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천령자
당주영 사건은 당문에 큰 변화를 주었다.
먼저 각 당의 주요 보직에 인사이동이 일어났다.
당주영의 아버지 당형경은 곧바로 경질되며 내원당 당주직에서 내려왔고.
그 자리를 당지환이 맡게 되었다.
당서윤은 감사를 표하기 위해 걸협오성을 소당원으로 초대했다.
스윽.
당서윤은 들어선 다섯 명을 보며 두 손을 모았다.
“모두 고맙소이다.”
“당문의 소가주가 설마 한 끼 식사로 때우려고 하는 건 아니지요?”
“하하하하! 후개,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보게. 무엇이라도 구해주지.”
“지금 당장 아니라도 되지요? 나중에 생각나면 그때 말하겠습니다.”
“후후후, 얼마든지!”
당서윤은 술병을 들고 이휘연의 잔을 따르며 말을 이었다.
“당문이 큰 도움을 받았소이다. 당문은 한 번 입은 은혜는 결코 잊지 않소.”
“잘 마시겠소이다.”
당서윤은 차례대로 감사의 술을 따랐다.
마지막으로 남하림의 차례.
“후개, 이 녀석을 훌륭하게 거듭날 수 있도록 해주어 고맙소이다.”
“소가주는 잘못 생각하고 계시는군요. 무독은 원래부터 대단했습니다.”
“……오!”
“무독에게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지요. 원석 속에 숨어 있는 보석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본 방에게는 천운이었습니다.”
남하림은 옆에 앉은 성철각과 팽유도를 가리켰다.
“여기 철각이나 유도도 마찬가지. 모두 찬란한 보석으로 다듬어지는 중입니다.”
“어…… 부장, 휘연 형은?”
성철각은 혼자 빠진 이휘연을 보며 물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휘연도 남하림을 보았다.
“휘연 형은 원석이 아니라 원래부터 보석이지. 사실 세상은 내가 안 되면 남도 안 되기를 바라거든. 휘연 형처럼 눈에 띄는 존재는 질투를 받을 수밖에 없어. 내 옆에 있어서 눈에 안 띄니 다행이지.”
이휘연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런 면에서는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세상에서 제일 잘난 부장.”
“휘연 형, 그게 아니라 우주에서 제일 잘난 부장.”
성철각이 다시 한마디 거들었다.
“아하하하!”
“그래, 그래. 다 해먹어라.”
당서윤은 시선을 돌리며 웃고 떠드는 다섯 명을 천천히 보았다.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거늘. 녀석들의 유대감이 부럽긴 하군.’
술병이 하나씩 탁자 위에 쌓여 갔다.
내력을 숨기고 마신 탓인지 어느 정도 술기운이 올라왔다.
“추멸선자를 만나고 왔소.”
당서윤은 오전에 별관에서 추멸선자를 만난 이야기를 꺼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더군. 이야기는 아버지께 모두 들었네.”
다섯 명은 그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아버지가 잘못했더군. 게다가 당주영, 그 새끼가 어디서 그런 말을 듣고 와서는 분란을 키웠던 거지.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만 이번 일로 당문에서 그 녀석을 잡아낸 게 불행 중 다행이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소. 그리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까? 앞으로 여자들을 만날 때는 조심해서 다녀야겠다고 생각했소이다.”
“서윤 형……!”
“물론 결혼 전까지만…… 결혼하면 충성해야지. 아버지처럼 사고 치다가 내 자식이 죽게 할 수 없잖아.”
“……형도 어지간하다.”
“하하하! 사람이 일관성 있게 살아야지. 안 그럼 병 나. 후개, 내 말이 맞지 않소이까?”
“뭐, 일관성 있게 산다는 말은 좋네요.”
“하하하하! 후개가 알아줘서 반갑군! 자, 한잔 받으시오.”
* * *
당염청을 따라 걷는 추멸선자의 발걸음이 떨렸다.
두 사람이 멈춘 정문 앞.
“으음…….”
추멸선자가 현하장(賢廈場)의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현하장은 성도에 기반을 둔 상가로, 당문에 필요한 물품들을 납품하는 곳.
