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문령
무림맹 군사의 전령을 가지고 나타난 중년 사내.
경무송이 전서를 내밀었지만 남하림은 움직이지 않았다.
‘뭐 하는 거지?’
경무송은 당황했지만 애써 침착한 척 다시 말했다.
“군사님의 전서라고 했소이다.”
“알고 있으니 소리 지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왜 받지 않습니까?”
“받고 싶은 생각이 없군요.”
경무송은 더 당황했다.
‘이런 어이없는 사람이 있나.’
그리고 어떻게 할지 망설였다.
‘억지로 맡겨?’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던 그 순간.
슥.
이휘연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서를 주시오.”
“아…… 여기 있소.”
그는 후개가 방해하기 전에, 얼른 전서를 이휘연에게 건네주었다.
“고맙소이다.”
“따로 할 말이 있소?”
“그건 없소이다. 전서만 전해주면 된다고 했소.”
“알겠소. 돌아가도 좋소.”
경무송은 다급히 말에 올라탔다.
돌아서기 전에 확인까지 잊지 않았다.
“난 분명히 군사님의 전서를 전했소이다. 나중에 안 받았다고 하면 안 되오!”
“걱정하지 마시오.”
히이이잉!
경무송이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돌아섰다.
“가자!”
두두두두두-
무림맹 사천지부 소속의 무인들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휘연은 전서를 남하림에 건네주었다.
“여기 있어.”
“하아…… 무슨 내용인지 안 봐도 알 것 같아요. 돌아오는 길에 다른 곳에 들러 구천신품을 찾아오라고 적혀 있을 겁니다.”
“하림 형, 어떻게 알아요?”
“군사가 나한테 맡길 일은 현재로는 하나밖에 없거든.”
“아하, 구천신품을 찾는 일이군요.”
“아이고, 그래. 어디로 가라고 하는지 한번 보자!”
남하림은 봉투에서 전서를 꺼내 펼쳤다.
“허.”
곧바로 남하림의 입에서 실소가 튀어나왔다.
“철각, 네가 한번 읽어봐라. 이 양반, 양심이 쬐금은 있나 보네. 우리가 고생하는 걸 알고는 있구만?”
성철각은 전서를 받아 간단하게 적혀 있는 내용을 읽었다.
#NAME?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검각에 구천신품이 있다더군.
검후에게 물어봐서 정말로 물건이 있다면, 내가 아닌 맹주님의 이름하에 가지고 오게나.
“검각이라고?”
당무독은 전서를 빼앗듯 손에 들고 다시 읽었다.
“으아아아아아, 진짜네. 이건 너무한데……?”
“무독, 왜 그래?”
“부장, 검각이 어떤 곳인 줄 알지?”
“당연히. 무림맹에서 전대 검후님도 만났잖아. 여무인들로 된 검문.”
이번에는 팽유도가 나섰다.
“하림 형, 맞긴 한데…… 무독 형이 놀라는 게 뭐냐면, 현재 검후가 무림맹 군사를 너무너무 싫어한다는 게 문제야.”
“그런 말은 처음 듣는 것 같은데? 하긴 군사를 누가 좋아하겠어? 그를 싫어하는 이유가 뭐야?”
“오래전에 군사가 검후를 무시한 적이 있었거든요.”
“검후를 무시해? 호오, 역시 사고 치는 수준이 남다른데. 무슨 일로?”
“내가 듣기로는 현 검후에 대해서 말을 할 때 전 검후와 비교를 하는 도중에 무인은 얼굴이 조금 딸려도 무공만 강하면 되지 않느냐의 식으로 했다네요.”
“틀린 말은 아닌데…… 그분 입장에서는 살짝 기분이 나빴겠군.”
“맞아. 근데 검후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잖아.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안 되는 것처럼 문사건을 두른다고 해서 유식하게 안 보인다고 했지. 그리고 봉황선을 흔들 때마다 닭똥 냄새가 풍긴다고…….”
“흐음…… 그 말은 당연히 군사의 귀에 들어갔겠군.”
“그 뒤로 서로 상대방한테 남편 잡겠다느니 여자 손도 못 잡을 인간이라느니…….”
