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범인
‘망할 녀석.’
며칠이 지났건만, 군사 제갈령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화산파에서 얻은 구천신품을 강물에 던졌다는 일화.
-후개님은 진정한 대협객이자 성인이시다!
이 일화가 중원 무림에 퍼지면서, 개방과 후개에 대한 찬송이 이어졌다.
‘이 녀석을 어떻게 하지?’
명을 어긴 남하림을 그대로 둬선 안 된다.
‘이 녀석. 완전 기회다 싶어 강물에 던져 버렸을 게 틀림없어.’
제재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중원 무림의 평판이 자신에게 좋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약은 놈. 이런 것까지 계산을 했을 게야.’
“허허허.”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분명 무림맹에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건만.
‘지금까지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을 남들이 알았으니, 차라리 무림맹에 넘기는 게 좋겠다고 여겼겠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면 순순히 줄 놈이 아니다.’
이번의 경우도 마찬가지.
‘종남파 놈들. 감히 구천신품에 눈독을 들이다니…….’
중간에 변수가 생기지 않았다면, 구천신품은 무림맹의 것이 되었을 터.
‘백리세가를 본보기로 중원 무림에 내 뜻을 분명히 보여주었거늘. 아직 약한 모양이군.’
제갈령은 이천영의 영주를 불렀다.
“인종.”
슥.
히공에서 제갈령의 앞으로 인종이 내려섰다.
“부르셨습니까?”
“한 가지 고민이 생겼네.”
“종남파를 칠 생각이십니까?”
“어느 수준까지 쳐야 할지 망설여지는군.”
“무림맹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어떻게라도 충분하다고 여겨집니다.”
“자네의 생각은 멸문을 시키든지 겁만 주든지 상관이 없다는 말이군.”
“…….”
제갈령은 혼탁함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고개 숙인 인영을 바라보았다.
“무림맹을 세운 목적은 무림을 다스리는 게 아니네.”
“…….”
“군림해야 하지.”
살랑.
제갈령은 미소를 띠며 봉황선을 부쳤다.
“아까운 시간에 남들 좋은 일 하자고 무림맹을 만든 건 아니라는 말일세. 아니 그런가?”
“군사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백리세가를 쳤다면 종남파도 당연히 쳐야겠지. 힘의 우위도 파악하지 못하는 멍청함이라니. 난 이런 것을 정말 싫어한다네.”
“군사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허허허.”
살랑.
제갈령은 봉황선을 흔들며 히죽 미소를 지었다.
“무림에서 군림하려면 무림맹의 힘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모든 이들이 군사님을 따를 것입니다.”
유극지가 맹주이긴 하나, 무림맹의 주요 보직은 군사 제갈령의 사람들이었다.
제갈령은 인종의 말이 매우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좋아. 종남파에게 본 맹의 뜻을 확실히 보여주는 방향으로 하지. 이번에는 지룡군과 철호군을 보내도록.”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놈은 어디에 있지?”
“사천당문으로 움직인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당문에? 그곳엔 왜?”
“그건 아직 밝혀진 게 없습니다. 조만간 확인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구천신품을 잘도 버리더니 놀러 다니고 있군.”
“후개를 가만히 둘 생각이십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종남파라는 변수가 끼어들었다고는 해도, 이번 일이 쉽게 넘어갈 일은 아니지.”
“그렇습니다.”
똑똑.
그때, 문 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조호산입니다.”
인종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잠시 뒤, 한 장의 서신을 들고 들어왔다.
“후개에게서 온 서신입니다.”
“후개?”
스으윽.
제갈량은 봉투에 담긴 서신을 꺼냈다.
피식.
“진짜 골 때리는 놈이군.”
“군사님. 그게 무슨……?”
“자. 보게나.”
#NAME?
강물에 버린 것은 가짜.
진품은 화산파에서 받아 잘 지니고 있으니 걱정 마시지요. 전서편에 함께 동봉할까 싶었지만, 요건 나중에 직접 드리겠소이다. 세상에 믿을 놈이 없어서.
“하하하! 인종, 우리가 후개에 대해서 잘못 생각한 것 같지 않나. 다른 건 몰라도 약속만큼은 상가 출신이라서 잘 지키는 모양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인종은 대답을 하면서도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럴 녀석이…… 아닌데…….’
* * *
연홍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이제 혼자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여기는 당문이라고 들었는데…….’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거지 움막촌 한복판 같았다.
드륵.
방문이 열리는 기척이 들렸다.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후개님.”
“일어나 있었군요.”
남하림을 보던 연홍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이제 괜찮은 모양입니다.”
“아…… 네. 고맙습니다.”
자신을 안고 구해주었던 손길이 어렴풋 기억났다.
‘세상에서 가장 포근하고 따뜻했던 분…….’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제가 당문에 큰 죄를 지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무독 공자님께 들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대에게는 마음의 짐이 되겠지만, 당사자도 이해하고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소이다.”