“누구 있는가?”
인기척 소리에 문을 열고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 가주님이 아니십니까?”
“장노. 오랜만일세. 장주는 안에 있는가?”
“소인이 주인 어르신께 모시겠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당염청과 추멸선자는 장노를 따라 장원으로 들어섰다.
‘이곳에…….’
두근두근.
추멸선자는 가슴이 떨렸다.
장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드륵.
접객실의 문이 열렸다.
장주 현주용이 환한 표정으로 당염청을 반겼다.
“가주님, 어서 오십시오.”
“그동안 잘 지냈는가?”
“저야 늘 가주님께서 도움을 주시기에 탈이 없지만…….”
그는 도중에 말을 멈추며 머뭇거렸다.
“괜찮네. 그 아이는 이상이 없어. 당문의 일은 잘 마무리가 되었네.”
“아……! 천만다행입니다. 찾아뵙고 싶었습니다만…….”
“이해하네.”
다다다다!
그때, 문 밖에서 빠르게 달려오는 아이의 발소리가 들렸다.
“땅문 할부지……!”
네 살가량의 사내아이가 당염청의 품으로 달려들어 안겼다.
“허허허. 이 녀석, 고새 더 자랐구나.”
“보꼬 싶어쪄요.”
“그럼 아빠에게 말해서 오면 되지 않느냐?”
“아빠가 할부지가 바쀼다고…….”
“이 녀석…… 알겠다. 다음에는 자주 놀러오마.”
스윽.
문 밖으로 삼십 대가량의 부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부님, 오셨습니까?”
“선청아, 잘 지냈느냐?”
‘선청……!’
젊은 부부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오래전 기억.
“아이를 낳는다면 서로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 짓도록 해요.”
그녀의 눈동자가 떨렸다.
“할부지. 여기 할머니는 누구야?”
“양이가 한 번 안아드려라. 할아버지와 친한 사이란다.”
“네에……!”
소양이 추멸선자의 앞에 다가서서 손을 뻗었다.
쓰윽.
추멸선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아이를 꼭 안았다.
‘내 눈매를 닮았어.’
* * *
현하장에서 한 시진을 보내는 동안, 추멸선자는 소양의 손을 내내 꼭 잡았다.
‘잘살고 있어 다행이다.’
당염청과 추멸선자는 그들의 배웅을 받고 현하장을 나섰다.
정문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후다다닥!
뒤에서 다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선청아, 무슨 일이 있느냐?”
“……그게, 그냥 가시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스윽.
추멸선자의 앞에 다가선 현선청은 그녀를 바로 안았다.
그리고 얼른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혹시 다음에 성도에 들릴 일이 있으시면 오셔도 됩니다.”
“알겠다. 그만 돌아가거라.”
현선청은 다시 인사를 한 후 현하장으로 돌아갔다.
당문으로 돌아가는 길.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됐어요. 이젠 돌아가 모든 것을 잊고 지내지요.”
“그렇게 하시구려. 음…… 혹시 나를 용서하는 것이오?”
“내가 죽을 때까지 용서할 수 없소.”
추멸선자는 앞서 걸었다.
“쩝…… 너무하지 않소이까. 전부 잘됐지 않았소?”
“양심에 털이 났군요.”
* * *
스르르륵.
당문의 하늘 위로 한 인영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삼엄하군. 잘못했다가는 들키겠어.’
중년 사내는 건물에 바짝 몸을 숨기며 움직였다.
그의 목표는 당천금옥.
‘제법 똘똘한 녀석이었는데……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스으으윽-
그의 신형이 그림자 안으로 사라진 순간,
금옥간수 준형의 눈에서 잠이 쏟아졌다.
고개를 돌리며 잠을 쫓았지만.
“아…… 왜 이리 잠이 오지?”
“그럼 영원히 자든지.”
“헛! 누구냐?!”
화들짝 놀란 준형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아서며 소리쳤다.
핏!
준형에 이마에 붉은 점이 새겨지고,
“억.”
그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바닥에 쓰러졌다.
“이봐! 무슨 소리야?”
동료가 쓰러지는 소리에 당천금옥에서 간수가 달려 나왔다.