“이야, 그냥 한판 붙는 게 시원했겠다. 난 그 이야기를 왜 못 들었지?”
당무독이 물음에 대답했다.
“아마 그때가 무림맹을 만들 당시였을 거야. 그날 이후 검후께서 군사의 사과도 받지 않았고, 그냥 지금까지 이어져 왔어. 군사도 보통 인물이 아니잖아. 그 뒤부터 서로 앙숙이지.”
“대충 알겠군.”
“그 이후 제갈이란 성만 들어도 치를 떤다고 해요.”
“이야, 큰일이군. 검각에서 군사의 명을 받고 왔다고 하면 당장 쫓겨나가겠는걸.”
“맞아요. 그래서 맹주님을 팔아서 가지고 오라는 거죠.”
“푸훗, 군사도 무서운 게 있는 모양이군.”
검각의 주인 검후 정화진.
남하림은 군사를 겁나게 만드는 그녀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거 재미있겠는데? 검각으로 가자.”
“하림 형……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
“유도야, 떨리는 모양이네?”
“그게…… 전부 여자들밖에 없는 곳이라 부담이 돼서. 게다가 우릴 반겨주지도 않을 텐데…….”
“에이, 걱정 안 해도 돼. 그냥 여자나 남자나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 상대하면 된다고. 심호흡해, 심호흡.”
“흐으으흡, 휴우…….”
팽유도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 * *
스윽.
한쪽 발을 객잔 이 층 난간 다리에 올린 사내.
문령이 머리를 손으로 넘기며 멀리서 다가오는 다섯 명을 내려다보았다.
“저놈을 어떻게 처리한다?”
독을 뿌렸지만 실패.
진법으로 덫을 놓았지만 또 실패했다.
마지막 하나 남은 방법.
‘다섯 놈이라 괜히 시비를 걸었다간 심하게 털릴 것 같은데…… 어쩐다?’
문령은 생각에 잠겼다.
그사이 걸협오성은 그의 발밑 가까이 도달했다.
뚝.
팽유도가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
“저 사람, 아까부터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우리가 이상하게 보이나 보지.”
당무독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산을 넘기 전 나타나는 마지막 객잔이라…….”
성철각이 문 옆에 적혀 있는 글을 읽었다.
“어쩔 수 없군. 저녁은 여기서 보낸 뒤 아침 일찍 떠나는 걸로 하자.”
덜컹!
팽유도가 앞에서 문을 열었다.
객잔에는 많은 손님들이 소란스럽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하림 형, 사람들이 많아.”
“여기가 마지막 객잔이라서 그런 모양이군.”
팽유도는 고개를 돌리며 객잔 점원을 찾았다.
“어이! 여기!”
“아, 예예, 갑니다.”
머리에 두건을 두른 점원이 빠르게 다가왔다.
점원의 눈빛이 팽유도의 아래위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무리 유행이지만 하루에 한 명씩은 이런 놈들이 온다니깐.’
“하룻밤 자고 갈 건데…… 객실이 있는가?”
“있긴 한데…… 그 방은 비싸서…… 요.”
거지 같은 네놈들은 돈이 없을 테니 못 잡을 거라는 뜻.
“얼마요?”
점원은 팽유도 뒤에 선 남하림을 빼꼼 보았다.
‘아항, 제법 있는 집안의 자식들이 걸협오성 놀이를 하는구만. 하지만 이 방의 가격을 알면 놀라 자빠질 거다!’
“특별호실이라 하루에 금 한 냥이지요.”
“그래? 난 또 비싸다고 해서 이거 하나 정도는 되는 줄.”
남하림은 허리에 찬 주머니에서 금원보 하나를 꺼냈다.
‘헉! 재신이시다!’
점원의 눈이 커지며 허리가 저절로 숙여졌다.
“귀빈을 몰라 뵈었습니다요! 소인이 특별호실로 모시겠습니다!”
점원 종칠은 곧바로 앞장서서 이 층으로 올라갔다.
스윽.
남하림은 계단을 오르며 이 층 끝에 서 있는 사내를 보았다.