“네, 후개님께서 나서주신 것을 잘 압니다.”
연홍은 자신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알았다.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스윽.
남하림은 떨리는 연홍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천천히 호흡을 하세요.”
“네…….”
연홍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그날.
자신에게 일어났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 * *
끼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중년여인.
그 소리에 연홍이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세요?”
“거리에서 일을 구하러 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네……. 근데 누구신지요?”
중년여인이 말없이 방 안을 살폈다.
좁은 방바닥에 병든 어머니가 누워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휙!
그녀의 앞으로 은전 한 냥이 떨어졌다.
그리고 중년여인의 목소리가 한동안 연홍의 귓가에 이어졌다.
“……할 수 있겠느냐?”
‘한 사내와…… 한 번만이라고……?’
“그자와 하루를 보내면 은자 열 냥을 주겠다.”
은자 열 냥.
그 돈이면 어머니를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다.
“……아, 알겠어요. 제가 하겠어요.”
“그럼 이틀 뒤에 데리러 오겠다.”
* * *
“전…… 그날 유운정에서 집으로 가는 도중 정신을 잃었고…… 지금까지 그날 함께 보낸 사내가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렇군요.”
토닥토닥.
남하림은 연홍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안정시켰다.
“당신을 찾아온 중년여인의 얼굴은 기억하나요?”
“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도움이 되겠군요. 잠시만.”
남하림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내 붓과 종이를 든 거지 한 명이 달려왔다.
잠시 후.
한 장의 종이 위에 중년여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 * *
팽유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생긴 건 못되게 생기지 않았는데.”
“생긴 건 몰라도 한 고집 하겠어.”
성철각도 한마디 했다.
“하림 형, 이런 아줌마, 쉽게 찾을 것 같지 않아? 완전 귀부인 같잖아.”
“그러게 말이다.”
드륵-
그때, 문을 열고 만통자가 들어왔다.
“뭣들 보고 있는고? 그건 뭐냐?”
휙!
만통자는 탁자에 있던 초상화를 빼앗듯이 들었다.
“귀부인처럼 생겼지만 딱 봐도 고집 있게 생긴 게 추멸선자처럼 생겼구만. 이 여자 누구냐?”
“……이렇게까지 쉬울 줄은 몰랐는데.”
팽유도가 곧바로 책자를 넘겨 추멸선자를 찾았다.
“추멸선자. 아미파의 장로야. 사내를 무지 싫어한다고 해서 광오선자라고 부르기도 해.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사내들한테 괜히 시비를 붙여서 죽일 듯이 싸운다고 하네.”
“미친 아줌마네.”
밖에선 초상화의 주인을 찾기 위해 개방 식구들이 총출동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통자님이 제대로 한 건 하셨네요.”
“뭐냐? 내가 또 잘못했냐?”
“이번에는 반대예요. 역시 늙은 생강이 맵다는 말이 맞긴 하네요.”
“이놈이…… 한 대 맞기 전에 무슨 일인지 얼른 말해라.”
“소가주를 중독시킨 범인 초상화가 나와서 찾으려고 했는데. 아주 단번에 찾았잖아요.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래? 이 여자가?”
만통자는 추멸선자와 안면이 있었다.
“근데…… 이 여자가 왜 당문의 소가주를 죽이려고 했지? 아무리 막 나가더라도 아미파 장로인데…….”
“아직 확실하게 단정 짓는 것은 안 되고, 확인을 해봐야 하는데…… 곤란하네.”
“뭣이 곤란해?”
“이 일에서 손을 떼려고 했는데…… 당문에 맡겼다가는 아미파와 한바탕 전쟁이 일어날 것 같아서요.”
“하긴…… 당문이나 아미파나 시작하면 끝을 내는 성격들이긴 하지.”
“이번 일도 우리가 해야 할 것 같네요. 무독의 본가이니 우리 일이기도 하지만요.”
“고마워, 부장.”
“좋아. 그럼 다들 모여. 계획 한번 세워보자.”
만통자도 다섯 명 사이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노인장은 왜요?”
“네놈한테 은근히 따돌리는 게 얼마나 나쁜지 가르쳐 줬지 않느냐?!”
“그냥 구경만 하셔도 될 나이에…… 꼭 나서야겠어요?”
퍽!
만통자는 남하림의 엉덩이에 발길질을 했다.
“아이고!”
“이 자식은 꼭 말끝마다 나이 타령이야!”
* * *
광독장원.
독전대항이 하루 전 앞으로 다가왔다.
원래라면 축제와도 같은 날이건만.
장원은 긴장감에 잠겨 있었다.
딱! 딱! 딱!
그때.
장원의 정문 위사가 막대기로 바닥을 치며 다가오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누구요?”
“후개라고 하는데, 시간이 되시면 장주님을 만나 뵐까 해서 왔습니다.”
“후개!”
그들도 개방 걸협오성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다.
