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유미령
진시(辰時).
검후전에서 연락이 왔다.
#NAME?
다섯 명은 검후전에서 나온 호위 무인을 따라 묘검정(泖劍庭)으로 들어섰다.
척.
검후의 호위무단.
봉황철검단의 단주 문소하가 묘검정의 입구에서 다섯 명을 맞이했다.
머리를 짧게 자른 그녀의 첫 인상은 우직하면서도 강인했다.
남하림의 눈에도 검문 무인들의 기도가 꽤 인상 깊었다.
“그대들이 걸협오성입니까?”
“그렇습니다.”
남하림은 일행을 대신해서 포권을 했다.
“검후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 오십시오.”
“고맙습니다.”
문소하는 돌아선 채 앞만 보며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맑은 물빛을 담은 호수가 보였다.
“멋진데요?”
검문 한가운데서 호수가 나타날 것이라곤 예상치 못했다.
팽유도는 호수의 경치에 감탄했다.
“우린 이 호수를 백화호(白花湖)라고 부릅니다. 봄이 되면 호수 주위로 백화가 사방을 흩날린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백화호라…… 검문 안에 이런 멋진 호수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남하림은 백화호의 물가를 따라 이어진 장소에 세워진 정자를 보았다.
‘저곳이 묘검정…… 이군.’
백색으로 칠해진 정자.
잠시 후.
먼저 묘검정으로 올라갔던 문소하가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검후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묘검정으로 오르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남하림은 앞서 계단을 올랐다. 그 뒤로 네 명이 따랐다.
묘검정은 호수를 향해 한쪽 벽이 뚫려 있어 구조가 특이했다.
문을 향해 앉아 있는 백의중년여인.
검후 정화진이 들어서는 다섯 사내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그를 보는 듯하군. 그것도 다섯 명이나…….’
다섯 사내들의 기도가 무림맹주 유극지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했다.
“검후님을 뵙습니다.”
“반갑소. 후개. 다른 네 분들도.”
정화진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으로 자신과 얼굴을 대면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바짝 긴장하여 흔들리는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근데 이들 다섯 명은 달랐다.
‘호오. 나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해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일 텐데.’
“자리에 앉게.”
“고맙습니다.”
정화진은 자리에 앉는 다섯 사내들을 보았다.
남하림의 피부는 여느 여인에 못지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후개는 잘생겼다는 말을 많이 듣겠군. 인기가 많겠구려.”
“인기가 많다면, 잘생겨서 많은 게 아니라 제가 잘났기에 많은 것입니다.”
“……음.”
검후 정화진의 입이 움찔거렸다.
세상에 자신 앞에서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이가 있을 줄은 상상해 본 적도 없다.
“후개. 그대가 정말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네.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해본 적은 있지만, 결론은 인정할 수밖에 없더군요.”
“하하! 후개가 이렇게 유쾌한 사람일 줄은 몰랐군.”
그녀는 오랜만에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검후 정화진은 기분이 좋아지자, 묘검정의 분위기가 밝아졌다.
‘나를 편하게 대하는구나.’
특히 이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분명 초면이건만, 이상하게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맘이 편안했다.
‘물론 내게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겠지.’
하지만 아직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
검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검문에 온 느낌은 어떠한가?”
“사람 사는 곳에 다른 게 있겠습니까? 똑같지요.”
남하림의 말에 다른 네 사람도 한마디씩 했다.
“저희들도 부장과 같은 생각입니다.”
별반 다른 게 없다는 다섯 사내들을 보며 정화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은 조금 다른가 보이. 어떤 인물들은 부담스럽다며 빼더군. 하하.”
“부담이라는 게,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겠습니까?”
“후개의 말이 맞네.”
검후 정화진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남하림을 내려다보았다.
‘음, 이제 뭐라고 하는지 볼까?’
“당문에서 무림맹으로 가려면 이 길로 갈 이유가 없지 않나?”
“네. 맞습니다. 도중에 검문에 와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그대에게 물어봐도 되겠는가?”
“편히 질문하셔도 됩니다.”
정화진은 남하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본 문에 온 이유가 뭔가.”
“당문에서 돌아가던 도중, 무림맹에서 나온 전령을 만났습니다.”
“전령? 제갈 군사의 명이었나?”
“아닙니다. 맹주님께서 직접 보내신 사람이었습니다.”