난간에 발을 올리고 있던 사내다.
“하하하! 어서들 오시오.”
문령은 두 팔을 벌리며 자신의 집에 초대한 듯 환영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우리를 잘 아시나 봐?”
“그대들과 달리 난 여러 번 봤지.”
“쥐새끼처럼 우리를 쫓아다녔다는 말인가?”
이휘연이 순간 그의 앞에 바짝 섰다.
스르르르-
문령의 신형이 옆으로 물러났다.
“재주가 좋군.”
“하하하, 오랜만에 칭찬을 받으니 기분에 좋소이다.”
이휘연은 손을 뻗어 문령을 잡으려고 했다.
‘무슨 보법이지? 손안에 들어왔는데.’
분명 손안에 걸린 느낌은 있었다.
하지만 마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처럼 빠져나갔다.
남하림은 곧바로 이휘연을 말렸다.
“휘연 형, 신경 쓰지 마.”
“알겠다.”
“방으로 갑시다.”
“아…… 네에.”
종칠은 얼른 특별호실로 앞장을 섰다.
문령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더 놀았으면 좋았을 텐데.”
드르륵.
분위기가 환했다.
“여기가 특별호실입니다. 저희 객잔에서 가장 좋은 시설과 침구, 식사 모두 한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습지요.”
“좋군요. 마음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그럼 어떻게, 식사를…….”
“식사를 하기 전에 우선 씻고 싶군요.”
“곧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하지만 종칠은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스윽.
“이것이면 충분하고도 남지 않겠소?”
그는 허리를 숙인 채 눈앞으로 빛나는 금원보를 보았다.
‘금전 다섯 냥짜리! 오늘 완전히 횡재수!’
“편히 쉬십시오. 최고의 정성으로 모시겠습니다.”
“부탁하지.”
종칠은 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내지 않도록 천천히 움직였다.
얼마 후.
“안에 있소?”
“아무도 없으니 그냥 가시오.”
“어허, 참…… 사람들이 각박하시구려.”
드륵-
문령이 문을 열었다.
피익!
남하림이 의자 앞에 놓여 있던 찻잔을 던졌다.
휘릭.
문령은 손을 부드럽게 돌려 날아오는 찻잔을 손바닥 위로 올려놓았다.
“너무한 게 아니오?”
“너무 같은 소리 하네. 불청객은 그만 나가시는 게 좋을 것 같소이다.”
스윽.
성철각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씨익.
문이 닫히기 직전 썩은 미소 한 방.
타악!
문령은 닫힌 객실 문 앞에 우두커니 혼자 남았다.
‘이 새끼들이…… 나를 완전 개무시하는군.’
손만 뻗어도 부서질 문이었지만 참았다.
“휴우…….”
다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손잡이를 잡았다.
‘억……?’
손에 힘을 주며 문을 당겼지만 열리지 않았다.
객실 안에서 문이 열리지 않도록 잡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에이…… 드러운 놈들.”
문령은 뒤로 물러났다.
‘이번 일은 기억하마. 꼭 갚아주겠다.’
타아악!
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뒤 문을 세게 닫았다.
팽유도가 멀리서 신경질적으로 닫히는 문소리를 들으며 말했다.
“저 사람 누군지 알아요?”
“모르지.”
“저 사람은 우리를 잘 아는 것 같은데요?”
“그럼 확실하네.”
“뭐가요?”
“우린 모르는데 우리를 잘 안다. 답은 하나잖아. 나쁜 놈이라는 거지.”
남하림의 간단한 추리에 네 사람 모두 인정했다.
“부장은 늘 옳은 말을 많이 해. 그럼 잡아서 족쳐야지 않겠어?”
“나쁜 놈이긴 하지만,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잖아. 잠시 기다리면 이상한 짓을 하겠지. 그때 잡아서 패든지.”
“알겠어.”
“오늘은 푹 쉬고 내일 검각령을 넘어가면 될 거야.”
“그래, 부장 말대로 오늘은 좀 쉬자.”
* * *
슬금슬금.