“헉……!”
바닥에 쓰러진 동료를 본 간수가 다급히 주위를 살폈다.
펏!
또 한 번 홍광지가 그의 이마를 뚫었다.
이번엔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빨리 끝내고 나가야겠군.’
철컥!
중년 사내는 문을 부순 뒤 금옥으로 들어섰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자,
‘저기 있군.’
당주영은 양팔과 양다리에 철쇄를 매단 채 바닥에 앉아 있었다.
“하하, 천령자께서 내 입을 막고자 친히 오셨군요. 반갑소이다.”
“당주영, 고생이 많군. 보아하니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겠는걸.”
“죽이지 않는 것도 다행이지요. 아니면…… 아직 살려둘 이유가 있었던지.”
“……!”
천령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저벅저벅.
“……함정이군.”
“아하하하하! 잘됐소이다. 혼자 죽기에는 외로웠는데 함께 죽을 친구가 생겨 좋군요!”
“닥쳐라. 죽는 것은 네놈뿐이다.”
피잇!
퍽.
당주영의 얼굴이 뒤로 젖혀지며 이마에서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금옥으로 내려오는 발소리.
남하림이었다.
“거 너무한 거 아니오? 당문의 죄인을 함부로 죽이다니. 기절시켜도 될 만한데 말이외다.”
“네놈이 후개군.”
다섯 명이었지만 후개가 누군지 금세 알 수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제법 수상한 무공을 펼친다고 들었소만.”
“…….”
천령자는 대답하지 않고 전방을 살폈다.
‘빈틈. 아직 어설프군.’
앞을 막아섰다고 하지만, 충분히 나갈 수 있을 만하다.
스르륵-
이휘연이 옆으로 움직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중간에서 교차했다.
“이런, 일부러 빈틈을 만들다니. 나하고 싸워봐서 알 텐데. 저번에 많이 아쉬웠던 모양이지?”
피식.
이휘연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아쉬운 쪽은 당신일 텐데.”
이휘연의 말에 천령자의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젠장, 쉽게 나가기 어렵겠는데…….’
그는 처음으로 긴장했다.
‘그럼…… 머리부터!’
핏! 핏! 핏!
천령자는 홍광지를 펼치는 동시에 남하림 앞으로 달렸다.
쉬이이이익-
바람 소리와 함께 천령자의 손가락에 뻗어 나온 홍광지강(紅光指罡).
우우우웅-
남하림은 눈앞에 다가온 붉은 강환을 보며 손바닥을 펼쳤다.
파아아아앙-!
호신장막이 퍼졌다.
퍽! 퍽! 퍽! 퍽!
홍광지강이 호신장막에 막혀 속절없이 사라졌다.
‘이 녀석이……!’
좀 더 내력을 올렸지만 남하림이 만든 기의 장막을 뚫을 수 없었다.
“너무 시시한데요? 좀 더 힘을 내세요.”
“……!”
남하림의 무시에 그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네놈이 원한다면……!”
핏핏!
연이어 두 번의 홍광지강이 강맹한 속도로 날아왔다.
남하림은 호신장막을 거두고 강룡십팔장을 펼쳤다.
번쩍!
우르르르-
콰아앙!
뇌벽이 치며 홍광지강을 단숨에 삼켰다.
쿠아아아아아앙-!
천령자의 전신을 감싸는 기.
“이놈……! 이것으로 본인을…… 잡지 못한다!”
두두둑!
천령자의 양손에서 뻗어 나온 홍광지강이 강룡의 기를 밀어냈다.
타앗!
강맹한 기운이 중간에서 반발하며 동시에 밀어냈다.
“후개…… 이 정도의 내력을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당신도 마찬가지. 이제 제대로 싸워볼 맛이 생기는군.
전력을 다해 싸우지 않았다는 남하림의 말에 천령자의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기대하세요. 제대로 할 겁니다.”
흐느적.
남하림의 신형이 좌우로 흔들거렸다.
취리건곤보(醉裏乾坤步).
움직임이 마음에 들어 만리추풍신법과 함께 익혔던 개방의 보법.
하늘은 땅처럼.