윤기가 흘러 살랑이는 머리카락.
흠 하나 없는 백옥 같은 피부.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급히 연락을 넣겠습니다.”
거지라고 할 수 없는 남하림의 모습을 멍하게 살펴보던 위사는 빠르게 장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반각이 지나기 전.
중년인이 다급히 정문으로 나왔다.
그 또한 두 명 중 후개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광진당을 맡은 조봉재라 하외다.”
“남하림입니다.”
“당무독이라 합니다.”
조봉재의 눈동자 저절로 당무독을 향해 돌아갔다.
‘이자가 당문 출신의 독광걸!’
조봉재는 당무독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두 분께선 무슨 이유로 장주님을 뵈려고 하는지요?”
“당문의 소가주 문제로 의논드릴 게 있어 왔습니다.”
“……!”
“이곳에 오기 전에 당문의 가주와 상의를 했습니다. 서로 민감한 상황이라 제가 중간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조봉재는 갑자기 몸이 굳어버렸다.
결국 당 소가주를 중독시킨 범인을 본 장원이라 생각한 건가?
“무, 무슨…… 큰일이라도…….”
“큰일은 아니니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아…… 이, 일단 따라오시지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남하림과 당무독은 조봉재를 따라 장주를 만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흐음…….’
장주 묘진평과 개방 두 사람의 만남.
‘소문보다 뛰어나다.’
단번에 알았다.
남하림뿐 아니라, 당무독의 전신에서 흐르는 기 또한 일반 무림인들의 기와는 달랐다.
절대자의 기.
남하림과 당무독이 포권을 했다.
“장주님을 뵙습니다.”
“개방의 후개를 만나게 되어 반갑소이다. 본 장원에 찾아주어서 영광이오.”
“장주님께서 환대를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휴우…… 다행히 적의는 없구나.’
조봉재는 깍듯한 두 사람을 보면서 안심했다.
“우리가 왜 찾아왔는지 궁금하실 것입니다.”
“그렇소. 갑자기 찾아와서 놀랐소이다.”
“제가 주제넘게 나설 일은 아니지만 한 가지 청을 하고자 왔습니다.”
“청이라니…….”
묘진평과 조봉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장주님께서도 당문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아시리라 봅니다.”
“그렇소이다. 안타까운 일이었소. 본 장원도 도움이 된다면 돕고 싶소이다.”
“그 말씀은 당문의 가주님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소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당문 소가주의 문제는 독전대항과는 연관이 없는 일입니다. 주의를 못한 책임이 있겠지요.”
“…….”
“다행히 소가주는 며칠 전부터 안정을 되찾는 중입니다.”
“오오. 다행이군요. 잘됐소이다.”
묘진평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만일 그가 죽었다면 큰일이 발생했을지도 몰랐습니다.”
“…….”
“그런데 우리가 조사를 해보니, 소가주는 누군가에 의해 고의적으로 중독되었더군요.”
“이런…… 그게 정말이오?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했소이까? 설마 우리를 범인으로 보는 것이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마도 범인은 소가주의 죽음을 단초로 두 가문이 피 터지게 싸우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뭣이…… 대체 그놈들이 누구요? 감히 분란을 만들려고 하다니……!”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남하림은 말을 멈춘 뒤 묘진평에게 전음을 보냈다.
[추멸선자인 듯하외다.]
‘허어, 아무리 우리와 사이가 별로라고는 하나, 이런 식으로……!’
광독장원과 아미파는 예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인주 땅을 완전히 차지하기 위해 관할 영역에서 늘 대립하는 두 문파였다.
“우리가 찾아온 이유는 독전대항을 두 달 뒤로 연기하자는 당 가주님의 뜻을 전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방금 들은 이야기는 아직 비밀로 했으면 하는군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아서요.”
“무슨 말인지 알겠소이다. 범인이 잡힐 때까지 기다리겠소. 독전은 당가주에게 알겠다고 전해주시면 좋겠소이다.”
“고맙습니다.”
“아니오. 덕분에 쓸데없는 오해를 벗었소이다. 혹시 도울 일이라도 있으면 언제라도 달려가겠소이다.”
“말씀이라도 고맙습니다. 그럼 시간이 바빠서 그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오면 제대로 대접을 하겠소이다.”
그동안 당문의 일로 고민에 잠겨 있던 묘진평의 얼굴이 펴졌다.
그는 장원의 정문까지 함께 나와 두 사람을 배웅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묘진평은 떠나가는 두 사람을 보면서 감탄했다.
“후개도 후개지만 독광걸도 대단하지 않나. 독광걸의 신형에서 자연스럽게 흐르는 기가 독강호기(毒强護氣)일 줄이야.”
독강호기(毒强護氣).
주위에 흐르는 독기의 침입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자연 무형기.
“장주님, 걸협오성에 대한 소문이 왜 자자한지 알겠습니다.”
그들은 한동안 정문에서 움직이지 않았다.