남하림은 제갈령의 말대로, 명을 내린 사람이 맹주라고 곧바로 대답했다.
‘약았군.’
정화진은 사실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넘어갔다.
남하림도 그녀가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최선을 다했다.
“맹주께서 귀찮더라도 검문에 들러 검후께 붉은 요대를 빌렸으면 한다고, 그렇게 전령이 전하더군요.”
붉은 요대란 말에 찰나지간 정화진의 인상이 구겨졌다.
“정말로 맹주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냐? 사실에 목숨을 걸 수 있는가?”
협박이 담긴 압박이 남하림을 무겁게 억눌렀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모르다니? 그대가 방금 나에게 맹주가 말을 전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맹주께서 그런 말을 했다고 한 게 아니라, 전령이 했다고 전해 드린 것입니다. 전 여기서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스으으으-
남하림의 무형기가 정화진의 기를 밀어냈다.
“전 단지 그분의 명을 전달하기 위해 온 것뿐. 나머지는 검후께서 결정을 하시면 됩니다.”
“……좋다. 내가 결정해야 할 일이지.”
“맞습니다. 실례가 될지 모르겠으나 맹주께서 말씀하신 홍대는 가지고 계십니까?”
“그대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잘됐습니다.”
“후개, 이 문제는 조금 더 생각을 해야 하니 시간을 주게.”
“얼마든지 필요한 만큼 생각해 보시고 연락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동안 우린 내화당에서 지내도록 하지요.”
“그렇게 하게. 나중에 연락을 보내지.”
“일어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슥.
남하림을 따라 네 명도 포권을 한 뒤 묘검정을 나왔다.
[……하림 형, 검후가 줄까?]
[글쎄. 잘 모르겠어.]
[검후가 거절한다면 검문도 종남파나 백리세가처럼 공격하려나?]
[아마…… 어렵지 않을까? 검문은 무림맹과도 연관이 있는 곳이라 맹주가 허락하지 않겠지.]
[음…… 군사 입장에서는 피곤하겠어.]
그들이 전음을 나누면서 백화호를 빠져나갈 때였다.
호수 건너편에서부터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스르르-
고운 청의 치맛자락이 바닥을 가볍게 스치는 소리가 났다.
그 뒤로 열 명의 여인들이 따랐다.
걸협오성과 마주친 순간.
청의여인의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호위 여인이 옆으로 나왔다.
십봉호화(十鳳護花) 수장 한서미는 다섯 사내가 누군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걸협오성.”
“누구시죠?”
“봉황오영 청영(淸英)이시오.”
‘청영?’
남하림은 한서미 너머에 있는 청영 유미령을 보았다.
살짝 눈을 아래로 내려뜬 도도한 표정.
‘저 여인이 맹주님의 여식이군. 그냥 보기에도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 것 같네.’
금방 상대를 파악한 남하림은 가만히 서 있는 그녀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원하는 게 있소?”
한서미는 당황했다.
옆으로 물러날 기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남하림은 반 정도 옆으로 물러난 상태였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말문이 막힌 한서미를 보며 남하림이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우린 바쁜 사람이외다. 언제까지 안 비키고 있을 겁니까?”
“……!”
스윽.
그때, 유미령이 한서미를 대신해서 남하림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후개십니까?”
“그렇소.”
“사부님을 뵙고 가시는 모양이군요. 무림인이 검후님을 쉽게 뵐 수는 없지요.”
남하림은 상대하기 귀찮았다.
“지나가시오.”
“…….”
유미령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그럼 우리들이 지나가겠소이다.”
스윽.
남하림은 그녀의 곁을 지나쳤다.
“……!”
‘지금 나를 무시한 거야?’
유미령은 십봉호화를 옆을 지나 백화호를 빠져나가는 다섯 명의 사내들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감히 저자가 예의도 없이?”
“그만해. 거지에게서 예의를 찾는 게 아니지.”
휙!
그녀는 몸을 돌리며 묘검정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백화호를 나온 순간.
팽유도가 기억이 났다는 듯 소리쳤다.
“하림 형! 방금 저 여자가 누구를 닮았는지 생각이 났어요.”
“맹주와 전대 검후의 여식.”
남하림의 대답에 성철각은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어…… 정말이야? 난 전혀 몰랐어.”
“엄청 도도한 척하던걸. 잘난 부모를 둔 탓인가?”