땅은 하늘처럼.
천령자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타나는 남하림을 향해 홍광지를 연이어 펼쳤다.
핏팟팟!
십지홍살(十指紅殺).
열 손가락을 펼치자 전방을 향해 붉은 지기(指氣)가 불꽃처럼 퍼졌다.
쾅쾅쾅쾅!
지하 동굴에 만들어진 금옥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다.
“어…… 이러다 금옥이 무너지겠어.”
“근데 하림 형은 언제 취리건곤보를 익혔지?”
“마치 공간을 뚫고 다니는 것 같아. 나도 한번 익혀볼까?”
“저건 부장이니 가능한 것 같다. 원래는 저렇지 않을걸.”
이휘연도 취리건곤보를 알았지만, 남하림이 펼친 보법은 그와는 결이 전혀 달랐다.
‘아이고. 빨리 잡아야겠네. 이러다 다 무너지겠다.’
척!
남하림은 십지홍살을 피하면서 천령자의 앞으로 점점 가까이 붙었다.
‘지금!’
슈우우욱-
일 장도 안 되는 거리에서 펼쳐진 승룡포박의 초식.
쿠와아아앙!
화산이 폭발하듯 솟구친 강기에 천령자는 그대로 들썩거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폭발에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커어어억!”
* * *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천령자는 눈을 떴다.
“크큭.”
“…….”
그는 비웃음을 들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일어났소?”
“여긴……?”
“어디긴? 금옥이지.”
철렁!
손을 잡아당기려고 했지만 철족쇄에 묶여 있었다.
당주영은 건너편에 묶여 있는 천령자를 한심한 눈으로 보았다.
“죽지 않았더냐?”
“큭, 다행히 급소는 피해서…… 후개가 살려주더군.”
“…….”
당주영은 그를 다시 비웃었다.
“겨우 후개에게도 깨지는 놈들에게 내 미래를 걸었다니…… 어이가 없군.”
“당주영, 죽고 싶은 것이냐?”
“크하하! 미친놈. 지금 네놈 꼴을 봐라. 누구를 죽인다고?”
단전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력을……!’
“크크큭. 네놈 단전은 이미 깨졌다. 삼류건달 놈들한테도 이길 수 없겠지.”
“…….”
“크크, 조만간 고문당할 텐데…… 어쩌나. 고통을 받기 싫으면 나처럼 모든 사실을 밝히고 목숨이라도 건지는 게 좋지 않을까. 하하하.”
“이놈…… 내가 네놈처럼 될 성싶으냐?”
“그럼 고문이나 처받고 뒈지시든지. 손톱을 하나씩 뽑으면 아프다고 하던데…….”
휙.
천령자는 철 사슬에 묶인 손을 당겨보았다.
“욱…….”
끄떡하지도 않았다.
‘젠장…… 이렇게 죽는 것이군. 하지만 네놈들은 나에게서 한마디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잘 가시오. 난 조만간 여기를 나갈 것이외다. 킥.”
“이놈……! 네가 그러고도 천황님께 살기를 바라느냐?”
“천황님이고 나발이고, 어차피 난 무림에서 못 살아. 아무도 못 찾는 조용한 곳으로 가야지.”
“훗, 멍청한 놈. 네놈은 절대로 창천의 눈을 피할 수 없다.”
“…….”
“창천의 눈은 중원 천지에 없는 곳이 없다. 내가 사라지고 하루가 지나면 난 죽은 것으로 처리될 것이다. 네가 당문에서 나가는 순간 들킬 수밖에 없을 터.”
“그렇군. 창천이란 곳의 두목이 천황이란 인물이란 말이군.”
“……!”
철컹.
당주영은 철족쇄를 풀었다.
그리고 자리를 툭툭 일어나 창살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넌…… 누구냐?”
“나요? 잠깐만.”
스윽.
목소리와 같이 서서히 드러나는 얼굴.
“후…… 개……? 당주영은?”
“당신이 죽이지 않았소이까. 이것도 재미있군. 본 방의 수업에 왜 이런 게 필요할까 의문이었는데…… 이럴 때 사용하는 거군. 하하!”
남하림은 맑게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