복면을 쓴 도적 십여 명이 계단을 따라 올라왔다.
그들은 손짓으로 특별호실을 가리켰다.
칠흑같은 어둠 속.
앞장을 선 복면인이 무언가와 부딪혔다.
‘뭐지?’
손을 뻗었다.
‘이건…… 사람 발 같은데……?’
빠악.
순간 눈앞이 번쩍거리며 빛이 솟구쳤다.
“아악!”
소리를 지르면서 뒤로 넘어간 복면인.
“이 도적놈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도적질을 하러 오느냐?”
퍽! 퍽! 퍽! 퍽!
문령은 복면인을 한 명씩 잡고 패기 시작했다.
“이놈을 죽여라!”
“죽이긴 누굴 죽여! 네놈들이 죽는다!”
복면인들이 동시에 달려들었지만 당연히 문령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바닥에 한 명씩 쓰러지면서, 곧 십여 명의 도적이 모두 뻗었다.
드륵-
남하림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거, 시끄럽게 뭐 하는 겁니까?”
“이것 보시오. 내가 도적놈을 잡았소이다!”
“누가 도적놈인지 모르겠소이다.”
“어허, 이놈들을 보고도 모르다니! 내가 아니었다면 이놈들이 몰래 들어와서 그대들의 돈을 훔쳐갔을 게요.”
“아하암, 그럼 저들에게 물어봅시다. 진짜로 우리 물건을 훔치려고 했는지.”
“좋소!”
문령은 기절한 복면인을 한 명 깨웠다.
“야, 인마! 일어나!”
“허억……!”
소스라치게 깨어난 복면인은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했다.
“이보시오. 한 가지 묻겠소만, 당신들이 우리 물건을 훔치려고 했소? 아니라면 살려주겠지만, 진실이라면 죽소.”
“아, 아아, 아닙니다. 저희가 어찌……!”
“이 새끼가! 똑바로 이야기하지 못할까?!”
스윽.
남하림이 문령의 앞을 막아섰다.
“협박하지 마시오. 당신 때문에 똑바로 말하지 못하면 어쩌려고?”
“허어, 이거…… 참.”
문령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마치 짜고 치는 노름판에 당하는 듯한 더러운 기분.
“전부 깨워서 여기에서 나가시오.”
“예, 옙. 알겠습니다.”
남하림의 말에 복면인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동료들을 깨운 뒤 황급히 사라졌다.
문령은 어이없어 웃음밖에 안 나왔다.
“허어…… 허허, 참 내.”
남하림은 문령을 보며 한마디 했다.
“우리 이제 조용히 잡시다.”
“저자들은 분명 도둑놈인데…….”
“도둑일 수도 있겠지요. 당신 방에 갈 수도 있고 우리 방에도 올 수 있고. 조금 더 지켜보면 알 수 있었을 테죠. 하지만 이 층으로 올라 왔을 뿐 아직 물건을 훔쳤거나 훔치려 방으로 들어오지도 않았잖습니까.”
“……허.”
“그리고 우리 일에 신경 안 써도 됩니다. 도둑맞는 것도 우리이거늘.
우리랑 같이 있고 싶은 모양인데, 미안하지만 난 전혀 그런 마음이 없소.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난 문령이라 한다.”
“거참, 그런 이야기는 정신이 맑을 때 합시다. 지금 한밤중인데.”
“그래도 말이 이왕 나왔으니 통성명이나 하는 게 어떻겠소?”
“혼자서 하시오. 난 피곤해서 잠이나 더 자야겠소이다.”
드륵-
타악!
방문이 완전히 닫혔다.
바로 눈앞에서 막혔다.
“……이거 완전 골 때리는 놈이잖아. 세상에 나보다 이상한 놈이 있을 줄은 몰랐는걸.”
“시끄럽소. 잠이나 잡시다.”
“…….”
‘망할 자식. 도둑을 잡아주면 동료로 받아줘야 하는 거 아냐? 계획이 은근히 틀어지잖아.’
그는 걸협오성과 동행해서 놈들이 어떠한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당연히 죽일 기회를 엿보는 것도 포함.
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문령은 조용히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