당무독도 그녀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엇, 그럼 나는?”
“부장은 우리 인간계 사람들과는 다르잖아. 압승이지.”
“그런가?”
“맞아.”
네 명이 동시에 대답했다.
* * *
유미령이 묘검정으로 올라섰다.
“사부님.”
“들어오너라.”
드륵.
유미령은 안으로 들어서며 허리를 짧게 숙였다.
천하제일인 아버지와 전대 검후인 어머니.
세상에 이보다 더한 부모를 둔 자식은 없다.
어느 누가 그녀를 보며 거만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부인 정화진에게조차 큰절을 하지 않았다.
“앉아라.”
“네. 알겠습니다.”
정화진과 마주 앉은 유미령의 모습.
‘휴우……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구나.’
강한 자존심.
언제나 자신을 최고라 여기는 오만함.
실제로도 그녀의 무공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성격이 좀만 더 유했으면…… 당장 검후가 되어도 걱정이 없었을 텐데.’
정화진은 작년부터 망설이고 있었다.
다섯 명의 봉황오영.
그중에서도 유미령은 가장 뛰어났다.
하지만…….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느냐?”
“굳이 준비까지 할 필요 없습니다.”
그녀의 한마디에 자신감이 느껴졌다.
“만일의 상황이 발생한다면 변수가 많이 생길 수도 있다.”
“변수가 생기더라도 그것조차 저를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부님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은 제가 아닌 다른 이들이 할 일이지요. 아니면 그들에게 기권하라고 권유하시는 게 더 좋을 듯합니다.”
“내가 말이더냐?”
“네, 맞습니다.”
“흐음, 그 아이들이 내 말을 듣겠느냐?”
개성이 강한 다섯 명의 제자들.
싸우다 지는 한이 있더라도 기권하지 않을 것이 눈에 보였다.
“기권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자신의 위치가 어떠한지 보여주는 수밖에.”
‘동문이며 사매이거늘……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오직 자신만을 믿는 유미령.
사부와 제자.
두 여인은 잠시 말없이 호수를 바라보았다.
“……오는 길에 걸협오성을 만났을 텐데.”
“호수 입구에서 마주쳤습니다.”
“후개를 보았느냐?”
“…….”
“강해 보이지 않더냐?”
“별다른 점은 없어 보였습니다. 상당히 거만하더군요. 강하다고 들었지만 제자에게는 전혀 위험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흠. 위험거리가 안 된다? 큰일이군. 전혀 발전된 모습이 보이지 않아.’
유미령의 오만함을 고치기 위해 오랫동안 충고했지만, 오 년이 지났는데도 고쳐지지 않았다.
“내력을 숨긴 듯하구나. 그가 중원에서 싸운 상대들을 봐도 알 수 있느니라. 어쩌면 우리들보다 강할지도.”
유미령은 그에 대해 다시 떠올렸다.
‘그자가 사부님의 말씀처럼 정말로 강하단 말이지?’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검후에게 인정을 받은 사내.
‘얼마나 강한지 두고 보겠어.’
유미령은 곧바로 결심했다.
“사부님, 그들이 본 문에 찾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물건을 가지기 위해 왔다고 하더구나.”
“그들이……?”
“무림맹주의 명을 받았다고 말이지.”
“……!”
무림맹주라면 자신의 아버지다.
“아버지가 그것을 달라고 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겠지. 나도 알고 있다. 군사가 맹주님의 이름을 팔았겠지.”
“사부님께서는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두 가지 방법밖에 더 있겠느냐.”
군사의 명을 따르거나, 거절하거나.
정화진은 군사에게 머리를 숙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거절한다면 군사가 백리세가와 종남파, 이들 두 문파처럼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군.”
“사부님.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무림맹에서 농사를 짓고 계시지만, 그 두 분은 군사가 검문을 공격한다는 사실을 알면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검문의 제자로 있다.
그렇기에 군사는 절대로 검문을 공격할 수 없다.
‘그자들은 헛걸음을 했어.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도 모르는군.’
유미령은 확신했다.
‘구천신품을 군사에게 줄 순 없어. 그건…… 내 것이니까.’
중원 무림에서부터 구천신품에 대한 소문이 하나씩 들리기 시작한 후.
그녀는 목표가 생겼다.
‘구천신품을 꼭 모두 모으고 말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