에 앉았다.
“뭐야? 그게 부끄러운 태도야?”
“따지는 건 나중에 하세요. 저기는 벌써 올라왔으니 가보시죠.”
단목영하가 비무대에 오른 팽유도를 매섭게 바라보았다.
오영 중에서 가장 장신인 그녀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후훗, 잘 봐라. 진정한 사부님의 제자가 어떻게 저들을 상대하는지.”
휘리리릭!
그녀는 유성허보(流星虛步)를 펼치며 비무대에 올라섰다.
“와아아아! 양영이시다!”
“양영은 무조건 이길 것이다!”
관중석의 무인들은 다시 한 번 더 기운을 내며 소리쳤다.
비무대 중앙에 내린 단목영하가 팽유도와 마주 섰다.
“흐으음…….”
팽유도는 턱을 치켜 올려 단목영하를 보았다.
한 뼘 정도의 키 차이.
“팽유도입니다.”
“양영이라 한다.”
목소리에 성의라곤 한 톨도 들어 있지 않다.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군요.”
“아니, 그대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아니라, 비무가 마음에 안 드는 거다.”
“근데 왜 반말을 하죠?”
“내가 두 살 많은 걸로 아는데? 원한다면 존대해 주지.”
“아, 그렇군요. 난 또. 여하튼 내가 마음에 안 든 게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흥! 계속 말이 많으면 그럴 수도 있다.”
“아, 하하, 알겠어요. 귀찮다고 하니 빨리 끝을 내죠.”
피식.
단목영하는 팽유도의 말에 실소가 나왔다.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는 있나?”
“무슨? 아항, 내가 이긴다는 말?”
“맞다.”
“그건 맞는 말인데요. 헤헤.”
팽유도 또한 그녀를 보며 씨익 웃었다.
“도천걸. 자신감이 있는 건 좋지만 상대를 정확히 파악하는 방법을 먼저 배워야겠어.”
“음, 이걸 두고 아가사창(我歌査唱)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고 하죠.”
“쳇, 다치지 않게 해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군! 나를 원망하지 마라!”
타앗!
단목영하가 긴 팔을 이용해서 일 장을 뻗었다.
단목세가의 성류장법(星流掌法).
파앗.
팽유도의 눈앞에서 터진 성광(星光)이 눈을 가리는 동시에, 강맹한 일장이 어깨를 향했다.
휘익-
팽유도는 기민하게 몸을 옆으로 회전시켜 장법을 피했다.
‘어허, 이 여자가 사람 잡겠는걸!’
휘리릭!
그러고는 성철각의 환영각법을 휘둘렀다.
단목영하는 시야각 바깥에서부터 뻗어 나온 각법에 깜짝 놀라 삼 장이나 뒤로 물러났다.
‘헉! 큰일 날 뻔했……!’
각법을 펼칠 줄은 예상조차 못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큰 부상을 당했을 터.
비무대 아래에서 성철각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제법이야. 완벽하게 무영선각을 펼쳤어!”
“언제 저걸 가르쳐 줬어?”
“그냥 옆에서 수련하는 걸 보더니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하는 방법만 설명해 준 것밖에 없어.”
“어째 다들 정상적이지가 않아. 한 번 설명해 준다고 저렇게 멋진 각법을 펼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부장이 할 말은 아니다.”
비무대 위의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난 빚지는 걸 싫어해서요. 그럼 편히 쉬도록 해드리죠.”
패애애앵!
팽유도의 등 뒤에서 묵흑반도가 솟구쳤다.
타앗!
동시에 그도 공중으로 뛰어올라 묵흑반도를 잡았다.
우우우우우웅-
기의 거대한 울음과,
쿠아아아아앙!
천둥이 치는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오며 단목영하를 향해 묵흑반도의 도강이 떨어졌다.
단 한 자 크기의 묵흑반도에서부터, 세상이 두 조각으로 나뉘었다.
단목영하는 극심한 무력감에 휩싸였다.
‘막…… 아야…… 해!’
번쩍!
그녀는 자신이 익힌 최고의 검식, 봉황파진검강(鳳凰破陣劍罡)을 펼쳤다.
콰아아아앙!
슈우우우우욱-
도강과 검강이 강맹한 기세로 부딪혔다.
비무대 중앙에서 일어난 파동풍이 관람석을 향해 퍼져 나갔다.
팽유도의 일초식.
단목영하는 비무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뒤 눈앞에서 멈춘 묵흑반도를 보았다.
꿀꺽.
겨우 마른침을 삼켰다.
눈꺼풀이 떨리며, 바닥을 짚은 손 또한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찌이이잉!
팽유도의 내력과 함께 묵흑반도의 날에 깃든 도강이 언제라도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이 사람의 눈동자는…….’
단목영하는 자존심이 상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졌어…… 요.”
“한 번에 빨리 끝냈지요? 이젠 귀찮지 않을 겁니다.”
파앗!
팽유도는 경쾌하게 묵흑반도를 공중으로 던졌다.
휘리릭.
회전하면서 올라간 묵흑반도는,
딸깍.
곧장 팽유도의 등에 매인 도집에 정확히 들어갔다.
“단목의 검을 잘 보았습니다.”
팽유도는 싱긋 웃고는 비무대에서 먼저 돌아섰다.
바닥에서 일어난 그녀의 시선은 걸협오성에게 다가가며 밝게 웃는 팽유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개방이…… 이 정도로 강했다고?’
단목영하는 비무대를 내려오며 고개를 푹 숙였다.
백리희는 풀이 죽은 그녀를 보며 한 마디 던졌다.
“어때요? 만만하게 보이던가요?”
“…….”
“이젠 똑바로 하세요. 정말로 망신을 당하지 않으려면…….”
세 번째 나갈 차례가 된 묵영 서소화는 건너편 자리에서 일어나는 성철각을 보았다.
‘저자는…… 천장걸이군.’
스윽.
서소화는 허리에 찬 연검을 살짝 쓰다듬으며 비무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